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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흰 모자를 쓰고 있었던 꾸청. 유럽의 대학이나 뉴질랜드의 대학등에서 강의를 할 때도 거의 이런 모습이었다>
얼핏보면 요리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꾸청을 환상의 나라 즉 동화의 나라의 왕자로 보았던 것이다.
내 눈에는 요리사 모자이고 그런 모습으로 보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이 천재시인에 관한 선배시인 북도 즉 베이다오의 그나마 번역을 하면 겨우 시같아 보이는 그의 대표시를 보면 같이 공동시집도 내었던 둘과의 관계를 대충 알수가 있다.
청년시인의 초상
소매부리가 잡아당기는 영감은
다 끝나지 않았다, 너는
밤낮으로 긴 문장과 뒷골목을
돌아다닌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늙어 있었지
영웅심은 여전히
머리 벗겨진 모서리를 따라 자라고
틀니를 뽑겠지만 말이야, 너는
정말 어린애 같아
...생략...
물론 이 시는 북도가 꾸청을 대상으로 놓고 쓴 시는 아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 시를 읽으면 꾸청의 모습이 어느 정도 떠오른다.
후배시인인 꾸청을 매우 칭찬했고 동경했던 북도...
결국 꾸청은 젊은 나이에 틀니 아닌 틀니를 뽑은 어린애 같은 철부지 인생을 살고 말았던 것이다.
비극적인 인생을 말이다...누가 천재 아니랠까봐 말이다.
38살의 나이에 자살한 시인 꾸청(顾城)의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괴롭다. 그의 인생이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디 젊은 시인이 본국에서는 몽롱시로 일대 파란을 일으키더니 타국에서 애인을 도끼로 찍어죽이고 자신은 자살을 했으니 말이다.
꾸청은 중국에서는 북도(北島) 즉 베이다오와 함께 대표적인 몽롱시 시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나이가 많은 사실 시는 별로 돋보이지 않는 평범한 북도는 그렇다 치고 나이가 젊은 꾸청은 그 천재적인 역량을 발휘하면서 몽롱시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천재적인 일생을 담은 영화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바로 꾸청[顾城(1956- 1993)]의 일생을 그린 영화 《꾸청의 이별과 사랑(顾城别恋)》을 말이다.
한국에서는 언제 볼수 있을까.
그의 산문은 접근이 어렵다. 내가 일전에 한국에서 나온 그의 산문책을 읽다가 던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 읽지 못했다.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 바로 그의 산문집이었다.
내용이 황당하기도 했고 읽기에 거북스러운 자기만의 스토리였다.
그런 그의 책중에서 그의 시는 읽을 만 했다.
번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는 그의 시로 유명했다.
같은 몽롱시였지만 베이다오가 꾸청의 시에 비해서는 시로서 별로 유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뉴질랜드 북쪽의 한 작은 섬을 배경으로 마지막 인생을 살아가던 꾸청과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이 있었고 그리고 그를 좋아하며 두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내던 한 여인 ‘잉얼(英儿)’이 있었다.
꾸청의 시의 제목과도 같은 연인이 있었고 그림같은 생활을 즐기면서 몽롱한 상태에서 삶을 살았고 또한 몽롱한 정신상태에서 살인을 하였고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의 삶은 중국에서도 몰이해속에서 살았지만 해외에서도 역시 몰이해속에 살았다. 천재의 비극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도 해외에서 꾸청의 시를 읽고 좋아했었다. 중국의 북경에서 그의 시집을 샀고 길림에서 역시 그의 시집을 사서 중국말로 읽었다.
그리고 시를 다 외웠다.
그래도 좋을 시인이었다.
시을 다 외울 정도로 좋은 시인은 백석이었고 그 다음이 꾸청이었다.
그만큼 시풍은 낭만적이었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꾸청의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즐기기만 했던 시였건만 해외에서는 매일 한문으로 된 그의 시를 외우다시피 하였다.
그것이 낭만의 힘이고 외국풍의 에조틱한 멋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젊다는 것 말이다. 그런 젊은 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꾸청의 시는 더욱 자극적이고 세뇌적이다.
꾸청은 말 그대로 몽롱시의 대표시인이고 당대의 낭만주의 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그의 시는 아이들처럼 천진한 풍격과 몽환의 정서를 갖고 있었고 그런 시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
직감과 인상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쉬우면서도 편한 시를 많이 썼다. 영탄 섞인 동화 속 소년생활을 엿보이게 할 정도의 시의 맛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천재적인 면모를 보인 시는 참으로 많다. 그러나 가장 회자되는 시가 있다.
백석의 시처럼 짧은 시가 그의 진가를 발휘하기에 더욱 충분했다.
단 두 행으로 이뤄진 시《일대인(一代人)》말이다.
“어둠은 나에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통해 광명을 찾는다 ”
이 시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현대시의 짦은 경전이 되고 있다.
북도는 1949년에 태어나서 1980년대의 문을 연 시인이다. 그러나 꾸청은 1956년 9월 24일에 북경에서 태어나 1980년대의 몽롱시를 일대개혁을 하듯이 활짝 문을 연 시인이 되었다.
지금도 별볼일이 없는 북도는 살아있지만 천재적인 꾸청은 이미 죽었다. 38살의 나이에 죽은 것이다.
시처럼 문학처럼 그림처럼 그는 죽은 것이다.
그는 한때 화가를 꿈꾸었다.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던 시련은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문혁이 일어나던 해인 1969년에 비판을 받아 산동성 광베이(廣北) 농장으로 쫓겨간 아버지 꾸공(顾工)을 따라 그도 정처없는 방황을 하였다.
꾸청은 13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돼지를 키웠다. 그리고 그 시절 그가 접한 것은 그림이었다.
1973년부터는 그림을 배우다가 중도에 싫증을 느껴 포기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튼 꾸청은 1974年 북경으로 돌아와 운반공과 목공일을 하며 가끔 차출되어 편집을 도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환경이 만들어낸 예비작가이기도 했다.
문혁이 끝나면서 한 때 낭만적인 표류생활을 하면서도 21세인 1977年《민들레(蒲公英)》라는 시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이미 새시대를 준비하는 시인으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12월 중국에서 삼중전회가 막을 내리면서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을 때 그 시기에 탄생된 《계몽》이라는 잡지가 창간이 되었고 마침내 북도(北島) 중심의 잡지 《금천》이 창간이 된 것이다.
특히 베이다오는 꾸청을 끌어들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몽롱시파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꾸청의 24세이던 1980년엔 《별들(星星)》이라는 잡지에 <일대인(一代人)>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노골화되었다.
한마디로 베이다오가 민주화의 시가운동이라는 돗자리를 펴놓은 곳에 꾸청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를 했던 것이다.
이 짧은 시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시 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북도 같은 시인들이 있는 평범한 시단에서 꾸청은 시단의 강렬한 반향과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몽롱시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인기를 끌 무렵 진부한 느낌의 중국 공산당식의 할일없는 그런 직장은 해체가 되었다. 이는 그에게 더욱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꾸청은 각지의 문예지에 글을 기고 하였다. 그리하여 《금천》동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베이징문예(北京文艺)》,《산동문예(山东文艺)》,《소년문예(少年文艺)》등에 시를 발표하며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몽롱시의 영수가 되었다.
아이칭(艾青)과 수팅(舒婷)은 그의 아류에 불과할 정도로 꾸청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꾸청은 이렇게 몽롱시에 대해서 말했다.
"나와 친구들은 줄 곧 몽롱시의 표현법 자체가 몽롱하다고 생각한다. 몽롱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볼 때 그것은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것이요', '달이 나루터를 미혹하는' 느낌을 말한다.
현대 이론에 따르면 이는 시의 상징성, 암시성, 심오한 이념, 중첩된 인상, 잠재의식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설명이 어느 정도의 법칙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새로운 시의 중요한 특징을 파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감이 있다.
이 새로운 시의 특징은 진실에 있다고 봐야 한다 - 객체의 진싱에서 주체의 진실, 피독적 반영에서 능동적 창조로 이행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해 그것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심미의식의 깨달음이며 어떤 점에 있어서는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1985년 그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87년엔 구미문화교류방문단에 끼어 창작 강의 활동을 하다가 해외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1988년엔 뉴질랜드로 가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오크란 대학의 아시아언어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곧 사직하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한편 1992년 그는 독일학술교류중심(DAAD) 창작기금을 받으며 잠시 독일에서 시작생활을 시작했으나 그때가 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학구적이지 못했던 꾸청은 현실과 이상사이의 갭을 허물지 못한 탓에 독일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그마저 사직하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 뉴질랜드 북방의 한 작은 섬으로 들어가 다시 은둔생활을 했다.
시인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시를 쓰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꾸청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면 그냥 고향인 중국에서 교편이라도 잡았어야 했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외국물을 먹고 또한 아내 외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둔 꾸청은 나날이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앖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정불화였다. 애인을 제목으로 시인지 소설인지를 쓴 것도 사실은 문제였다.
하여튼 근 일 년 만에 생활고와 심약한 그의 정신상태 등을 이유로 그의 아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하자 생의 무능력한 상태에 빠진 꾸청으로서는 역시 참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93년 10월 8일에 급기야 꾸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수같은 아내를 도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꾸청에게는 아내가 은인이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잉얼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원수이기도 했다.
생활은 아내가 해 주지만 사랑은 잉얼이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도끼만행 사건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황제급의 시인으로서는 도저히 할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행동한 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그의 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시《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我是一个任性的孩子)》는 국내에서는 "나는 제멋대로야"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기도 하였다.
몽롱시의 대표시인 베이다오(北島)도 꾸청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비천함은 비천한 이들의 통행증이 되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 될 때, 꾸청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서툴지만 ‘자유’를 찾아내고 있다.”
꾸청과 같이 시집을 내기도 했던 베이다오는 시 <회답>에서 눈동자를 강조했는데 같은 금천의 동인이었던 꾸청은 <나는 눈을 깜빡거린다>로 눈동자를 주요 시제로 삼아 화답을 할 정도였다.
아래는 1980년에 발표한 꾸청의 시다.
나는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굳건히 믿는다.
내 눈은 맑아지지 않을 것을
무지개
분수 속에서 헤엄치고
온유하게 행인을 바라본다
내가 눈을 한번 깜박버리자---
곧 뱀 그림자로 변했다
시계
교회당에 머물고
조용히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내가 눈을 한번 깜박거리자---
곧 깊은 우물로 변했다
빨간 꽃
은막 위에서 터지고
흥분한 채 봄바람을 맞이한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자---
곧 피비린내로 변했다
굳건한 믿음 때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결국 꾸청은 베이다오의 말대로 몽롱시의 황제답게 고상함으로 결국 그의 묘비명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매체에선 꾸청의 제멋대로의 행동에 대해서 결국은 “꾸청이 도끼로 부인을 살해하다”라고 거의 또라이식으로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화시인이었던 꾸청이 악마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살인자가 되었다고 보도할 정도로 그의 돌출생동은 큰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천재시인이었다. 그의 누나는 꾸청의 모든 것을 수습하여 장래에 돈이 될 것을 파악하고 간수를 했다. 그리고 꾸청의 복권을 위해 노력을 했다.
물론 사후 일부 악의적인 범죄자로서의 꾸청의 모습은 그 누명은 벗겨졌다. 그것은 누나의 역할이 컸다.
[꾸청의 누나 꾸샹(顾鄕)은 “꾸청 최후의 14일”이라는 기획물에서 말하길,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도끼는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대의 황제급의 시인의 죽음과 그가 일으킨 도끼만행 살인사건의 참혹한 참상은 아직도 중국인들에게나 꾸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들이 죽기 몇 달 전인 1993년 3월에 그들 부부는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문인들을 만나고 꿈에 부풀어 다시 독일을 거쳐 뉴질랜드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영화의 한장면 같았다.
꾸청의 아내 시예예와 꾸청은 1979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4년간 연애를 하다가 1983년 결혼했다.
1987년 같이 조국을 떠나 자살을 할 때까지 그의 아내 시예예는 남편인 꾸청의 잦은 실직과 이사 때문에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녀는 꾸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꾸청이 꿈을 꾸듯이 사랑하고 쫓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꾸청을 쫓아다니며 함께 살기도 했던 여인 ‘잉얼’ 때문이었다. 시예예는 잉얼 등으로 많은 심리적 고초를 견뎌내는 중에도 최대한 관용과 미덕을 겸비했던 여인이었다.
꾸청이 해외를 다닐 때는 시예예도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1992년 6월에 네덜란드에서 강의를 할 때도 1992년 12월 독일에서 강의를 할 때도 꾸청은 변함없이 외국인들에게도 그는 신비한 ‘동화 시인’이었다.
그것은 꾸청이 쓰고 다니는 동화나라에 나오는 크고 높은 모자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꾸청은 독일에서 주는 안정적인 직업을 거부했다. 그리곤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와 뉴질랜드의 한 섬으로 들어가 닭을 키우고 채소를 키우며 살았다.
하지만 더이상 해외에서 활동하지 않을 때 위기는 닥쳐온 것이다. 계속되는 아내와의 갈등과 번민으로 인해서 결국은 둘은 이혼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극단의 자기 중심적이었던 꾸청으로서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 노릇을 해오던 그녀 시예예를 떠나가게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남주기는 아깝고 보내기도 아깝고 하니 화가난 꾸청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을 택한 것이다.
영화같은 이야기들이다.
꾸청의 인생 말이다.
그래서 나온 "꾸청의 이별과 사랑(顾城别恋)"이란 영화는 꾸청 자신이 남긴 《잉얼(英儿)》라는 소설 내용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꾸청이 최후에 보여준 광폭한 모습은 그의 시를 좋아해 쫓아다니던 한 여인 때문이라는 항간의 추측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밝혀진 상태다.
그 ‘잉얼’이란 여인의 실제 본명은 리잉(李英)으로 현재《시간(诗刊)》잡지사의 편집을 맡아보는 마이치(麦琪)라는 필명의 여인이다.
그러나 마이치는 꾸청이 죽은 후 그녀에게 남겨진 이런 꾸청의 실질적인 살해범이라는 오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아직도 거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12월 22일 뉴질랜드 경찰국을 통해 중국영사관에 전달된 그의 유서는 모두 네 통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아들 무얼(木耳)에게,..!
여기에는 죽은 아내나 사랑하는 잉얼에게는 유서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죽였기 때문에 따로 유서가 필요가 없고 잉얼에게는 아마도 잉얼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서를 작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전화통화를 했을 것이다. 유서대신 전화통화 말이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정말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유서를 쓴 것이다.
이 유서들은 사건현장에서 경찰이 취합하였고 그 유서를 토대로 꾸청의 살해동기와 자살원인을 분석하였는데 한마디로 꾸청은 인생이라는 길 특히 결혼이라는 길을 잘못 들었고 데 결국 길이 끊어진 막다른 곳에 스스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 무얼에게 만은 끝내 눈물을 보이며 아빠를 이해해달라는 문구가 있었다.
꾸청은 사진과 원고 등을 누이에게 부탁했으며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집이나 그 밖의 것 역시 아들에게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꾸청은 많은 시와 그림 그리고 산문등을 남겼다. 위대한 꾸청의 모습은 이제는 영화에서나 그의 시나 산문에서 볼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