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부는 군사 쿠데타로 침체된 경제 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부는 1962년 6월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합니다..
1) 화폐 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10환=1원으로 1/10의 명목 절하
2) 유통 화폐의 은행등 금융기관의 환화 표시 금전 채무의 거래를 금지. 단 국가,지방자치단체,금융기관,주요 관리기업체 등은 원화 표시 화폐로 지급
3)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구권과 6월10일 이전에 발행된 수표. 어음 또는 우편환 증서 등은 금융기관에 신고하고, 6월17일까지 신고하지 않은 청구권은 무효
쿠데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재무장관 천병규를 비롯한 5명의 화폐 개혁 준비반은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 기밀 누설시 총살형도 감수한다 "는 선서를 했을 정도입니다..
화폐 개혁에 사용할 돈은 영국 드라뤼 회사에서 제조됐는데, 영국제 새 화폐는 화폐 개혁이 있기 44일 전 부산항에 도착, 폭발물로 보안 처리된 상태에서 보관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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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앞에서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밤새 줄 서 있는 시민들.
전혀 예상치 못한 박정희 군부의 화폐 개혁은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생활비에 한해 6월17일까지 10대1의 비율에 따라서 가구당 한 사람에게 5백원 한도로 새은행권을 바꿔준다고 했지만..
9일밤 저녁 10시에 발표된 화폐 개혁은 10일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노려 통제를 됐지만, 사회적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 날은 통금 시간까지 앞당겨져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 기사가 구권은 이제 소용없다면서 승차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포목상과 쌀집은 늦은 밤에도 현금을 들고 와 치마 저고릿감을 사거나, 쌀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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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에 발표된 화폐개혁으로 귀가하는 시민들은 버스와 택시로부터 승차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화폐 개혁이 단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돈이 없는 서민들은 술에 취해 '알게 뭐냐'고 외치기도 했으며, 지방에 있는 가족에게 화폐 개혁을 알리고 빨리 신고하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 많아 전화 교환양은 '눈코 뜰 사이가 없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군부가 급작스럽게 시작한 화폐 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냥 밀고 나가면 할 수 있다는 군사 문화의 전형적인 정책과정을 보여줬습니다..
박정희 군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 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 화폐 개혁 '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막상 화폐 개혁이 시행되자 이런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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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통화 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습니다..
6월 9일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 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원만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습니다..
즉, 박정희는 화폐 개혁만 하면 이런 지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 화폐 개혁 '을 실시했지만,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 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박정희의 화폐 개혁은 1961년 최고회의 재경위원이었던 유원식이 박정희에게 제안하여 시작됐는데,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심지어 한국은행 총재와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장이었던 김동하조차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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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환을 1원으로 화폐개혁을 했던 1962년 6월10일자 경향신문. 한국은행 앞에 총을 든 군인 사진이 보인다.
미국은 박정희의 '무계획'적이고 비전문가적인 ' 화폐 개혁 '에 불같이 화를 냈고, 화폐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봉쇄한 예금 계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아예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을 했습니다..
화폐 개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경제 혼란과 함께 산업계의 자금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해 오히려 경제 침체만 더 가중됐습니다..
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던 박정희 군부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예금 봉쇄를 해제함으로, 처음 계획했던 퇴장 자금을 끌어내 군사 정부의 재정 적자를 막겠다는 박정희식 ' 화폐 개혁 '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