
한두골은 지하철 2호선 교대역 북서쪽 출구 11번 출구 옆에 있던 마을이다.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신도비가 있는 정곡(鄭谷)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 신도비에 나와있는 '果川 白石洞 負亥之原'의 백석동(白石洞)이 한두골이다.
힌돌골이 희도골 한두골로 바뀐 지명이라고 한다.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와 그 남쪽 일대에 옛날 해주 정씨들이 모여 살던 정곡(鄭谷)마을이다.
조선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정역(鄭易)의 묘소가 있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후 정역의 딸은 효령대군의 배필로
경숙옹주가 되어 왕실과 사돈이 된다.정역의 묘는 원래 서오릉에 자리잡았다.세조는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사돈 정역의 무덤을 밀어내고 요절한 아들 의경세자의 묘를 쓴다.오늘날 서오릉이다.정역의 무덤은 지금의 법원단지로 옮긴다.
1984년 법조단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로 또 이장된다.

정곡마을 입구에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백석(白石)정중만 (鄭重萬)이 쓴 정곡(鄭谷)이라는 표석 2개가 있었다.
지금은 해주정씨 대종친회 건물 옆에 그 표석을 옮겨 놓았다. '鄭谷' 표석 바로 옆에는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정역은 본관이 해주이고 시호는 정도(貞度)다.
효령대군의 장인으로 예조·형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 집현전 대제학 등을 지냈다.
성품이 근검하고 왕실과 인척관계이지만 교만하지 않고 덕이 많았다고 한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후 정역의 딸은 효령대군의 베필로 경숙옹주가 되어 왕실과 사돈이 된다.
정역의 묘는 원래 서오릉에 자리잡았다.
세조때 경릉(덕종)이 오는 바람에 과천현 동쪽(서초동)으로 옮겼고,이 서초동 일대는 해주정씨의 집성촌이 된다.
1984년 법조단지가 이곳으로 정해지면서 300년된 신도비만 남기고 정역의 묘는 다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로 이장된다.

본래 서초동의 옛 이름은 '서리풀'이다. 이 지역에 서리풀이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영조때 당파 싸움에서 밀려나 유배형을 받은 이양복이 유배를 가기 전에 아들 경운으로 하여금
고향인 장안말(삼풍 아파트 남쪽 일대)에 가서 가명을쓰고 은둔하면서 조상의묘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양복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12대 손이다.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조상의 무덤을 중시했다.
부친의 말대로 이경운은 장안말에 살면서 선산을 돌보았다. 40여 세가 되도록 대를 이을 후사를 얻지 못했다.
당파에서 밀려난 그의 집안으로서는 아들을 얻어 선산을 돌보고 집안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조상들의 무덤 앞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 그 마지막 날에 그의 정성이 효험을 얻게 되었다.
이날은 몹시 눈이 많이 내렸으나 그는 날씨에 관계없이 마지막 기도를 정성스럽게 드렸다.
“나는 묘의 주인으로 너의 정성이 지극함을 보고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내가 보내준 호랑이를 타고
저 앞의 안산(安山)으로 가면 눈 속에서도 푸른 자태를 자랑하는 설중록초(雪中綠草)가 있을 터이니,
이것을 다려먹으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런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이경운은 그 말대로 호랑이를 타고 안산으로 가서 그 풀을 얻게 되었다.
이를 복용한 후에는 자손이 번창 하여 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맞추어 눈 속에서도 자라는 효험 있는 풀의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설이초리”(雪裏草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리풀' 즉 상초리(霜草里)로
바뀌었다가 다시 서초리로 변모되었다. 이 지역 일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