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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지검 해오름 산악회에서는 우리 청에서 사무국장으로 재직하시다가, 고향인 대구지검 사무국장으로 영전하여 재직하고 계신 최봉영 국장님으로부터 함께 했던 인연을 되살리고 싶다면서 대구의 진산(鎭山) 팔공산으로의 등산 초대를 받았습니다.
폐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후안무치하게도 4월 정기산행을 대구 팔공산으로 정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스쳐 지나기만 하던 대구, 그것도 대구의 진산이라는 팔공산(八公山)을 처음으로 찾게 돼, 참으로 기뻤습니다.
2006. 4. 29. 토요일 새벽 6시, 서부지검 청사 안마당으로 회원들이 차례차례 도착했습니다. 오늘 참석자 중에는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 근무하는 이경자씨가 있어 더욱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제가 1988년 의정부지청에 발령이 났을 때, 그곳에 근무하고 있어 친하게 된 여직원인데, 그동안 이프러스 상에서 간혹 채팅을 하여 소식을 주고받다가 16년 만에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보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검, 서울고검, 중앙지검, 의정부지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비롯하여 우리 청 임덕기 옴부즈맨(제가 농담 삼아, 앞으로 임부즈맨이라고 불러야겠다고 했습니다)까지 속속 도착하여 반갑게 인사를 하고, 새벽 6시 반, 준비된 관광버스를 타고 대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히 검찰연합등산회라 할만하지요?
버스 안에서 등산회 총무 장형남 수사관이 나누어주는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었다가를 반복하다보니 어느 새 북대구 톨게이트였습니다.
가는 도중, 간간히 비를 뿌릴 때는 제대로 등산이 될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대구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빗줄기도 잦아들어 안심됐습니다.
북대구 톨게이트에 최봉영 국장님과 대구지검의 유동학 수사관, 총무과의 형진, 김정욱 주임이 반갑게 맞았습니다.
항상 웃음 가득 머금고 있어, 어느 곳에 있던, 서 있는 그 자리를 밝게 해 주시던 최국장님을 다시 뵈니 정말 반가워, 힘찬 악수로 인사를 했지요.
대구지검의 유동학 수사관은 5. 1. 자 인사이동으로 우리 서부지검 형사5부로 발령이 났다고, 미리 얼굴을 익혀두기 위해 오늘 등산모임에 합세했다고 합니다.
버스에 오른 최국장님께서는 먼저 우스개 소리로 팔공산은 신라시대 때 공익근무요원 8명이 근무했다고 팔공산이라고 한다 해서 모두 박장대소하게 했습니다.
분위기를 확 휘어잡고 나서는, 국장님께서 팔공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국장님의 설명과 안내서에 덧붙여, 제가 찾아 둔 자료를 종합하면, 팔공산은 이런 산이더군요.
팔공산은 백두대간 태백준령이 남서로 달려오다, 대구벌을 가로지르는 낙동강과 금호강에 물길을 터주며 대구광역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감싸 안은 채, 해발 1,192미터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봉(미타봉 1,155미터)와 서봉(삼성봉 1,150미터)이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수의 기상으로 산자락을 이끌고, 암봉으로 솟아오른 산이라고 합니다. 가산(架山)에서 갓바위(冠峰)까지 주릉만 26킬로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산이지요.
팔공산은 신라시대 때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또는 공산(公山)으로 불리웠습니다.
팔공산이 오악( 동악 토암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 중악이 된 것은 바로 통일신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때부터라고 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맞서 싸우다가 신숭겸, 김락 등 그의 충복 8명과 5,000명의 군사를 잃고,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들을 영혼을 추모하는 뜻에서 팔공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 전투는 너무 유명한 전투여서인지, 팔공산에는 왕건의 그 전투에 관한 지명 즉 파군재, 안심, 반월, 무태 등의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팔공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즉 대구, 칠곡, 인동, 신녕, 의흥, 영천, 하양, 경산 등 여덟 마을에 걸쳐 있어 팔공산이라고 이름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그러나 전쟁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역사적이고, 비장하며, 사나이의 의리를 생각케 하는, 왕건과 여덟 공신 이야기를 정설로 믿고 싶어집니다.
팔공산 자락에는 파계사, 동화사, 은해사와 염불암, 백년암 등 대소 불도량(佛道場)이 180여개에 이르는 신성한 불교의 신앙지로 유명합니다.
최봉영 국장님의 설명을 듣다가 우리의 출발 예정지인 수태골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미리 준비한 물과 과일, 팔공산 막걸리 등을 하나씩 건네받아 배낭에 넣고, 플랭카드를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약간 비가 뿌리는 가운데 산행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원만한 산행길인데, 출발할 때부터 날씨가 습해서인지,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꾀꼬리가 펄펄 날아가는 듯, 가뿐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가는, 최국장님의 보조를 맞추기 어려워 슬슬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차례 쉬면서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숨을 고르고, 다시 출발하곤 했습니다. 쉬면서 살펴보니 계곡 양편에 바위 틈 사이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 눈을 찔러왔습니다.
한참 걸을 때는 물소리조차 멀어지더니만, 쉬다가 가쁜 숨이 잦아들 때 쯤, 그제서야, 여기저기에서 비온 뒤 불어난 계곡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습니다. 세찬 계곡물소리에 기분이 쇄락해 졌습니다.
염불암으로 가는 사거리로 올라서기 직전, 총무 장형남수사관이 힘들면 비타민제라고 여기고, 시원한 맥주를 한잔 하고 산행을 하는 게 어떠냐고 꼬드겼습니다.
술 좋아하는 바람에, 항상 산에서 혼이 나곤 하는 제가 어찌 반성을 못하고 술을 마시면서 산을 오르겠냐고 손사래를 치면서 사양했습니다.
마침 아무것도 매지 않고 올라오고 있던 조성호씨가 제 배낭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얼씨구나 하고, 배낭을 맡겼지요.
배낭하나 메지 않았을 뿐인데,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면서 이제부터 걸을만 했습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나서 둠벙에서 건져 올린, 겨울잠을 준비하는 개구리를 불붙은 볏 짚단에 던져 구워 먹을 때, 느꼈던 그 고소한 맛에 관한 직원들의 오고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머금을 수 있게 된 것으로 봐서 이제야 조금 살만해졌나 싶었습니다.
염불암으로 가는 길목 사거리에서부터 고된 30분가량의 산행을 하여 능선에 올라보니, 서울 관악산에서 보던 군사시설물이 비로봉에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체한 듯 싶기도 하고, 가슴위에 뭔가 무거운 것을 얹어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좌우를 둘러보니, 과연 팔공산에 관한 설명서 그대로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봉과 서봉이 고싸움놀이처럼 부딪치고 있는 형상 같기도 했고,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 싶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해발 1,155미터 동봉에 올라섰습니다.
가히 팔공산은 광주의 진산이라고 할, 무등산에 비견할 만 했습니다. 다만 무등산은 광주라는 대도시에 바로 인접하여 있어 시민들의 접근이 더 용이하고, 넉넉하고, 원만하며,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보면 더 나은 듯싶지만, 그 대신 팔공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다양하고, 유장하게 춤사위를 보여주는가 하면,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 치솟아 오르기도 하는, 남성적인 산으로 느껴졌습니다.
동봉은 비로봉의 군사시설물 때문에 사실상 주봉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상에 서서 둘러보니, 구름이 언뜻 언뜻 걷히면서 머언 곳에 서 있는 봉우리들의 얼굴을 잠깐 비춰줬다가 다시 가리곤 했습니다.
그 유명한 갓바위 부처가 있는 곳이 어딘지 물어봤습니다. 저 멀리, 관봉이라는 봉우리를 가르켜 주었습니다.
팔공산 하면 갓바위 부처를 말하다시피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갓바위 부처인 것 같습니다.
갓바위 부처는 원래 이름이 관봉석조여래좌상으로서 보물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갓바위 부처는 신라선덕여왕 때 원광대사의 수제자 의현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 지금도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기도를 하러 가는 기도처로 유명하지요. 입시철이면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해 장관이라고 합니다.
한 때, 이제는 꿈에서나 볼 수밖에 없을 뿐인 제 어머니께서 기도를 다니시곤 했던 곳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내도 다닌곤 했고요.
숨이 턱에 차면서 갓바위 부처께 기도를 하기위해 오르내리셨던 그 마음은 무엇이며, 어디로 갔을까요!
동봉 정상의 안부는 널찍한 암반으로 사면은 벼랑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각자 메고 온 배낭 속에 든 음식물들을 꺼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자, 우리의 정신이 담긴 술인 ‘팔공산 막걸리’라는 상표가 붙은 막걸리로 정상주를 마셨습니다.
그곳에서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기념사진을 찍고, 제가 팔공산에 관해 절창이라고 생각하는 시인 팔공산이라는 제목의 시를 낭송했습니다.
팔공산
-김 장 호
눈 내리는 은해사를 빠져
은해사 옛 터전 해안평(海眼坪)을 거슬러
동봉(東峰)에 가 서서 바라거나
중암암(中岩菴) 바위너머 느언재에 가 서거나
八公山은 흡사
천하장사가 맞겨루는 형상이다.
불끈거리는 팔다리의 근골은
엇섞이고 맞물려
영천(永川) 쪽의 것인지 군위(軍威) 쪽의 것인지 도시
달성(達城)에선지 가산(架山)에선지
확실하게 꽉 다져진 등허리를 떠받들고
어느 결에 배지기가 될런지
호미걸이가 될런지.
팽팽하게 동서로 흐르는 어깨죽지 너머
저만치 머리짬이 되는 주봉(主峰)이
오히려 파묻힌 느낌이다.
아랫배 폼이 이만하면
한반도도 힘깨나 쓸만하다고,
파계(把溪)재에 가 서서 바라거나
갓바위에 가 서거나
팔공산에 오른 이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팔공산 동봉 정상에서, 이 시가 팔공산을 탁월하게 잘 묘사한 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모두들 박수를 치자, 그의 호를 따서 백촌 선생이라고 부르는, 대구가 고향인 심성용 수사관이 윤선도 님의 오우가(五友歌)를 자연스럽게 읊어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 하야 무엇하리.
팔공산 산속에 묻혀 자연과 벗하고 있으니, 욕심 없다는 뜻에서 자연스럽게 화답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다섯 친구인 물, 바위, 대나무, 소나무, 달만이 친구가 아니라 여기 선 등산객 모두가 친구라는 뜻으로 새기니, 가히 뜻 깊고 여운이 많이 남는 시조였습니다.
하산 길에 최국장님의 안내로 비로봉과 동봉의 중간지점 산마루에 세워진 약사여래입상을 관람하고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염불암 가는 길목 사거리로 내려와, 염불암에 도착하여 암자 뒤편에 세워진 마애불에 참배를 하고 되돌아 나오면서 휘둘러보니, 삭풍도 감히 침노하지 못할 만큼, 안온하게 감싸 안은 자리에 암자가 자리하고 있어, 참으로 좋은 자리에 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탄한 길을 따라 두런 두런 대화를 하며 하산했습니다.
동화사에 못 미쳐 부도암을 지났습니다. 암자 안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돌담이 성곽처럼 높고, 우람했습니다.
승(僧)과 속(俗), 너와 나를 철저히 가르고 있는 듯싶어 씁쓸했습니다. 분별심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 부처인데, 저렇듯 큰 담으로 너 땅과 내 땅, 행인과 주인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했습니다.
오히려 너와 나를 가르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 높은 성곽 같은 담을 만들었을까요?
동화사에 도착해 동화사 경내를 둘러봤습니다.
동화사를 소개한 팜프렛에 조선시대 서거정이 읊은 시, 대구십영(大邱十詠) 중 동화심승(桐華尋僧)이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멀리 절로 오르는 좁은 돌층계 길(遠上招提石逕層)
푸른 등나무 하얀 버선 검은 지팡이(靑藤白襪又烏藤)
지금의 이 흥은 아무도 모르리라(此時有興無人識)
흥은 청산에 있고 중은 간곳이 없네(興在靑山不在僧)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서기 493년) 극달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고 불리다가 신라 흥덕왕 7년(서기832년)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불렸다고 합니다.
경내에서 동화사 대웅전으로 가는 길목에 봉서루(鳳捿樓)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누각이 자리 잡고 있어 눈에 띄었습니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었습니다.
특히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곳이 봉황의 꼬리부분이며,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왜 이름이 봉서루일까?’했던 궁금증은 동화사에 대한 해설책자를 보고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습니다.
봉서루는 이름 그대로 봉황이 깃드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하지요.
그러기에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동화사라는 이름과 짝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절에서 나와 아래로 돌아드니, 통일대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대불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통일대불은 1992. 11월에 완공된 약사여래불로 높이 약 33미터 둘레 16. 5미터에 이르고, 석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대불 앞에는 높이 17미터에 이르는 국내최대의 석탑 2기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외경심이 앞서기 보다는, 이렇게까지 크게 불사를 일으켜야만 되는가 싶어 씁쓸한 감회가 앞섰습니다.
통일대불에서 집단시설지구로 나가는 도중, 특이하게도 참나무 높은 가지 위에 바구리 모양의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그 나무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수종이 다른 나무라고 했습니다. 새들이 그 나무의 씨를 먹고 참나무 가지위에 씨를 배설하는 바람에 참나무에 기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나무들이 암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하네요.
집단시설지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를 타고 최국장님께서 미리 마련해 둔 점심 식사 장소로 옮겼습니다.
식당으로 가는 도중, 최국장님께서는 옛날 동화사 정문 쪽은 호젓한 오솔길로 운치가 있었는데, 풍수학 상으로는 허리를 찌르고 나오는 지점에 새로 정문을 세우는 바람에 그 이후로 분규가 잦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초원식당(갈비)이라는 팔공산 컨트리클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 식당은 아주 깨끗하고, 주인이나 종업원이 모두 친절했습니다. 고기의 질도 빼어날 뿐 아니라 음식 맛도 괜찮았습니다.
서울서부지검에 근무한 인연으로 우리 산악회를 초청하여 길안내 뿐 아니라 성찬까지 준비해 준 국장님을 위해 미리 준비해 간 감사패를 드렸습니다.
감사패는 서울 서부지검 해오름 산악회 회원 일동이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 구절을 빌려와, 마련 한 것으로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지. 천지엔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우리를 에워싸는 오늘, 팔공산 자락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 그 밝은 웃음과 넉넉한 마음을 헤아리니 어이 감사의 마음을 패로 담아 드리지 않을 수 있으랴!
회원을 대표하여 감사패를 드리고 나서, 건배 소리 우렁차고, 유쾌하게 소리치며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그리고 맛난 술로 흥이 도도해질 무렵인 오후 5시경, 국장님께서 처음 우리를 맞아주셨던 북대구 톨게이트에서 작별의 인사를 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대구에서 받은 한 망태기의 그 따뜻한 정의 무게를 가늠하며 서울로 왔습니다.
검찰가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일깨워주신, 최봉영 국장님, 그리고 여러 가지로 애 쓰신 유동학 수사관, 총무과의 형진, 김정욱님께 다시 한번 참가자들을 대신하여 회장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팔봉산 산행 참석자(존칭 직위 생략)
서울서부지검 해오름 산악회: 강영권, 안성희, 정익우, 김성훈, 김성원, 심성용, 김득호, 장형남, 이병찬, 김정환, 김상수, 박전근, 조성호, 김기열, 윤일심, 강경희, 김길선, 회원 배우자 3명,
대검찰청: 서정진, 서울고검: 심주용, 서울중앙지검: 송도영
의정부지검: 한준,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이경자
서부지검 옴부즈맨: 임덕기
대구지검: 최봉영, 유동학, 형진, 김정욱
이글은 팔공산을 등산하고 나서 2006. 5. 2. 검찰내부통신망에 게재한 산행기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 팔공산 등산가실 분은 한번 읽어보고 가시면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첫댓글 흥은 청산에 있고 중은 간곳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