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내 몸에 녹색 피가 흐른다 | |
[걷고 싶은 숲길] 장성 축령산 편백·삼나무숲 피톤치드 '목욕', 스트레스 우울증 아토피도 싹~ 도시락·도서·돗자리 ‘3D’ 챙겨 ‘그림 속의 한 점’ | |
이병학 기자 | |
탐방객들은 이 숲에 들어와 피톤치드 목욕을 하고 나간다. 거닐고 뒹굴면서 숲을 보는 한편, 나무도 본다. 깊은 숨 쉬며 숲을 배우고 나무를 익힌다. 입장료도 없고 안내소도 없다. 숲 안엔 통나무집도 민가도 없다. 있는 것은 숲길과 팻말이다. 그리고 탐방객들이 말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숲 해설가다.
‘조림왕’ 임종국 선생이 21년 걸쳐 일군 국내 최고 생태숲
나무 심기엔 주변 마을 주민들도 힘을 보탰다. 문암리 금곡마을의 김정대(74) 할머니가 말했다. "나가 시악시 때부터 심갔어. 날마둥 산질(산길)로 걸어 올라가 심갔제. 그땐 질도 쫍아서 요만뿐이 안혔어. 남자들은 인자 괭이루 구뎅이 파고 여자들은 심구고 요로코롬 발로 볼바(밟아)줬제."
가물 때면 임 선생과 그의 가족, 그리고 주민들이 달려들어 물지게를 지고 물을 퍼 날라 나무를 살려냈다고 한다. 그의 성공적 조림은 전국에 파급 효과를 일으키며 나무 심기의 중요성과 숲의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숲과 산은 타인 명의로 넘어갔고, 벌목 계획 등으로 황폐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가 2002년 정부에서 258㏊(편백나무 153㏊, 삼나무 37㏊, 낙엽송 50㏊ 등)를 사들여 국유림으로 관리하고 있다.
선견지명을 가진 한 사람의 열정이 국내 최고의 조림 생태숲을 후손에 안겨줬다. 쌍쌍이 거닐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숲길이자,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만지고 냄새 맡고 재잘대면 그대로 자연 공부 교실이 되는 숲이다. 나무에 기대앉아 생각하고 책 읽고 조는 동안 스트레스·우울증·아토피가 완화되고 치유되는 자연 치료시설이기도 하다.
피톤치드는 나무가 자기방어를 위해 내뿜는 물질로 강한 살균력을 지녔다. 사람의 심폐기능을 좋게 하고 아토피 등 피부질환이나 스트레스 해소에도 효과도 있다고 한다. 소나무·편백나무·삼나무·주목·구상나무 등이 피톤치드를 많이 내뿜는 수종으로 꼽힌다.
산림청 소속 축령산 숲 해설가 류광수(40)씨가 말했다. "피톤치드는 해뜰 무렵과 낮 10~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발산됩니다. 새와 곤충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비슷하죠." 이 숲에는 류씨와 김현태(60)씨 등 2명의 숲 해설가와 한 명의 등산 안내인이 상주하며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숲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광주에서 왔다는 50대 부부는 "이 좋은 숲을 옆 동네에 두고 다른 지역 산길을 돌아다녔다"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멋진 곳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아토피 때문에 일부러 휴가를 내 이곳을 찾았다는 김아무개(30·용인)씨도 말했다. "사흘째 숲 안에서 책을 읽으며 지내고 있는데 증상이 많이 완화됐어요. 잠도 잘 오고 정말 편안해졌습니다. 자연 치유의 위력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이 숲에선 해충 제거를 위한 약치기 등 방제작업은 일체 하지 않는다. 숲 해설가 김현태씨가 말했다. "숲에 손대는 일이라곤 간벌작업과 가지치기 말고는 없습니다."
한두 시간이면 완상…능선 타고 정상 등반도 가능
숲 안에는 널찍한 임도가 곳곳으로 뻗어 있다. 큰 길을 버리고 어두컴컴한 오솔길로 들면 더욱 진한 숲 향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한두 시간이면 완만한 산길을 따라 걸으며 숲을 어느 정도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탐방객들은 숲속에 돗자리를 펴고 앉거나 누워 오랫동안 숲을 즐긴다.
류광수씨가 산불감시초소 부근 길 옆에 마련된 '샘터'에서 골짜기 물을 바가지로 받아 마시며 말했다. "숲에 오실 때는 '3D'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도시락·도서·돗자리 말입니다."
안타까운 건 이 숲길로 차량이 제한 없이 드나든다는 점이다. 숲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는 동안 "이 아름다운 숲길로 차를 몰아도 되나" 하는 마음이 절로 인다. 그러나 산 밑 마을 어디에도 숲 탐방객을 위한 주차장은 없다. 차를 댈 만한 자리를 찾았을 땐 이미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뒤다.
류광수씨가 말했다. "문암리와 모정리, 추암리 등 세 곳의 숲길 들머리에 각각 주차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흙길에 자갈을 까는 것도 줄이고 걷기만 하는 산길을 유지하는 게 상책이죠."
이 멋진 숲을 만끽한 뒤 탐방객들은 임종국이라는 인물을 다시 한번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숲 한가운데 임종국이 숲을 가꾸며 머물던 움막 터와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숲 안에는 그의 공적비와 수목장 느티나무도 있다. 87년 타계 뒤 순천 선영에 묻혔다가 2005년 축령산 숲 헬기장 옆에 13년생 느티나무를 심고 수목장을 지냈다.
임종국 선생 국가유공자 지정 청원에 앞장서고 있는 전 장성군청 공무원 변동해(54)씨가 말했다.
"3만명 서명을 받아서 재작년말 유공자 청원을 했는디 여태 소식이 없어부러야. 우리나라에 사회발전 부문 유공자가 한낫도 없다는 건 말하자면 국민적 수치랑게. 임 선생이야말로 그 적임자 아니것소잉." 변씨는 7년전 축령산 자락에, 누구나 와서 묵으며 쉬다 갈 수 있는 산장 '세심원'을 열어 유명해진 인물이다. 2년 전엔 금곡마을에 아담한 미술관도 열었다.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무대 된 영화마을도 볼 만
숲길을 즐긴 뒤 문암리의 금곡마을을 찾아볼 만하다.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만남의 광장' 등 영화와 드라마를 찍은 마을이다. 초가집과 마을길, 다락논 등이 60년대 옛 마을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마을로 유명해지면서 방문객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방문객들의 발길이 늘어나니, 푸근하고 고즈넉한 옛 마을을 떠올리고 찾아온 이들에겐 실망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포장된 골목길과 일부 번듯하게 치장된 초가집, 곳곳에 붙은 촬영지 안내 간판 따위들이 급조된 촬영지같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마을도 우리나라 여느 농촌마을처럼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아 사는 평범한 마을이다. 20여 가구가 주로 논농사를 지으며 산다.
영화마을이라는 간판과 유명세를 걷어내면 이 마을이 간직한 아픔도 드러난다. 이 마을 풍경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마을 첫 초가집에 홀로 사시는 김정숙(80)씨가 말했다.
"전쟁 때지. 죄 없는 이 동네 젊은 사람을 스물 다섯명이나 끌구가서 구뎅이 파고 쥑여 묻어부렀어. 착헌 사람들을 말여. 우리 시째(셋째) 시아주바니두 그때 당해부렀당게. 우리 영감은 그때 쩌그 딴디 나가 있어갖고 모면했지라. 국방군들이 그 지랄덜 혀부렀어. 산사람들과 연락했다고. 산사람들은 우덜헌티 해꼬지 한나 안했어야. 그란디 고것들이 동지 전날에 총 들구와 불 싸질르구 끌구가디만 사흘 만에 그리 되아부렀당게. 고것들이 그 지랄을 혔어."
김정숙씨는 3년여 전까지도 이 집에서 고 윤묘순(당시 94) 할머니와 사이좋게 살았었다. '한 남자를 받들어 일생을 바친 두 아내'들이다(<한겨레> 2002년 4월25일치 보도). 둘째 부인 김씨는 첫째인 윤씨를 보내고 지금은 윗집에서 역시 홀로 사는 동서 김정대(74)씨와 오가며 서로 기대어 산다. 가려운 곳 긁어주고 아픈 곳 감싸주며 산다.
마을엔 연자방아도 있고 디딜방아도 있다. 마을 들머리에 우거진 예닐곱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도 마을을 돋보이게 한다.
장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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