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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4. 2. PMC 프로덕션 '송승환' 대표가 강의한 내용을 소개 합니다.
◎ 사 회 자 :
○ 지금부터 제149회 ‘희망의 경기포럼’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피엠씨 프로덕션 대표이사이신 송승환 강사님을 모시고, ‘난타. 기획에서 세계진출까지’라는 주제로 약 1시간 동안 진행하겠습니다.
- 강사님께서는 한국외국어대학을 명예 졸업하시고, 1965년 KBS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TV, 라디오, 연극, 영화 등을 통하여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신 바 있고, 동아연극상을 비롯, 백상연기상,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등을 수상하시는 등, 많은 수상경력을 갖고 계시며, 현재는 (주)PMC프로덕션 대표이사, 명지대학교 부교수,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송 승 환 : 안녕하십니까?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아침 일찍들 나오셨는데. 요즘 새 정부 들어와서 다들 아침 일찍들 나오시는데, 저는 사실 아침형 인간이 아니고 야행성인데, 아침 일찍 나오라고 해서 사실 곤욕스러웠습니다마는 좋은 자리를 지사님께서 만들어주셔서, 이런 자리라면 새벽잠을 설치고라도 나와야 되겠다고 하고 일찍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 저도 경기도민입니다. 파주시에 살고 있습니다. 외곽순환도로를 통해서 오니까 조금밖에 안 걸리더군요. 굉장히 시원하게 뚫려서 빨리 왔습니다. 너무 딱딱하신 것 같은데, 그냥 편안하게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특별한 강의를 한다기보다는 제가 난타라는 공연을 만들어서 11년째 공연을 하고 있고, 세계 25개국, 도시 수로는 해외 약 250개 도시에서 난타를 공연했습니다.
- 이런 난타, 라는 작품을 제가 어떻게 만들게 됐고, 이 작품을 가지고 어떻게 해외진출을 했고, 대한민국에 요즘 문화산업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현재 우리 문화산업의 현 주소라든지, 현황에 대해서 제가 아는 데까지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회자께서 소개해 주신 대로 저는 사실 아역배우로 어렸을 때 데뷔를 했습니다. 여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제가 아역배우로 활동할 때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1965년도 KBS 어린이 시간에 우연히 출연했다가 담당프로듀서가 어린이 시간에 한 번 고정출연을 해보지 않겠느냐, 이렇게 섭외를 해서 제가 데뷔하게 된 것이 ‘은방울과 차돌이’의 차돌이 역할로 제가 데뷔 했습니다.
제 데뷔작이 ‘은방울과 차돌이’입니다. 65년도에 그렇게 데뷔 해서 쭉~ 배우생활을 해오면서 배우라는 직업에 참,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참,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우선 제가 촬영을 하러가거나 혹은 공연무대에서 공연을 하거나, 그게 저한테 일이지요. 제 job인데, 전혀 일하러 간다는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늘 제 일터, 방송국이나 극장이나 일터로 가는 게 굉장히 즐겁습니다. 늘, 오늘 내가 연기할 역할에 대해서 약간의 긴장감과 설레임도 있고, 매일 똑같은 공연을 무대에서 하지만 공연이 끝날 때 관객에게서 받는 박수가 저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어쨌든 그게 제 일이면서도 일하러 가는 것이 굉장히 즐겁다면 이것만큼 좋은 직업이 있나. 또 잘 아시겠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마진이 굉장히 좋습니다. 이게 뭐 특별히 원자재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공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몸뚱아리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굉장히 마진이 좋은 직업이죠.
또, 요즘은 PPL이라고 해서 기업들이 굉장히 간접광고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하면 신발 회사에서 신발 갖다 주고, 옷 회사에서 옷 갖다 주고. 얼마 전에 제가 드라마 촬영하면서 휴대폰으로 전화 거는 장면이 있었는데, 마침 소품이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제 휴대폰으로 촬영했어요. 제 휴대폰이 좀 구형이었습니다. 방송 나가고 났더니 휴대폰 회사에서 바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신형 보내 드릴 테니까 다음 주부터는 신형 들고 나오시라고. 세상에 이런 좋은 직업이 어디 있습니까? 구형 들고 텔레비전 한 번 나가면 바로 신형으로 바꿔주고. 또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지요. 늘 상대 역할이 있습니다. 저도 20대에는 송승헌 못지않게 멜로드라마 주인공도 많이 했었습니다. 상대 배우들도 당대의 미녀 배우들이었고.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그 당시에 내 노라, 하는 미녀 배우들하고 함께 출연을 하면. 촬영만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하다 보면 같이 점심도 먹고, 일 끝나면 술도 한 잔 할 때도 있고. 그것도 참, 일하는 가운데의 즐거움이지요. 제 상대역 중에 미녀가 아닌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던 것 같아요.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10년 전쯤에 제가 ‘목욕탕집 남자들’이라는 드라마에서 이순재, 강부자 선생님의 사위로 출연했었는데, 그때 제 상대역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양희경 씨였죠? 퉁퉁하신 분으로 미녀는 아닙니다, 분명히. 그런데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분이죠.
- 어쨌든 배우라는 직업을 저는 즐기고 좋아했는데, 제가 20대 후반에 철이 들면서부터는 배우라는 직업에 조금 회의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다른 회의가 아니라. 이 직업이 좀 수동적입니다. 말하자면 뽑혀야 되는 직업이죠. 연출자나 작가나 제작자가 판을 다 벌려놓고, 그리고 저를 캐스팅해야만 내가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수동적이라는 직업이 조금은 불만스러웠어요. 말하자면, 제가 스스로 좀 판을 벌려보고 싶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새로운 각도로 해석해서 만들어보고 싶고, 또 춘향전을 나도 새로운 현대적인 해석을 가지고 새롭게 무대에 올려보고 싶고, 뭐 이런 생각이 머릿 속으로 자꾸 샘솟는데 마냥, 그런 작품이 기획되어서 저를 이몽룡으로 캐스팅 해주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래서 사실은 그런 욕심 때문에 제가 공연 제작, 프로듀서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신촌에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20대 뜻 맞는 동료들과 공연제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일을 해보니까 정말 배우 할 때 하고는 또 다른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고, 보람도 있고, 어찌 보면 프로듀서가 하는 일은 기업의 CEO와 같습니다. 어떤 아이템의 공연을 할 것인가, 어떤 공연이 이 시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또 감동만 줘서는 안 되지요. 자본이 들어가니까 그것을 ......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품이 흥행가능성이 있는가도 결정을 해야 하는. 또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도 해야 되고, 배우와 스텝들을 그 작품에 알맞은 사람들을 캐스팅 하는 일도 해야 하고, 그 작품의 티켓을 팔기 위해서는 홍보마케팅, 이런 일도 해야 되고, 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프로듀서니까 배우 때처럼 자기 역할만 그저. 내 대사만 열심히 외워서 연기만, 내 역할만 열심히 하던 때하고는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일이지만,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작품,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내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간다는 게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 그런데 이 공연 제작을 하고 나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공연을 끝내고 나면 늘 빚을 진다는 게 문제더군요. 연기할 때에는 그저 내 역할 열심히 하고 출연료 받으면 되는데, 공연 제작을 하다보니까 우리나라 문학의 현실이 한 작품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자본을 티켓을 팔아서 회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말하자면 연극 한 편을 만드는데 소극장에서는 1, 2억이 들기도 하고, 대극장 뮤지컬을 만들려면 요즘 같은 경우는 40, 50억 들기도 합니다. 결국 들어간 자금을 회수하는 방법은 티켓을 팔아서 회수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지요.
- 우리나라 영화가 작년에 100편 정도 한국영화가 만들어졌고, 편당 약 50억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서 총 제작비가 한 5,000억입니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작년 한 해 벌어들인 총 매출액이 4,000억이 채 되지 않아요. 우리나라 영화시장 전체로 보면 1,000억 정도 적자를 본 셈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올라간 뮤지컬만 무려 160편이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수익을 낸 뮤지컬은 채 10%가 되지 않습니다. 저도 춘향전을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고, 햄릿을 새롭게 만들고 싶고, 이런 의욕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공연을 끝내고 나면 대관료 못 주고, 인쇄소에 인쇄비 제대로 못 주고, 빚을 진다는 게 참, 큰 고통이더군요. 다행히 저는 공연제작만 하는 게 아니라 배우도 하면서 제작 일을 했기 때문에 빚지면 또 주말연속극 하나 열심히 출연해서 그거 개런티 받은 것으로 빚 갚고, CF라도 하나 해서 목돈 받으면 그 돈으로 연극 제작하고.
- 그러다 제가 96년도에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고래사냥이라는 창작뮤지컬을 제작하고 나서는 생각이 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래사냥이라는 뮤지컬을 제가 만든 이유는, 9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 소위 브로드웨이뮤지컬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는 켓츠라든가 레미제라블, 팬텀오브오페라 이런 작품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물론 세계적으로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들이기는 합니다마는 언제까지 이렇게 외국 뮤지컬을 비싼 돈 주고 수입해서 볼 것인가. 또, 그 정서가 어차피 우리 얘기가 아닌 미국 사람들이 글을 쓰고, 미국 친구들, 영국 친구들이 작곡을 한 우리 정서하고는 왠지 좀 거리감이 있는. 가능하다면 우리 정서로, 우리 자본으로, 우리 얘기를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최인호 선생의 고래사냥이라는 도서를 각색을 하고, 제 친구인 김수철 씨에게 작곡을 맡기고 해서 고래사냥을 만들었죠. 좀 잘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제작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한 7억 정도 제작비가 들었는데. 요즘은 몇 십 억 듭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에 7억이면 연극 제작비로는 굉장히 많은 돈이었습니다. 물론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2, 3주 공연하고, 그리고 지방 몇 개 도시를 돌고나니까 손해는 안 보고 간신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는데, 고래사냥 지방 순회공연을 끝내고 나니까 굉장히 허탈하더군요.
-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2년 동안 100여명의 배우, 스텝들이 함께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불과 한, 두 달 공연하고 나니까 대한민국에 더 이상 공연할 곳이 없어요. 오페라하우스처럼 큰 극장이 우리나라 도마다, 시마다 다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더 있다 하더라도 공연을 한들 관객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몇 년간 고생한 작품을 한, 두 달 공연하고 더 이상 관객이 없고, 결국 시장이 없어서 막을 내린다는 게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제 수익분기점을 막 넘기고, 이제부터 공연을 하면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점에서 막을 내린다는 것도 굉장히 안타깝지요. ‘아, 이 작품을 가지고 일본을 가고, 대만을 가고, 홍콩을 가고, 해외에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이제 다 만들어놓은 작품이고, 다 만들어놓은 세트이고, 다 만들어놓은 의상이고, 이제부터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점에 문을 닫는다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 그래서 고래사냥을 끝내놓고 제가 한 생각은,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화산업도 국내시장만 가지고는 수익을 내기가 굉장히 힘드니까 어떻게든 해외시장을 좀 개척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막상 공연을 가지고 해외에 가서, 우리가 브로드웨이뮤지컬을 비싼 돈 주고 사오듯이 우리도 우리 뮤지컬을 만들고 해외시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보자, 수익을 내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여러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 첫 번째 장벽이 언어장벽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 넓은 지구에서 한국어를 말하고,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한국 사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말씀을 잘 하신다고 해도 비행기 타고 한반도를 30분만 벗어나면 한국어가 아무런 언어로서의 가치를 못 갖습니다. 결국, 연극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서 스토리를 전달하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메시지를 주는데, 과연 한국어로 하는 연극이 해외 어디에 가서 공연이 가능한가, 사실은 막막했습니다. 물론, 해외공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어느 프로덕션이 뉴욕에서 공연을 하면서 한국말로 공연을 하고, 무대 양쪽에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해서 영어로 자막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국 관객들이 굉장히 불편해 했어요. 자막보랴, 연극보랴. 미국 사람들이 자막을 보면서 연극을 본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국의 영어문화권에서 나오는 작품도 쏟아지고 있는데, 굳이 외국작품을 자막을 읽어가면서 본 경험이 없어서 굉장히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그 프로덕션이 영국에 가서 공연할 때 ‘도저히 안 되겠다. 한국어로 공연하면서 자막을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힘들지만 영어로 공연을 하자.’ 그래서 우리 배우들이 대사를 다 영어로 암기하고, 따로 영어레슨을 받고 해서 그 다음에 런던 공연을 할 때에는 영어 버전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그때 런던 관객의 평가는 “차라리 자막을 써라. 더 못 알아듣겠다.” 이게 런던 관객의 평가였다고 합니다.
- 외국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두, 세 달 레슨 받고, 대사 외운다고 해서. 더군다나 일상의 비즈니스 영어도 아니고, 인간의 감정의 아주 디테일한 작은 것까지도 전달해야 하는 배우의 언어가,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가 몇 달 만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큰 문제였습니다.
- 두 번째는 자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7억을 들여서 고래사냥을 만든 게 그 당시로서는 국내 사상 최고의 제작비였어요. 당시 신문 문화면에 국내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고래사냥이 뮤지컬로 막이 오르다, 이런 기사가 났을 정도로. 그런데 같은 시기에 소위 브로드웨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여러분이 이름을 들어보시고, 가보신 분도 물론 계시겠지만 수십 개 극장들이 모여 있고, 전 세계 관광객들이 뮤지컬을 보러오는, 그 브로드웨이에서 만들고 있는 뮤지컬들은 평균 제작비, 그것도 막 오르기 전까지 들어가는 사전 제작비도 약 1,000만 불 정도를 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치면 약 100억 정도를 당시에 사전 제작비로 썼습니다. 작년에 우리나라 롯데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라이온킹’ 같은 뮤지컬은 디즈니가 공연할 때 사전 제작비만 2,000만 불을 들인 작품입니다. 제가 고래사냥을 만들었던 그 시기에 디즈니에서는 약 2,000만 불의 사전 제작비를 들여서 라이온킹을 뮤지컬로 만들었습니다. 약 200억 정도를 들였습니다. 과연 내가 7억을 들여서 만든 뮤지컬과 200억을 들인 디즈니뮤지컬이 해외시장에 나가서 경쟁력이 있느냐. 경쟁력 없습니다. 무대 메커니즘, 무대의상, 음악, 편곡, 사운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200억을 들인 작품과 7억을 들여서 만든 작품은 사실은 갭이 엄청나게 큽니다.
- 이것도 문제였어요. 과연 자본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러나 불가능은 정말 없는 것 같고, 고민 하다 보면 방법이 나서는 것 같습니다. 이 언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제가 내린 결론은 언어가 문제라면 언어가 없는 공연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언어가 문제라면 그럼, 언어가 없는 공연을 만들자. 무대 위에 언어만 있는 거는 아니지 않느냐. 언어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배우의 몸짓이 있고, 표정이 있고, 무대 위에는 무대기술, 조명, 음향이 있고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언어가 없다고 해서 못 만들지는 않지요. 또, 마침 90년대 초부터 non-verbal performance라고 하는 비언어극이라는 장르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제가 나름대로 택한 방법은, 언어가 장벽이라면 언어가 없는 공연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태리를 가든, 영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중국을 가든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
- 그 당시 제가 7억의 자본을 만드는 데도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애를 썼는데, 제가 100억, 200억의 자금을 동원할 재주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연극제작 하는데 100억, 200억을 투자할 사람도 없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제 생각에는 아무리 돈 많은 뉴욕의 프로듀서라도 돈만 갖고는 만들 수 없는 작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아무리 돈이 많기로서니 그 돈만 갖고는 만들 수 없는 게 뭘까. 결국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가 아무리 자본이 풍부해도 나만큼 동양을 잘 알지는 못 할 것이고, 나만큼 한국을 잘 알지 못 할 테니까. 내가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소재로,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잘 만든다면 그것은 자본의 한계를 비켜갈 수 있는.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돈만 갖고는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는 소재의 독특함으로 자본의 한계를 넘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 제가 난타를 만들게 된 배경은 일단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소재로 자본의 한계를 피해 보고, 또 하나는 비언어로, 언어가 없는 연극으로 언어의 장벽을 헤쳐 나가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소재로 제가 찾은 것이 사물놀이였습니다. ‘사물놀이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사물놀이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징, 장구, 북, 꽹과리, 네 가지 악기를 두들기는 우리의 음악 연주입니다. 따라서 굉장히 세계적으로 많은 공연을 하면서 그나마 한국적인 음악으로 알려져 있는 그런 장르입니다. 저는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스토리가 있고,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데, 사물놀이 가지고 어떻게 연극을 만들어 볼 수 없을까. 아시다시피 사물놀이라는 게 두들기는 것이지요. 연극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혹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을 무대 위에 옮겨놓는 것이 연극이죠. 그렇다면 사물놀이처럼 두들길 게 많은 일상의 공간이 어딘가. 저는 부엌이 아닐까, 생각 했어요. 부엌에 냄비, 후라이팬, 주전자, 두들길 게 많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 저희 어머니가 칼로 도마 ‘따따따다’ 두드리는 소리를 아주 좋아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부엌에서 그 소리 나는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달리 좋았던 게 아니라, 그 소리 나는 날은 저녁 반찬이 좀 괜찮았던 것 같아요. 주로 이제 고기 다지실 때 많이 쓰시고. 그래서 난타라는 공연의 무대를 주방으로 생각해 봤어요. 등장인물은 역시, 우리 어머니도 주방에서 일을 많이 하시지만 전문적인 요리사들로, 등장인물을 요리사로 생각해 봤어요. 요리사들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연극적인 드라마로 꾸미면서 그 사이사이에 사물놀이 리듬으로 주방 도구들을 두들기면서 얘기를 꾸며나가면 뭔가 재미있는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이런 컨셉을 갖고 97년 봄에 난타 연습을 시작했지요.
제가 난타 연습 첫날 배우, 스텝들을 모아놓고 “우리 한국 최초로 수출용 연극을 만들어보자. 공연 만들어서 서울, 경기, 인천, 수원. 끽, 해야 부산, 대전, 대구 돌고 끝나는데, 이번에 공연 한 번 잘 만들어서 일본도 가고, 미국도 가자.” 하니까 좋다고 그러죠. 해외 간다는 데 싫다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다들 좋다, 그러면서 저한테 대본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공연 연습 첫 날 하는 일이 대본 나눠주는 일입니다. 햄릿을 하면 햄릿대본, 로미오와 줄리엣 하면 로미로와 줄리엣 대본, 대본을 달랍니다. 제가 “대본이 없다.” 그랬더니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아니, 대본도 없이 어떻게 연극을 하냐?”, “컨셉만 있다. 무대배경은 주방이고, 여러분께 맡길 역할은 요리사고, 사물놀이의 리듬을 가지고 에피소드를 만들어서 공동창작을 하자.” 그 다음 날 반 쯤 안 나오더군요. 이제 뭐 앞길이 막막한 거죠. 설계도 없이 집 짓자는 거나 똑같은 것이니까. 다른 공연들이 대개 한, 두 달 정도의 연습기간을 갖는다면 저희는 6개월이라는 긴 연습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배우, 스텝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 아이디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또 아니면 다시 해체시키고, 또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죠. 사물놀이와 비슷한 소리를 찾기 위해서 냄비는 종류대로 다 갖다놓고 두들겨보고, 어떤 냄비가 꽹과리 소리랑 비슷한지. 밥그릇 중에는 어떤 밥그릇이 징소리와 비슷한지, 사물놀이와 비슷한 소리를 우리 주방도구에서 찾아보고, 제가 직접 호텔주방에 가서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도 하고. 하여간 굉장한 어려움을 많이 겪은 끝에 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첫 공연을 막을 올렸습니다. 그때 저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관객들이 과연 어떻게 이 난타를 볼까.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말 한마디 안 하는 연극을 관객들이 과연 이해할까. 우리가 나름대로 만든 스토리를 관객들이 쫓아올까.’ 저희가 첫 공연 때는 해프닝도 많이 집어넣었어요. 객석에 물을 뿌리기도 하고,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서 드라마에 동참시키고. ‘물을 뿌리면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까. 관객을 배우 위로 끌어올리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드라마에 맞게끔 관객이 움직여줄까.’ 그런데 막상 막을 올려놓고 보니까 그런 걱정이 다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관객들은 어쩌면 그렇게 콘서트와 같은 연극을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일방적으로 객석에서 무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무대 위에 뛰어올라가서 동참하고 싶은 그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걱정했던 거와는 정 반대로 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열성적이고, 뜨거웠습니다. 그때 제 생각은 공급자들이 이런 작품을 못 만들고 있었지, 수요자들은 이미 이런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런 작품을 즐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만드는 쪽에서 ‘관객이 이해 못 하면 어떻게 하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관객은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호암아트홀에서 난타가 첫 공연부터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좋은 반응을 얻고 나니까 배우, 스텝들이 다 저를 쳐다보더니, “가자. 해외로 간다고 그랬으니까 가야 될 거 아니냐. 6개월 동안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켰으면 가자.” 저도 이런 공연을 만들면 해외진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어떻게 해외공연을 해야 되는지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우선 대책을 세우려고 해도 소위 전례가 없었어요. 도대체 한국 연극을 해외에 돈 받고 팔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난타 이전에 해외공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문화관광부나 외교통상부 예산을 받아서, 또 제가 보기에는 해외 나갈 만한 공연이 아닌데, 어찌어찌 로비들을 해서 예산을 따내고, 그래서 해외에 가서 초대권 뿌려서 외국인 앉혀놓고, 아니면 LA나 뉴욕에 우리 교포들 많은 곳에 가서 교포들 앉혀놓고,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습니다.” 라고 소개하는 공연. 말하자면, 국가홍보 차원의 공연들. 예전에 리틀엔젤스가 많이 했고, 선명회 합창단도 많이 했고, 사물놀이패도 해외공연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런 공연들이 commercial하고, 상업적인. 해외에 가서 수익을 내고, 한국의 문화상품을 팔아서 이익을 내는 공연이 아니라, 어찌 보면 국가예산을 가지고 그저 국가홍보차원의 공연에 머물렀던 것이지요. 저는 그런 의미로 난타를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수십 만 불 주고 한국에서 사오듯이 저도 제 작품을 수십 만 불 받고 해외에 팔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시장을 넓혀야만 거기에서 얻은 수익을 가지고 새로운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고, 작은 국내시장 갖고는 해결이 안 되는 문화산업의 적자 구도를 흑자 구도로 바꾸기 위해서 해외시장이 필요했고, 해외시장에서의 수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팔아야 되는지, 누구한테 팔아야 되는지, 이걸 공연료를 얼마를 받아야 제대로 받는 것인지,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런 전례가 없고, 정보가 없으니까 참,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해외시장에 나가겠다고 만들어놓은 작품이고, 팔긴 팔아야겠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소위 공연을 사고, 파는 그런 프로모터들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 그래서 98년 봄에 제가 난타를 팔기 위한 첫 번째 해외출장을 떠났습니다. 물론, 난타 팀을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죠. 난타 하이라이트를 찍은 비디오테잎을 가방에 잔뜩 넣고, 동경, LA, 뉴욕, 파리, 런던, 이렇게 다섯 개 도시에 난타를 팔러 갔었는데, 제가 런던에서 만난 프로듀서가 아주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해외 작품들을 사서 런던으로, 혹은 뉴욕으로 배급하는 아주 유명한 프로모터였습니다. 제가 난타 하이라이트 찍은 비디오 테잎을 보여주면서, “이 작품이 대사가 없다. 언어가 없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도 다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다. 코미디이기 때문에 굉장히 재미있고, 한국의 사물놀이라는 리듬을 활용했는데 이 리듬이 굉장히 에너제틱하고 파워풀한, 관객들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그런 작품, 한국에서는 빅히트한 작품인데, 살 용의가 있느냐. 내가 처음이라 비싸게는 안 팔겠다. 적당한 가격이면 너한테 팔겠다.” 그런데 이 친구가 제 얘기를 다 듣고 작품이 좋다, 나쁘다, 혹은 공연료가 비싸다, 싸다 얘기는 한 마디도 없고, 절 아주 신기한 놈 쳐다보듯이 쳐다보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얘기를 다 듣고 저한테 던진 첫 번째 질문이 “한국에서도 연극을 하느냐?” 그게 저한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아프리카 원주민 된 기분이고, 자존심도 좀 상하고. “우리나라에서도 1년에 수백 편의 공연이 막이 오른다. 우리나라에 세익스피어의 햄릿, 맥버드, 리어왕, 한여름 밤의 꿈, 1년에도 몇 차례씩 막이 오른다.” 그러니까 영국 친구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자기는 한국 연극을 한 번도 본적이 없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친구가 언제 봤겠습니까? 우리가 런던에 가서 한국 연극을 한 적도 없고, 그 친구가 한국을 와본 적도 없고.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이 친구가 한국 연극을 본 적이 없는 건 물론이고, 한국 문화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요. 심지어는 한국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98년이니까 불과 10년 전입니다. 물론 2002년 월드컵 이후에 갔더라면 좀 나았을지 모르는데. 이제 거꾸로 물어봤어요. “너 10년 전에 한국에서 88년도에 올림픽 했는데, 그것도 모르냐?” 자기는 스포츠엔 별로 관심이 없대요. 그래서 제가 “너 그러면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뭐냐?” 하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가 한참 생각하더니 “코리아가 South Korea, Nouth Korea 두 개 아니냐?", "그렇다." 그게 그 친구가 한국에 대해서 아는 모든 정보였습니다. 그 이상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벽을 한 번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한국의 문화상품을 팔겠다고 나왔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의 문화를 모르고, 한국을 전혀 모른다는 건 이건 정말 큰 벽이었습니다.
- 아마 여기 김 지사님도 해외에 많이 가시지만, 김 지사님이 아마 해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지사님이 온다고 하니까 한국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만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아는 척 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관광지에 가시면 관광객들한테 물건을 팔기 위해서 태국 가면 “싸요. 싸요.” 하면서 “안녕하세요?” 한국 말 몇 마디 합니다. 그것으로 한국을 외국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한다면 큰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물론 98년도에 난타를 팔겠다고 해외출장을 가서 만났던 외국 사람들에게서 한국이 너무 안 알려져 있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정말 심각하게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10년 전. 물론, 그 10년 동안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냉정하게 한국이 세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세계경제규모가 11위, 12위인데, 세계 유수기관들이 조사하는 국가브랜드 조사를 보면 늘 50위권밖에 있습니다. 또,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조사해도 늘 40위권, 50위권에 있습니다. 왜 경제규모는 11위, 12위에 가있으면서 도대체 국가브랜드는 이렇게 낮으냐. 저는 이게 심각한 문제인 게, 우리 기업들이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든들, 'made in Korea'의 브랜드 가치가 이렇게 낮아서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 제가 몇 년 전에 런던에서 LG전자의 해외마케팅을 총괄하는 상무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그런 얘기를 했지요. LG에서 만든 평면TV가 처음 유럽시장을 진출할 때 마케팅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뚫고 들어가기 힘든 백화점이 하나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게 런던의 해로드 백화점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갤러리아 명품관 정도로 고급 백화점인데, 런던의 부자들이 넘나드는 런던 한복판에 고급 백화점입니다. 거기가 LG TV가 뚫고 들어가려고 해도 굉장히 힘들었다는 거예요. LG라는 브랜드가치, 한국이라는 나라의 제품이라는 게 굉장한 약점이었는데, 그러나 어렵게 어렵게 백화점 구매담당자를 설득하고, 그래서 해로드 백화점에 드디어 LG TV가 전시를 하고,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전시 판매를 하고 얼마 안 있다가 백화점 구매 담당자가 LG 쪽으로 전문을 보냈답니다. "너희 제품 다 좋다. 한 가지만 수정해 달라." 뭐를 수정하느냐, 라고 물어봤더니 “다 좋은데, 텔레비전 뒤에 맨 위쪽에 너희가 큼지막하게 적어 둔 ‘made in Korea'를 좀 지워 달라.” 그것이 백화점 측의 요구였다고 합니다. “그걸 왜 지우느냐?”라고 물어봤더니, “고객들이 제품을 보고 살려고 마음먹었다가. 디자인도 좋고, 퀄러티도 좋고. 그러나 텔레비전 뒤에 ’made in Korea'를 보는 순간 구매를 망설인다. 그거를 지워버리고, 그냥 LG브랜드로 바꿨으면 좋겠다." 당시 LG는 유럽에 진출하면서. LG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lucky의 L, goldstar의 G 해서 LG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얘기해 봐야 유럽 사람들이 그걸 자세히 알리도 없고, 그래서 당시에 LG는 유럽시장을 공약할 때 카피가 ‘life is good'이었습니다. life에 L, good의 G. 그러니까 ’life is good‘이라는 카피가 굉장히 유럽에 인기가 있었고, LG브랜드가 굉장히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LG브랜드로 팔았으면 좋겠다. 굳이 made in Korea 브랜드를 달아서 구매욕을 떨어뜨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건 앞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국가브랜드라는 게 물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이미지. 한국하면 떠오를 수 있는 어떤 이미지. 외국인들이 일본을 안 가본 사람들도 ‘Japan'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china'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여러분이 미국을 안 가보셨더라도 뉴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요. 무너진 쌍둥이탑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일 수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일 수도 있고. 프랑스하면 에펠탑일 수도 있고, 향수일 수도 있고. 나름대로 눈감고도 떠오르는 국가별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외국인들이 ‘korea’ 하면 떠올리는 비쥬얼 이미지, 시각적 이미지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뭐일 것 같습니까? 많은 외국인들이 ‘korea’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평소에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네? 한복이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한복이 세계적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씨가 89년도에, 88올림픽 직후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한복을 가지고 파리 패션쇼에 진출했습니다. 89년도에 파리의 언론들이 한복을 갖고 극찬을 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옷이 왜 이제야 패션계에 얼굴을 들이미느냐.” 한복을 천사의 옷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이 디자인하며, 이 색감하며” 르몽드를 비롯한 파리의 유수 언론들이 한복을 그 당시에 뭐라고 표기했는지 아십니까? ‘코리안 기모노’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소개했습니다.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로 소개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조금만 게으르면 지금 한국의 대표 음식이라는 김치도 어쩌면 일본의 기무치로 세계인들에게 소개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기무치가 지금 굉장히 적극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치가 몇 년도에는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기무치로 잘못 오인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국가브랜드도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88올림픽에서 2002년까지만 해도 15년. 88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 2002년이라는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행사, 이 행사를 치르는 15년 동안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기회와 찬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마케팅하지 못 했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많은 외국기관들이 조사한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안타깝게도 아직도 전쟁입니다. 아직도 남과 북의 대치. 그 사람들이 CNN을 통해서 1년에 몇 번 한국 뉴스를 접할 때 늘 접한 뉴스가 결국은 남북 간의 긴장 관계에 관한 거죠. 외국인들이 한국의 소위 랜드마크로 생각하는 건물. 우리가 파리하면 에펠탑, 이태리하면 개선문을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나라나 랜드마크. 두바이하면 요새 뭐 고층급, 100 몇 층짜리 빌딩을 생각하고,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는 안타깝게도 불타버린 숭례문도 아니었고, 판문점입니다. 그것이 외국인들이 한국소식을 접할 때 가장 많이 본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도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데 한류가 참,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히트하면서 배용준 씨가 CF 출연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그게 중요한 것보다 더 큰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물론, 배용준 씨 돈 많이 벌었지요. CF도 했고. 최근에 배용준 씨가 동경에 겨울연가라는 한국레스토랑 문을 열었습니다. 그 레스토랑에서 밥 먹으려면 지금 예약하면 내년 여름에 먹을 수 있대요. 일본 아줌마들이 배용준 식당에 와서 한식 한 번 먹으려고 그렇게 1년 예약이 밀려있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잘 모르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알기 시작했고, 한국에 와서 여행을 하고 싶어 하고, ‘made in Korea’ 제품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2, 3년 전에 일본 갔더니 어느 가이드가 “한국의 정치외교가가 못하는 일을 배용준이가 해 낸 게 큰 게 하나가 있다.”, “그게 뭐냐?” 20, 30대들은 요즘 그런 호칭을 안 씁니다만, 저처럼 50대만 되어도 일본 사람들보고 ‘왜놈, 쪽발이’ 이렇게 비하해서 많이 불렀습니다. 일본 사람들 역시 한국 사람들을 비하해서 ‘조센징’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습니다. 그 가이드 얘기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한국 사람들을 조센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러냐. 감히 욘사마의 나라 사람을 어떻게 조센징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배용준이가 욘사마로 격상되면서 한국 사람들도 같이 격상된, 결국은 문화의 힘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중국에서 최근에 동방신기가 부른 우리 한국가요가 중국의 CCTV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요 톱10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중국의 10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북경가요 톱10에서 동방신기가, 그것도 중국어로 부른 노래가 아닌 한국어로 부른 노래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큽니다. 그 감수성 예민한 중국의 10대들이 동방신기의 노래 가사를 이해하고 싶어서 한중 사전을 뒤적거립니다. 우리가 어릴 때 팝송 가사 좀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려고 영어사전을 뒤적거려 보듯이. 또, 동방신기 오빠들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싶어서 중국의 10대들이 한글을 배웁니다. 동방신기가 입고 있는 청바지가 입고 싶어서 ‘made in Korea' 청바지를 시장에 가서 찾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시장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다 아실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중국에, 앞으로 더 커질 중국시장에서 한국에 어쩌면 수출 의존도가 제일 높아질 중국에서 그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이 앞으로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중국의 소비주체 세력이 됐을 때, 10대 때 동방신기 때문에 갖게 되었던 코리아에 대한 호감도, 그로 인해서 생겼던 ‘made in Korea'에 대한 호감도는 어쩌면 한국수출에 엄청난 영향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문화는, 동방신기의 노래 한 곡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가 중요하고, 국가 브랜드가 중요하고, 국가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브랜드를 뭐로 만드느냐! 그것은 좀 더 많은 전문가들의 BrainStorming이 필요하고, 이미지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선택과 집중, 그리고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주 같은 나라를 보면, 호주가 우리보다 문화가 뛰어납니까? 역사가 깊습니까? 그런데 호주는 딱, 두 가지 이미지로 국가홍보에 성공한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호주 기업이든, 정부든 외국인들에게 호주를 알리는 모든 비주얼에. 포스터가 됐던, CF가 됐던, 책자가 됐던 딱, 두 가지 이미지만 씁니다. 하나는 잘난 시멘트로 지은 조개껍질 모양의 지붕이 있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사진 한 장입니다. 그러나 그 사진 한 장이 ‘호주는 굉장히 문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은 풀밭 위의 캥거루 사진 한 장입니다. 그러나 그 캥거루 사진 한 장이 ‘호주는 굉장히 자연친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딱, 두 개의 이미지로 충분합니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 건물 사진 한 장, 캥거루 사진 한 장. 그러나 그것은 집중적이고, 선택적으로 오랫동안 정부나 기업이 마케팅함으로써 호주는 문화적이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많은 외국인들이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가를 홍보하는 국가홍보처에서 만들어내는 그런 인쇄물을 봐도, 우리나라 국가를 외국에 알리기 위한, 관광을 하기 위한 CF를 봐도 너무 이미지가 많고, 잡다해요. 선택과 집중이 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은 좀 우리가. 여기 공무원 여러분들 대부분이 계시겠지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경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길을 지나가다보면 경기도를 내세우는 여러 가지 포스터나 표어를 봅니다. 이미지의 집중과 선택이 좀 필요하지 않나. 특히, 경기도에도 많은 관광지가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경기도를 찾을 때 경기도하면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집중과 선택된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마케팅,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 얘기가 좀 빗나갔는데, 제가 좀 흥분한 이유는, 제가 난타 팔러 그때 가서 하도 설움을 당했기 때문에. 도대체 한국에서 왔다니까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특히, 문화상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더욱 한국을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한국의 문화상품이 그 동안 제대로 제값을 받고 해외에 팔려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외출장을 가서 결국 아무 데도 못 팔고, 맨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맨손으로 돌아와서 제 나름대로 좌절도 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한 것이, 제가 문화상품을 사고 팔아본 경험도 없고 정보도 없다면, 나보다 문화상품을 많이 사고 팔아본 경험이 있고, 또 세계적으로 정보가 풍부한 복덕방을 찾자. 에이전트를 찾아보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은 회사가 뉴욕에 있는 브로드웨이아시아라는 미국 회사였습니다. 브로드웨이아시아는 사실은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이나 싱가포르. 적어도 뮤지컬이 흥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소득이 2만 불 이상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10만 원 짜리 티켓을 팔 수 있지요. 국민소득이 2만 불 이상 정도 되는 아시아 도시들에 브로드웨이뮤지컬을 팔고 있는 회사가 브로드웨이아시아라는 뉴욕에 있는 미국회사였습니다. 그 회사로 연락을 했어요. “너희가 브로드웨이 작품을 아시아에 파는 것도 좋지만 거꾸로 아시아 작품을 브로드웨이나 유럽에 배급해 볼 생각은 없느냐. 내가 난타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런 작품이다.” 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오기는 왔는데, 아주 간단했습니다. “니 메일 잘 받았다. 우리는 그런 일에 관심 없다.” 이게 제가 첫 번째 받은 메일이었습니다. 오기가 좀 생기더군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연락을 했습니다. “관심이 있고 없고는 일단 난타를 한 번 보고나서 판단하면 어떠냐? 니가 한국에 온다면 내가 비즈니스클래스로 왕복항공료, 한국에 머무는 동안 특급호텔 제공, 2박 3일만 한국에 와서 난타를 보고 얘기를 하자.” 비행기 표 대주고, 호텔 대 주고 그러면 좀 오면 되지, 기분 나쁘게 “그럼, 다음 달에 일본 가는 길에 한번 들리겠다.” 이 대목이 좀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브로드웨이아시아 사장이 98년 여름에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난타를 보고 저한테 긍정적인 답을 줬어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자기 혼자 판단하기는 힘들고 다음 달에 브로드웨이 스텝들이 다 함께 와서 공연을 보고 미팅을 갖자. 긍정적인 것은 좋은데, 다음 달에 여러 명이 온다니까 부담스럽더라고요. 비행기 표 여러 장 보내야지요, 호텔방 여러 개 잡아야지요. 그러나 투자라고 생각하고 다시 그 사람들을 초청을 해서 난타를 보여주고, 미팅을 갖고, 98년 가을에 브로드웨이아시아라는 미국회사가 저희 난타를 전 세계에 배급하겠다는 에이전트로서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물론, 가계약이었습니다. 본 계약으로 가기까지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제시한. 첫째는, 자기들이 “난타를 몇 번씩 서울에 와서 봤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 관객들이 왜 웃는지, 왜 박수를 치는지 자기들은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말하자면 세계적인 보편성이 부족하다. 이태리를 가면 이태리 사람이 보고, 일본을 가면 일본 사람이 보고, 러시아를 가면 러시아 사람이 볼 텐데, 어느 나라 사람이 봐도 똑같이 박수를 치고, 웃음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장면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추천하는 브로드웨이 연출자가 한국에 와서 작품을 같이 수정하자는 거예요. 물론, 100% 동의했습니다. 한국에서 해외를 겨냥해서 만드는 많은 프로젝트를 만들 때 이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미국 사람들의 취향을 알아야 되고, 독일에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독일 사람들의 취향을 알아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이 필요합니다. 난타는 그런 공동 작업을 거쳤습니다. 두 번째 옵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페스티벌에 가서 한 번 공연을 해보자. 거기에서도 좋은 반응이 나오면 자기들이 팔겠다. 그러면서 저희한테 추천한 페스티벌이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공연축제인 에딘버러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그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일단 난타를 가지고 가서 공연 해봐라. 거기는 주로 유럽 사람들이 많이 오고, 미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페스티벌인데 거기에서도 관객들이 한국 관객처럼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때부터 자기들이 해외에 팔아보겠다. 그래서 저희 난타가 첫 공연을 갖게 된 것이 99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이 에딘버러 페스티벌이 1948년 2차대전 직후에 스코틀랜드의 조그마한 도시에서 시작해서 저희가 참여한 99년도가 52회째였습니다. 그런데 이 축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일종의 마켓입니다. 문화상품을 사고파는. 말하자면, 저희가 참여한 99년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여한 공연 작품수가 1,260 작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공연예술제 한다고 그러면 불과 외국에서 10나라, 20나라가 오면 굉장히 많이 오는 것인데, 무려 매회 참가작이 1,000 작품이 넘습니다. 99년도에 1,260개의 작품이 에딘버러에 와서 공연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1,260개 작품보다 더 많은 수의 해외극장 예술감독들, 프로모터들이 와서 공연을 보고, “아, 너희 공연 마음에 든다. 런던의 어느 극장에서 왔는데, 우리 극장에서 내년에 6개월 공연을 하자. 한 달에 100만 불 씩 600만 불이면 되겠느냐?” 이렇게 거래가 이뤄집니다. 문화상품을, 공연을 사고파는 일종의 마켓역할을 한다는 것이 에딘버러 페스티벌이 정말 중요한 페스티벌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브로드웨이 아시아가 저희한테 그 페스티벌을 추천해 줄 때까지 저희는 그런 페스티벌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또, 그 페스티벌이 그렇게 마켓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더더군다나 몰랐습니다. 99년도 우리가 난타를 가지고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간 것이, 그 축제 생기고 52년 만에 한국 연극으로는 첫 번째 참여였습니다. 그 축제가 생기고 52년 동안 이뤄질 동안 한국 연극은 단, 한 번도 그 축제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 세계화, 글로벌, 글로벌 하지만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우리가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이고, 정보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에딘버러 가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축제가 워낙 유명하다보니까 스코틀랜드 정부에서 단, 돈 1불도 보조해 주지 않습니다. 모든 참가 단체들이 자비부담입니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시는 에딘버러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많은 페스티벌, 뭐 방송, 비디오 페스티벌도 열고, 페스티벌로 먹고사는 도시입니다. 1년에 아마 페스티벌로 벌어들이는 돈만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1,260개의 단체가 공연을 하러 몰려들면 공연단체 참여자만 수만 명이고, 또 그것을 보러 오는 수만 명의 유럽 사람들. 호텔 값도 시즌에는 엄청나게 뛰어오르고. 저희가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여하려고 예산을 짜보니까 약, 30만 불이 필요했어요. 3억 정도입니다. 당시로서 저희 프로덕션 입장에서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때 무슨 난타 전용관도 없고, 1년에 난타 뛰엄뛰엄 몇 번해서 배우들, 스텝들 개런티주고, 사무실 집세 내고 그러면 제 월급도 못 가져 갈 때인데, 3억이라는 돈이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협찬이나 기업의 후원을 좀 얻으려고 뛰어다녔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기업들은 IMF 끝 무렵 구조조정 할 때라 공연에 협찬하고, 이런 것이 힘들었습니다. 문화관광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라는 데에 가는데, 여기 가면 난타가 해외시장에 팔릴 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 후원해 달라.” 문광부 직원이 “나라도 어려운데, 거기는 왜 가느냐, 달러 쓰면서. 정부는 그런 데 쓸 예산이 없다.” 사실 자금이 마련이 안 되어서 못 갈 뻔 했습니다. 날짜는 다가오고, 자금은 준비가 안 되고. 저랑 같이 PMC 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만든 공동대표가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라 2억 정도 자기 부모님에게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저는 1억을 준비하려고 뛰어다녔는데, 마침 고등학교 동창 중에 난타를 아주 재미있게 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가서 “내가 이번에 난타를 가지고 에딘버러라는 데를 가는데, 가면은 해외 프로모터들이 와서 작품을 산다는데, 가면 팔릴 것 같으냐?”, “아, 걱정마라. 난타 팔릴 거다.”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러면 1억만 빌려주라. 팔리면 바로 갚을게.” 그 친구가 큰 재벌 아들도 아니고, 현찰 1억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죠, 주변에. 결국 제 친구가 지점장으로 있는 은행에 가서 그 친구 집을 담보로 1억을 빌렸습니다. 저는 그때 전세로 살고 있어서 담보할 게 없었습니다. 제 친구 집을 담보로 1억을 빌렸어요. 그 친구가 자기 집 담보로 1억을 빌려주고 은행 문 나서면서 제 손 꼭 붙잡고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제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저를 쳐다 보길래 ‘너, 가서 꼭 성공해라’ 이 말 할 줄 알았더니, 이 말은 안 하고 “우리 마누라한테 절대로 얘기하면 안 된다.” 그래서 친구 마누라 몰래 집 담보로 1억 빌리고, 그렇게 해서 자금 마련해서 에딘버러를 갔어요. 가서보니까 또, 막상 도착하니까 첩첩산중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말하자면 제가 가지고 간 30만 불은 극장을 빌리는 돈, 조명, 음향기를 사용하는 돈, 저희 배우, 스텝들 왕복 항공료, 거기서 머무는 체류비. 호텔에서 자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허름한 하숙집 하나 빌려서 남자들은 그냥 침낭 가지고 가서 마루에서 자고, 여자들만 방에서 자고. 먹는 것도 한국에서 전자밥솥 가져가서 밥 해 먹고, 배추 사다가 김치 우리가 담궈서. 돈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반찬 먹고, 그게 30만 불인데. 말하자면 마케팅 예산이 전혀 없는 거예요. 돈 많은 미국 단체들은 길거리에 빌보드 광고도 하고, 텔레비전 CF도 하고, 신문광고도 하고. 가서 걱정이 덜컥 됐습니다. 300석짜리 극장, 이 정도 되는 극장을 제가 한 달 동안, 축제기간동안 한 달 30회 공연계약으로 극장 스케줄을 잡아놨는데, 과연 이 관객을 어떻게 끌어 들일 것인가. 1,260개나 되는 경쟁작들 속에서 과연 난타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어필시키고, 해외의 바이어들이 관심을 갖게 할 것인가, 이게 또, 막막하더군요. 제가 70년도에 처음, 76년도에 신촌에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20대 초반에 공연제작을 시작할 때 그때도 돈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때 유일하게 홍보광고 마케팅 할 수 있는 게 그저 포스터 많이 붙이는 거였습니다. 20대 한창 젊었을 때였으니까 밤 세워서 연극 연습하고, 새벽 4시에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동 트기 전에 포스트 한 손에 말아들고, 한 손에는 풀통 들고. 배우, 스텝 할 것 없이 한 팀은 명동으로, 한 팀은 종로로, 한 팀은 신촌으로 가서 열심히 포스터 많이 붙이면 그게 유일하게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홍보 광고였습니다. 자금은 없고, 어떻게든 작품을 알려야 되니까. 저희가 에딘버러 시내 전체를 난타 포스터로 아주 도배를 해 버렸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그 해에 에딘버러에 온 관광객들이 ‘아, 올 해 에딘버러에서는 난타밖에 안 하나 보다’ 착각할 정도로 시내 벽이라는 벽, 공간이라는 공간은 난타 포스터로 도배를 했습니다. 다행히 축제를 2, 3일 앞두고 저희가 좋은 기회를 하나 얻었습니다. 축제 위원회로부터 유럽에서 온 기자들을 앞에 놓고 난타를 5분정도 간단하게 시연회를 할 수 있게끔, 저희한테는 언론에 노출할 수 있는 아주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이런 극장에 기자들이 가득 앉아있고, 이태리팀, 유럽팀이 한 토막씩 하고, 저희 난타팀 순서가 되자 이런 무대 위에 도마 네 개 깔아놓고, 오이, 양배추 잔뜩 쌓아놓고. 저희 배우들이 일부러, 옆에서 등장 안 하고 저 뒤에서 꽹과리 대신 냄비를, 그리고 주전자를, 후라이팬을 두들기면서 객석을 뚫고 무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자마자 식칼 두 자루 잡아들고 그냥 두들겨 패니까 졸고 있던 기자들 다 벌떡벌떡 일어나고, 카메라맨들 다 앞으로 딱, 오더니 사진 찍고. 그 다음 날 가디언, 이브닝뉴스, 스코트맨, 런던타임 이런 유럽의 일간지들이 99년 에딘버러 페스티벌 개막을 알리는 특집기사를 실으면서 난타 사진을 대부분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그런 덕분에 난타는 첫날, 첫 회부터 극장이 매진이 됐고, 30일 동안 전회 매진되고, 극장 측 요구로 예정에 없던 4회 추가공연을 할 정도로 에딘버러에서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공연을 제가 배우로 출연도 해봤고, 제작도 해봤지만 제가 가장 가슴 떨리면서 봤던 공연이 에딘버러에서의 첫 공연이었습니다. ‘배우가 실수를 하면 어떨까, 관객들이 한국 관객들처럼 웃어야할 장면에서 웃어주고, 박수를 칠 곳에서 박수를 칠까?’ 그러나 예상 외로 더 많은 박수와 더 많은 웃음이 터져 나오고, 공연이 끝날 때 모든 유럽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그렇게 난타는 에딘버러에서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 그 이후로 99년 에딘버러 최고의 히트작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난타는 세계적인 마켓에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에딘버러에서 첫 번째 계약이 이뤄진 것이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월드 테마파크 안에 에콥센터에서의 한 달 공연 계약이 체결 되었습니다. 또 일본의 프로마터라는 회사로부터 도교, 오사카 공연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난타는 지금까지도 해외공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팀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난타가 여섯 팀의 공연팀이 국내에서도 공연을 하고, 해외에서도 공연을 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세계 약 24개국, 약 205개 도시에서 공연을 하고, 대륙으로 치면 아프리카 대륙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도시, 모든 국가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물론 다 공연료를 받고 저희가 수익을 낸 공연입니다.
- 그리고 2000년 7월에 제가 난타 전용극장을 서울에 처음 만들었습니다. 제가 난타 전용극장 만들 때도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어요. “그게 되겠느냐?” 우리나라 공연하면 대게 한, 두 달하면 프로그램이 바뀌는데, 1년 365일 난타만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 하냐. 저는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뉴욕에 가면 10년 이상 롱런한 공연들이 많습니다. 제가 유심히 보니까 그렇게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70% 이상이 관광객이기 때문입니다. 런던의 세인트마틴이라는 극장에서 아가사크리스트의 ‘쥐덫’이라는 연극이 올해로 52년째 공연되고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관광객들이 그 공연을 찾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난타 전용극장을 만들 때 마케팅 타켓은 관광객이었습니다. 한국에도 1년에 600만 명의 외국인이 들어옵니다. 안타깝게도 600만 명의 외국인이 저녁때 뭔가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 라고 하면 보여줄 만한 것이 그동안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타전용극장을 만들 때 마케팅 타켓을 관광객으로 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국내여행사 사장들을 초청해서 난타를 보여주고. 그 중에 300만 명이 관광객이고, 그 중에 또 150만 명에서 200만 명이 일본 사람입니다. 난타 마케팅팀을 데리고 제가 일본에 직접 가서 도쿄, 오사카, 나고야 큰 도시들을 쫓아다니면서 일본 여행사 사장들을 일일이 만나고, 난타를 일본어로 만든 팜플렛을 전달하고, 난타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찍은 비디오를 보여 주고. 도쿄처럼 큰 도시에서는 호텔컨벤션을 빌려서 난타팀이 가서 직접 하이라이트 공연을 하고, 동경 시내에 있는 일본여행사 사장들을 다 모아놓고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난타 전용관을 처음 만들 때 저희 전용관에 외국인 점유율은 5%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전용관 만들고 2년이 채 안 되어서 제 전용관에 외국인 점유율은 80%를 넘어섰습니다. 그 점유율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용극장이 정동에 있고, 압구정동에 있고 두 군데 있습니다만 1년에 약 30만 명의 외국인들이 보고 갑니다. 지금도 객석의 80%를 외국인이 채우고 있고, 이번 달 4월 18일에는 제주도에도 난타 전용극장을 오픈해서 서울과 제주도에서 전용극장을 운영할 것입니다.
- 문화산업에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고 제가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이유는, 문화산업은 ‘One Source Multi Use’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라이온킹이 처음에 디즈니에서는 애니메이션, 만화영화로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어서 지금도 돈을 벌고 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뮤지컬에 출연한 캐릭터들을 가지고 캐릭터 상품을 만들어서 전 세계 시장에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소스를 활용해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또, 저는 우리나라에서 문화산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제 제조업은 중국에 밀려서 우리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건비가 굉장히 비싸지요. 제가 알기로는 선진 국가들도 그렇게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제조업에서 문화산업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새로운 고용인구가 생기고, 실업률이 줄어들었습니다. 어쩌면 제조업은 기술력이 발달하면 기계 하나가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을 해내면서 실업이 증가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산업은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사업입니다. 테마파크가 하나 생기면 엄청난 고용효과가 생깁니다. 저희 PMC프로덕션도 처음 96년에 회사를 만들 때 제가 다섯 명의 직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 저희가 4대 보험의 혜택을 주고 퇴직금을 주는, 일반기업과 똑같이 보험혜택을 주는 직원만 83명으로 늘어났고, 저희와 계약을 해서 일을 하고 있는 배우, 스텝만 120명입니다. 다섯 명으로 출발한 회사가 200명의 직원이 됐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고용효과가 문화산업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또, 문화산업이 중요한 이유는, 아직은 문화산업이 파이가 작을지 모르지만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한류가 아시아 시장에서 했던 것처럼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도에도 할리우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화산업을 구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가능을 헤쳐 나가는, 그리고 시야를 넓게 보시고 여러 행정에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창의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나라에 비처럼 노래 잘 부르는 젊은이 수십 만 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만 명. 보아처럼 예쁘고, 노래 잘 부르는 그런 여자들 20대에 수백 명, 수천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아를 세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이수만 같은 프로듀서가 몇 사람 없는 것이고, 비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 수 있는 박진영 같은 프로듀서가 몇 명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제 문화는 그저 예술인들의, 문화인들의 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문화를 가지고 상품으로 만들고, 기업화하고, 나가서는 국가산업으로 육성하고, 그렇게 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한국 수출의 인프라 역할을 하고, 문화이미지와 국가브랜드를 높이고, 이제는 공무원 여러분들이 앞서서 도와주실 때입니다. 사실 저희처럼 예술을 하거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행정을 잘 모릅니다. 그냥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가면 뭐 때문에 안 되고, 뭐 때문에 안 되고, 무슨 규제가 있고. 아이디어가 행정에 막히고, 규제에 막혀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는 예술가보다 창작가들보다 더 아이디어를 갖고, 그분들의 아이디어가 법에 문제가 된다면, 규제에 문제가 된다면 그런 것을 헤쳐 나가서 실현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이제 이수만이나 박진영 같은 프로듀서의 역할을 해주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경기도에 계신 분들이 문화산업에서만큼은 이수만이나
박진영이나, 혹은 저 같은 프로듀서의 마인드를 가지고 아이디어가 산업이 되고, 돈을 벌 수 있고,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그런 프로듀서의 마인드를 가진 경기도 공무원 여러분들이 돼 주시기를 바라면서 제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