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객산 김복선바위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이던 시절,
어느날 하늘을 보니 모일 모시에 바다가 터져 육지가 사라질 조짐이 보였다.
온 땅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피신시키고 있었다.
그때 이름없는 상놈 하나가 하는 말이
"하늘 보는 토정이 제 발치는 볼 줄 모르는구나!"하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땅이 꺼지고 물이 발아래까지 들어찼다고 한다.
그 때 만들어 진곳이 삽교천과 한진포구 였다.지금의 행담도 휴게소 옆이다.
그 상놈이 전설속의 기인 복선(福善)이었다.
착하게 살아서 복 많이 받으라고 지어진 이름이었고 성은 김씨였다.
김복선은 기인으로 아직 그에 관한 출생이나 사망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신평면 금천리 망객산을 중심으로 그의 전설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에 관한 전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김복선은 홍주목 신평현(洪州牧 新平縣) 사람으로 병서를 좋아하였다.
가문이 미천(微賤)하므로 동리의 약정(約正 : 조선조 때 향약 단체의 임원)이 되었더니 후에 염평공직(廉平公直)을 하였다.
임진왜란(서기 1592~1598)에 마을 사람이 모두 피병입산(避兵入山)하나 복선은 홀로 집을 수축하고 있었더니
난이 평정되어, 후에 사람들이 돌아와 그의 선견을 탄복하였다 한다.
인조 병자년(서기 1636)에 복선이 인조께서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심을 듣고 청나라 대장 용골대(龍骨大)의 군중으로
뛰어 들어가 후매광규(後罵狂叫)하여 방약무인하니 청병(淸兵)이 잡아매려하나 용골대가 눈짓으로 못하게 하고
“이 사람은 조선의 지사(志士) 김복선이다. 이런 사람을 등용하였으면 내가 어찌 이곳에 왔겠느냐?”
고 말을 하며 그의 행동을 그대로 두었더니 복선이 꾸짖다가 방성대곡하고 어디로 가버렸다 한다.

망객산에서 바라본 아산만과 우강평야
둘째 전설은 조선 선조 때 천인 김복선이 당진군 신평면 망객산(望客山 : 69.7m)에 숨어 사는데 세상 사람이 업신여기나
오직 율곡 이이(李珥)와 토정(土亭) 이지함이 그 높은 학식과 숨은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가끔 찾아와서 세상일을 상의하다가
앞으로 있을 임진왜란의 일을 크게 걱정하니 김복선이 토정과 율곡을 번갈아 보면서
“인신년 상사(寅申年喪事)에 왜 임진년 걱정을 하십니까?”
하며 서로 한탄하다가 작별 하였는데 김복선이 이 산에 올라와서 두 분이 돌아가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으므로
「망객산(望客山)」, 「객망산(客望山)」, 「손바라기산」이라 하였으며 토정은 무인년(戊寅年)에 율곡은 갑신년(甲神年)에
각기 돌아가서 임진왜란을 보지 못하였다 한다.
셋째의 전설은 아산만은 원래 좁고 긴 만인데 선조 때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이 되어 민정을 살피느라고 이곳을 순시하다가
지함(地陷)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주민에게 피난할 것을 권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곧이듣는 사람은 없고 또 시각이 임박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한탄하면서 망해산(望海山)으로 올라가 땅이 함몰되는 광경을 살피려 하는데
한 등짐장수가 이 토정을 따라오더니 토정이 앉은 아래쪽에 옹기짐을 받쳐 놓고 앉으므로 토정이
“위험하니 이리로 올라오라.”
하니까 그 사람이 웃으면서
“참 겁쟁이라고! 아무 염려 마시오.”
하고 그대로 앉아있는데 과연 천지가 진동하더니 등짐장수가 받쳐놓은 작대기 끝까지 땅이 함몰되어 바다가 되었다 하는데
이 등짐장수가 곧 망객산의 김복선이였다고 한다.
넷째 전설은 율곡 이이와 토정 이지함이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걱정하면서 이 난을 평정하는데
신평 망객산의 김복선은 3년 평정이요, 전남 광주의 김득녕이 5년 평정이요, 아산 배암밭의 이순신은 7년 평정인데
김복선, 김득녕은 천인이므로 이순신이 평정하도록 되었으므로 임진왜란이 7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섯째 전설은 신평 망객산의 김복선은 축지법을 써서 세상을 날아 다녔다.
이 망객산은 토기(土氣)가 있어 땅을 억누르는 지기(地氣)가 뛰어난 산이므로 김복선이 축지법으로 온 세계를 누빌 때는
손을 들면서 떠나고 돌아오곤 하는 산이라 『손바래기산』이라고도 부른다.
하루는 보령시 성주산에 있는 한 도승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축지법을 잘하는 명사가 있다 하여도 중국의 소주(蘇州)를 사흘에 서너 번 왕래하지는 못 할 것이나
다만 나는 할 수 있다. 「손바래기산」의 김복선이 축지법에 능하다고 하나 소주를 서너 번 왕래 하는데 꼬박 열흘은 걸릴 것이다”라며 내기를 해보자고 전하자, 김복선이 말하기를
“축지법이 무슨 자랑이라고 내기를 하느냐? 아직 수양이 덜되었구먼…제 죽을줄 모르고” 하고 얼굴을 돌리더니
“내가 그렇잖아도 며칠 있다가 중국땅을 세 번 급히 다녀올 일이 있는데 그때 내가 돌아오는 길에 성주산에 들려 시각을
알려드리리다.” 하였다.
김복선의 이 말은 바로 보령시 성주산의 도승에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성주산 기슭에 한 밤중에 큰소리로
“한번이요.”
“두 번이요.”
“세 번이요.”
하는 소리가 꼭 하루를 지나는 시간에 연속해서 사흘 동안 계속 되었다.
사흘째 김복선이 중국 소주땅에서 돌아올 때는 중국을 세 번 다녀왔다는 표시로 고운 풀잎을 세 잎 떨어뜨렸다.
도승은 성주산의 암자에서 그 풀잎을 바로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들어서 냄새를 맡은 다음
“세 번 하기는 했는데 시간이 나보다 한 시간 빠르구나!”
그날로 산을 누비며 몇 번 연습을 하다가 훌쩍 그 어려운 중국행을 하게 되었다.
도승은 김복선보다 한 시간이 늦으므로 두 시간을 단축해서 김복선보다 우위에 있고 싶은 욕심에서 최선을 다해서 축지법을 썼으나
끝내는 김복선이 말대로 세 번째 돌아오는 길에 자기의 힘이 약해져서 황해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성주산의 도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그 날로 눈치 챈 김복선은 손바래기산 땅에 기대어 몇 번 냄새를 맡더니 조용히 잠자리에
누웠다 한다.

행담도 전경
김복선(金福善)은 당진 신평사람으로 신평 이씨 하인이었다.
김복선은 매사에 공평 정직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
이이 율곡, 토정 이지함과 인연을 이루게 된다.
신평은 농지가 많은 곡창지대이고 해안을 끼고 있어
왜구 침입이 많은 지역이었다.
영의정 율곡은 사직 하고 전국을 유람하러 합덕 방죽을 찾아 왔을 때
김복선이 찾아와서 인연은 시작된다.
그후 율곡, 이지함은 김복선 집을 찾아 나라를 걱정한다.
율곡, 이지함을 마중하고 떠나 보내는 작은 동산을
지금도 망객산, 손바라기산으로 불리어진고 한다.
이이 율곡은 임금께 십만 양병 장계를 올린다.
임진란 때는 왜병이 밀려와 다른 사람들은 도망친다고 난리였으나
김복선은 보통 때와 다름없이 집수리를 하고 농사 짓고 살았다고 한다.
분탕질을 일삼던 왜적도 그 집을 건드리는 일은 사람이 할짓이 아니라며
거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왜적이 물러간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웠는데
30년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가게 되자
김복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청군 진중에 들어가
적장 용골대에게 쌍욕을 퍼부었다고 전한다.
놀란 병사가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용골대는 저 노인은 조선의 의국 지사요. 의인이라며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