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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길 산행에 넌더리를 낸 백두대간 26 구간
삽당령(揷唐嶺)에서 대관령(大關嶺) 休憩所까지
1. 산행 일시 : 2005년 2월 12일 24 : 00시 ~ 13일 21 : 00시
2. 산행 구간 : 삽당령 ~ 대관령(25. 9km, 13시간 50분 소요)
3. 참 석 자 : 16명
☻ 송죽 파출소 앞 출발 : 김재윤, 김찬석, 박봉하, 윤희원, 조재방
☻ 동수원 사거리 : 박기양
☻ 권선고등학교 정문 : 김명자, 노승애, 신광철, 안상경, 유선만, 이경제,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 조규연
4. 경유 지점
862봉/들미골갈림길/이정표 → 무명봉/대용수동갈림길/이정표 → 백두대간쉼터 이정표/안부 → 석두봉 → 석두봉 이정표/헬기장 → 960봉 → 989.7봉 → 소기동갈림길/이정표 → 1006봉쉼터/공터 → 화란봉/이정표 → 바위전망대/노송 → 무덤/석관 → 시멘트포장도로 → 닭목령(10:15)/이정표/안내판/농기계보관창고 등 → 농로"Y"형 갈림길 → 임도끝 → 목장"정문 → 목장 울타리 끝지점 → 왕산제1쉼터/이정표/철제의자 → 왕산제2쉼터/이정표/철제의자 → 송전탑 ① → 송전탑 ② → 왕산고루포기산/삼각점/이정표 → 임도 →송전탑 ③ 임도끝/숲길/리본 → 오목골갈림길/이정표 → 무명봉/대관령전망대/이정표 → 왕산골갈림길/이정표 → 왕산골, 샘터갈림길/이정표 → 행운의 돌탑 → 능경봉/삼각점/이정표 → 헬기장(15:22) → 무덤1기 → 도로[대관령~제왕산]/이정표/샘터 → 동해영동 고속도로 준공비 → 영동고속도로 휴게소
5. 산행 일기
[1] 出發前 狀況
지난번 백봉령에서 삽당령까지 17km를 8시간 10분 정도로 예상하고 산행을 시작한 것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雪徑, 雪路)에 길을 찾고 만들어가며 12시간을 산행하느라 진저리를 냈는데 이번 구간(26구간, 삽당령~대관령, 26.9km, 산행 예정 시간 10 : 30분)도 눈길 산행을 해야 할 판이다.
放學 중이라 미리 산행 연습을 해 두어야 하는데 중국 여행(장가계), 학교 근무 등으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산행 한 週前 경기대에서 출발하여 광교산을 한 바퀴, 설 전날 헬기장 산행 한 것이 고작이여서 산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으로 고민을 했다. 그런 와중에 산악 대장의 訃音을 설 전날에 接하고 이번 산행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설날 오후 우리 집을 시작으로 『조재방, 김찬석사장과 박기양교감』의 집에 들려 어머님과 아버님께 세배를 올리고 5시경 수원을 출발하여 忠淸南道 公州 山岳 隊長의 喪家에 들려 問喪을 하고 산행을 1 주 연기할 것을 요청했다.
다음 날(2월 10일) 만석공원이라도 가볍게 산책하리라 생각했는데 전날 먹은 酒毒이 빠지지를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태인 총무님으로부터 산행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2월 12일, 보온병 2개, 생수 1병, 간단한 간식, 장갑, 아이젠, 스펫치 등 겨울 산행 장비를 베낭에 챙기고 만석공원 송죽 파출소 앞엘 나가보니 『김재윤 회장과 김찬석, 윤희원, 조재방, 박상호사장』 나와 있고 산행 후 먹을 생태찌개 거리를 장만했다며 자랑이다.
차가 출발했는데 박사장이 보이지를 않는다. 식당에 손님 예약이 있어 산행에 참석할 수 없단다. 생태찌개 거리 전달과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늦은 시간(12시)에나온 모양이다. 함께 가지는 못해도 관심과 한배 산악회 회원들을 배려하는 정성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동수원 사거리에서 『박기양교감』 승차, 권선고등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니 『김명자, 노승애선생님, 신광철, 안상경, 유선만교감, 이경제,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 조규연선생님』이 승차를 한다. 이번 산행에는 시산제도 있고 해서 20명은 넘을 것으로 생각 했는데 여러 사람이 불참이다. 이경제선생님은 일년만에 보는 것 같고, 신광철교감도 참 오랜만에 본다. 윤희 총무는 배웅만 하고 건강이 좋지 못해 함께 산행을 떠나지 못했다.
[2] 35번 國道 삽당령(揷唐嶺) 고갯마루
12시 35분경 수원을 출발하여 곤한 잠에서 깨어난 것이 03시 35분경. 강릉시 신터미널 근체에 있는 『평지 해장국』집에서 진한 설렁탕으로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로 이동하여 『삽당령』에 도착한 것이 04시 30분. 스펫치를 차고 차에서 내려 이른 아침 찬바람을 맞으며 아이젠을 동여매고 해드랜턴을 꺼내 불을 켜니 산행 준비 끝. 이제부터 산을 오르고 걷고 넘는 일만 남았다.
「여기는 삽당령 정상입니다(해발:680M)」라는 강릉국도유지건설사무소의 안내판이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삽당령 標識石이 있고 콘테이너 형태로 만든 산불감시 초소 사이로 오늘 산행의 시발점 시멘트 포장길이 숲 속으로 나 있다.
삽당령(揷唐嶺)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 사이에 있는 높이 721M의 嶺이다. 고개의 생김새가 삼지창처럼 세 가닥으로 되어있데 東國輿地勝覽에는 "부 서쪽 60리 정선으로 가는 길" 리아 기록돼 있다. 산정에는 영을 수호하는 성황당이 있고, 중턱 상단에는 샘물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강릉지역 지명유래중에서>고 하나 지나 번 산행 때는 지치고 고단해서, 이번에는 날이 어둡고 가는데 급급하여 주변(성황당)을 자세히 살피지를 못했다.
지난 번 산행 때 겁을 먹은 김재윤 회장님, 박기양, 안상경교감, 장현옥 선생님, 두 번이나 산행에 참석하지 못한 노승애선생님, 그리고 모처럼 참석한 신광철교감, 이경제선생님은 오전 산행(삽달령~닭목령)을 포기하고 9명(김명자, 김찬석, 박봉하, 유선만, 윤희원, 이용준, 이태인, 조규연, 조재방)만이 산행 길에 올랐다.
[3] 석두봉 가는 길
숲으로 들어서자 강릉시에서 세운 「석병산 ← ◈ → 닭목령」이라 표지판이 오늘 산행 길을 안내한다. 도로를 조금 지나 대간종주 리본을 뒤로하고 산 속으로 들어서니 初入부터 눈에 푹푹 빠지기 시작한다. 오늘 또 한 번 넌더리가 나도록 눈을 밟고 걸어야 하나보다. 해드렌튼의 불빛만 보고 앞사람을 따른다. 온통 눈밭이고 어둠이라 길인지 산인지 분간할 수도 없고 주변을 돌아보고 景을 살피는 念도 없다. 그저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만 빠지고 빠지면서 따라갈 뿐, 앞서 가고 비켜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30여분을 걸었나. 큰 철탑이 우뚝하고 철탑 주변으로 망을 쳐 두었다. 통신 중계 탑인가?
비탈길 ☞ 임도 ☞ 「삽당령 ← ◈ → 닭목령」이정표 ☞ 들미골 갈림길(직진 능선 길은 들미골로 내려가는 길이고, 닭목령으로 가는 대간길은 좌측으로 90도 꺽어 내려간다) ☞ 無名峰 ☞ 無名峰 이정표 「삽당령 ← ◈↓ 대용수동 → 닭목령」이정표가 있다. 대용수동 방향 표시로 보아 진행 방향에서 좌측으로 가면 『龍沼』가 있는 강릉시 왕산면 大基 2里에 있는 『龍沼골』인 모양이다.
大基里 地名 由來(http://www.daegiri.or.kr/sub01/sub01-2-2.asp)에 따르면 龍沼골 안에 큰 용수골과 작은 용수골이 있고, 골안에 작은터, 가르쟁이, 큰용수골 등 3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龍沼』는 작은터 마을 냇가에 있는 沼로 바위 벽 사이에 깊은 소가 있는데 너무 깊어 명주꾸리 하나가 다 풀려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한다. 옛날 이곳에 있던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중간쯤 올라가서 힘이 부쳐 더 올라가지 못하고 沼옆에 있는 너래반석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너럭반석에 움푹 파인 자국이 있는데 용이 떨어져 파인 곳이라 하며 『가르쟁이』는 작은터에서 큰용수골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마을로 옛날 나무그릇을 만드는 가르대목(나무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대간 산행을 하며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았는데 산이며 계곡, 嶺과 바위와 나무들의 이름에는 유래와 전설이 담겨 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박함과 꿈과 진솔한 哀歡이 담겨 있는 듯하여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늘 아쉬웠었다.
야간 산행이고 온 산이 눈으로 덮여 방향을 잡기가 힘들다. 대간 종주 꼬리표도 눈에 잘 띄지 않아 선두가 산을 내려오다 주춤거린다. 지난 산행 때 길을 잃고 헤매던 경험이 있어 조심하고, 산악대장 길을 찾는 동안 잠시 산행 정지. 후미로 오던 팀 꼬리표 발견한다. 내려오던 길 되돌아 올라간다. 느린 것도 福이 될 때가 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길 산행을 하다보니 길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걷다보면 철쪽 가지가 목덜미를 잡고 늘어지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얼굴을 할퀸다. 빨리 날이라도 밝았으면 좋겠다. 완만한 산봉을 몇 개를 넘고 지나쳤는가. 작은 無名峰, 날이 훤해 지며 동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중간 無名峰,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는데 또 하나의 된 비탈로 이어지는 산이 가로막는다. 산 정상을 오르면 日出을 볼 수 있겠다 싶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보지만 마음만 앞서고 눈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산 중턱을 오르니 이미 날이 완전히 밝아 日出을 놓치고 말았다.
된 비탈을 오르다보니 눈 속에 묻힌 돌덩이가 나타난다. 石頭峰(07시35분경)인가 보다.
산림청이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석두봉(石頭峰)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2리 큰 용수골 안 가리젱이에 있는 높이 982m의 봉이으로 산 정상에 두 쌍의 바위가 있는데, 東峰과 西峰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바위에 올라서면 일대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석두봉은 강원도 오지 중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에 위치한 탓으로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 登山人들의 발길이 뜸하다고 한다. 그래서 등산로가 수풀에 둘러싸이고 산행 때 힘은 들지만 원시림을 헤쳐 나가는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잇점도 있단다.
산림청 자료의 설명대로면 웅장한 바위도 있고 一望無際로 툭 트인 雪山의 모습도 한 눈에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 너무 기대를 한 탓인가. 문득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栗谷 李珥(1536∼1584)가 지은 시조)가 떠오른다.
구곡(九曲)은 어드메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무쳐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정상에 올라 진행 방향 쪽을 보니 흰 천을 펼쳐 놓은 듯 눈으로 덮인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아마 화란봉이나 고루포기산 정상의 고랭지 채소밭일 듯싶다.
정상에 오르느라 바쁘게 몰아 쉰 숨을 잠시 고르고 예정보다 늦은 시간(약1시간)에 쫓겨 山頂 내려와 잡풀구간을 지나니 헬기장이 있고 「현위치 - 石頭峰 : ←삽당령 ← ◈ → 닭목령 / 강릉시 왕산면」이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앞서 힘들게 올랐던 山頂이 石頭峰인가 헬기장이 石頭峰인가? 정리가 잘 되질 않는다.
[4] 화란봉을 향해
완만한 峰(960봉)을 지나고 또 하나의 봉(989.7봉)은 봉우리로 직접 오르지 않고 좌측 측면으로 비켜 지나 좌측으로 휘어진 완만한 내림 길로 들어선다. 곧이어 평탄한 안부에 내려서니 소기동 갈림길 이정표가 서 있다. 「삽당령 ← ◈ ↑소기동 → 닭목령」
소기동 갈림길 안부 ☞ 완만한 오름길의 무명봉 ☞ 다시 조그만 무명봉 ☞ 완만한 비탈 길 ☞ 넓은 공터(백두대간 종주 리본이 주렁주렁),
힘도 들고 배도 고파 후미팀(김명자, 김찬석, 박봉하, 윤희원, 조규연, 조재방), 평탄한 능선 길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돼지 족발, 가래 떡, 마늘 양념이 된 빵, 물 한 모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벌써 지쳤는가? 솜같이 부드러운 눈에 벌렁 누워 천근만근이나 되는 눈꺼풀의 무게를 줄이고 갔으면 싶다. 생각 뿐,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완만한 능선을 오른다. 좌측으로 떨어진 큰 봉(1006봉?) 하나는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휘어져 나간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큰 봉은 중간쯤에서 비켜가는 福을 누렸으면 싶다. 이미 길이야 정해졌겠지만.
1006봉의 완만한 내림 길에 이어 안부에 내려선다. 다시 완만한 오름이 시작되고 점차 된 비탈이 이어지며 발의 무게도 더 나가고 숨도 가빠지고 바람에 날씨까지 차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선두는 산 중턱을 오르고 중턱을 올랐는가싶으면 산 정상을 오르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 마음만 더 바쁘게 만든다. 겨우 겨우 힘들게 정상을 오르니 『花蘭峰(10시40분경)』 정상 이정표가 나타난다.
花蘭峰(1069m,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소재)은 이름 그대로 꽃모양을 하고 있는 산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진 花冠이 花蘭峰을 중심으로 겹겹이 에워싼 형상이라고 한다. 꽃피는 시절이면 화란봉의 절경을 눈에 담아 갈 수 있을 텐데 시절이 거리가 멀어 산 이름으로 아름다움을 그리며 산 정상을 내려온다.
[5] 金鷄抱卵形의 明堂 『닭목령』
내림 길 ☞ 아름드리 노송들이 몇 그루 버티고 선 바위전망대(지난여름에 황장산을 지나며 본 소나무와 이 곳 소나무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끈하고 굵게 험 하나 없이 자란 소나무다. 황장목-춘향목이라면 이런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정말 탐스럽게 자란 落落長松이다.) ☞ 급 비탈 내림 길 --- 김찬석, 유희원, 조재방 대원 급히 내려가고 김명자, 조규연 대원을 뒤로한 채 급경사 길을 조심해서 내려온다. 11시를 넘긴 시간이다. 닭목재 선지 해장국 생각을 하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무덤(빈 석관묘) ☞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 ☞ 숲속을 지나 내려서니 파란 건물지붕과 도로가 보이고 건너편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정차해 있다. 마침내 넌더리가 나도록 힘들었던 눈 길 오전 산행의 종착지 닭목령에 도착(11시35분경)한 것이다. 『삽당령13.5km ← ◈ → 능경봉10.2km』임을 알리는 이정표, 산불조심 깃발, 씨감자 産地라는 대형 입간판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산에서 보았던 파란지붕의 건물은 농기계 보관창고고, 창고 옆으로 아담하고 말끔하게 지어진 산신각이 있며 도로 건너쪽(삽당령 방향) 도로 변에는 天下大將軍과 女將軍 장승 2기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으로는 계양동 번영회에서 『닭목령』標識石을 세워 놓았다.
닭목이란 地名이 좀 특이하다. 「푸른고원 대기리 홈페이지」를 뒤져 보았더니 벌말(대기리에서 제일 넓은 들이 있는 마을)에서 문바우를 지나 왕산리쪽으로 가다가 매지분교가 있는 마을 일대로 이 마을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생겨 명당자리가 많다고 한다.
닭목을 당목이라 하는데 '닭목'이란 받침에 스인 'ㄺ'의 발음이 대표음 'ㄱ'으로 소리가 나 '닥목'이 되어 다시 '닥목'이 音韻變化하여 '당목'이 되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서낭당이 있는 길목에 있어 생긴 이름이란다.
■ 문바우
닭목이에서 벌말로 가다가 길옆 양쪽에 문처럼 서 있는 바위. 지금은 도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닭목이와 벌말이 구분된다. 옛날 승려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옆에서 쉬면서 바위를 처다보니 바위가 문처럼 생겨 문바위라 했다. 이 문바위가 있어서 마을이 재물이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모여 잘 살수 있다고 한다.
기사양반, 반가운지 차에서 나와 반기고 오전 산행구간을 생략한 대원들은 2시간 전쯤 대관령을 향해 출발하고 일찍 도착한 선두 대원들도 일부 떠났다고 한다.
우선 아이젠을 풀고 차에 오르니 조금 전 도착한 대원들도 점심을 막 끝낸 모양이다. 우선 그릇에 선지 국을 퍼고 바닥에 깔린 밥을 두어 주걱 국에 말아 먹으니 寒氣와 배고픔이 가신다. 이 찬 날에 더운 국밥에 난방 된 버스 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쉴 여유도 없이 다시 아이젠을 졸라매고 출발을 서두른다. 능경봉 초입, 「백두대간 등산」지도와 구간 거리가 표시된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닭목령에서 대관령 샘터까지 구간별 거리가 적혀 있다. 각 구간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로 설정이 되 있고 대관령 샘터 까지는 13. 10km로 소요시간 7시간이라 표기해 두었다. 『닭목령』 출발 시간이 12시 05분, 오전 산행 같은 눈길이라면 8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고 길이 잘 나있으면 6시쯤에는 대관령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 닭목령←[2.6km]→제1쉼터←[2km]→제2쉼터←[2km]→고루포기산←[1.06km]→전망대←[1.58km]→쉼터←[2.46km]→행운의돌탑←[0.3km]→능경봉←[1.1km]→대관령 샘터, 총 13.10km ▲▲▲▲
[6] 목장길 따라
山神閣 우측 비포장 林道를 따라 진입하여 천천히 오르니 산채 재배단지가 있다. 봄이면 도톰하게 잎이 돋을 두릅나무가 가시를 촘촘히 달고 나란히 심어져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탓인가? 쌓인 눈이 잘 다져져 있다. 이정도의 눈길이라면 예상보다 한 시간은 앞당겨 목적지(대관령)에 도착할 것 같다. 쉬엄쉬엄 임도를 따라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산골자기 전부를 草地로 만든 듯한 목장 출입문이 있고 산 중간 중간에 畜舍도 보인다. 겨울철이어서인지 소(양)들도 없고 사람의 움직임도 없는 寂寞만이 흰 눈과 함께 목장을 지키고 있다.
목장(맹덕목장) 출입문을 앞에 두고 대간 길은 좌측 능선으로 나 있으며 두 가닥의 철사 줄이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다. 완만하던 능선이 갑자기 고도가 높아지고 다리에 주는 힘도 倍加된다. 능선 중턱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곧 따라 올 것으로 생각했던 김명자 선생님이 보이질 않는다. 걱정을 하며 능선 마루(955.6봉)에 올라 돌아보니 명자 선생님 그제야 목장 입구의 언덕을 오르고 있다.
힘들게 오른 다리 품을 달래며 계속 이어진 철망을 따라 나간다. 철망 끝 지점 안부에 도착, 목장을 중심에 두고 20여분을 돌았나보다. 지루하고 힘들고 --- 대간 길은 좌측 능선으로 다시 휘어져 오른다. 철망이 또 다시 등장한다.
[7] 왕산 제 1 쉼터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
지금쯤이면 닭목령에서 봐 둔 제1 쉼터(2km)가 나타날 만도 한데, 숲 ☞ 임도 ☞ 숲 ☞ 숲으로 이어지더니 완만한 오름길에 「왕산제1쉼터(해발855m) : 닭목령 2km ← ◈ → 왕산제2쉼터 2km」란 안내팻말과 스텐인레스로 만들어진 밴치4개가 놓여진 쉼터에 도착했다.(13 : 10). 안부에서 걸음을 빨리하던 윤희원 사장님 쉼터에서 쉬었다 갈 만도 한데 흔적도 없이 앞서 가고 후미팀 벤취에 걸터앉아 휴식.
[8] 또 한 번의 橫財 왕산 제 2 쉼터
완만한 오름길 ☞ 가파른 비탈길 ☞ 바위 너덜지대 ☞ 또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오르니 「왕산 제 2 쉼터(해발952m) : 왕산제1쉼터2km ← ◈ → 고루포기산 쉼터2km」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제1쉼터와 같이 스텐레스로 된 벤치가 2개 놓여있는 왕산 제 2 쉼터에 도착한다(14 : 00). 또 한 번의 쉴 수 있는 기회. 이러다 해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그래도 쉬고 보자.
[9] 고로쇠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고루포기산
오후 산행 구간 중 첫 번째 고비 『고루포기산(1,238m)』 오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고루포기산』은 고로쇠나무가 많이 서식하여 붙인 이름인데 ‘고루포기’와 ‘고로쇠나무’는 같은 의미다. 또 이 산의 다른 이름은 「東國與地勝覽 大東輿地圖」에서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이라 하여 65자로 설명해 놓았는데
所隱栢伊山 在府西六十五里 / 諺傳神仙居之地 ---
소은백이산은 강릉 서쪽 65리에 있는데 옛 말에 전하기를 신선이 살던 곳이다. 옛날 사냥꾼이 짐승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조망을 하니 골짜기 마을에는 노거수와 초가집과 오솔길이 있고, 시냇가에는 포목과 옷가지 빨래가 걸려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하산하여 그곳을 찾아갔으나 마침 구름과 이내가 계곡을 덮어 길을 앓고 끝내 그곳을 찾지 못했다.
또한 이 산 기슭에는 아직도 피난지라 五德의 지명이 남아 있다. 괴비데기(고비고사리가 많은 언덕), 안반데기(떡을 칠 때 쓰는 나무판처럼 넓고 평평한 지형), 장두데기(길고 긴 언덕), 황철데기(황장 소나무가 서식하는 언덕)가 그곳이다.
<월간 『산과 사람』중에서>
급경사 오름 길. 바람이 찬데도 땀이 모자 둘레로 비집고 나온다. 미끄러운 눈길과 코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지팡이로 밀고 걸음으로 버티며 오르는 중도에 高壓線 鐵塔 하나 지난다. 아침나절에 본 흰 천을 펼쳐 놓은 듯한 눈밭이 이곳 고랭지 채소밭이다.
雪山을 觀望할 念도 갖지 못하고 숲길을 지나 완만한 임도를 따라 오르니 또 하나의 철탑 밑을 통과하게 된다. 다시 임도를 만나고 리본을 따라 우측 숲길로 접어드니 『고루포기산』 정상이다(14 : 46분). 힘들게 힘들게 고루포기산 정상에 올랐다. 대관령 휴게소가 멀리 보인다.
정상에는 「왕산고루포기쉼터(해발1238m) : 왕산제2쉼터2km ← ◈ → 능경봉4km」란 標識板을 세워 두었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이태인 총무, 쉬면서 후미팀을 기다리고 있다. 눈 때문에 찍지 못한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정상 벤취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다.
[10] 오목골 갈림길
고루포기산 정상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니 세 번째 高壓線 鐵塔을 지나게 된다. 철탑 좌측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철탑 ☞ 숲길 ☞ 오목골 갈림길 이정표 「고루포기산0.4km ← ◈ ↓오목골1.6km → 능경봉4.7km」
[11] 대관령 전망대
고루포기산 정상을 떠나 20여분을 완만한 내림 길과 가파른 오르막 올라 대관령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답게 대관령 전경이 한 눈에 확 들어온다. 활처럼 휘어진 능선과 집과 나무들 사이로 덮인 설경이 마치 대형 사진 액자를 벽에 걸어 둔 듯하다. 봇물 터지 듯 가슴이 후련하다.
『대관령 전망대(대관령 산악회)』표시판, 평창군에서 세운 「고루포기산1.0km← ◈ → 능경봉4.1km」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12] 왕산골 갈림길 이정표
전망대 ☞ 왕산골 갈림 길, 「고루포기산1.4km ← ◈ ↑왕산골 → 능경봉3.7km」이정표 ☞ 또다시 왕산골 갈림길 이정표 「전망대1.4km ← ◈ ↑샘터100m, ↑왕산골700m → 능경봉2.6km」☞ 능경봉 전 제 2 쉼터(16 : 00시) 안내 팻말, 아래쪽에는 차들이 질주하고 있는 넓은 도로가 보이고 진행 방향으로는 완만한 선을 이룬 대형 산이 가로막고 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능경봉』인가 보다.
지친 대원들에게 힘을 내자는 뜻인가. 지형으로 보아 산이 가파르지 않고 30여분만 마지막 힘을 내면 능경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산악 대장의 말.
[13] 山 頂上을 쉽게 내 주지 않는 능경봉(陵京峰
산악 대장의 말을 위안으로 삼고 가파른 오름길에 도전한다. 큼직한 봉 하나를 오르며 능경봉 정상인가 하면 저만큼 더 큼직한 봉우리가 하나 더 버티고 있다. 저게 능경봉이다 싶어 악으로 올라보니 더 큰 峰이 뒷쪽에 버티고 있다.
능경봉 정상 0.3km 전방에 있다는 『행운의 돌탑』은 어디 있는가? 잠시 휴식, 제일 후미로 따라 오는 명자 선생님 잠시 쉬다오라 권하고 마지막 峰이다 싶은 급경사를 중간쯤 오르니 반 정도 쌓여진 『幸運의 돌탑』이 나타난다. 돌탑을 보는 순간 맥이 빠진다. 너무 지치고 힘들게 산을 오른 때문이리라. 주변 돌 하나를 주워 탑에 올려놓고 ‘올 한해도 건강하고 백두대간 무사 종주하게 해 주십시오.’라 큰소리로 소원을 빌고 마지막 힘을 끌어 올린다.
『능경봉(陵京峰)』은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와 성산면 오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에 걸쳐 있고 높이는 1,123m이다. 대관령 남쪽 산맥 중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제왕산의 母山이 된다. 山頂에 靈泉이 있어 祈雨祭를 지냈고 이 봉에서 맑은 날엔 울릉도가 보인다고 한다.
능경봉 정상에 도착(16 : 45분경) 「능경봉 정상(해발1123m) : 닭목 ← ◈ → 대관령휴게소1.8km」라고 새긴 標識板과 등산 안내 지도가 설치되 있다. 힘들게 오른 산이라 우선 기념촬영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산신제 시간이 촉박하여 대관령을 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14] 大關嶺 山神祭와 一味 중의 一味 生太국
이제 단걸음에 미끄러지듯 줄행랑을 놓으면 닿는 곳이 대관령이다. 산행인의 통행으로 눈길도 적당히 나 있어 비료포대라도 가져 왔으면 설매 타는 재미도 누리고 힘든 다리품 덜 수 있었는데 --- (대간꾼에 어울리지 않는 발상)---. 능경봉 턱 아래 헬기장. ☞ 헬기장을 가로질러 내려서니 무덤1기 ☞ 완만한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오다 보니 제왕산 등산로 안내판이 있는 비포장도로에 내려선다. 안내판에는 「능경봉1.1km ← ◈ → 대관령700m」라고 적혀있다.
대관령 샘터인가? 대관 길 좌측에 물 호스가 있고 주변에는 물이 고여 있다. 더운 날이면 얼마나 보배로운 물인가? 그냥 지나치고 「대관령 700m」라고 새겨진 안내판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넓은 흙 길로 접어들어 갈대 숲 사이를 지나 완만한 능선을 넘어서니 『동해, 영동 고속도로 준공기념비』와 휴게소 건물, 풍력발전소 1기, 그리고 텅 빈 광장이 눈에 들어오고 竣工碑 뒤로는 먼저 내려온 대원들이 도열하여 始山祭 올릴 채비를 차리고 있다(17 : 25분경).
『삽당령』에서 『대관령』까지 백두대간 제 26 구간 눈길에 넌더리를 낸 산행에 마침표를 찍고 癸酉年의 無事山行과 所望을 술잔에 담아 大關嶺 山神靈께 올렸다. 동해의 바람이 큰 嶺을 넘기 때문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고 손끝을 에는 추위 때문에 오래 遲滯하지 못하고 飮福 한 잔 시산제를 끝내고 祭物을 거두어 폐쇄된 휴게소로 내려왔다.
대관령에 일찍 도착한 대원들(닭목령에서 출발한 대원)이 휴게소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고 큰 들통에 준비해 온 生太 국을 얼큰하게 끓여 놓았다. 허기지고 추운 날에 뜨끈뜨끈한 국을 안주하여 큰 컵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시니 山海珍味가 따로 없다. 서고, 쭈그려 앉고, 三三五五 모여 먹느라 여념이 없는데 난데없이 찝차 한대 정차하고, 산불방지 감시원이 내리더니 다짜고짜로 큰소리를 치며 운전기사를 찾는다.
“운전기사 당신 차에 가스버너 가지고 다니면 40일간 운전면허 정지당하고 벌금 무는 것 알아 몰라”
응급 결에 당하는 일이라 모두 얼떨떨하여 상황을 지켜본다. 정신을 수습하여 뒷정리를 깨끗하게 하겠다는 약속과 장현옥 대원 이쁜 재치로 서설이 퍼렇던 감시원을 진정 시켜 보내고 다시 분위기는 평온을 되찾는다. 힘들고 어려웠던 산행이었지만 무사 산행을 했고, 시산제와 산행 후의 뒤풀이도 알뜰하게 잘 끝낸 백두대간 26구간 산행이었다.
[15] 참고자료
15-1) 江陵市 由來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후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 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 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면을 관할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 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15-2) 왕산면
■ 왕산면 개요
1896년 8월4일 고종 칙령 제35호에 의해 강릉군 구정면이라 했다. 1914년3월2일 늘목재 새재를 중심으로 상구정면이라 칭하고 도마 목계 송현 고단 대기 남곡 구절리를 관할하다 1917년10월1일 고려 우왕이 帝王山에 성을 쌓고 피신했다하여 王山으로 부르다 그후 旺山으로 바뀌었다. 1955년 강릉시 승격으로 명주군이 되고 1973년 7월1일 대통령령에 의해 왕산면 구절1, 2리와 남곡리가 정선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1월1일 도농통합으로 강릉시 왕산면이 되었다. 법정리 6개(도마 목계 왕산 송현 고단 대기)와 행정리 12개(도마1, 2리 목계 왕산 송현 고단1, 2, 3리 대기1, 2, 3리) 48개 반, 5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 지역적인 특성
삽당령과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영상․영하 지역으로 양분돼 있다. 영상지역은 송현 고단 대기리로 고랭지 채소와 전국 최대의 씨감자단지가 주류를 이루며 경지면적의 87%가 밭이다. 영하지역은 도마 목계 왕산에 해당하며 주로 청정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총 면적이 245.67㎢로 강릉시 전체면적의 23.6%에 달하며 이중 222.03㎢가 임야이고 밭 13.35㎢ 논 5.37㎢ 기타 4.92㎢이다. 임야 중 75%이상이 해발 700m이상의 고랭지를 이룬다. 영하지역 대부분이 강릉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맑은 수질을 보존하고 있으나 지역개발의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 국도 35호선이 영상․영하지역과 면 전체를 연결하며 대기~구절간 확포장공사로 도로 접근망이 발달돼 있다. 면내 유일의 왕산중과 왕산초등 고단초등이 있다. 전통문화의 도시인 강릉의 다른 지역과 달리 지형적 특색때문에 지정문화재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 왕산면 대기리
▶ 마을이 넓기로 유명한 대기리.
▶ 대기2리
▶ 대기3리 배나드리 마을
▶ 대기4리
♠ 왕산면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인 대기1리는 원래 구정면 지역으로 큰 터가 있어 한터, 큰터, 대기라 불렀다. 이 마을 남쪽엔 노추산과 사달산이 있다. 노추산은 정선군 북면 구절리와 경계하는 해발 1,322m의 산으로 둘레가 40㎞에 이르며 신라시대 설총과 조선 때 율곡 선생이 학문을 닦아 대성했고 중국 노나라 공자와 추나라 맹자의 기상이 서려 있다고 전해진다.
사달산은 노추산 인근의 높이 1,230m로 공자 맹자 설총 율곡이 통달했다는 설이 서린 산이다. 노추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장군목에서 곧바로 오르면 해발 1,188m의 조고봉을 등산하는 코스가 일품이다.
늪골, 늑막골, 도화목, 신직이란 자연마을에 47세대 101명(남자 68명 여자 33명)이 밭농사 91.7㏊를 일구며 산다.
♠ 대기2리는 벌말(坪村)에서 대기 3리 한터까지 흐르는 대기천 계곡이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닭목재에서 화란봉 정상~장기바위~석두봉 정상~용수골~삽당령 정상까지 8시간이 소요되는 백두대간 등산로가 일품이며 곳곳마다 표지판이 설치돼 초행자도 쉽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벌말에서 대기 1리 도화목~장군목~노추산 정상까지 오르는 5시간 코스의 산행도 산악인들을 손짓한다.
닭목재 아래 왕산골 입구엔 왕성분교를 개조한 왕산조형연구소가 있어 다양한 조각품을 구경할 수 있으며 솟대 등 민예품을 구입할 수 있다.
왕산면에서 가장 규모가 큰 209㏊의 밭농사를 지으며 84세대에 남자 126명 여자 66명이 거주하고 있다.
♠ 대기3리는 한터 뒤편에 해발 1,458m의 발왕산이 있다. 발왕산은 해발 1,458m의 높은 산으로 오대산으로 가던 중이 바랑을 벗고 절을 짓다가 중단하고 다시 바랑을 걸치고 오대산으로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전국 유일의 감로차 생산지인 향림 약초원이 널리 알려졌으며 강릉시내에 특판장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정선 구절리와 연결돼 기암괴석이 냇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한터가 유명하며 배나드리, 다리재, 바람부리, 동초밭, 가내구비, 동초가 등의 부락이 이어져 있다. 41세대 97명(남자 64명 여자 33명)의 주민이 비교적 넓은 152.7㏊의 밭농사만 짓고 있다.
♠ 대기4리는 면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로 남자 32명 여자 24명으로 총 56명이 30세대를 이루며 밭농사만 195.4㏊를 경작하고 있다.
맹데기에서 벌말에 이르는 연장 8㎞, 강폭 20m의 대기천이 흐른다. 대기천은 대기지구 최대 경지지역인 당무기 지역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의 근간을 이룬다.
마을 생김새가 떡메로 떡살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처럼 생긴 안반덕이, 마을 뒤 고로쇠나무가 많은 고루포기, 화전 이주민이 세운 송덕비가 있는 피득령 마을이 있다.
15-3) 대관령(大關嶺)
■ 大關嶺 옛길
♠ 소재지 : 강릉시 성산면
♠ 대관령은 강릉시와 평창군 사이의 령으로 높이 832m, 길이가 13㎞나 된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문화의 전달로이고, 자연의 경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을 이 지역 사람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ꡒ대굴대굴 구르는 고개ꡓ 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ꡐ대굴령ꡑ을 한자로 적어 ꡐ대관령ꡑ(大關嶺)이 되었다 한다.
강릉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농산물들이 이 길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넘어갔고, 영서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성산면 구산리의 구산장, 연곡장, 우계[옥계]장 등으로 넘나들었다. 이 물산의 교역은 ꡐ선질꾼ꡑ이라는 직업인들이 담당했다. 그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도 바로 이 대관령 옛길이었다. 또한 개나리 봇짐에 짚신을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들의 역사적 향취가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관령 옛길은 령의 중간에 위치한 반정(半程)에서 내려가는 코스와 대관령박물관이나 가마골로 올라가는 코스가 있다. 내려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50분 정도이며 올라가는데는 2시간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옛길은 산세가 완만해 가족단위로 등산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올라가는 등산로를 안내한다.
대관령 정상에서 굽이굽이 돌아 흘러내린 시냇물은 산골짜기마다 고여 작은 폭포와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시원한 소리로 계곡을 울리며 흐르는 시냇물은 바닥까지 투명하여, 지나는 산객이 그 맑은 물에 뛰어 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 옥계수(玉溪水)가 흐르는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능선이 서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과 기암괴석, 다양한 수종의 삼림이 잘 어우러져, 대관령 숲 속에 들어가면 마치 대자연의 포로가 된 것처럼 쉽게 나올 수가 없다.
초입의 울창한 삼림 속을 걸어 들어가면 야생 들국화 군락지를 지나게 된다. 늦은 가을 처량히 핀 들국화도 산객의 마음을 한껏 낭만스럽게 한다. 그윽한 국화 향기는 산행의 걸음걸이를 멈추게 한다. 야생화 군락지를 지나면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이어져 산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작은 돌탑과 계곡을 돌아서면 들리는 상쾌한 물소리,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 숙이는 할미꽃, 이름없이 자태를 뽐내는 야생화들이 산객의 발길을 반긴다. 이것저것 산풍경들을 감상하며 오르면 어느새 반정까지 오른다.
대관령 옛길은 조선 중종때 「고형산」이란 사람이 조금 넓혀 놓았다. 이고개는 ꡒ울고넘는 고개ꡓ이다. 관원들이 멀리 푸른바다가 보이자 세상끝에 당도했다고 눈물을 흘렸고 떠나갈때 그동안 정들었던 생각을 하며 울면서 갔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반정에서는 강릉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율곡 이이선생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산길을 오르시던 모습과 지금 가면 친정에 또 언제 오려는지, 오죽헌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신사임당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반정에서 내려와서 대관령박물관에 들르면 귀중한 민속 소장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승용차로 5, 6분 정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성산면 구산리 면소재지에 다다를 수 있다.
거리는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꿩고기로 만든 상큼한 만두국, 얼큰하고 구수한 추어탕, 대구머리찜, 막걸리, 숯불갈비집 등이 등산의 허기를 채우기에 적당한 곳이다.
보광천과 대관령 자락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배경으로 허기를 채우다 보면 아름다운 산들이 떠오른다.
아흔 아홉 고개 따라 대관령을 넘다보면 사임당의 싯구를 닮은 마음 하나 떠오를 지도 모를 일이다.
■ 대관령박물관
대관령박물관은 수십세기에 걸친 방대한 역사와 민속유물 2천여점이 전시되어 있는 사설박물관으로 외관은 고인돌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밖에서 보면 6개의 건물로 보이지만 건물내부는 하나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는 원통형으로 들어온 곳을 통해 다시 나가게 만들어진 특이한 건축형태를 하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로 나누어진 전시관은 백호방, 현무방, 토기방, 청룡방, 우리방, 주작방의 여섯개 전시실로 나눠진다.
백호방에는 조선시대 유물 중 종교, 민속신앙, 궁중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현무방에는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토기방에는 주로 석기시대와 신라시대의 토기유물이, 청룡방에는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도자기 유물이, 우리방에는 조선시대의 생활용품류가 전시되어 있으며 주작방에는 15세기 설화도를 비롯해 산수도, 민화 등의 고화와 불화, 조선시대 가마 등이 진열되어 있다.
각 전시실은 우리나라 고유의 분위기와 색감을 살려 만들어졌으며 진열장이 아닌 노출상태로 진열되어 있는 전시품이 많다. 야외전시장에는 비석, 전통공예품, 20개의 장승을 비롯해 신라의 사리함, 조선의 문관석, 동자석등이 전시되어 있다.
■ 대관령 자연휴양림
1989년 한국에서 최초로 개장한 휴양림으로 대관령 동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국 3대 미림으로 손꼽히는 송림지대이다. 소나무 참나무등 수림이 울창하고 물이 맑다.
산림문화 휴양관, 통나무집, 야영데크, 임간수련장등 각종 평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대관령에서 가깝고 강릉에서도 가까워 해수욕과 산행을 겸할수 있는 곳이다.
강원도의 모든것! [현재창] http://www.egwd.net/jsp/welcome/welcome_history.jsp?city_code=06
15-4) 제왕산(帝王山) 유래
증수임영지 고사편에는 "공양왕 원년(1389년) 신우(辛 :우왕)를 강릉에 유배하고 왕산촌에 구금하니 산의 이름이 이로 인해 불리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恭讓王元年流辛 江陵囚于王山村山得名因此.........>
임영강릉명주지에는 "제왕산 성지 : 왕산면 제왕산에 있는 석성으로 약 3km 둘레로 되어있으며 많이 붕괴 되었으나 그 형태는 완전히 알아볼 수 있다. 이성지는 고려말 우왕이 피신한 곳으로 남쪽 상원산에서 부터 노인봉, 옥녀봉, 화란봉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영동민속지 지명유래편에는 "大帝 : 대관령밑 왕산쪽에 있는데 이종을 추봉해서 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산이름을 대제라 했다"라고 기록 (1972년 최열이 펴낸 영동민속지는 '義士列傳' 인용함)
김기설교수의 강릉지명유래에는 "제왕산 또는 증웨이라 불리며 성산면 어흘리와 왕산면 왕산리 사이 높이 840m의 산으로 대관령 동쪽 산맥중 제일 높은 봉으로 고려말 우왕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신한 곳이라 하는데 축대를 쌓은 돌과 기와장이 있다" 라고 기록되었다
역사기록과 野史에는 구정 왕고개, 왕산면의 왕산, 제왕산등 왕과 관련된 지명유래에서 우왕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로 중 신돈(辛旽)과 애인 반야(般若:후일 공민왕은 후궁으로 들어간 여자)와 사이 소생인데 고려사에서는 신우왕으로 기록된다. 일설에는 공민왕의 소생이라 하나 분명치 않다. 공민왕이 환관 최만생에 살해되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강화로 유배, 여흥군으로 천배, 그후 강릉에 이배되어 공양왕이 보낸 서균형에 살해된 비운의 왕이다. 공민왕은 왕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후 익빈을 두었는데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못잊어 익빈을 방관하니 익빈은 익빈대로 외로움을 달래려고 제자위 소속 어린소년들과 어울리다 홍륜(洪崙)이라는 소년과 불륜으로 임신을 하게된다. 이사실은 안 환관 최만생이 왕에 고하니 왕은 최만생을 죽여 소문을 잠재우려 살해하고자 계획하다 오히려 살해를 당한다.
15-5) : 사달산
▶ 높이 : 1187
▶ 소재지: 강원도 강릉, 정선
▶ 개요 : 사달산은 노추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산세는 동서로 6km에 걸쳐진 산이다. 노추산의 남쪽 봉우리가 바로 사달산(四達山)이다. 성현(聖賢) 네 분이 나신다는 산이다. 사통팔달 길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이 사달산에서 공부를 하면 학문에 통달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설총, 율곡, 인회 같은 이가 학문을 닦았다한다. 설총과 이율곡 선생이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반열에 올랐으니 앞으로 두 분의 성현(聖賢)이 더 나실 거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산행기점은 대기리다. 작은 늘막골 입구의 대기교를 건너 장구목 까지 간후 장구목에서 왼쪽능선을 따라 1,280봉에 오른다. 이곳에 동쪽으로 주릉을 따라 40분 정도 가면 정상인 헬기장이다. 사달산에서 동쪽으로 굽어보면 삽당령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발왕산, 남쪽으로는 정선군 북면 구절리, 북쪽으로는 안반데기가 보인다. [자료출처 : 산림청]
15-6) 명당(明堂)의 27가지 종류
한글 표현 형국(形局) 의 미 (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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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고조형 回龍顧祖形 용이 맥을 끌고 내려와서 되돌아 본다
군신봉조형 君臣奉朝形 임금이 신하에게 예를 받는다
금계포란형 金鷄抱卵形 봉황이나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다
생사출림형 生蛇出林形 뱀이 수풀을 헤치고 나온다
오공형 蜈蚣形 지네의 모습을 닮았다
맹호출림형 猛虎出林形 사나운 범이 수풀을 헤치며 나온다
장군대좌형 將軍對坐形 장군이 서로 마주 본다
행주형 行舟形 배처럼 생겼다
선인대국형 仙人對局形 신선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둔다
옥토망월형 玉兎望月形 달밤에 토끼가 달을 본다
와우형 臥牛形 소가 누워있다
갈마음수형 渴馬飮水形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
유혈 乳穴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
연주옥대형 連珠玉帶形 구슬을 꿰어 허리띠를 두른 듯한 모습
매화낙지형 梅花落地形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양
황룡농주형 黃龍弄珠形 용이 구슬을 희롱한다
해룡여의농주형 海龍如意弄珠形 바다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굴린다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연꽃이 물에 떠서 피어있다
비룡상천형 飛龍上天形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노서하전형 老鼠下田形 늙은 쥐가 밭으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다
금구형 金龜形 금 거북을 뜻한다
비봉귀소형 飛鳳歸巢形 봉황이 둥지로 날아든다
영구음수형 靈龜飮水形 신령한 거북이가 물을 마신다
보도출갑형 寶刀出匣形 장수가 칼집에서 날카로운 보도를 꺼낸다
옥녀산발형 玉女散髮形 미녀가 머리를 풀어 제친다
완사명월형 浣沙明月形 미려한 천을 밝은 달빛에 적신다
귀미형 龜尾形 거북이가 한 마리 누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