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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의 시
인사와 그리스도 선포 (로마 1, 1-7)
나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부르심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고 이 편지를 씁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언약해 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나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으니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대들도 그들 가운데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교우들에게 인사하니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총과 평화가 그대들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 (로마 1, 8-15)
그대들의 일로 예수님을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드리니
그대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두루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시니
끊임없이 여러분을 생각하며 기도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그대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니
그대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며
그대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대들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형제인 그대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라오니
비록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가려고 마음먹었고
다른 민족들에게서처럼 그대들에게서도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그리스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지고 있기에
로마에 있는 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까지
믿는 이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이오니
복음 안에서 그분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인간의 불의와 하느님의 진노 1 (로마 1, 18-25)
불의로 진리를 거스르는 이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하느님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환히 드러났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그들에게 환히 드러내 주셨으니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은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여 그들은 아무런 변명을 할 여지가 없으니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허튼 생각으로 허망하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이들이라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으니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마음을 욕망으로 더렵혀지도록 버려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으니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시옵니다. 아멘.
인간의 불의와 하느님의 진노 2 (로마 1, 26-32)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으니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남자들은 여자와 맺는 육체관계를 버리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우는 관계로 바꾸었으니
그들은 파렴치한 짓,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분별없는 부당한 짓을 하도록 두셨으니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그들은 이런 짓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잘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짓을 행하는 자들을 두둔까지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우신 심판 (로마 2, 1- 11)
남을 심판하는 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그대는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내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짓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며 같은 짓을 행하는 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그대의 완고함과 뉘우칠 줄 모르는 그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스스로 쌓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니
선한 행실에 꾸준하면서
영예와 불멸을 구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지며
먼저 유다인들에게, 이어서 그리스인들에게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큰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들에게, 이어서 그리스인들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영광과 영예와 평화가 내릴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율법 (로마 2, 12-16)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는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는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율법을 듣기만 하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비로소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이라서 비록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타고난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율법이 되니
그들은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거나 변호하면서
율법의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유다인과 율법 (로마 2, 17-29)
그대는 유다인으로 자처하여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고
율법을 배워 하느님 뜻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다고 하며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며
남은 가르치면서 왜 그대 자신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남을 가르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하며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하며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치며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과연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느님의 이름이 그대들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습니다.”
그대가 율법을 준행할 때에야 비로소 할례는 유익하지만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되고 마니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비록 그들이 할례 받지 않았지만 할례 받은 것이 되지 않겠으며
몸에 할례 받지 않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
법으로 할례를 받았지만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고
살에 드러나는 겉모양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아니니
오히려 속이 유다인인 사람이 참 유다인이며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받는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이니
그런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진실성과 사람들의 죄 (로마 3. 1-8)
유다인이 더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어느 모로 보나 그런 것이 많이 있으며
우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불성실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불성실함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무효로 만듭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당신께 재판을 걸면 당신께서 이기실 것이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로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진실하신 분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우리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사람들의 관례대로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므로 불의하시다고 해야 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
만일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 드러나서
그분께 영광이 된다면
왜 내가 아직도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으나
그런 자들은 합당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 (로마 3, 9-20)
그러니 어떻습니까?
우리가 유다인이라고 해서 뛰어난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으니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논증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그대로이니
“의인은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깨닫는 이도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도 없도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도다.
좋은 일을 하는 이가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벌려져 있는 무덤이요
그들의 혀로는 속임수를 일삼으며
그들의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도다.
그들의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잽싸고
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뒤따르며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안중에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도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해당되어
모든 입이 다물어지고 온 세상이 하느님 앞에 유죄이니
어느 누구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 의롭지 않고
율법을 통해서는 다만 죄를 알게 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로마 3, 21- 31)
이제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니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으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는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시어
그분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지니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 과거의 죄들은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넘기신 것으로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시며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으니,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니라, 믿음의 법입니다.
우리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확신하니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시니
그분께서 할례 받는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십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 4, 1-12)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는 그가 무엇을 얻은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자랑할 만도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 품삯이란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지지만
일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으면
그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이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그 범법들 사하여지고 그 죄가 가려진 이들이여!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그 죄를 아니 따지시는 이들이여!”
이 행복이 할례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합니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셨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인정을 받은 것입니까?
그가 할례를 받고 난 다음입니까?
아니면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표징으로 할례를 받았으니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 (로마 4, 13-25)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으로 주어졌으니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율법은 진노를 불어 일으키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으며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보장되니
율법에 따라 사는 이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에게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니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만들겠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믿었던 분,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하며
“네 후손이 저만큼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백 살이 다 된 그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기 몸과 사라의 죽은 모태를 익히 보고도
그의 믿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불신으로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믿음이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니
하여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기록은 우리를 위한 것이니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 (로마 5, 1-1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니
믿음으로 우리는 이 은총에 이르는 통로를 얻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에서 오히려 긍지를 지니니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단련을, 단련은 희망을 자아내며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나약했던 당시에 이미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으려고 나설지 모르지만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인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어 있는 지금에는
그분을 통하여 진노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니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이던 때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의 화해를 얻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그분의 생명으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하며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하느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로마 5, 12-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모두 죄를 지어 모두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으며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를 따라
죄를 짓지 않은 자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이니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같지 않아서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은총의 선물이 풍성히 내렸습니다.
이 선물의 경우는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르니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그를 통해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더욱더 생명을 누리며 세상을 지배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움으로 모든 이가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으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성히 내렸으니
이는 죄가 죽음을 지배한 것처럼
은총도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 (로마 6, 1-14)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죄에서 죽은 우리가 어찌 죄 안에 계속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것을 모릅니까?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거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죽은 사람은 이제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하니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번이었으며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들 자신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것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하여 죄가 그대들의 몸을 지배하여
그대들이 그 욕망에 복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대들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내맡기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에서 살아난 이로서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죄가 그대들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그대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로마 6. 15- 23)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총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대들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내맡기어 복종하면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종이거나
그대들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그대들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 그대들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으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으니
그대들의 연약한 육을 감안하여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하니
한때 불결과 불법에 그대들의 지체를 무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 그대들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그대들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고
그때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행하여 소득을 얻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종국은 죽음입니다.
이제 그대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주니
그 종국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보수는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 (로마 7, 1- 6)
형제 여러분,
그대들이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하오니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것을 모릅니까?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법으로 매여 있나니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남편과 관련된 법에서 풀려납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그 법에서 자유로워져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살아도 간통한 여자가 아닙니다.
그대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써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으며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육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율법으로 인한 죄의 정욕들이
우리 지체 안에서 활동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으나
이제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써 거기서 벗어나
옛 법전이 아니라 새로운 영을 따라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역할- 죄와 죽음 (로마 7, 7-25)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이며
율법에서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욕을 몰랐을 것이니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으로 나는 전에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으며
생명으로 이끌어야 할 계명이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라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죄가 선한 것을 통해 죽음을 가져왔으며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영적인 것이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으로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니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율법이 좋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하니
내가 좋은 일을 하기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으로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하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으며
그 다른 법이 나를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비참한 인간, 그것은 바로 나이니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 자신은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 (로마 8, 1- 17)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 받을 일이 없으며
그분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나약해져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으니
당신의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을 따르지 아니하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육을 따르는 자들은 늘 육의 일에 마음을 쓰고
영을 따르는 이들은 영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육이 마음 쓰는 것은 죽음이요
영이 마음 쓰는 것은 생명과 평화이며
육의 마음은 하느님을 대적하여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대들 안에 살고 계시기만 하면
그대들은 육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 안에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않으면 그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들 안에 계시다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로움에 이르는 생명이니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그대들 안에 살면
그분께서 그 영을 통해 그대들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제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지고 있지 아니하며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영을 따라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들이니
그대들은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으니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시며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니
곧 하느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는 공동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과 희망과 영광 (로마 8, 18-30)
장차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피조물은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고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으며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으리라는 희망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지만
피조물만이 아니라 영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눈에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우리는 인내로 기다립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께서는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며
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결정에 따라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 아드님의 모상으로 정하셨고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로마 8, 31-39)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분께서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지 않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들을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니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니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는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되는 양들같이 다루어졌나이다.”
우리는 사랑해 주시는 분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니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와 이스라엘 (로마 9, 1-5)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주니
큰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갈라져 기꺼이 저주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며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으니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으니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세세에 찬양받으십니다. 아멘.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 (로마 9, 6-18)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간 것은 아니니
이스라엘 태생이라고 해서 모두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기 때문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의 대를 이어야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맘때에 내가 다시 올 터인데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라는 약속의 말씀이며,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로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더구나 그들이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나니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불공정하시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으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것은 인간의 원의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렸으니
성경도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운 것은 너로 말미암아
내 권능을 보여주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원고하게 만드십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 (로마 9, 19-29)
이제 그대는 내가 물을 것이니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여전히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대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려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작가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고 말할 수 있으며
찰흙을 주무르는 옹기장이가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다른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리가 없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 권능을 알리시려고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인내로 참아 주셨으니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유다인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부르시니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치니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효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땅위에서 말씀을 온전히 서둘러 실현하시리라.”
이는 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이니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고모라처럼 되고 말았으리라.”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 (로마 9, 30-10, 4)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이니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니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으로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보라, 이제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놓으리니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바람,
그들을 위해 내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들을 위해 이렇게 증언하오니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둔 열정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아보지 못한 탓으로
자기 나름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애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우심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어
모든 이에게 의로움의 되시었고
하여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로마 10, 5-21)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며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으로 살 것이다."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니
"누가 하늘로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이며
"누가 저 깊은 땅속까지 내려갈까 걱정하지 마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이며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니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성경이 말하니,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며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리시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으며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이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니
이사야도 이렇게 한탄한 일이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일러 준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니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도다."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까?
우선 모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기하게 하겠고
어리석은 백성을 보고 화나게 하리라."
이사야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해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니
"나는 온 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도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로마 11, 1-10)
내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저버리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벤야민 지파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셨으니
그대들은 성경이 엘리야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엘리야가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어떻게 호소하였는지 모릅니까?
"주님, 저들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당신의 제단을 모조리 헐어버렸습니다.
이제 저 하나 남았는데 제 목숨마저 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나를 위해 남겨두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은총으로 뽑힌 사람들이 남아 있으며
그들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뽑힌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은총은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한 반면
뽑힌 사람들이 그것을 얻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더욱 완고해졌으니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시어
그들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다윗도 이렇게 말하니
"그들이 벌인 잔치 자리가 오히려 올가미와 덫이 되어
그들이 걸려 넘어져 패망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은 굽어진 채로 펴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다른 민족의 구원 (로마 11, 11- 24)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렀으니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이제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그대들에게 말하오니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인 만큼 내 직무를 소중하게 여기며
내 혈육에게 질투심을 일으켜
혹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들을 물리친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되었다면
그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죽이 첫 부분이 거룩하면
나머지 온 덩어리도 그러하며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그러합니다.
원래의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나가고
야생 올리브인 그대가 그 자리에 접목되어
그 올리브 나무의 기름진 뿌리에서 한몫 얻게 된 것이니
그대는 그 잘려 나간 가지들을 얕보며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니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목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들이 잘려 나간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대가 든든하게 서 있는 것은 믿음 때문이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그대도 굳이 아끼시지 않을지도 모르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엄격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게 대하시니
그대는 그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려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다시 접목될 것이니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목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그대가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참 올리브 나무에 접목되었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목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의 구원 (로마 11, 25-32)
형제 여러분,
나는 그대들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라오니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하게 된 것은
다른 민족들이 모두 다 들어올 때까지 그러리라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온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으로부터 와서
야곱으로부터 사악함을 치워 없애리라.
이것이 곧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을 나의 계약이다.”
복음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그대들을 위해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받는 것에 비추어 보면 조상들 덕분에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니
그대들도 그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도리어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들도 지금은 그대들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이니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찬미가 (로마 11, 36)
오! 하느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정녕 그분의 판단은 감히 헤아려 짐작할 수 없고
그분의 길은 더듬어 찾아낼 수 없도다!
그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 수 있으리오?
그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될 수 있으리오?
그 누가 그분에게 먼저 드리고
그 보답을 받을 수 있으리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비롯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을 위하여 있으니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에 영원토록 있으리라. 아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로마 12, 1- 8)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그대들을 격려하니
그대들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 세상을 본뜨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대들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그대들에게 말하니
마땅한 생각에서 벗어나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대들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몫에 따라 바르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 안에 여러 지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똑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며 서로 지체가 되니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지닙니다.
예언의 은사라면 믿음에 맞추어서 제대로 예언하고
봉사의 은사라면 봉사하는데,
가르치는 이라면 가르치는 일에,
격려하는 이라면 격려하는 일에 힘쓸 것이고,
나누어주는 이라면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로마 12, 9-21)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하니
그대들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앞장서십시오.
열성이 식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불타오르게 하여
주님을 섬기며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항구하십시오.
성도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나그네 대접에 정성을 다하고
그대들을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합심하고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며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친애하는 그대들이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복수는 내 것이니, 내가 갚겠노라.”라고 말씀하였으니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여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머리에 숯불을 놓은 셈이니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권위 (로마 13, 1- 7)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하나니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는 있을 수 없으며
기존하는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이니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사실 악행을 할 때는 관헌들이 두렵지만
선행을 할 때는 두렵지 않나니
그대가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권위로부터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관헌은 그대의 선익을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으로
그대가 악을 행할 때는 두려워하여야 하니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며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것이니
하느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대들이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은 하느님의 공복으로서 이 일에 정성을 다하니
그대들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여
조세나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나 관세를 내고
두려워하거나 존경할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십시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 13, 8-10)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예외이니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두 이 한 마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으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 (로마 13, 11-14)
그대들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고
그대들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대낮처럼 품위 있게 행동하며
포식과 폭음, 음행과 방탕, 다툼과 시기를 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로마 14, 1- 12)
그대들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되
그 소신에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어떤 이는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아무 거나 먹는 사람은 가려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며
가려먹는 사람은 아무 거나 먹는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하려 드는 것입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이지만
그는 서 있게 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이 다른 날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어떤 사람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여기나니
각자는 제 나름에 판단에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특정한 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고
아무 거나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그것을 먹으니
그는 그것을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가려 먹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으니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그대의 형제를 심판하며
그대는 누구이기에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니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리라.”
하여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앞에 자기 일을 아뢰게 될 것입니다.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 (로마 14, 13- 23)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말고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하십시오.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하니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그것이 부정할 따름이니
그대의 형제가 음식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대는 이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음식으로 인해 형제를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으니
그대의 그 좋은 것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니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으며
음식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하지만
무엇을 먹어 장애가 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고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며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으니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며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
이웃의 마음에 들도록 (로마 15, 1- 6)
우리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참아주어야 하며
자신들이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되며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웃의 마음에 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좋을 대로만 하시지 않았으니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에 떨어졌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이니
우리는 성경에서 얻는 인내와 위로로써 희망을 지닙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그대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 뜻을 같게 하시어
한 마음, 한 입으로 주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대들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단언하니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진리를 위해 할례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민족들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치나이다.
또 이르기를
“민족들아,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또 이렇게 말하니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그분을 찬미하여라.”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니
“이사이의 뿌리에서 줄기가 돋아나리니
그가 일어나 민족들을 다스리고
민족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리라.”
희망의 하느님께서 그대들이 믿은 일에
온갖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워주시어
그대들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더욱 넘치기를 빕니다.
바오로의 사도직 (로마 15, 14-21)
나의 형제 여러분,
나는 그대들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선의가 가득하고 온갖 지식으로 충만하며
서로 타일러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대들의 기억을 새롭게 해 드리려고 편지를 쓰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썼습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해 예수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려는 것이며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봉헌으로
성령 안에서 모두 거룩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나를 통해
그분이 다른 민족들을 복종시키려고 이루신 일 이외는
내가 감히 더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두루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알려진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니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이니
“그에 관하여 전해들은 적이 없는 자들이 보고
그의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이 깨달으리라.”
바오로의 여행 계획 (로마 15, 22-33)
나는 그대들에게 가려 했지만 여러 번 좌절을 겪었나니
이제 이 지역에서 일할 곳도 없거니와
여러 해 전부터 그대들에게 가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으니
내가 스페인으로 가게만 된다면
지나는 길에 그대들을 보고 그대들과 기쁨을 나누고 나서
그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금은 성도들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니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인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눔을 베풀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이 있어 그렇게 하였으니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이 결실을 확실히 전한 다음
그대들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떠날 것인데
그대들에게 가면서 그리스도의 축복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그대들에게 부탁하니
나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내가 구출되고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활동이 성도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대들에게 가서 함께 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평화의 하느님께서 그대들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끝 인사와 권고 (로마 16, 1-24)
켕크레애 교회의 일꾼인 자매 포이베를 그대들에게 추천하니
성도들의 품위에 맞게 그를 주님 안에서 맞아들이고
그가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십시오.
사실 그는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의 후원자였습니다.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으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고마워합니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주시고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사랑하는 스타키스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은 시련을 이겨낸 아펠레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집안 식구들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나의 동포 헤로디온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주님 안에 있는 나르키소스의 집안 식구들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애쓴 트리패나와 트리포사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페르시스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와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아싱크리토스, 플레곤, 헤르메스, 파트로바스, 헤르마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필롤로고스와 율리아, 네레우스와 그의 누이, 올림파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그대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그대들에게 당부하니
그대들이 배운 가르침을 벗어나
분열을 일으키고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멀리해야 하니
그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뱃속을 섬기는 자들로서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로 순박한 이들의 마음을 속입니다.
그대들의 순종은 모든 이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
나는 그대들의 이 일로 기뻐하면서도
그대들이 선에는 지혜롭고 악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사탄을 그대들의 발아래 굴복시켜 주실 것이니
우리 주 예수님의 은총이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나의 협력자 티모테오와 나의 동포들인 루키오스와 야손,
소시파테르와 이 편지를 받아 쓴 테르티우스,
나와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 이 도시의 재정관
에라스토스, 그리고 콰르투스 형제가 그대들에게 인사합니다.
종결 찬송 (로마 16, 25-27)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써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그대들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신비가 이제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드러나게 되었고
이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