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료일요철학강좌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습니다. 신진현 교수가 철학용어를 설명했습니다.
“우리들은 말을 사용합니다. 이제 이 말들을 언어라고 부르겠습니다. 언어에는 단어가 있고 그 단어들이 모여서 문장이 됩니다. 이렇게 단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문장에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여러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장은 겅험을 통해서 형성한 현실에 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장 속에서 언어적인 어떤 규칙성을 찾아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문법이 됩니다. 따라서 문법은 경험적인 사실에 대한 언어들의 규칙성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문법은 언어<과학>의 대상이 됩니다.
이제 논리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논리는 사고의 영역에서 이치를 따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논리는 현실적인 언어사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규칙성을 찾아내어 문법으로 정리하였듯이, 이제 사고 과정에서 규칙과 법칙 같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를 개념으로 바꾸어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개념이란 ‘무엇이라고 말하면 딱 떠오르는 그 정도의 생각들’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산골사람’ 이라고 말하면 마음속에 어떤 내용이 떠오릅니다. 또 우리가 ‘순박하다’라고 말하면 마음속에 어떤 내용이 떠오릅니다. 이런 것을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개념에는 ‘주개념’과 ‘보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두 개가 서로 함께 있을 때, 주인역할을 하면서 앞에 있으면 주개념이고 주인을 도와주면서 뒤에 있는 것은 보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 술어라는 말에 익숙해 있으므로 앞으로 보개념을 술어개념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개념과 술어개념이라는 말을 정했습니다. ‘산골사람은 순박하다.’라고 말할 때, 주개념은 산골사람이 되고 술어개념은 순박하다가 되겠습니다.
판단이란 ‘두 개념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개념과 술어개념간의 연관관계를 확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판단에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있습니다. ①분석판단은 술어개념을 주개념에서 끌어냅니다. 주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술어개념을 끌어냅니다. ②종합판단은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고 경험을 통해서 발견한 것입니다. 경험해보니 철수는 힘이 세다, 영희는 목소리가 크다 등과 같은 문장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종합판단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판단입니다.
①‘삼각형은 세 변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다.’ 라는 명제를 보겠습니다. 삼각형이라는 이 말 속에는 ‘세 변, 세 각, 도형’ 등의 개념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즉, 누가 삼각형이라고 말하면 그 말 속에는 세 각, 세 변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분석적입니다.
②‘한국사람은 부지런하다.’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한국사람이라는 말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끌어올 수 있을까요? ‘부지런하다’라는 말을 집어낼 수 있습니까? 사실 이 부지런하다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안 것이지 원래부터 한국사람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부지런하다’라는 판단은 분석판단이 아니고 종합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분석판단은 주개념 속에 바로 술어개념이 들어있으므로 논리 안에 있습니다. 즉, 현실 속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고 그냥 우리의 사고 속에서 확인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석판단을 ‘분석적, 필연적, 선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주개념을 분석하면 자연히 술어개념이 나오기 때문에 분석적이고, 주개념이 사전적인 뜻풀이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바로 그 뜻대로만 사용되기에 필연적이고, 현실 생활에서 경험하여 확인하지 않고 그냥 현실 경험에 앞서기 때문에 선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비해서 종합판단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줍니다. 과학에서 찾아낸 많은 법칙들은 우리의 삶과 환경에 대해서 유용한 새로운 정보를 줍니다. 과학의 온갖 법칙들이 기술에 적용되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따라서 모든 내용과학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정도입니다.”
여기에 이르자 청강생들은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개념, 주개념, 술어개념, 분석판단, 종합판단 등의 말을 듣고서 그 말들을 모두 이해하자니 머리가 좀 복잡해졌습니다. ‘지혜사랑’ 스터디그룹의 네 사람도 신교수의 강의가 다소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신교수가 강의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쯔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에 대한 구분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라이프니쯔는 모든 참인 판단은 언제나 분석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참인 명제에는 술어 또는 술어개념이 주개념 속에 함축[내포]되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쯔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관념은 감각된 경험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지성 속에 본유(本有)되어 있다>라고요. 데카르트는 많은 관념이 밖에서 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이렇게 라이프니쯔가 말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모든 관념이 원래부터 우리의 지성 속에 본유되어 있다면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사실 그것은 일정한 상황에서 거기에 알맞은 관념을 기연(機緣)하여 다시 떠올리는 것일 뿐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라이프니쯔는 다음을 말했습니다.
1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명제이다.
2 모든 참인 명제는 술어개념을 주개념 속에 포함하고 있다.
3 모든 관념이 원래부터 우리의 지성 속에 본유되어 있다.”
성수와 현수와 영한과 재욱은 신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서양학자들 중에서도 본유(本有), 기연(機緣)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신교수의 강의가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유란 강제없는 상태이다.‘라고 불렀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말이 참인명제이고 분석명제라면 어떻게 ‘자유’라는 말 속에 ‘강제없음’이라는 개념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모든 관념이 원래부터 우리의 지성 속에 본유되어 있다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서로 다른 임의의 두 개념을 연결시켜서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놓고서 이 명제가 주개념 속에서 술어개념을 Rm집어 낸 분석판단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제가 과제로 내 드린 것을 보겠습니다. <신(神)의 경우에는 무한히 분석적이기 때문에 (신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 그냥 다 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교수의 강의가 모두 끝났습니다. 성수와 세 사람은 벤치에 앉아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현수가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개념입니다. 인간은 자꾸 의도합니다. 인간은 자꾸 알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자꾸 의도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보다 더 큰 지성이 있어서 보다 작은 지성을 이끌고 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작은 지성을 이끌 보다 큰 지성, 그런 점에서 요청된 것이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무한히 분석적이라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결국 논리의 측면에서 그냥 요청된 개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있는 그 무엇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언어나 이미지로 사유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이, 본질 그 자체로 볼 줄 아는 존재 -신- 를 요청한 것입니다.”
영한이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이란 단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요청된 논리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 누가 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걱정거리를 풀기 위해서 고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마침내 그 사람은 어떤 해답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그 해답이란 것이 그가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중에 생겨난 해답이 아니고, 본래부터 저기 앞자리에 있었던 해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들면 본래부터 저기 앞자리에 있었던 해답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신의 정신 속에 자신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또는 신의 정신을 자신이 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시간, 공간 속에 사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분석을 요하고 노력을 요하고 경험을 요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 속에서 시간, 공간을 넘어선 신의 정신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안 모든 것들은 결국 신의 정신 속에서 조망된 것이었습니다.”
재욱이 말했습니다. “영한이의 말 대로하면 이런 생각이 들어. ‘저기 저 돌도 신의 모습이다.’ ‘저기 저 나무도 신의 드러남이다.’ 왜냐하면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신의 정신 속에서 안 것이니까, 왜냐하면 뒤돌아보면 나의 앎이 이미 저기에 있었기 때문이거든. 신의 정신이 조망하고 있었던 것을 내가 인간의 정신으로도 본 것이니까.”
성수가 말했습니다. “저는 신(神)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사용되는 것을 보고 좀 답답해졌습니다. 철학에서 논의되는 신이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지식이 쌓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에서 사용하는 신은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신에 대한 지식이 쌓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인 신을 가지고 와서, 그 신에게 논리의 영역에서 분류된 분석판단과 경험판단의 기준으로 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니까, 우리가 그 뜻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문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은 무한히 분석적’이라는 명제는 논리의 영역 안에서 사고해야 하고, 이 말을 현실에 적용하여 바로 이 현실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사람의 말이 모두 끝났습니다. 누구의 생각이 보다 이치에 합당한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신(神)의 경우에는 무한히 분석적이기 때문에 (신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 그냥 다 안다.> 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 채 헤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성수는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했습니다.
첫댓글 고요님, 더운데 어떻게 지내세요
건강 유의하세요. .. 고맙습니다. 
엣날에 대학에서 철학강의 들은 노트 남은 것을 펴보고 읽어봅니다. 그리고 불교 동영상 강의 듣고 , 그리고 아비담마 길라잡이 책을 좀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있는 많은 나쁜 버릇들을 없애려고 하는데 이것은 잘 못해내고 있습니다. 잊지않기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래글부터 제게 댓글을 써주셨는데 저는 일일이 다 답변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은 자기가 쓴 글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그점에서 잊지않기님으로부터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고맙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잊지않기님께서도 제가 일일이 답변안해드려도 마음상하시지 않을 것 같아서 제가 답변드리지 못했습니다. 남으로부터 답변을 못 받아도 저는 이제 잘 참아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잊지않기님께서도 자신이 쓴 댓글에 누가 답변하지 않더라도 잘 참아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위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저도 저를 이끌어주신 화엄의 몇 분을 위해서 글을 쓰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사실 글쓰기가 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테지만요. 저도 힘들때면 화엄에 계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지키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고요님 고맙습니다. 저는 올릴 글이 없어서 못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요님의 한결같음에 많이 자극받고 배우고 있습니다. 혼자서 공부하시기 많이 힘이 드시죠? 저도 많이 힘들고 외롭습니다.
왜 외로운가 하면 주변에 '불법'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어떤 할머니와 자주 기독교방송에 목사님 설교를 듣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일단 재미가 없더군요. 저희집은 흙집이라서 안은 시원한데 바깥은 엄청 덥네요. 그럼.. 이만
기독교인이 되는 그리고 불자가 되는 각각의 성향이 있는거 같아요. 저는 기독교인들에게 호불호 보다는 무언가 이질감이 일어나거든요 ... 그런데 잊지않기님이 기독교 방송의 목사님 설교를 자주 들으신다고 하시니 의외인데요 ...저도 목사님 설교는 재미가 없어요 ...감동도 없고 ... ... ...불자들도 성향이 각각인데 비슷한 성향을 가까운 곳에서 만나기는 어려운거 같아요 ...
네, 불자들의 성향이 각각이죠. .. 또.. 뭐 .. 굳이 불자라고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다른분들을 보면 저랑은 취향이 너무, 너무 달라서 .. 아마 제가 별스러운 것이겠죠.
저는 남아 있는 철학노트도 보고 동영상강의 들은 것을 적어놓기도 하고 아비담마길라잡이 책도 보고 방문객님의 글도 보고서 그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쓰니까 지금까지 글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잊지않기님께서 글을 쓰시려고 너무 마음에 부담을 갖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불법'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외로움의 이유를 밝혀 주셔서 우리 모두 그나마 안심했습니다. (어쩌면 불법에 관심가진 이웃이 없다는 것이 수행면에서는 더욱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날씨가 더우면 주로 선풍기를 틀어서 있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요님 글 올려 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저에게도 많은 자극이 된답니다.
아! 별님이 와서 너무 좋다. 아마 휴가 다녀오셨죠?
이번에 전라도 쪽으로 갔다 왔는데요 ...송광사와 선암사를 갈려고 했는데 ...너무 짧은 일정이라 ...어떻게 하다 보니 ...보성에 있는 대원사만 갔다 왔어요 ...대원사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다웠는데...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되었다고 해요...전라도 쪽 절은 제가 두번째 가 보는건데 ...(쌍계사가 전라도에 속하나요? 그러면 세번째구요 ...) ...대원사도 그렇고 몇년전에 가본 절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꽤 큰 고찰이었는데 그 절도 그렇고 ...신도가 거의 없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요 ...어떻든 잘 유지되어서 불법의 연이 되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잊지않기님은 조용하고 시원한 곳을 갈 필요가 없으시죠...? 지금 계시는 곳이 조용하고 시원한 곳이니 ...너무 부럽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