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 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 카이로 선언, 독립에 대한 미심쩍은 약속
이승만은 한시도 쉬지 않고 활동했다. 미국 지도자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전파했다. 그 결과는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으로 나타났다.
1913년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내용은 아래와 같다.
"루즈벨트 대통령, 장제스 대원수, 처칠 수상은 각자의 군사, 외교 고문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회의를 마치고 아래의 일반적 성명을 발표한다.
각 군사 사절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을 협정하였다 ...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국으로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개시 이후에 일본국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에 있어서의 일부 도시를 일본국으로부터 박탈할 것과, 아울러 만주, 대만, 팽호도 등 일본국이 청국으로부터 도취한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일본국은 또한 폭력 및 탐욕에 의하여 일본국이 약취한 일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구축될 것이다.
3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이 자유로운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정한다 ... "
카이로 선언은 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은 누구나 열광했다. 하지만 이 선언에는 위험한 함정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도 함정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한국의 독립이 약속된 사실만을 반겼다. 카이로 선언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지(無知)는 해방 직후까지 계속되었다.
오직 한 사람, 이승만이 함정을 알아보았다. 사실 그는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낸 일등 공로자였다. 이병주는 이 선언에 한국의 독립에 관한 조항이 삽입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이승만이 했다고 주장하며, 미국에 소장된 문서들을 증거로 언급한다.
이승만은 자신의 노력으로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도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했다. 선언 속에 들어있는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라는 어구가 독립의 무한정 지연을 의미할 수 있다는 의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내용이 '즉시 독립'이 아니라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독립'으로 되어 있는 점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라는 어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미 국무부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미 국무부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승만의 서한을 묵살했다.
이승만은 줄기차게 움직였다. 그의 노력에 서서히 호응하는 미국의 지도자들도 나타났다. 루즈벨트와 미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직 고위 관료 섬너 웰즈(Summer Wells)는 여러 신문에 실리는 신디케이트 논평에서 "한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20세기의 가장 큰 죄악 중 하나가 시정되고, 태평양에 구축될 새로운 국제 체제에 안정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승만이 주장한 발언을 적절히 요약한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레노어 루즈벨트는 이승만을 직접 만났다. 이승만의 편지를 남편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1945년 3월 12일, 신디케이트 칼럼에 그녀는 이승만을 만난 소감을 썼다. "나는 이전에 이승만 박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만난 그의 얼굴은 숭고한 정신으로 빛나고, 그의 온화한 표정에서는 그의 동포들이 오랜 세월 발휘해 왔을 인내심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었다."
1945년 이승만은 <한국사정>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미국을 공격했다. "소련을 아시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일부의 절박한 심정 때문에 한국과 관련된 소련의 요구가 명확해질 때까지 한국 임시 정부의 승인이 유보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약소국의 독립을 희생시켜 강대국의 지원을 획득하려는 어리석은 정책이거나, 강력한 우방을 만조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어떤 외교 정책도 추진하지 못하는 소심함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이승만은 계속해서 미국 고위 괸료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어리석거나 소심하거나 음모를 감추고 있다는 평가를 약소국 망명 정부의 인물로부터 끈질기게 들어야하는 강대국 관료들의 심경이 오죽 불편했겠는가.
여사적인 순간은 단칼에 내리치듯이 찾아온다. 온갖 사연으로 복잡하고 헝클어진 실타래를 단칼로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확실한 태도를 유보하는 미국, 기회를 엿보는 소련, 겉으로는 합작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내전 중이었던 중국, 끝까지 저항하면서도 항복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일본 등, 강력한 세력들이 여러가지 변수를 놓고 고민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승만 역시 복잡한 심경이었다. 희망과 기대와 동시에 불한과 갈등 속에서 동분서주했다. 그때, 갑자기 광복이 찾아왔다. 미국 시간으로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일본의 항복 소식이 라디오 임시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이승만의 곁에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이다.
"그분은 임시 뉴스를 듣다말고 벌떡 일어나셨어요. 이봐, 일본이 항복했어, 우린 귀국하는 거야.' 그분은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너무 오랜 기다림이었지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면서 제 손만 꽉 잡고 계셨습니다."
♣ 어렵고 외로운 길목의 노래
이승만의 한시를 번역한 이수웅은 이렇게 말했다. "긴 생애 동안 순조롭지 못한 삶의 신산(辛酸)한 경험들이 곧 시의 소재가 되었다 ... 그의 시는 대부분 어렵고 외로운 길목에서 쓰여진 것들이지만, 아름다우면도 사(史)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수웅의 논평에 꼳 들어맞는 시가 있다. 1920년 이승만은 상해 임시 정부로 가는 배에 올랐다. 하지만 서류로 작성된 승객 명단에는 이승만과 그의 비서 임병직으 이름이 없었다. 그들은 밀항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평생 친구였던 보스윅의 주선으로, 하와이에서 상해로 가는 배에 몰래 올랐다.
문제는 귀중한 도움을 베풀었던 친구의 직업이 장의사라는 점이었다. 그 배는 중국인들의 시신(屍身)을 본국으로 보내는 화물선이었다. 이승만이 숨은 곳은 시신을 담은 관들의 틈이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에 이승만은 갑판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승만과 시체와의 인연은 꽤 길다. 한성 감옥에서 콜레라로 죽어가는 시신들의 틈에 섞여 지냈다. 하와이에서는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간 수많은 교포들이 있었다. 그리고 명색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인데, 그의 동행은 "황천객"들을 실은 관들이었다. 죽은 자의 틈을 넘나들어야 하는 산 자의 길, 참으로 고생스러운 독립투사의 삶이었다.
이승만은 그때의 경험을 시로 읊었다. 황천객과 함께 가는, 긴 밤의 노래였다.
민국 2년 동짓달 열 엿셋날
하와이서 남몰래 배를 탔다네
겹겹의 판자문에 화로불은 따뜻하니
사면이 철벽이라 칠흑같이 어두웠네
내일 아침이면 산천도 아득하리니
이 밤엔 세월도 어찌 길다냐
태평양 바다 위를 둥실 떠가니
이 안에 황천객을 누가 알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