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과 문순득의 만남.
1.손암 정약전
정약전은 조선 후기 영.정조때의 실학자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대단히 개방적이고 당시 까지의 주학문이라 할수 있는 주자학에 대하여 정치권력의 도구이며 당쟁의 원인이 이 주자학에 있다고 여겨 실학이 우리나라의 살길이며 하루빨리 새롭고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시의 학풍 즉 박제가, 유형원등과 함께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손암 정약전은 정약용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으로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과는 처남 매부관계로 정치적인 관계로 유배생활을 하였다고 말할수 있으나 그보다는 천주교라는 종교적인 이유도 귀양살이의 원인중 하나였다.
손암 정약전은 우이도(소흑산도)에서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각각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풀려나던중 황사영 백사사건으로 다시 유배되는 불운을 겪게된다. 황사영은 정약전 사촌형의 사위로 중국 천진의 프랑스 함대에 편지를 보내 조선정부에 압력을넣어 천주교의 박해를 저지해 달라는 편지를 보네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천주교 신자인 정약용,약전형제는 또다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게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초당위의 바위에 올라 멀리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형인 정약전을 그리워 했다는 얘기는 다산초당을 가본 사람은 보고 들었듯이 이들 형제는 유배지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실한자가 이 두곳에서 실학의 꽃이라 할수있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 다산의 대표적인 학문이 꽃을 피웠고, 형인 정약전도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자산어보등 저술활동을 하여 학문적 측면에서는 귀중한 시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글에서는 정약전이 어떻게 표해시말과 자산어보를 쓰게 되었는가?
우이도의 청년 문순득과는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문순득이 표해시말, 자산어보, 경세유표, 운곡선설에 미친 영향은 무었이었으며 정약용, 이강회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워 졌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것이다.
2. 우이도청년 문순득
문순득은 우이도에 사는 젊은 청년으로 어부이며 홍어장수이다.
우이도에서 홍어를 사서 배에싣고 영산강을 거쳐 나주(영산포로 추정)에 가서 쌀과 교환하여 우이도에 돌아와 파는 상인으로 상당한 부를 누리고 사는 진취적인 사고의 젊은이 였던 것이다. 머리가 뛰어나고 기억력이 뛰어난 총명한 청년이었던것이다. 당시 조선은 선비의 나라 士,農,工,商의 사고가 팽배했던 시절에 일개 상인이었던 문순득이 실학자 정약전이 이곳에 유배를 와 만나게 된 이들은 매우 친한 사이가 되어 친척처럼 지내게 되었는데 정약전의 실학적 사고가 양반인 정약전과 평민인 문순득이 쉽게 친해질수 있었으며 비록 우이도의 한낱 홍어장수에 지나지 않은 문순득을 아끼고 포용할수 있는 선비정신 또한 이 두사람을 끈끈하게 이어 줬으리라 생각된다. 인정많은 문순득이 유배중인 정약전을 위하여 홍어등 특산물을 가져와 맛보게 하며 섬겼으리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루어 알수있다.
3.표해시말
문순득이 나주에서 홍어를 팔아 쌀을싣고 돌아오던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류구(오끼나와)에 겨우 정박하게 되었는데 당시류구와 우리나라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것 같다. 류구는 독립국이었으나 일본에 복속되게 되는데 류구에서는 조선에 알리기를 꺼려한것 같다. 우리나라에 조공품을 가져오다 일본 해적에게 발각되어 해적들이 대신 가짜 조공을 하고 돌아갔다는 왕조신록의 기록들이 있다고 하는걸로 봐서 일본이 이들을 붙잡아 빼았고는 가짜 물품을 가져와 류구국 조공사신역할을 했던 것이다. 문순득의 숙부를 포함한 일행 6명은 류구국의 보호아래 이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나 또다시 풍랑을 만나 이번에는 태평양의 필리핀 루손(애송국)에 겨우 정박하여 그곳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이미 조성되어 있는 중국인촌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우리와는 국교관계가 없어 마카오를 거쳐 북경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어 다시 소흑산도에 귀향하는 장장 3년여의 여정이 표해시말 의 줄거리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따르며 문안하던 문순득이 풍랑으로 실종되자 고향 우이도에서는 씻김굿도 하고 죽었을 것으로 포기 하였을 것이다. 이런 청년이 3년여만에 돌아왔으니 대단한 경사인것이다. 외로운 섬에서 자기를 따르던 청년이 불귀의 객이 된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 왔으니 정약전으로서도 보통 반가운 정도가 아니라 살맛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약전은 문순득을 통하여 그간의 표류하여 되돌아 오기 까지의 여정을 묻고 구술을 들어 표해시말을 쓴것이다. 실학의 대가인 정약전이 보기에 꼭 글로 남겨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마음이 표해시말을 쓰게된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행자를 흔히 김대건 신부라고 하는데 문순득이 훨씬 먼저 오끼나와, 필리핀, 마카오, 천진, 북경등의 문물을 보고 전한 것이다.
최근의 표해시말을 조명하기 위하여 문순득의 여정을 따라 모 언론사에서 다큐멘터리식 집중취재를 통하여 문순득이 정약전에게 구술하였던 지역, 언어등이 대부분 일치하였다고 하며 중국측 사료에 문순득의 송환사실이 외교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 할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문순득의 상상력과 암기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다.
4.자산어보에 영향을 주다
자산어보는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생활중 흑산도 지역 바다 에서 많이 나는 어류, 해조류를 총 망나하여 지은 생물도감과도 같은 저서이다. 여기에는 영양가와 성분 조리법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도 문순득을 통하여 알게되고 조사하여 편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흑산도 홍어가 유명해진것도 이 자산어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것이다.
홍어장수와 정약전의 만남이 자산어보를 낳았으며 오늘날 흑산도 홍어를 알아 주는것도 이 때문인것이다.
5.다산의 경세유표 저술에 영향을 주다.
문순득이 표류생활중 관계국의 화패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장단점을 정약전에게 구술하였는데 문순득은 상인으로서 화패 통화부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유심히 관찰하였던 것이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편지로 이사실을 알려 결국 정약용이 문순득을 만나 경세유표 저술에 기여한것이다.
경세유표에서 정약용은 화패개혁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는 금과 은을 금수와 견포로 바꿔 중국에서 매년 들여오느것에 대하여 이것은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켜 국력이 피폐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금수와 견포를 무역으로 구하지 말고 비단짜는법을 배워국내에 퍼지게하여 해결하고, 금전과 은전을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상평통보는 여러군데에서 만들어져 규격이 통일되지 못했고 불량이 많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무용지물이 되며, 동전 한가지로만 거래하기 때문에 큰 거래에는 동전의 양이나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화패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문제점으로 전환서를 만들자는것이다. 이근거로 문순득의 표류담을 중요한 실마리로 제공하고 있는것이다..
6.이강회의 운곡선설에 영향을 주다.
이강회는 정약용의 수제자로서 정약용의 저술활동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중의 하나로 과거시험에 응시하려고 학문하였으나 정약용을 만나 이를 접고 실학자로서 정약용을 도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등에 도움을 주었으며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편지하면서 이강회라는 제자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적고 있는것으로 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강회는 우이도로 직접가서 문순득을 만나 함께 기거하면서 문순득이 경험한 외국의 선박과 우리 선박과의 비교, 그리고 만들어 지는 과정에 대하여 심도있게 나누고 우리의 선박 조선기술의 향상을 위하여 운곡선설을 쓴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선비들은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이 일본수군을 격퇴하는 것을 우리의 조선기술이 뛰어나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중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장수의 지휘와 능력은 간과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의 조선기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7.맺으면서
위와같이 한사람의 상인이 우리 문화에 기여한바가 크다 아니할수없다. 따라서 정약전과 문순득의 만남을 어찌 우리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중요한 만남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두사람의 만남이 표해시말, 자산어보, 경세유표, 운곡선설을 쓰게된 배경인것으로 그 단초는 정약전과 문순득의 만남인 것이다.
첫댓글 표해시말, 자산어보, 경세유표, 운곡선설...
정약전과 문순득의 만남이 단초였다는 이야기 ... 처음 배웁니다.
ㅡ개인적인 일 땜에 오늘에서야 들어왓습니다. ㅡ기왕에 정약용 형제분 이야기가 나온김에 제기해보는 의문점? ㅡ정약용 선생은 유배기간 초반기에 고생한 것 말고는 상당히 느슨하고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유배생활을 했는데... ㅡ왜 흑산도 동생분을 그 기간 동안에 단 한번도 안 만났을까요? ㅡ심부름꾼을 통해 서신과 소식을 자주 주고받은만큼 ㅡ나중에는 기회를 보아 그 중간에서라도 한번쯤 접선(^^ ^^)해 볼만 했는데요 ㅡ남양주 마현이 고향인 다산 선생은 <한강길>을 자주 배로 오고다닌 <뱃사람>이기도 했습니다요, ㅡ또한 <물길, 조수론>에 관한 글도 쓰신 분이구요
예양강님 말처럼 정약용은 상대적으로 느슨한것 같으나 형인 정약전이 더 큰 죄인으로 감시와 탄압이 심했던것같습니다. 절해고도인 흑산도에 유배되어 중간인 우이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데 다시 흑산도로 들어가게 하는 조선정부의 모습에서 확인이 되며 정약용은 관산도 여러번 왕래하였다합니다. 강진 오기전 2년전에 졸한 존재공 생가방문, 그리고 그옆의 마을학다리에 자자일촌한 것으로 봐서도.......
ㅡ며칠간 일 때문에 다시 오늘에서야 봅니다. ㅡ다산선생이 관산에 오셧던 것은 사실이지요ㅡ<영호정 팔경>, 천관산을 노래한 <충식송>을 보면 ㅡ 그런데 존재선생의 생가 방문과 학다리 마을에 자자일촌햇다는 사연은 어떻게 되는지요? ㅡ몰라서 질문드립니다. ㅡ압해(나주)정씨 다산선생은 압해에서 상계분파된 장흥 지방의 영광정씨와도 꽤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관산죽교3구를 학다리라고 합니다. 물론 관산읍내에 있는 마을이지요. 이마을이 다산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전마을이 정씨입니다. 김씨가 딱 한집 있는데 부인이 정씨입니다. 정약용선생이 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손을둬 나주정씨로 본을 쓰고 있는데 손이 없어 영광정씨에서 양자를 가서 원래 한손이랍니다.지금은 압해정씨로 통합하는 작업중이랍니다. 현 민노당 전남도의원 정우태의원이 이마을 출신입니다.
ㅡ기왕에 한번 더 ㅡ 아마 짐작컨대, ㅡ 정약용 선생의 후손들이 아니라 큰집격인 압해(나주) 정씨에서 상계분파된, 장흥지방의 정씨 일문을 두고 말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거기에 가서 <영호정 팔경 ㅡ위장흥정씨>을 남겼더랍니다. 다산은 장흥의 영광 정씨, 장흥의 정(丁)씨들도 크게 보아 같은 정씨 집안으로 보았으며 ㅡㅡ장흥의 영광 정씨들 역시 강진에 귀양온 다산선생에게 쌀을 보내주엇다는 전설(?)이 전해진다합니다.
ㅡ다산의 다신계 18제자 중에는 <영광 정씨 정수칠>이라는 분도 있었구요. ...정우태 도의원과 고인이 되신 정옥태 교수는 같은 집안인 것 같습니다.
ㅡ다산 선생의 <영호정 팔경>은 인터넷 검색도 되구요, ㅡ장흥 향토지, 신문 등에도 <장흥지방의 여러 팔경>과 더불어 이미 소개되었답니다.
<영호정 팔경>. ㅡ장흥정씨를 위해 짓다[映湖亭八景 爲長興丁氏作]
험준한 뿔바위가 하늘 높이 줄을 섰고 / 嵯峨石角列天庭
비 지나간 낭떠러지 씻겨 더 푸르다네 / 雨過雙厓洗更靑
해질 무렵 한 줄기 가로놓인 푸른 자취 / 薄晩翠痕橫一抹
선녀가 구슬봉에 숨어 살아 그렇는가 / 卻疑仙女隱瑤峯
ㅡ관악(冠岳)의 개인 이내
대숲에 밤이 짙어 등잔불을 마주하면 / 篁林瞑色對孤檠
교교한 밤을 쟁글쟁글 작은 시내가 울다가 / 靜夜玎玲小澗鳴
갑자기 하얀 빛이 실내를 비치는데 / 忽見白毫光射室
갈고리 같은 조각달이 동영에 떠서라네 / 一鉤殘月上東榮
ㅡ상잠(觴岑)의 새벽달
앞 시내에 물이 잦고 흙모
그곳 정씨들 얘기로는 자기네들이 정약용선생의 직계후손이라 주장합니다. 제친구가 몇명 있는데 은행에 근무하다 은퇴하여 그곳에 가잇는 친구가 있습니다. 휴가 때면 같이 산행도 하지요, 중앙대에서 법대 학장을 하던 정옥태교수는 저의 2년 선배가 되시죠, 이분들은 지금 영광,나주,압해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양강님 정확하게 알고 있는것 같습니다. 원래 압해정씨가 목포앞 압해도에 귀양와서 본을 압해로 썼으나 후손들이 영광정씨에서 나주정씨가 손이 없어 양자를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해정씨로 합본을 하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굳이 세분하자면 관산 학다리 정씨는 영광이고 다산은 나주라고 합니다.
ㅡ<극성 ^^>스런 질문에 <극선 ^^>하게 답주시어 감싸합니다 ^^^^ ㅡ전 아직 죽교리 영호정에 못 가보았습니다.
ㅡ다산 선생이 그토록 멸시하다시피 싫어했던, 촌학구 시골선비들, 향원들,
다산 선생 말마따나 상투적 문구의 한시 몇수 정도로 모든 학문을 다 이룬양 음풍농월로 폼잡던 그런 건달풍 시골양반보다는
<흑산도 문순득>이 훨 존경 받을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ㅡ<장흥의 문순득>이 되시길 기원함니다.
다산이 나주,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제자들중에는 이강회를 비롯한 소위 호남학파들이 많이 있었던 지역적 한계와 호남실학의 대표적 인물인 존재에 대한 다산의 존경심과 정경달에 대한 다산의 존경심도 대단하여 자기 제자들에게 반곡의 저서를 필독서로 삼도록 하였다는 정황과 또한 외가가 해남윤씨라는 인척관계등으로 호남사람들을 좋아 했던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