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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노화가 오기마련이다. 노화는 질병처럼 나쁜 걸까? 노화는 자연현상이지 질병이 아니다. 20세기 이후 인간의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40세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필칭 100세 시대다. 그만큼 노년이 길어진 게다. 인간의 생애주기를 크게 3단계로 묶는다면, 1단계는 출생에서 30세까지로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교육받는 시기다. 2단계는 30에서 60 혹은 65세까지로 직업생활을 위주로 일하는 시기다. 3단계는 65세 이후로 은퇴 후에 맞는 노년의 삶이다. 아마 앞으로 노년기가 약 30년 정도로 늘어날 게다. 대충 생애의 3분의 1이 노년기에 해당된다. 해서 길어진 노년을 어떻게 하면 품위 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느냐가 긴요한 화두다.
하버드대 인생성장보고서인 『행복의 조건』(2010, 조지 베일런트, 이덕남 옮김)은 70여년을 종단적으로 추적한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2022년 현재까지 무려 55쇄나 출판되었음). 총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이 연구가 착수되었다. <애틀랜틱 먼슬리> 심리학 특집기사에서 죠슈아 셍크는 “하지만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꿰어 맞추기에 인생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불가사의했으며, 난해하고 모순투성이였다. 진짜 삶에 접근하려면 예리한 과학의 칼날을 ‘이야기’의 힘으로 둥글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네 삶은 과학적 설명 이상의 하나의 독특한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베일런트(G. E. Vaillant)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주로 사용한 분석도구는 고통이나 갈등, 불확실성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기제’였다. 그는 전기 작가처럼 폭넓은 시각으로 한 인간의 총체적 삶을 이해하려 했고, 인류학자나 자연주의자처럼 한 시대를 포착하려 했다. 그는 연구 참여자들의 삶에 대해 “과학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진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애잔하고, 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구불멸의 존재”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성인발달연구로부터 찾아낸 주요 성과들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 우리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이 결코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관계 회복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진다.
• 50세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80세에도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다.
• 알코올 중독은 분명 실패한 노년으로 이어진다.
• 은퇴하고 나서도 즐겁고 창조적인 삶을 누린다면, 수입을 늘리는 것보다 한층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 객관적으로 신체건강이 양호한 것보다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하다.
• 긍정적 노화는 사랑하고 일하며,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면서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는 것이다.
• 노년에도 계속해서 인간이 성장해 간다는 사고방식의 혁명적 전환이 가능하다.
노년의 발달과업은 다음 세대에게 과거의 전통을 물려주는 ‘의미의 수호자’(keeper of the meaning)가 되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발달과업으로 ‘통합’(integrity)이라는 과업을 완성함으로써 개인의 삶은 물론 세상의 평온함과 조화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에릭슨은 “세상의 이치와 영적 통찰에 도달하는 경험”이 바로 ‘통합’이라 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며, 한 번 태어나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통합’의 미덕은 바로 ‘지혜’다. 에릭슨은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지혜는 남아 있다. 노년은 지혜를 통해 통합을 꾸준히 경험하고 배우고 성취해 갈 수 있다.”고 했다. ‘통합’은 인생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업이다.
노년에 잘 사는 것은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잘 늙는 것’이다. 미국 노년학회는 “인생에 세월을 보태지 말고, 세월에 인생을 보태라!”고 했다. 저자는 60에서 80대(아마 지금은 90대까지도 포함해야 할 터이다) 사이에 행복하고 건강한지, 불행하고 병약한지를 뚜렷이 구분하기 위해 노년의 건강상태를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신체 질환 유무에 따라: 1등급은 심각한 병을 앓지 않는 경우, 2등급은 병을 앓고 있으나 수명단축이나 신체장애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 3등급은 치유가 불가능하고 생명에 위협이 되는 만성질환을 잃고 있는 경우, 마지막 4등급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 심각한 신체적 무능 상태인 경우다.
(2) 신체건강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 따라: 신체건강은 다분히 주관적인 성격을 지닌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면서도 건강이 나쁘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고, 반면 쾌활하고 대범한 사람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건강이 양호한 상태라고 믿는다.
(3) 신체적 무능 상태의 지속정도에 따라: 80세에 객관적 건강은 유지하고 있으되, 지난 20년 동안 정원관리나 야간운전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의 건강상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에 대응해 신체적 노화의 정의에 “주관적‧객관적인 신체적 무능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4) 객관적 정신건강에 따라: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상태로는 노년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노화의 네 번째 항목으로 직업적 안정, 정신과의사 이용여부, 진정제 복용, 다른 사람들과의 놀이 등에 걸친 객관적인 정신건강 측정항목을 설정하고 있다.
(5) 사회적 유대관계를 기준으로: 사회적 유대관계는 건강한 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훌륭한 사회적 관계유지에는 아내 혹은 남편, 자녀, 형제와 친척, 놀이 친구, 사교모임, 종교모임, 절친한 친구들과 관계유지 등을 포함한다.
(6)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를 중심으로: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와 행복을 느낀다면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이다. 건강한 노화의 여섯 번째 요소로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는 결혼생활, 수입과 직결된 직업, 자녀와 관계유지, 사교활동, 취미, 봉사활동, 여가와 운동 등을 포함한다.
위의 여섯 갈레에 비추어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의 특성을 요약하면 (1) 80세 이전에 한 번도 객관적‧주관적인 신체의 무능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다. (2) 다른 연구 참여자들과 비교해 볼 때 사회적 유대관계와 정신건강이 상위 4분의 1에 속한다. (3) 삶에 대한 만족도가 상위 3분의 1에 속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장기추적의 연구결과에 의거하여 ‘건강한 노년’을 지칭하는 일곱 가지 요소로 (1) 비흡연 혹은 젊은 시절 금연, (2) 성숙한 방어기제, (3) 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4) 알맞은 체중, (5) 안정적인 결혼생활, (6) 규칙적 운동, (7) 교육받은 연수 등을 들고 있다. 결국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은 뜻밖의 행운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노력하면서 구성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책에는 보람 있는 은퇴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활동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직장 동료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필요하다. 때로는 손자 손녀들과의 관계가 이를 대신할 수도 있다. 둘째는 놀이 활동이다. 놀이를 통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셋째는 자기 나름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내 경우 글쓰기가 여기에 해당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은퇴 뒤에도 평생공부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언필칭 지금은 ‘평생학습’ 시대다.
과연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더 지혜로워지는가? 노화는 신체적으로 노쇠과정이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지혜로워지는 삶의 과정이기도 하다. 와인은 오래 숙성할수록 맛이 깊어진다. 지혜는 “풍부한 경험의 산물이며, 다른 사람과 진정한 소통을 하면서 축적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의견 충돌이 생길 경우 기꺼이 한 발짝 물러서서 기다릴 줄 아는 능력과 여유가 곧 지혜다.
75세에 이른 하버드 출신들에게 노년과 지혜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다른 사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참을성, 감성과 이성의 조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자기인식,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능력, 삶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깊은 이해, 사물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 세상과의 연관성 인식”(이 책, 342쪽) 등을 들었다. 이처럼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 늘어나는 것이다. 지혜는 “잘살고 잘 대처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 든 뒤에 좀 더 현명해지기 마련이다.
저자는 노년에 지혜와 마찬가지로 영성과 종교적 관심도 깊어진다고 본다. 종교와 영성은 어떻게 다른가? 종교는 모방적이며 외부로부터 오지만, 영성은 ‘나의 능력, 희망. 경험’에서 나온다. 종교는 언어나 성서,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좌뇌’활동과 연관되지만, 영성은 육체나 언어, 이성, 문화의 한계를 초월하므로 ‘우뇌’활동과 연관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종교와 영성은 따로 떼어 생각 할 수 없다. 우리는 나이 듦의 성숙을 통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가치를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다. 품위 있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적 차이들은 바로 그 비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노년은 사바에서 열반을 만드는 삶(수행)의 과정이다. 진흙탕이 아니고는 연꽃이 필 수가 없다.
나이 들수록 영성이 조금씩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노화 자체가 영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좀 더 느긋해지고, 인생의 향기와 신비를 느낄 여유와 평화를 얻는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상은 단조로워지고, 바꿀 수 없는 상황들을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불타오르는 본능을 잠재우고 내면의 평화를 향유할 줄 안다.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이제는 자신에게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거대한 바다의 일부로 느끼는 데에 이른다.”(375-376쪽). 영성은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비로운 선율이 잔잔히 흐르는 내적 삶에 귀 기울일 때 생겨난다.
나이가 들어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는가? 인격은 기질과 성격의 총합이다. 타고난 기질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격은 변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노화는 쇠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지평을 확장하고 무의식적 방어기제를 성숙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격과 행동은 서른 살쯤에서 석고처럼 굳어지는 게 아니라, 그 뒤로도 계속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처럼 성인들도 느리지만 계속해서 성숙한다. 물론 이런 가설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나이 들면서 삶은 불연속성으로 채워진다. 원칙적으로 살아 있는 동안 정신력은 꾸준히 좋아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개인적 자질로 저자는 다음 네 가지를 든다. (1) 미래를 예견하고 계획하고 희망을 가지는 능력. (2) 감사와 관용, 즉 컵에 물이 반만 남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반이나 차 있다고 여길 줄 아는 능력. (3)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 (4)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우러져 일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등이다.
저자는 다시 노년에 행복의 조건으로 ‘품위 있게 나이 드는 것’을 말한다. 그는 75세에서 85세 사이의 사람들이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모습을 다음처럼 기술한다. (1)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배려하고, 새로운 사고에 개방적이며, 신체건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꾸준히 노력한다. (2) 그들은 노년의 초라함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들은 아플 때면 의사를 찾고, 늘 적극적으로 삶의 자잘한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
(3) 그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자율적으로 해결하며, 매사에 주체적이다. 그들에게는 삶 전체가 하나의 여정이며,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 (4) 그들은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삶의 근본적인 낙(보람)을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복을 포기할 줄 안다. (5) 그들은 과거에 이루었던 성과들을 소중한 재산으로 삼으나, 호기심을 가지고 다음 세대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자 노력한다. (6) 그들은 오래된 친구들과 계속 우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해서 “사랑의 씨앗은 영원히 거듭해 뿌려져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긴다.
책의 부록에 <품위 있는 노화 측정>을 위의 여섯 갈레에 의거해 평가하고 있다. 전체 15점 만점에서 13점 이상이면 유난히 정력적으로 늙어가는 사람이다. 성공적인 노화의 거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의사와 손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10〜12점은 70대 중반의 나이라면 적응력을 지닌 노년으로 평가된다. 7〜9점은 노년에 뛰어난 면도 있지만 심각한 한계도 드러낸다. 4〜6점은 나이 듦에 그럭저럭 적응하지만 상투적인 노인이나 완고한 축에 든다. 전체 평가기준에서 많은 부분 만족시키지 못한다. 0〜3점은 우울증, 불평, 의존성, 경직성, 퇴행, 소심함을 보이며 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부류의 노인들은 의사나 젊은 친척들도 싫어한다. 위의 다섯 등급 평가에서 자신은 어느 등급에 속하는가를 솔직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노년에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기억되는 사람이고자 노력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불가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 삶’이 얼마나 체현되는지가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해 퍽 긴요하다. 여기 ‘자리’(自利)는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지 않고 스스로에게 이로운 삶이다. 그래서 이기(利己)와는 다르다. 공부하는 삶이 그 대표적 방편이다. 자리적 삶을 체(體)로 삼아 결과적(부수적)으로 자연히 따라붙는 것이 용(用)으로서 이타적 삶이다. 나이 들수록 스스로에게 이로우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신은 언제나 작은 것에 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