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시한은 ‘지금까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을 넘어선 다음 순간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을 넘어 다음 순간을 사는 것을 연명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연명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죽음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또한 예수님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죽더라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하여 영생을 사는 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연명을 꾀합니다. 연명을 꾀하자면 내일을 염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연명을 꾀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수익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행16:19) 수익이 끊기는 것보다 귀신 들려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행16:16)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귀신에게 잡혀서라도 수익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연명을 꾀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귀신들린 상태로 평생을 산다 해도 괘념치 않습니다. ‘큰 수익’이 보장된다면 한 사람의 인생쯤 망가져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연명을 꾀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면 그들을 감옥에 가둘 수도 있습니다.(행16:17,24) 죽이기도 합니다.(행12:2)
영생을 사는 사람들은 관리들과 결탁되어 있는 ‘주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여종 하나’를 자유케 합니다.(행16:19) 여종을 붙들고 있는 귀신을 쫓아낸 벌로 감옥에 갇힙니다. 영생을 사는 사람들은 약자를 자유하게 하고 스스로는 감옥에 갇힙니다. 죽기도 합니다.(행7:59~60)
하나님의 정의가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감옥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만 출입할 수 있는 지성소입니다. 감옥에 갇힌 하나님의 종들이 찬송을 바칩니다.(행16:25) 감옥에서 바치는 찬송은 최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원한을 직소하는 것입니다. 원한에 곡조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죽어도 죽지 않는 줄 아는 믿음 때문입니다. 감옥에서도 곡조 입힌 시로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서든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빌4:4) 연명을 꾀하는 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영생을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어 옥에 갇혀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요14:27)
연명을 꾀하는 사람에겐 수익의 근원이 중요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겐 생명의 근원이 중요합니다. 수익과 생명 사이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일 연명하기를 애쓰지 않고, 오늘 십자가를 지며 죽어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요1:12)
‘큰 이익’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큰 이익’을 선택하는 것은 바알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선택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둘 중 하나를 믿습니다. 돈을 믿거나, 예수를 믿습니다.
돈을 믿어야 구원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나 황제의 밑을 닦는 관리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오그라들어 마비된 심장으로 살지 않고, 청년 예수의 심장을 이식받는 것이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첫댓글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감사하는 것은 모태신앙으로 가치관 자체가 하나님 중심인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저희 자녀에게도 전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가희는 아주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엘리야의 갑절 영성이 엘리사의 것 되었듯, 가희와 둘째의 영성이 집사님의 것보다 갑절 더 큰 영성되기를 저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