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상대주의는 만능인가?
● 문화상대주의의 의의
문화는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인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를 비교하더라도 언어, 음식, 주택, 옷차림 등에서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각 사회가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 직면하여 왔고,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여 나름대로 독창적인 생활 양식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중략)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물고기 중에서도 비늘이 있는 것만 먹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타스마니아 족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처럼 생선을 날로 먹는 곳이 있는가 하면, 베트남처럼 개를 식용으로 하는 곳도 있다. 태국에서는 멘다라는 벌레 튀긴 것을 즐겨 먹는다. 이처럼 한 사회의 독특한 문화 특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그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사회·문화(지학사, 이진석 외2인)』중에서 -
지역들 간의 교류 또는 나라들간의 교류는 인간의 문화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들 또는 나라들은 서로 다른 문화, 즉 서로 다른 가치와 행위 양식을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도인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쇠고기를 먹지 않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쇠고기를 먹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서구인들은 키스나 포옹을 친밀감을 표현하는 몸짓으로 여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적인 표현으로 여기면서 어색함을 느낀다.
이처럼 지역이나 나라에 따라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각각의 문화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을 ‘문화 상대주의’라고 한다.
-『사회학(한울아카데미, 산업사회연구회)』중에서 -
● 문화 상대주의의 한계
한편 문화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고유한 삶의 양식이라고 할 때, 각각의 문화들은 그 다양성 속에서도 어떤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물과 달리 체계화된 언어 또는 의사 전달 수단들을 사용한다거나, 다양한 생산도구를 발전시키고 있다거나, 결혼제도, 자녀 양육을 위한 가족제도, 종교적 의례, 춤이나 음악 같은 예술적 양식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들은 어느 문화권 속에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점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보편성도 동물들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유적인 보편성을 띠는 것이지 그 구체적인 양식들에 있어서는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문화의 보편성은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식인이나 순장 같은 비인간적인 풍속을 문화상대주의의 논리에 기반하여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화상대주의란 모든 문화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해하자는 주장이지 비인간적인 문화까지를 용인하자는 주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인권의 보편성 또는 동등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문화 상대주의는 아무런 긍정적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사회학(한울아카데미, 산업사회연구회)』중에서 -
요르단에서는 혼외 정사를 한 의혹을 받고 있던 누나(22)를 남동생(19)이 “가족의 명예를 씻겠다.”며 목 졸라 살해한 적이 있었다.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외간 남자와 가깝게 지냈거나 간통을 했다는 혐의를 받으면, 아내를 소유물로 보는 남편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아내를 살해한다. 그리고 무죄로 풀려 난 후 주변 사람들의 위로를 받는다. 때로 18세 이하인 살인자는 가족의 명예를 지킨 영웅 대우를 받기까지 한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서안에서 발생한 다수의 살인은 ‘명예’를 위한 여성 살해였다.
위의 사례는 이슬람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적으로 인정된 명예 살인(honor killing)’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문화적 특수성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회와 문화가 달라도 모든 인간 사회에는 자유, 인권 등 보편적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문화의 상대성이란 다른 사회의 문화를 이해할 때, 편견과 고정 관념을 배제하자는 것이지 어떤 사회의 문화든지 다 좋고 옳다는 뜻은 아니다. 명예 살인이라는 이슬람 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류 문화가 가지는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태도이므로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문화 현상에 문화 상대주의가 적용될 수 있으려면 그 문화 속에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가령 불합리한 신분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신분 차별은 우리의 문화이며 인권이라는 가치는 우리 문화와 무관하다. 따라서 우리 문화를 서구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 상대주의를 극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지학사, 이진석 외 2인)』중에서 -
● 생각해 볼 문제
1. 문화상대주의와는 다르게 문화를 자신들의 규범과 가치를 표준으로 삼아 다른 문화를 평가하려는 태도를 자문화 중심주의라고 하고, 다른 사회의 문화를 숭상하고 자기 문화를 비하하는 태도를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사례를 각각 하나씩만 들어 보라.
2. 아래의 사례는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해서 파악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해야 하는가? 500자 이내로 서술하라.
왜 카렌족의 한 부족인 파동족들은 여인들의 목을 징그럽도록 길게 만들까? 그들은 여자로 태어나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목에 쇠고리를 끼워 넣어 목을 늘인다. 이와 같은 야만적인 목 늘이기는 여자 나이 17-18살이 되어 시집을 갈 때까지 계속된다. 목뼈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목뼈의 연결고리가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쇠고리로 목과 머리를 받치고 살아야 하며 만약 목에 끼운 두꺼운 쇠고리를 빼어내면 머리가 아래로 처져서 금방 질식해 죽어 버린다. 그들은 전통 풍속으로 그와 같이 육체적인 기형을 만들고 사는지는 몰라도 인도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면 파동족 여인들은 일생을 천형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자의 목에 고리를 끼워 길게 만들면 목을 좌우로 돌릴 수가 없어서 앞만 바라다보게 되므로 일생동안 곁눈질을 하지말고 앞에 있는 남편만 보고 살라는 잔인한 발상에서 나온 풍속이다. 그래서 목이 길수록 정절이 있는 여자라고 소문이 나서 청혼을 많이 받게 된다
고 한다.
살원강변의 파동족 마을을 찾은 필자는 어린 소녀들이 자기들의 목을 늘려 기형을 만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몰래 접근을 했다.
“얘들아! 부모들이 강제하더라도 절대로 목을 길게 늘이면 안 된다. 그래야만 나중에 어른이 되서도 인간대접을 받는다.”
“뭐라고요?” 소녀들의 눈망울이 의혹스럽게 변했다.
“제발 목을 길게 만들지 말라구” 그러나 곧이어 소녀들의 대답을 들은 필자는 다시 한 번 절망을 했다.
“우리들이 좋아서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소녀들은 자기네들이 파동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관광 상품으로 팔려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체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옆에서 목에 감은 긴 쇠고리 때문에 머리를 구부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세운 채 바느질을 하며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파동족 여인들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그날따라 귀로에 오른 필자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김병호의 문화체험 - 소수민족열전, 파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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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래의 글을 읽고 문화 상대주의의 의의와 한계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들’을 만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와 ‘그들’사이의 차이는 없앨 수도 없고, 없앨 필요도 없다는 태도다. 이것은 특수주의 또는 문화적 상대주의라고 부를 만한 태도다. 두 번째는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피상적인 것이며, 인간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보편주의적 태도다.
그러나 이 두 태도 모두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에 대한 적절한 처방이 되지 못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흔히 휴머니즘과 한 묶음으로 거론되는 보편주의가 그 처방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보편주의는 그 실천적 국면에서 모든 것을 획일화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중심주의로 귀착하기 쉽다. 특히 유럽인들이 내세웠던 보편주의는 흔히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당의로 작용했다.(중략)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치가 가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낯선 것을 보편에서 제외시키는 이 자기중심주의는 휴머니즘의 탈을 쓰고 야만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식민주의로 발전한다. 또 보편주의는 과학주의와 등을 맞대고 있다. 과학주의란 과학적 지식이 보편적 도덕을 정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다. 이 과학주의에 따르면 모든 문화적 차이는 이성의 제단 앞에서 말살돼야 한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부당하게도 흔히 사실을 가치와 동일시한다. 20세기의 가장 흉측한 체제였던 나치 체제와 스탈린 체제는 이런 과학주의에 바탕을 두고 구축되었다. 한쪽에선 우생학이 과학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역사적 유물론이 과학이었다. 과학주의에서 전체주의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상대주의가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인종적·문화적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일종의 신인종주의로 귀결한다. 상대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
곧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에다가 서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차이의 권리’는
교묘하게도 ‘권리의 차이’로 전복된다. 이것은 ‘선의의’ 식민주의자들이 지닌 순진한 보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인류의 단일성과 가치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차이를 특권화함으로써 그들은 자아로의 퇴각과 소통의 부재와 타인의 배제를 부추긴다. 그러니까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주의자들처럼 보편적 가치들을 포기하는 순간 화해의 기본 원리인 톨레랑스나 상호존중이 존재 근거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바람직한 지점은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중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구체라는 것의 끈을 놓지 않는 태도다. 결정론과 추상성과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된 이런 보편주의를 열린 보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열린 보편주의는 인간을 문화로도 생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거기서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의지를 읽는다.
-『코드훔치기(마음산책, 고종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