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강화도 및 영릉을 다녀와서
<성균관을 돌아보며>
평창향교 유림(儒林)들이 성균관을 참배하고, 전등사와 영릉을 돌아보는 행사를 1박 2일(14. 3. 27~28)로 실시하기로 했다. 평창 유림대표들은 성균관을 다녀왔으나, 대부분의 유림들은 처음 가는 곳이었다. 또한 이왕 수도권으로 가는 길에 강화도 전등사등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기로 했다. 평창에 유림 중 개인 사정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버스 2대로 가기로 했다.
드디어 참배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10분전에 출발지인 우체국 앞으로 갔더니(07:20) 벌써 모두 참석해 있었다. 대부분 연세가 드신 분들이라 시간 전에 버스에 오른 것 같았다.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제일 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버스는 미탄지역 유림들을 시작으로 평창, 방림삼거리, 사초거리, 대화 및 재산지역에서 일행을 태우고 장평에 도착했다. 우리 버스는 40석의 좌석이었으며, 대화까지의 탑승객은 39명이었다. 재산지역에서 탄 분 들은 어쩔 수없이 서서 장평까지 갔다.
장평 버스정류장 앞에 도착하니, 북부지역에서 출발한 버스도 막 도착하고 있었다. 재산지역은 용평면이라 북부지역에 속하고, 우리 버스에 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 분들은 2호차로 옮겨 탔다. 그 버스도 7석밖에 비지 않았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 같았다. 버스가 장평을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에 오르자, 평창향교 전교께서 간단한 인사말을 하셨다. 또한 집행부에서 개인별로 떡, 물, 음료수를 한 병씩 나누어 주었다.
횡성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08:25) 출발하자, 우리 버스를 탔던 전교는 2호차로 가고, 1호차에는 2호차를 타고 온 평창유도회지회장이 옮겨 탔다. 지회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인사말을 했는데, 나도 간단히 인사를 했다. 버스에서 나눠준 떡을 먹고 나자,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분이 많았음에도, 평소 건강하기 때문인지 약주를 잘 드셨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이천휴게소를 경유해서 올림픽대로를 타고가다 동호대교를 건너 성균관에 도착(11:00)했다.
<일행이 휴식을 취한 횡성휴게소 풍경>
<일행이 타고 온 관광버스가 있는 풍경>
<일행이 휴식을 취한 이천휴게소 풍경>
성균관(成均館)은 사적 제143호로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서,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길러내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문묘의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기숙사인 동제와 서제, 도서관이었던 존경각, 지원시설인 양현고 등이 있었다.
평창향교에서 오늘 성균관 참배를 미리 연락한 덕분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젊은 분이 대성전 신삼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북쪽)에 있었다. 일행은 안내자를 따라 담장을 지나 문에 들어서자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였고, 다시 담장 남쪽 문으로 들어가니 대성전(大成殿)이 있었다.
<문묘(성균관)안내도>
<대성전 앞에 모여 서는 일행>
안내자는 대성전 정면의 커다란 광장 오른쪽에 자리를 깔아놓고, 그 곳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라고 했다. 대성전을 바라보고 주위를 돌아보니, 동쪽은 동무가 서쪽은 서무가 있었는데, 여기는 제관들의 옷을 보관하며 갈아입거나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일행의 대표인 전교를 비롯한 세 분도 여기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동무에서 옷을 갈아입는 전교 등과 안내하는 유생 모습>
<대성전 서쪽에 있는 서무 모습>
뒤로 돌아서자 대성전 앞쪽인데, 일행이 버스에서 내렸던 도로로 가기 직전에 신삼문(神三門)이 있고, 동무와 신삼문 사이에 묘정비각(廟庭碑閣)이 있었다. 다시 대성전을 바라보자 건물 양편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있는데, 오른쪽(동쪽)은 삼강(三綱)나무이고, 왼쪽(서쪽) 것은 오륜(五倫)나무라고 했다.
<대성전 정문인 신삼문이 있는 풍경>
<신삼문과 동무 사이에 있는 묘정비각>
<대성전 동쪽에 있는 삼강목>
<대성전 서쪽에 있는 오륜목>
안내자는 사회와 알자의 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제례 복으로 갈아입은 분들은 알자를 따라 참배했고, 다른 일행들도 안내자의 안내에 따라 예를 올렸다. 일행이 참배를 끝내고 나오려하자, 새로 성균관장이 된 분(서정기, 전북 남원)이 관계자들과 함께 나와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그는 모래(3. 29) 취임하는 분으로, 평창향교 유림들의 성균관 참배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이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데 유교만은 제자리걸음이라고 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이 분은 종교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말하면서 우리 유림들만이라도 깨끗하고 참된 길을 가자고 했다.
<일행에게 인사말을 하는 서정기 신임 성균관장 모습 1>
<일행에게 인사말을 하는 서정기 신임 성균관장 모습 2>
일행은 성균관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대성전을 올라갔다. 이곳에서도 안내자의 안내를 따랐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에 모두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제일 크고 가장 완전한 곳이었다. 추녀 밑에는 성묘(聖廟)라는 현판이 있었다.
<대성전을 배경으로 성균관장과 일행들이 추억을 남기고>
<대성전 처마 중앙에 있는 "성묘" 현판>
성균관 대성전 신성신현위패 봉안(成均館 大成殿 神聖神賢位牌 奉安)은 총 39위였으며, 그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
가장 중앙 뒤쪽에 대성지성 문선왕(공자)이, 문성왕 위패 왼쪽에 안자와 자사가, 오른쪽에 증자와 맹자가 모셔져 있었다. 안자와 자사 뒤에는 공문 10철 중 5위와 송조 6현 중 3위가, 증자와 맹자 뒤에는 공문 10철 중 5위와 송조 6현 중 3위가 모셔져 있었다. 또한 왼쪽에는 한국 18현 중 9위가, 오른쪽에도 한국 18위 중 9위가 모셔져 있었다.
지방의 향교들은 그 규모에 따라 위패를 모시는 분과 숫자가 조금씩 다르지만, 중앙에 모시는 다섯 분은 같다고 했다.
<대성전 중앙 뒤쪽에 모셔진 공자 위패>
<대성전 내부 모습>
일행은 대성전 참배를 마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갔지만, 나는 서쪽 문을 나서 재학당을 보고 담장의 문을 나왔다. 큰 광장을 지나자 명륜당이었다.
<대성전 서쪽 문을 나와 본 재학당>
<제학당 앞에 있는 창고>
명륜당(明倫堂)은 유학의 도를 가르치며 절차탁마를 하던 강의실이었다. 총 18칸인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정원을 엄정하게 선발해 오늘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제와 서제에 기숙하게 했다. 여기서는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을 익히는 장소였다. 또한 이곳은 유생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 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으로도 활용했다. 명륜당에는 명륜당기를 비롯해 왕이 직접 쓴 어필과 함께 주자가 쓴 명륜당이라는 현판 등이 있었다.
명륜당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유학자들이 노력했을까. 또한 이곳에 들어온 유학자들이 훈장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이곳이 있었기에 전국에서 뽑힌 인물들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으리라.
<대성전 뒤(북쪽)의 위엄 있는 명륜당 모습>
<명륜당 안에 걸린 명륜당기와 주자가 쓴 명륜당 현판>
<명륜당 안에 걸린 글씨들>
명륜당 광장 앞에는 약 500년 된 천연기념물 제59호인 “서울 문묘은행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라고 한다. 서쪽에 있는 나무는 높이 21m, 둘레 7.3m라고 했다. 동쪽에 있는 나무는 전쟁의 피해로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모두 잘 자라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59호인 서울 문묘은행나무>
일행은 진사각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으나, 나는 북을 달아놓은 건물, 즉 오늘의 기숙사인 동제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대학교 구내이기 때문에, 이곳에도 젊은 학생들이 쉬고 있었다. 일행이 점심을 먹을 식당은 진사각 지하 1층이 이었다.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여기서도 술이 한 순배 돌았다. 안에 있는 전통혼례 폐백실 앞에는 꽃가마가 전시되어 있었다. 화장실에도 여기가 우리나라 유교의 본산답게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무슨 예가 소용 있으며,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무슨 음악이 소용 있겠는가.”라는 논어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기숙사인 동제 건물에 달려있는 북>
<오늘날의 기숙사인 동제의 기둥과 마루>
<전통혼례 폐백실 앞에 전시된 꽃가마>
<진사각 화장실에 걸린 풍속도와 논어의 한 구절>
점심을 먹고 일행이 쉬고 있는 동안 나는 식당을 나와서, 담장 안에 있는 육일각과 도서관이었던 존경각을 돌아보았다. 약속시간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더니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정문 왼쪽에 있는 하마비(下馬碑)를 보았다. 이것은 조선시대 궐문이나 문묘 앞에 세운 석비로,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다. 말을 내리는 지점은 품계에 따라 다른데, 1품 이하는 궐문이나 문묘 입구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내려야 했다.
<명륜당 동북쪽 뒤에 있는 육일각>
<명륜당 동북쪽 뒤에 있는 도서관인 존경각>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에 있는 하마비>
하마비 옆에는 탕평비가 있었다. “탕평비(蕩平碑)”는 영조 18년(1712)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어명으로 성균관에 세워진 비석이다. 당시 조선은 붕당 정치가 본래의 의미를 잃고 그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영조는 장차 국가를 이끌어 갈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정치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친필을 내려 탕평비를 세웠다고 한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홍범편(弘範篇)에 나오는 말이란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에 있는 탕평비와 비각>
하마비와 탕평비를 모두 보고나도 버스가 오지 않아 교문 밖으로 나가 거리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서울이고 대학교 앞이기 때문인지 젊고 발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조금 기다리자 버스가 와서 성균관을 출발(12:50)하여 오랜만에 서울거리를 달렸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 거리 풍경>
첫댓글 우리들 삶에는 유교 정신이 맞다고 생각합니다..좋은글 올려 주셔 감사합니다.
목련님 감사해요. 저도 성균관에는 이번에 처음 가보았어요~~~
@백호 저희 친정어버님께서 향교 전교를 하시고 92연세에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