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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현 제공 |
이에 격분한 동포학부모들과 교직원, 학생들은 식민지노예교육절대반대! 민족교육을 끝까지 사수하자! 구호를 들고 항의나 시위, 궐기모임을 가져 견결이 투쟁하였습니다. 우리의 민족교육은 이렇게 그들의 온갖 탄압책동을 받으면서도 총련이 결성된 후 비약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왔으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신 것을 비롯한 조국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하여 이역땅 일본에서도 민족교육을 지키고 발전시켜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 교직원들과 학생들, 동포학부모들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964년에는 현재 교사인 새 교사를 건설했으며 같은 해 4월부터는 중급부를 병설하여 도꾜조선제2초중급학교로 새 출발하였습니다. 애국적 동포학부모들은 1975년에는 운동장을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1976년, 1982년에는 새 교사를 증축, 개축하였습니다. 우리 학교는 1963년에는 현재 교사가 선 땅을 구입하였으며 운동장에 대해서는 학교가 세워진 력사적 경위를 고려하여 1990년까지 무상사용 이후 2001년부터 2003년 7월까지 도꾜도당국과 끈질긴 교섭을 진행해왔습니다. 2000년에는 도꾜도와의 교섭, 재판을 통해 200호를 넘는 에다가와 주민들의 토지불하를 원만히 해결하였습니다. 2001년 9월에는 도꾜도당국이 학교방문 후 주민들과의 의견교환마당에서 력사적 경의를 존중하며 이곳이 주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고려한다, 학교운동장도 주민들의 불하조건에 따른 방향에서 검토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2003년 7월에는 8년 이상이나 교섭이 중단된 사실에 대하여 도꾜도 항만국은 과거 교섭이 중단한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과거문제는 청구를 안 한다는 것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초에 일반동포들과 도꾜도당국이 어떤 주민이라는 자들이 학교가 당을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감사청구를 도꾜도지사 앞으로 제출하는 교육권침해책동을 벌려놓았습니다.
힘겹게 진행된 학교 지키기 싸움
도꾜도는 8월 25일에 항만국 담당일군들을 교체시켜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교섭은 전진이 없다하면서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여러 통의 문서를 우리에게 보내고 학교땅에 대하여 엄청난 금액을 요구해왔으며 2003년 12월 15일 끝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는 력사적 경위와 교섭과정을 무시하고 오직 강경책으로만 일방적으로 우리한테 강요해나선 도꾜도의 태도에 명백한 악의와 탄압의 의도를 느꼈습니다. 우리 학교를 지키는 이 투쟁은 악질한 도꾜도의 탄압에 대한 정치투쟁이며 우리의 신성한 민족교육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즉시로 동포학부모모임을 긴급으로 가져 1만명 서명운동에 힘차게 궐기해 나섰으며 밤낮을 이어가며 삐라 살포, 서명운동에 적극 떨쳐나서 1만2천명의 서명을 받아내었습니다. 2004년 2월에 시작한 도꾜도와의 공판은 지난 2007년 3월8일 시가의 10분의 1 이하의 가격으로 구입하게 되는 우리의 승리적인 화해로 끝났습니다. 이 동안에 우리 학교를 견학하러온 일본, 남조선 사람들은 현재 1800명을 넘었으며 특히 신문, 텔레비전, 잡지들에서의 취재를 통해서 우리의 정당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더 크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찾아와 수업을 참관한 그들은 초급부 1학년 꼬마들이 눈을 반짝이며 랑랑한 목소리로 모국어를 익혀나가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민족교육이야말로 진짜 교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2004년 9월11일에 에다가와재판지원련락회의 조직과 2005년 5월에는 에다가와조선학교지원도민기금의 발족, 조선어강좌 미래의 개강 또한 남조선에서도 대책회의, 지원모금이 조직된 것은 일본의 민족교육력사상에서도 특기할 사업으로 됩니다. 3년 3개월에 걸친 이번 재판의 의의는 우선 처음으로 사법마당에서 민족교육의 존재의 의의를 인정시킨 것이며 앞으로 일본에서의 민족교육권리획득에서 단서를 열어놓은 것입니다. 또한 동포학부모들과 일본인, 남측동포들까지 포함한 광범한 사람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한 재판투쟁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크게 여론을 환기한 것입니다. 우리 학교는 동포자녀들에게 더 좋은 배움터를 마련해주자는 1세동포들의 정열과 그 높은 뜻을 계승하여 민족교육을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2세, 3세동포들의 피땀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전대미문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교육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희생적인 투쟁을 벌려 왔습니까.
재일조선인 운동의 생명선 우리 학교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초행길을 걸어온 1세동포들의 로고는 오늘 민족교육의 대화원으로 피어나 만방에 아름다움과 위용을 떨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민족교육사업은 말 그대로 우리 재일조선인운동의 생명선이며 모든 애국활동의 출발점이며 우리 학교는 쥬오고또 동포들의 민족성의 상징, 단결의 거점, 마음의 고향으로 되어왔습니다. 장장 60년에 넘도록 아이들을 어엿한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민족교육을 지켜왔기에 오늘도 화목하고 힘 있는 동포사회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가 이룩한 가장 큰 자랑의 하나는 여기에서 수많은 애국인재, 참된 조선사람으로 키워 애국운동의 여러 분야에 수많은 졸업생들을 내보낸 것입니다. 이 기간에 우리 학교를 졸업한 수는 초급부 1335명, 중급부 646명, 합계 1981명에 달하며 그 속에는 총련의 각급 기관일군, 애국적 상공인, 공훈교원, 과학자, 기술자, 예술가, 체육명수 등 그들은 다 동포사회의 유능한 역군으로 자라나 민족의 대, 애국의 대를 꿋꿋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제2학교 졸업생들은 총련의 각급 기관일군을 비롯한 화목하고 유족한 동포사회를 꾸리기 위한 직접적 담당자인 일군들을 그 어느 학교보다 수많이 배출해왔습니다. 또한 학교창립 초창기로부터 지난 61년 동안에 14명의 교장선생님, 11명의 교육회회장 선생님들을 모셨으며 약 200명의 교직원들이 교편을 잡아 학교사업발전을 위해 헌신분투하였습니다. 1세분들이 세우고 지켜온 우리 학교-도꾜조선제2초급학교를 계속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2세, 3세를 비롯한 우리 후대들입니다. 우리는 1세동포들의 그 지성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며 그 계주봉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100년 대계라고 옛날부터 말을 합니다. 또한 나라의 운명, 우리 재일조선인운동의 장래운명을 좌우하는 것도 바로 교육입니다. 저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우리 학교,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인 도꾜조선제2초급학교를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것입니다. 저는 이번 재판투쟁을 통해서 선대들이 남겨준 고귀한 재산인 민족교육을 2세인 우리가 3, 4세인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며 대를 이어 영원히 고수·발전시켜나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의 생명선인 우리 학교, 에다가와에 남부럽지 않는 아담한 새 교사를 짓는 데 모든 힘과 열정을 바쳐나갈 것입니다.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계좌 신한은행 330-03-004075(예금주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사무국 02)336-5642(www.edagawa.net)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유명인사들의 기증품 경매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옥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일부터는 종로구 원서동 비원 옆 살롱 마고에서 기증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쓰레기매립지로 강제이주 당한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난 2003년 도쿄도 정부는 수십 년간 무상으로 사용해온 학교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시대, 강제 이주시킨 일본의 원죄는 배제시킨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재판부는 도쿄도 정부는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합의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문제는 남았다. 학교 부지를 계속 사용하려면 시가의 1/10 가격인 14억원을 도쿄도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김용택 시인 등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을 결성했다. 오마이뉴스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의 뜻에 공감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에 참여한다. 앞으로 해당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와 학생들의 글이 차례로 실릴 예정이다. 마지막 글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상임대표인 김용택의 시다.
김용택 시 조국의 손을 주세요
▲ 김용택 시인. | |
운동장에 들어서면
땅을 울리는 아이들의 푸른 발소리가 들립니다.
나뭇잎을 달고 새가 날지요.
푸른 하늘로 하얀 바람은 또 얼마나 부는지요.
눈부시게 날고 싶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아이들 고함 소리 따라
나도 날고 싶지요.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작은 돌멩이와 작은 모래와 그 보다 작은 흙들이
우리 손톱 사이에 끼여 집으로 갔지요.
아! 감 같은 얼굴들이 운동장 가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려
하얗게 웃었지요.
조국은 그리운 곳이랍니다.
갈 수 없는 나의 조국, 피는 늘 그 쪽으로 흐르지요.
나무가 파랗게 잎이 납니다.
산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슬픈 나라, 하얀 도화지 위에 우리나라 두만강을 푸르게 그리고
백두산을 높이 그리면 저 쪽 파도를 해치고 한라산이 솟았습니다.
해 지는 산 아래 작은 마을을 향해 아이들이 집으로 갑니다.
가방 맨 형과 아우,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쩌면 그리 강 언덕은 정다운지요.
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림이지요.
운동장에 들어서면 발소리 들립니다.
맥박 같은 발소리들이 우리 가슴을 뛰어갑니다. 지구의 희망이지요.
글 읽는 소리, 풍금소리 쟁쟁하면 그게 미래랍니다.
울고, 웃지요.
좋아서 함께 고함을 지르고, 함께 손뼉 치며 노래하고 달립니다.
다 우리지요. 달리는 우리 어린 발소리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
하늘이 새로 열립니다.
운동장에 빛이 가득하였습니다.
운동장 가 아! 잘린 플라타너스 나무 푸른 잎들,
고개를 떨구고 마른 땅을 지도를 그리며, 슬프고 눈물 났지요.
낡고 허술한 교실마다 아이들의 얼굴과 노래와 말들이
우수수 꽃잎처럼 떨어졌습니다. 아주 오래 된 미래가 거기 있었지요.
그 교실 벽에 기대어 나도 꽃이지요.
나도 조국 산천의 꽃 한 송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다라 우와! 우와! 소리 지르며 우리나라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내 눈과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
다시 가겠습니다.
우리의 산천을 쓰다듬을 아이들의 손을 잡으러 또 가겠습니다.
당신의 손을 주세요. 조국의 손을 주세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희망콘서트 21일 오후 6시.
<오마이뉴스> 동영상 생중계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어린 천사들에게 조국에서 불어오는 희망을 바람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의 일환으로 희망 콘서트를 연다. 21일 오후 6시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다. 일본정부에 의해 쓰레기 매립장 인근으로 강제이주 당해야했던 슬픈 역사와 도쿄도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에 의해 학교부지를 빼앗길 위기를 겪었던 재일 조선인들. 그들이 희망으로 키워온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한 이번 콘서트에는 정희성(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시인, 김용택 시인, 가수 양희은, 나무자전거, 이지상, 우리나라, 시노래모임 나팔꽃, 배우 권해효, 서예가 오민준 등이 참여한다. 이번 콘서트를 준비한 이지상씨는 일본 공립학교의 9배에 달하는 교육비를 내면서도 민족의 글과 말을 지켜낸 조선학교 학부모과 아이들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한다며 우리 사회는 지난 60년간 그들의 눈물겨운 삶을 외면해왔다. 이제는 그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할 때라고 했다. 콘서트장 주변에선 조선학교 관련 사진전과 영상 상영회 등이 열리고, 에다가와 조선학교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토로 할머니들도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공연수입은 모두 에다가와 조선학교 돕기에 사용된다. 지난 5월 25일 서울 안국동에서 결성식을 가진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은 그간 유명인사 소장품 인터넷 경매와 각종 모금활동 등을 진행했고, 앞으론 관련 심포지엄과 음반 제작도 계획하고 있다. 8월엔 방문단을 구성해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방문, 성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오마이뉴스는 21일 오후 6시부터 희망콘서트 현장을 동영상 생중계한다.
공연문의 및 예매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02-336-5642)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 디스크포유(www.disc4u.co.kr) 홍성식 기자
<기고> 유기홍 의원 에다가와 조선학교 방문기
수학여행을 백두산과 한라산으로
지난 6일 세 번째로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방문했다. 2005년 7월의 첫 방문은 도쿄 이시하라 지사의 말도 안 되는 행정소송으로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였고, 2007년 3월의 두 번째 방문은 14억 원만 내면 학교운동장 점유권을 인정하겠다는 재판 화해권고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지금 한국에서는 14억 원을 마련하기 위한 에다가와 조선학교 모금회가 발족해 한참 국민모금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방문은 국회 차원에서 모금 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진척시키기 위한 길이었다. 이번 방문은 내가 간사로 일하는 국회 연구단체 교육에서 희망을 찾는 국회의원 모임 이름으로, 이미경 대표와 강혜숙 의원, 이계안 의원과 함께 했다. 6일 오후 2시경,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한국과는 달리 에다가와 조선학교 운동장에는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학교부지가 넓지 않아 교문에서 교실 입구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20여 걸음이면 충분한 이 곳, 아이들은 여전하다. 수업이 일찍 파한 저학년 여자아이 둘이 그네를 타고, 남자아이 서넛이 무엇을 하는지 운동장 흙바닥에 머리를 잔뜩 숙이고 놀고 있다. 이 아이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도록 학교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이 맴돌 뿐이다. 학교 건물에 들어서면 한 눈에 띄는 눈에 익은 글씨체의 글귀가 벽에 걸려있다. 백두한라라고 적힌 시원스런 붓글씨는 신영복 선생님이 선물한 것이란다. 그 아래 물 흐르듯이 적힌 진달래 꽃길따라, 불타는 단풍따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한라까지는 실제 에다가와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바람 그대로이다. 송현진 교장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아이들의 수학여행을 백두산, 한라산에 모두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시고, 학교 가까이 불고기집을 운영하는 학부모님도 "그게 진짜 통일교육이다"라고 강조하지 않았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란다
바로 아이들이 있는 교실의 수업을 참관했다. 저학년 교실 뒷면에 붙은 시간표에는 국어 수업이 유독 많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4,5세 동포 아이들은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어 우리말에 서툴기 때문이다. 또 아이들이 서툰 우리말로 적은 자기 소개글과 그림이 빼곡하게 뒷면을 채우고 있다. 6~7년 동안 일본말만 사용하다가 들어온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이곳의 선생님들은 참 대단하다. 학교운영비를 절약한다며 학생들의 통학버스를 직접 운전하시는 송현진 교장선생님이며, 일요일 밤까지 신입생ㆍ졸업생에게 달아줄 꽃을 수작업으로 만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 없다. 2시 30분 수업이 모두 끝나자 학생들이 소강당으로 내려왔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선물 두 가지를 꺼내들었다. 에다가와 조선학교 모금회 발족식에 맞춰 입었던 티셔츠를 꺼내들자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이 좋아한다. 초등학교 아이들 치수로 더 가져오라는 즐거운 명령(?)도 떨어진다. 3억 원 상당의 컴퓨터로 이용할 수 있는 교육용 자료도 전달했다. 작년에 KTF와 아름다운 재단에서 기증한 20여 대의 새 컴퓨터를 기억하고 준비해온 선물인데, 아이들 교육 자료로 쓸모가 있길 기대해본다. 간단한 증정식을 끝내고 한국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모금회 발족식 비디오를 함께 보았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신나한다. 지난 5월 25일 발족식 행사에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아이들 여럿이 이지상 가수의 이것이 우리학교란다라는 노래를 중창했는데, 에다가와 조선학교 학생들이 이 노래를 모두 외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 새 합창으로 노래가 끝나고 앉아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울컥해지고 먹먹해졌다. 우리가 지난 60년 동안 방치한 재일동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언론을 통해 에다가와 조선학교 문제가 많이 알려지면서, 조선학교 교사를 하고 싶다며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 한국 관광객 중 일부가 불쑥 학교를 방문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메일 답장을 쓰다보면 손가락이 저린다는 교장선생님의 장난 섞인 말에 민족교육을 지켜나가고 있는 에다가와 학교를 지키는 데 장벽은 없다는 생각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여전히 낡은 학교, 여전한 차별 속의 우리 아이들
그러나 2005년 7월에 처음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물 새는 천장, 겉 페인트가 다 벗겨진 농구 골대, 점점 줄어드는 신입생 수, 도쿄도와의 갈등은 여전했다.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 변한 것은 없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는 의미일 것이다.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일정은 짧지만 의미 있게 마무리됐다. 찾아간 사람, 반겨준 사람 모두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민간차원의 국민모금이 더 활발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재일동포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일본사회에서 없어질 수 있도록 일본정부에 요구할 법적 조치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선학교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해 어떠한 교육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은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하고, 어떤 분은 기꺼이 모금을 내주시고, 어떤 분은 에다가와 학교를 위해 학교설계를 해주신다고 한단다.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