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라 마르세예즈’, ‘라 카르마뇰’>
‘라 마르세례즈’와 ‘라 카르마뇰’은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노래들이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외적에 맞서는 혁명군가였으며, 지금도 프랑스 국가로 불려지고 있다. ‘라 카르마뇰(La Carmagnole)’은 프랑스 군주에 대한 프랑스 민중들(상 퀼로트)의 승리를 노래하는 축제와 같은 노래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등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보통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 시민혁명이 영국에 국한된 것이며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켰다면 프랑스 혁명은 전 유럽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제까지 나아간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제3신분(세 번 째 신분으로서의 평민,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은 성직자와 귀족을 넘어서 국민이 되었으며, 상 퀼로트(sans-culottes: 반바지 스타킹의 상류층 복장과 다른 일상의 긴바지를 착용한 사람들)라고 불리는 파리의 민중들은 군주제를 폐지시키고 스스로 국민군을 조직하였다.
1. 역사적 배경
프랑스 혁명은 재정 적자 해결을 위한 삼부회 소집으로 시작되었으나 혁명의 마그마는 구체제 지각 아래 끓고 있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 귀족계급, 프랑스 교회는 국가의 위기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국왕 루이 16세 Louis XVI는 가톨릭 신앙에 독실하고, 공작을 좋아하는 소박한 사람이었지만, 왕으로서의 경륜은 전혀 없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는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서 세상을 자신의 소꿉장난 무대로밖에 인식하지 못하였던 천진난만한 여인이었다. 무지한 왕, 철없는 왕비가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 혁명의 해일은 프랑스 군주제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프랑스 귀족들도 실력과 권위에서 모두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왕국의 대부분의 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봉건적 과세를 강요하면서 국가 재정부담의 개혁은 거부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은 더 이상 무능한 귀족계급의 특권을 용납하기 어려웠고, 퇴락한 일부 귀족도 체제의 전복을 희망하였다.
가톨릭 교회도 더 이상 구원의 방주가 되지 못하였다. 고위 성직자들은 그 신분에서 귀족계급과 동일한 것이었다. 주교 수도원장 성당 참사회는 그 자체 봉건 영주였다. 교회는 국가에 직접세를 납부하지 않았으며 농민들에게 1/10세를 거두었다. 현장의 교구 사제들과 수도사 수녀들이 정진하고 희생하였지만, 교회는 타락하였고, 수도원은 줄어들었으며, 세상의 도덕은 문란해졌다.
1789년 삼부회에서 제3신분 시민계급이 독자적인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주권을 선언하였다. 하급 성직자들 일부 귀족들이 합세하였다. 루이 16세는 혁명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절대군주제는 입헌군주제로 이행하였다. 이어서 국민의회는 역사적인 인권선언을 선포하고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종식시켰다. 나아가 교회 및 수도원의 토지를 국유화하고 성직자 신분을 변화시키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에게 ‘국민과 법과 국왕’에게 충성할 것을 선서케 하였다. 이제 프랑스의 교회는 교황의 교회가 아니라 프랑스 국가의 공무원이 될 참이었다.
시민들은 새 세상에 대한 열망에 고취되었다. 상 퀼로트라고 하는 도시 서민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울분을 삭이며 특권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성직자 기본법은 교회를 충성선서파와 선서거부파로 분열시켰다. 교황은 프랑스 혁명을 죄로 선언하였다. 독실한 루이 16세는 혁명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망명을 시도하다 잡혔다. 왕과 왕비가 민중들에 포위되어 파리로 호송되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군주에서 프랑스의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군주제의 장송행렬’이라고 부른다.
주변 군주제 국가들이 나섰다. 프랑스 왕실의 운명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한 것이다. 더욱이 오스트리아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황제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였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전쟁을 선언하였다. 진심은 패배를 희망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왕의 군대는 무기력했다. 장교들의 망명이 잇달았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프랑스 동부 접경 스트라스부르의 수비대 ‘라인 군대’에서 출정가가 만들어졌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 Marseille 의용군들이 파리로 행군하면서 그 노래를 불렀다.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라’는 노랫소리가 전국으로 그리고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이렇게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프랑스 혁명의 행진곡이 되었고, 지금까지 프랑스 국가로 불려지고 있다.
프랑스 인민들의 전의는 고조되었다. 파리의 상 퀼로트들은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것을 요구하고 선서거부 성직자들을 유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상 퀼로트들은 궁전으로 난입하여 스위스 용병 근위대를 제압하였다. 소위 1792년 ‘8월 10일 봉기’이다. 프랑스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왕권이 정지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로운 의회 소집이 결의되었다.
국왕의 거부권은 혁명 초기 입헌군주제에서 왕에게 남겨진 최후의 대권이었다.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지키고자 했고, 결국 군주제를 잃었다. 루이 16세는 군주로서의 최후의 권한을 행사고 이제 일개 시민으로 바뀌었다. ‘라 카르마뇰’ 노래에는 왕과 왕비를 ‘미스터 거부권(Monsieur Veto)’, “마담 거부권(Madame Veto)이라고 조롱하는 대사가 나온다.
새로 소집된 의회인 국민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며 마침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일치단결 하여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였으며(‘대불동맹’), 프랑스 국내에서도 대규모 반혁명 내란이 발발하였다. 특히 선서 거부 성직자 중심의 가톨릭의 저항이 거셌다. 이들은 루이 16세의 죽음을 ‘순교’로 인식하였다.
국민공회는 외환과 내란의 위기 속에서 혁명 비상정부를 수립하였다.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와 공안위원회는 내란을 제압하고 영국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국민들 1/3의 반대 그리고 전 유럽의 침략에 맞서 혁명을 성공시켰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김영사 제1판 3쇄, 2016, 475쪽).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수호자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한 공포정치였다. 혁명의 이상과 엄숙함은 무시무시한 국가 폭력이 되었다. 당시에는 ‘밀고가 시민의 의무이고 단두대는 미덕의 제단’이었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 사, 앞의 책, 472쪽). 처음에는 혁명을 위해 죽였으나, 다음에는 죽이는 것이 혁명이 되었다.
2. 노래에 대한 설명
(1)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탈출에 실패하고 시민군에 잡혀 오면서 프랑스 혁명은 전 유럽의 위기로 비화한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루이 16세 보호를 위한 군사행동’을 선언하였다(이른바 ‘필니츠 선언 Declaration of Pillnitz’). 프랑스에서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주전파들이 여론을 주도했다. 의회는 전쟁을 통해 혁명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왕은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 정부가 패할 것을 기대하였다.
마침내 전쟁이 선언되었다. 프랑스 동부 접경 스트라스부르의 시장 디트리히 남작 baron Philippe-Frédéric de Dietrich은 프랑스 혁명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사람이었다(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정상원 역, 초판 2쇄, 이화 북스, 2021, 142쪽). 그는 라인 강을 위한 혁명 부대인 ‘라인 부대’의 출정가를 생각했다. 마침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 대위가 작곡의 경험이 있었다. 루제는 하룻밤 사이 출정가를 지었다. 원래의 제목은 ‘라인 부대 군가 Chant de guerre pour l'armée du Rhin’였다.
노래는 여기저기 조금씩 불려졌고, 마르세이유 의용군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 Marseille에서 의용군들이 수백명이 파리로 행군하면서 그 노래를 불렀다. 수천 수만의 파리 시민들이 그 노래에 환호하였다. 그리고 노래 제목도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되었다. ‘행진 행진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라’는 노래는 프랑스 혁명의 행진곡이 되었다. 프랑스 전역에 그리고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지금까지 프랑스 국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 노래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으로서 프랑스 혁명이 관련된 음악에 활용되었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1812 Overture)’에도 사용되었으며, 슈만의 가곡 ‘두명의 척탄병(Die Beide Grenadier)’에도 사용되었다. 모두 프랑스 혁명 전파의 주역이었던 나폴레옹에 대한 음악들이다. 1942년의 유명한 영화 ‘카사블랑카 Casablanca’에서도 독일 점령군에 맞서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노래로 삽입되어 있다.
노래의 창시자들은 불행하게도 프랑스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공포정치에 희생된다. 노래를 위촉한 스트라스부르 시장 디트리히 남작은 공화제 혁명인 8월 10일의 민중봉기에 반대하여 망명하였다가 송환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루제도 혁명정부를 비판한 죄로 수감되어 처형될 위험에 처했으나 로베스피에르가 실각되고 공포정치가 끝나면서 풀려나게 된다(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앞의 책, 157쪽).
아래 라 마르세예즈가 최근 프랑스 혁명 기념일(‘바스티유 데이’)가 불려지는 영상 그리고 노래의 전체 가사를 올린다.
*참고로 이전에 여기 게시판에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대한 글을 올린 것도 있습니다. 노래 관련 다른 영상들도 볼 수 있습니다.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epistle/IfQN/102?svc=cafeapi
https://youtu.be/T2BhWcSBJtI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작곡 작사 : 루제 드 릴르 Claude Joseph Rouget de Lisle, 번역 : 정태욱
(2) ‘라 카르마뇰(La Carmagnole)’
이 노래는 프랑스 혁명의 제2단계로 불리는 1792년 ‘8월 10일의 봉기’ 성공 이후 프랑스 민중들 사이에 널리 불린 축제의 민요와 같은 노래이다. 국왕과 왕비에 대한 비난과 혁명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노래의 작자는 미상이며 제목은 당시 전투적인 상 퀼로트들이 입던 짧은 상의를 가리킨다고 한다(영어 위키 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Carmagnole).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탈출의 실패와 군주제의 위기 그리고 유럽 군주제 국가들의 위협 속에 프랑스 혁명은 더욱 격렬해졌다. 군주에 대한 배신감이 군주에 대한 신뢰를 추월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의 민족적 애국심으로 가열되었다.
전쟁이 선언되고 기존에 구성된 프랑스 군은 유럽 연합군에 패퇴하게 되었다. 프랑스 인민들 그리고 의회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상 퀼로트로 대변되는 프랑스 민중들은 새로운 프랑스 국민군 소집을 주장하였다. 그 전까지 재산과 소득의 차이에 따라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차별이 있었다. 수동적 시민들은 자유권 등 기본 권리는 인정하되 정치참여와 군대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수동적 시민들, 상 퀼로트가 국민주권의 주체가 된 것이다. 상 퀼로트들은 혁명을 밀고나가고자 했다. 국내 혁명 반대 근거세력인 선서거부 가톨릭 성직자들의 유배를 주장하였다.
파리의 상 퀼로트들은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던 튀일리 궁 Palais des Tuileries으로 몰려가 국왕과 의회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완강하였다. 국왕의 최후의 특권인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가톨릭 신앙에 독실하였던 국왕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상 퀼로트들은 독자적인 조직을 구성하여 튀일리 궁을 공격하였다(이른바 ‘봉기 코뮌 la commune insurrectionelle’). 마르세이유 출신 의용군들이 제일 먼저 진입하였다.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근위대와 충돌하였다. 루이 16세는 근위대의 발포를 중단시켰고, 파리의 봉기는 승리하였다(알베르 소부울, 프랑스 대혁명사 <상>, 최갑수 역, 두레, 1984, 243-244쪽).
이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옥 탑에 갇혔고, 결국 처형당한다. 이로써 프랑스 군주제는 사실상 끝이 나고, 프랑스 공화국의 역사가 첫 걸음을 떼었다.
아래 라 카르마뇰 노래 영상과 가사를 올린다.
https://youtu.be/u-tqxx2VrpI
라 카르마뇰 "La Carmagnole“
작자 미상, 번역 정태욱
3. 이후의 전개 과정
로베스피에르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진군시켰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는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국민공회 의원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혁명의 신성함으로 무장한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그의 젊은 동료 생 쥐스트(Saint Just)는 혁명 진영에게도 가차 없었다. 비기독교화를 선도하였던 에베르 Jacques Hébert 등 ‘격앙파’를 숙청한 데 이어, 혁명을 온건하게 마무리하고자 했던 당통 Georges Danton 등 ‘관용파’도 처형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토대는 점점 줄어들었다. 상 퀼로트들은 흩어졌다. 다수의 국민공회 의원들이 결합하였다. 마침내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등 혁명 지도부를 제거하였다(이른바 ‘테르미도르의 반동 Thermidorian Reaction’).
테르미도르파는 새롭게 온건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제거되고 상 퀼로트가 무력화되면서 혁명의 열정도 잦아들었다. 혁명 지도부는 자중지란과 지리멸렬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왕당파는 다시 재기하였다. 망명귀족들과 반혁명군대를 조직하여 국민공회를 향해 진주하였다. 혁명의 운명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던 순간, 국민공회의 근위대장이었던 26세의 청년이 신속한 대응으로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나폴레옹이 혁명, 공화국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혁명의 전면에 서게 되면서, 이제 프랑스 혁명, 즉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 특권신분의 철폐라는 목표는 나폴레옹의 군사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통치 기간에 ‘만민평등’ 등 공화국의 기본 원리들은 상당 부분 안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폴레옹의 전쟁과 권위주의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