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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의 네째 아들인 은열의 8세손 이며 동정공 봉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인조 때 평장사를 역임하고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명종때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여 일천호의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그후 금주에 김녕대도호부가 설치되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오다가 고려 말 지명이 김해로 바뀌면서 관향을 김해로 하였다. 그러나 수로계의 김해 김씨와 혼동되어 선김ㆍ후김으로 칭하다가 조선 고종 2년에 왕명으로 본관을 김녕으로 다시 환원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흥의 아들 상이 고려 인종 때 병부 상서를 지내고 평장사에 올랐으며 그의 동생 수는 사헌부 지평을 거쳐 찬성사에 추증되었다. 상의 증손 귀갑(貴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를 거쳐 밀직사사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순절하였다.
공민왕때 병부 상서를 역임한 정병은 상의 5대손으로 1361년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분성군에 봉해졌으며 광저(光儲)는 현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이렇게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명문 김녕 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시켜 가문을 빛나게 하였는데 그 중에 백촌 문기(文起)가 대표적이다.
그의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 김시홍의 9세손이고 호조판서 순의 손자이며, 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백지리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 1426년 생원시 및 문과의 대제과에 합격, 예문관 검열을 시작하여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주요관직을 두루걸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함경감사때는 학문을 널리 장려하였으므로 유림에서 생사를 세웠으며, 단종때 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관찰사와 도절제사 때는 둔전법을 실시하여, 공적이 컸다. 또한 한어ㆍ외어와 외교에 능숙하여 문무겸전한 실력을 높이 인정받아 공조판서겸삼구노진무직에 이르렀으며, 1456년에 내외종간인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城源) ㆍ이개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주동하다가 김질의 밀고와 동지들의 자백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는 아들인 현석과 함께 순절하였다.
영조 7년에 그의 9대손 정구의 송원으로 2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온갖 수난을 겪다가 1731년에 복관작되고, 정조2년에는 시호를 받고 승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고 1791년에 불천위의 부조묘에 재향하라는 왕명과 또 정려의 왕명이 내렸다. 사육신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보다 신원이 약 40여년간 늦었으며, 또한 남효온이 쓴 육신전의 오기로 사육신의 주동자이면서도 사중신으로 전해져 오다가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원래의 사육신으로 가결되어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가묘를 봉안하고 매년 10월 9일에 재향을 지내고 있다.
응수(應壽)는 판서를 역임한 복용의 아들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형제가 함께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에 올라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그의 노모를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충효공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 기남, 난생 형제는 병자호란때 순절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담양부사 언공은 정묘호란때 호남에서 의병을 인솔하여 진주성을 방어하고 섬진강의 적을 막아 방어사가 되어 노량대첩때는 충무공 진중에서 공을 세웠다.
이 밖에도 세조 때 병조 참판 구룡(九龍)과 중종 때 형조 판서를 지낸 경의(敬義)ㆍ선조때의 공신 준영(俊榮)등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제 4대 탈해왕(脫解王) 9년 봄, 어느날 새벽 경주 계림(鷄林)에서 이상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울창한 소나무 숲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가져와 열어 보니 뜻밖이도 용모가 비범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하늘이 내려주신 아들"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알지(閼知)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金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세성중의 하나인 바로 그 김씨 이다.
시조 김생명(金生溟)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금강위(金剛尉)를 지냈다.
간성군(杆城君) 길(吉)을 시조로 전해지는 문헌도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간성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함남 안변군 문산면 일원에 45호, 함남 안변군 신모면 용포리에 54호가 살고 있었다.
시조 김만추(金萬秋)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문과 급제자로 전하며 후손들이 본관을 감천이라 했다.
강릉 김씨의 시조 주원(周元)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그는 신라 혜공왕 13년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신라 선덕왕 6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서김씨
시조 김반은 자가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다. 그는 1399년(정종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05년(태종5)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선사(繕寫)하여 성균관 주부가 된 후 성균관에 40여년간 재직했다. 세종때 여러차례 대사성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으며, 만년을 강서(江西)에서 보냈다. 그의 선계와 관향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강릉으로, 거주지는 강서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강릉김씨에서 분적, 그가 살던 강서를 본관으로 한 것 같다. 강서의 학동서원(鶴洞書院)에 제향, 경북 영주군 풍기읍 창낙2동 915번지에 후손 김윤식이 살고 있다.
시조 김제(金濟)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할 뿐 연대와 사적은 상고할 수 없다. 한편 경주 김씨 계림군(鷄林君) 파조 균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선계를 설정하여 거주지인 강양(江陽:합천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하고 제를 시조로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 김처곤(金處坤)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김양묵(金養默)의 아들로 1768년(영조44) 정시문과에 병과로, 1800년(정조24)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음(江陰:金泉)으로 한 연유와 전후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손 김근오(金根五)가 조선 철종조에 진사, 김응룡(金應龍)이 서화에 능했다. 그 외에 찰방 정윤(正允)의 후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강화김씨(江華金氏)는 같은 신라계 김씨이면서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는 개성파(開城派), 김송학(金松鶴)을 시조로 하는 용천파(龍川派), 그리고 김광(金光)을 시조로 하는 숙천파(肅川派)등 세 파가 있는데 그 중 용천파와 숙천파는 같은 혈족이면서도 그 상계의 휘자(諱字)에 차이가 있어 일원화하지 못하고 족보를 따로 하고 있다.
시조 김현선(金玄繕)은 고려조에 장군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혹은 경주인으로 전할 뿐 세계를 알 수 없다.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에는 그가 개성김씨로 시조로 기록되어 있고,<개성김씨세보(開城金氏世譜)>에 고려조의 인물로 현기(玄器), 현덕(玄德)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 김현선은 그들과 형제간으로 개성김씨에서 분적,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개령(開寧)으로 한 것 같다.
개성 김씨 시조 용주(龍株)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한 후 개성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여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준(畯)은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며 준의 세 아들중 차남 지경(之慶)이 상서를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滉)이 조선 명조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아우 유(濡), 지(漬)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에 주둔하여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이라 불렀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로 상의원 별제에 이른 응환(應煥)은 정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일본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 부산에서 죽었다. 이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득신(得臣)은 인물화를 잘 그려 심사정(沈師 正)ㆍ정선(鄭敾)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로 불리웠고 그의 동생 석신(碩臣)은 풍속화로 유명했다.
결성김씨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이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녕김씨 시조 김시홍의 10세손 김연의 둘째아들 김예철의 후손으로 전하는 상주파 외에 <김씨분종보>에 의하면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결성으로했다. 평북 위원군 화창면 문명리에 살던 위원파는 6·25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유실하여 중간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인궤(金仁軌)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錘:善山金氏 시조)의 아들 위옹(渭翁:三陟金氏 시조)의 9세손 윤성(允成)의 맏아들로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좌복야, 상장군등을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육화(育和)를 1세조로, 본관을 경산(慶山)으로 하여 삼척김씨(三陟金氏)에서 분적했다.
고려 말의 김룡(金龍)은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 1세조 육화의 7세손이며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지낸 영수(英秀)의 증손이다. 그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녘으로 몽진할 때 중랑장으로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해적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교섭했다. 또 정료위(定遼衛)에 사신으로 가서 고가노(高家奴)와 수교를 맺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전고대방(典故大方)>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조에 찬성사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이(金怡)를 시조로 하는 춘양김씨(春陽金氏)가 있는데, 김이의 상계가 경산김씨의 시조 인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혈족이면서도 이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의 속현 촌양이기 때문에 사적(賜籍)지는 경산이나 출생지인 춘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양김씨가 경산김씨의 분적종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경산김씨가 문헌에 보인다.
김알지계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인 경주김씨는 파계가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서로 계통을 알지 못하는 분파를 포함하여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은설공(殷設公)파, 태사공(太師公)파,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영분공(永芬公)파, 호장공(戶長公)파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역사상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설공파와 태사공파가 으뜸이며,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재상과 3명의 왕비가 나왔다.
시조 김구사(金九思)는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17세손이다. 그는 숙천부사를 지내고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김종(金琮)의 손자로 벼슬은 승정에 이르렀다.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그가 계림김씨 시조로 되어있다. 1805년(순조5) 대전두후평복(大殿痘後平復)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경리(金璟履)의 본관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계림(鷄林)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경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으로 한 것 같다.
시조 남득(南得)은 고려때 전리좌랑을 지낸 선(宣)의 아들로 고려 충해왕 1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집의를 거쳐 공민왕때 양광도 안렴사를 역임하고 판개성 부사문하평리에 올랐다. 그후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에 책록하고 고양부원군으로 봉하여 득어영남지의라고 사명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득의 아들 무(畝)가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의 4명의 아들도 모두 벼슬에 올라 나라에 충성했다.
장남 사행(士行)은 세종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거쳐 사복시정, 둘째 사문(士文)은 사헌부의 집의를 역임했으며 사충(士忠)과 사신(士信)도 승지와 군수를 지냈다. 사행의 맏아들 자숙(子肅)은 세종 11년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형조참의에 이르렀고, 자숙의 아들 형생(型生), 장생(莊生), 양생(楊生) 3형제도 모두 벼슬을 역임했다. 장생의 아들 수는 중종 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군수를 지내고 진주목사를 거쳐 순천부사를 지낸 후 절충장군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남득(南得)의 6세손 수문(秀文)은 중종 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후 종성에 침입한 야인들이 사람을 납치해 가자 영달만호로서 역전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명종 10년 을묘왜변때는 제주목사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에 특진하였고 명종 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걸쳐 호인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고산김씨
시조 김환(金紈)은 윤옥(潤屋)의 아들로서 151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문적(文蹟)이 없어서 연원과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이 씨족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곡리에 29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고산김씨(高山金氏)는 황간김씨(黃澗金氏)와 동원이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고산김씨 시조도 김환이라 되어 있고 또 황간김씨 시조 역시 김환이라 되어 있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김환의 본관이 황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황간이었는데 중간에 고산으로 개관을 하였거나 아니면 고산·황간을 병용하였던 것 같다.
시조 김말로왕은 김수로왕의 막내동생으로 설화에 의하면 구지봉에 다섯 형들과 함께 탄강하여 소가야국을 창건하고 도읍을 고성으로 정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가문을 이어온 대표적 인물은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조선의 태조때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삼도수군 도절제사에 오른 빈길이 유명하다. 그는 태조 7년 멸악산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병조 판서,정헌대부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어 낙안의 삼충사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희량은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희량의 동생 문량은 음보로 사직이 되어 태조 6년 문관에 급제하여 부사,도사를 지내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니면서 외교적 공을 세워 예문관 교관을 지낸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후손 경현은 이만주의 난에 어유소를 도와 공을 세우고 함길도 순문중군을 역임한 후 가선대부가 되었다.
세웅은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에 북청하여 공을 세워 노성 현감을 지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선조때 왜적을 격퇴하여 수문장에 오른 사홍과 순천부사를 지낸 우추가 유명하다.
그외 효자로 이름난 복광은 향당에서 효행비를 세울 정도로 효행이 뛰어나, 성리학에서 평생을 바친 학자 민환과 함께 고성 김씨를 빛나게 하였다.
시조 김용한(金龍翰)은 경순왕의 후손이라 전한다. 그는 김진찬의 아들로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직강·정랑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전후 세계를 알 수 없고, 또 본관을 고양(高揚)으로 하게 된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평남 평원군 동암면 용삼리에 21호가 살고 있었다.
시조 김의손(金義孫)은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金之岱)의 9세손이다.
<공주김씨세보(公州金氏世譜)> 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說)의 8세손 지대가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로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청도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지대의 8세손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의 둘째아들 의손은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을 지내고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의손에게는 여의(麗儀), 일동(逸東), 응동(應東),용(龍), 구(龜), 타, 봉(鳳), 기(麒)등 아들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용, 구, 타는 아버지의 작위를 따라 공주김씨로 분적하였고, 그 나머지는 청도김씨를 계승했다고 한다.
공주김씨는 의손을 시조로 하고, 용을 공주파(公州派), 구를 평양파(平壤派), 타를 곽산파(郭山派)의 1세조로 하고 있다. 용은 후손이 공주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파, 구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공주의 부전촌(浮田村)에서 평양성 밖의 인현리(仁賢里)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평양파, 타는 예조정랑을 지내고 청주로부터 곽산으로 이주하여 곽산파라 하였다.
공주김씨는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과 급제자 10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관서지방의 저족(著族)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해군 때 부차(富車)의 전투와 인조 때 정묘호란 당시 순절, 오열사(五烈祠)에 제향된 김룡(金龍), 김무의(金務義), 김천경(金天慶), 김응철(金應哲), 김응삼(金應參)등을 들 수 있다. 김룡과 그의 종질 김무의는 1618년(광해군10) 명군(明軍)과 연합하여 건주위(建州衛)을 치기 위해 명나라에 원병을 파병할 때 김응하(金應河)의 막료로 참전, 심하(深河)에서 전사했다. 김천경과 그의 재종제 응철·응삼 등은 인조조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지키다가 동시에 순절했다.
광산(光山) 김(金)씨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가문중의 하나이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대제학 7명을 낳았는데 그들 모두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한 사람의 자손이다.대제학 7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씨 말고도 전주(全州) 이(李)씨와 연안(延安) 이(李)시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만 7명이 나온 예는 광산김시 뿐이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이 다같이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로써 이조 중기 이후 손꼽히는 석학중에는 이들의 제자가 많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본관별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남양홍시, 안동김씨, 청주한씨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또 그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서만 상신·대제학·청백리·왕비 등이 나왔다.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세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 에는 신라 49 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선계는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광주 서일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평장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拭)이 신라에서 각간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준(埈)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에 이르렀으며,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를 거쳐 1043년(정종 9) 재사시랑 평장사, 동년 11 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ㆍ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 병마사를 지내고, 1074 년(문종 28) 태복경으로 사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082 년(문종 36) 좌복야에 올라 중서시랑 및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1087 년(선종 4) 판상서 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약온(若溫)도 고려의 명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까지 역임하였다.
시조 김녹광(金祿光)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5자 김석(金錫:義城金氏의 시조)의 6세손 언미(彦美)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236년(고종23) 상장군으로서 몽고군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광주김씨는 고려 말에 성세를 누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겨우 문과 급제자 4명밖에 내지 못했는데 이는 서북 지방민의 관계 진출의 억제 정책을 써온 조선시대의 정책적인 영향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광주김씨들은 서북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계 진출이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시조의 아들 김굉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굉의 아들 김훤(金暄)은 원종·충렬왕 양조에 걸친 명신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예서(隸書)에 능한 그의 자찬묘지(自撰墓誌)가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남물(金南物)은 훤의 아들로서 20세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거쳐 안동부사를 지내고 만년에 안동으로 낙향했다. 그의 아우 김개물(金開物)은 과거에는 누차 낙방했으나 세자(世子)때부터 그를 총애하던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사(監察使)에 기용되어 충숙왕 때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시·서·화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시조 김맹정(金孟貞)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 2자 굉의 14세손이며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7세손이다. 그는 1136년(인종14)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서경(西京:현 平壤)에서 반란을 일으킨 요승 묘청(妙淸)과 그 잔당 조광(趙匡)등을 토평한 공으로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交河)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현손 김득성(金得成)이 있다. 그는 1319년(충숙왕 복위 8) 산원(散員)이 되고, 그 후 사헌부의 감찰(監察)·규정(糾正)·장령(掌令)등을 거쳐 전객령(典客令)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김전(金田)은 충목왕 때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김관(金琯)은 전의 손자로 우왕 때 직장(直長)으로 등용되어 조선 세종 때 곡산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모두 3명으로, 김정석(金廷碩)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김성구(金成九)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김희신(金喜臣)이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일세조 김중구(金仲龜)는 가락국 제 15대 무위왕(武威王:武得)의 후손이다.
무위왕은 양왕(讓王)의 제 3자로서 562년 솔지왕(率支王:率友)이 왕위에 오른 즉시 왕좌를 버리고 방장산(方丈山)의 태조묘(太祖廟)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가락의 구신(舊臣)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해 가락국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이 가락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 무위왕에게 시랑 겸 대총관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는데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관적을 금릉이라 하고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이 확실하지 못하므로 후손 중구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김중구는 고려 고종조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문하시랑 평장사·서경유수 등을 역임하면서 충절과 청검으로 명성이 높았고, 태자태사에 올라 금릉군(金陵君)으로 봉해졌다.
시조 김문부(金文富)는 경순왕의 제 5자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후손 용주(龍珠)의 7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員外郞)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이라 했다.
후손 김시창(金始昌)은 자가 정양(廷楊), 호는 남정(嵐亭)으로 조선 명종 때 효자로 부모상에 여막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맹호가 보호했다. 1519년(중종14) 제현(諸賢)의 추천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후 누차에 걸쳐 추천하였으나 끝내 불응, 명종 때 정려가 명해졌다.
시조 김신(金侁)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 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김정보(金正寶)의 13세손으로 고려 원종때 원나라에 들어가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어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조정에서 그의 출신지인 부리현(富利縣)을 금주(錦州)로 승격시켜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금주가 금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금산(錦山)막?하였다.
금산 김씨는 농암(籠巖) 김지(金摯) 대에 이르러 번영하였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금주의 진락산(進樂山)으로 은거,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의 손자 김효공(金孝恭)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광주판관(廣州判官)·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청파(淸坡) 김희옹(金希雍)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고 경기감사·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석곡(石谷) 김감(金鑑)은 광해군 때 이조정랑으로 사신 이상길(李尙吉)의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정치가 문란함을 개탄하고 사임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다시 기용되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시조 김대경(金臺卿)의 자는 중시(仲始), 호는 월당(月塘)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나주김씨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15세손으로 1326년(충숙왕13)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후손들이 금성(錦城)에 살면서 나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금성으로 했다. 무안의 우산사(牛山祠)에 제향, 후손이 현재 금성시에 살고 있다.
시조 김학경(金學敬)은 경순왕의 후예로 남평김씨와 동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경주김씨세보)》에 충선공(忠宣公) 김혼(金琿)의 10세손 우연(遇然)의 배위가 금천(衿川)김씨 거의 딸이며, 묘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합지자전우 건좌에 있는 것으로 보아 금천김씨는 같은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김한흥(金漢興)의 아들 진사 김상렬(金商烈)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다.
시조 김적(金適)의 자는 희정(希正), 호는 취암(鷲巖)으로 금성김씨 시조 대경(臺卿)의 9세손이요, 현령 우운(祐雲)의 증손이다. 그는 1537년(중종3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5년(명종10) 호남지방에 왜적이 침입하자 김제군수로서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증군이 되어 전라도 좌방어사 남치근(南致勤)등과 함께 영암·남평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고 광주목사에 승진되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 충수(忠秀)·덕수(德秀)와 함께 왕의 서행을 호종하다가 의주에서 순절하였다. 그래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나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후손들이 금성김씨에서 분관한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연원을 상고할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목이 확실지 않은 효진(孝鎭)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해지고 있다.
시조 김천서(金天瑞)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본관은 그의 7세손 정걸(正傑)이 조선 태종 때 김제군(金堤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金堤)로 하였다.
김제김씨를 중흥시킨 가헌(可軒) 김정걸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401년(태종1) 태종이 공신 류습(柳濕)등과 함께 동갑계를 조직할 때 그는 한 살 아래여서 참여하지 못하자 태종이 이를 아쉬워하며〈재주는 문무를 겸했고 , 품행은 충효를 겸전했는 데 포상이 없어서야 되겠느냐?〉하고 김제군(金堤君)에 봉했다. 그의 묘소는 김제 옥녀산(玉女山)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김제군 김제읍 요촌리에 단을 모아 매년 9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명재(知命齎) 김극혜가 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오성(五聖)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여 남한산성에 대피시킨 공으로 원종공신(原綜功臣)에 올랐다. 뒤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주부(主簿), 호조좌랑(戶曹佐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등을 거쳐 안음(安陰)·군위(軍威)의 현령을 지냈다.
김정은 중종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공주로 낙향하여 그 지역의 입향조가 되고, 그의 아들 철견(鐵堅)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김영립(金永立)은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1678년(숙종4) 공주목(公州牧)에서 발급한 그의 호적부터 그의 8세손 김응록(金應祿)까지의 호적이 전해오고 있다.
시조 김화는 경순왕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참봉을 지냈으며, 뒤에 남원의 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외에 사정을 지낸 김사찬(金沙餐)의 후손 또는 부령김씨와 동원이라는 문헌도 전한다. 후손들이 본관을 김천으로 하였다.
시조 김규(金珪)는 경순왕 제4자 대안군 은열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김포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김포로 했다.
평북 연변에 후손이 30호가 살았는데 6 25 동란으로 족보가 유실되어 중간 계대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목포, 양주, 인천, 서울 등지에 살고 있다.
김화김씨
시조 김경언(金景言)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은열(殷說)의 증손인 김해군(金海君) 염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 시중(侍中)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등을 지내고 김화군(金化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화(金化)로 하였다.
김화김씨는 시조 경언의 15세손 김로(金輅)가 고려조에 태자태부에 태사(太師)를 지내고 김화의 비룡동(飛龍洞)에 세거하다가 그 후대에 평산(平山)으로 이주하였고, 21세손 김유기(金有器)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상소한 것이 왕의 뜻을 거슬러 가산(嘉山)으로 유배당했다가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세거하였다. 또한 김로의 동생 하가 호조참판을 지내고 숙천(肅川)으로 낙향했으며, 셋째 명(銘)이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1394년(태조3)참소를 입어 평양으로 유배당한 후 숙천으로 은거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평양, 순안, 숙천, 안주, 영변, 선천, 의주등 관서지방에 본거를 두고 살아오다가 남북이 분단되자 그 일부가 월남하여 종친회를 구성하고 피난 족보를 간행, 족의(族誼)를 다지고 있다.
나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운발(雲發)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으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전 두 아들을 고려조에서 예우하여 장자 운발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나주군으로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삼았다.
나주 김씨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월당 대경(坮卿)을 들수 있다. 그는 132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당세에 이름을 날렸으며 한때 목운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에서 유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
조선때 와서는 일경의 손자 정준(廷儁)이 정종때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부총제를 지냈으며 정준의 둘째 아들은 김종서의 사위가 되었다. 정준의 현손 경석(景錫)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로 종질(從姪) 적(滴)과 함께 영암포에서 무찔렀으며, 적의 아들 충수(忠秀)는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호조참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순사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덕수(德秀), 공조좌랑 복남(福南)을 비롯하여 부호군 세빈(世彬)이 유명하다.
시조 김수징(金粹澄)은 신라 제26대 경순왕의 제 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11세손인 영고(永固)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감무(監務)로 있으면서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오르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낙안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창군 성내면 부덕리 엄동에 낙흥단(樂興壇)을 모아 매년 음2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낙안김씨는 조선 초엽 지금의 승주군 낙안을 중심으로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장군을 증조로 섬기고 있다. 그는 1394년(태조3) 전라 수군첨절제사로서 왜선 3척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풀리고, 1401년(태종즉위) 3도 수군절제사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부사 가 되고, 1405년 김해에서 싸우다가 순사했다. 진안의 화천사(華川祠)에 제향되었다.
무열공(武烈公) 김광습(金光襲)은 고려 명종·신종 양조에 걸쳐 벼슬이 금오위대장 검상사인 검교대장 좌승상에 올랐고, 김윤견(金允堅)은 문과에 올라 조정대부 사재경 이부상서를 지내고 상장군에 올랐다.
김지겸(金之謙)은 충선왕 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경화공주(慶華公主)의 명으로 정동성(征東省) 사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김효자(金孝慈)는 광록대부 판각문하평리를 지냈고, 김남정(金南正)은 병부상서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규(金糾)는 판각참찬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고, 김수(金隋)는 충정왕 때 강릉존무사를 지내고 낙천군(樂川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민(忠愍)으로 내려졌다. 그는 예문(藝文)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들 양평공(良平公) 김미(金彌)도 출중한 인물이다. 우왕 3년에 진사에 합격, 전객시승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낸 뒤 공안부윤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남원김씨
시조 김사지(金四知)는 경순왕 부(傅)의 제 8자 추(錘:一善君)의 8세손 중(仲)의 셋째 아들이다.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이조 때 조방장을 지낸 김경로(金敬老),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한 김기욱(金基郁)으로 이어져 왔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 및 함경남도 고원군 등지에 세거하다가 6·25동란 때 월남하면서 보첩과 가장(家狀)등 모든 문헌을 봉지하지 못하여 중간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자료에 의하면 평북 초산군 송면 송정동에 18호, 함남 고원군 상산면 주당리에 27호가 분포 거주하였는데, 동란 때 남하하여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포김씨(藍浦金氏)는 주로 평북 철산 등지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6·25 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봉지하지 못해 그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김씨2000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시조 김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지만 연대와 행적 및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김시중(金始重)의 아들 성일(聲一)이 1729년(영조5)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김성일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 성일의 고조인 김충길(金忠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김여용(金礪用)의 아들 봉서(鳳瑞)는 1741년(영조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평북 철산군 철산면 영산동에 65가구,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에 4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조 김창협(金昌協)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양주김씨(楊州金氏) 시조 김원보(金元寶)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남평군(南平君) 김기홍(金器弘)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괴전리에 35호가 살고 있었다. 후손 김규진(金圭鎭)은 조선 말기의 서화가로 이름이 높다.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으로 대수는 알 수 없으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기범(起範)의 아들이다. 8세에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 10여년 만에 귀국했다. 글씨는 전서·예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하여 묘경을 이루었으며, 그림은 산수·화조를 잘 그렸고, 특히 난죽이 절묘했다. 그는 왕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서화연구회를 창설, 서화연구에 공헌했다. 후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 심사위원을 지내며 때때로 경향 각지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여 예술 발전에 공이 컸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김규진의 작품으로 저서 난죽보, 서법진결, 육체필론과 글씨에는 미륵불, 천하기절, 법기보살, 금수강산, 대웅전, 백마장강, 촉석루, 가야산해인사, 보신각, 희정당대조전, 태극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 해금강총석정도, 소상대죽도, 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남해김씨(南海金氏)의 시조는 김태진(金泰辰)이다.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掌隷院直長)을 지냈다. 그가 남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남해로 하였다. 김태진은 본디 광산김씨의 후예다. 그의 증조인 김극신(金克愼)은 조선 연산군 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아갔으나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시조인 김태진으로부터 4세손까지는 남해에 복고했고, 5세손인 김의경(金義慶)부터 9세손 김낙운(金洛雲)대까지는 김포군 하성면에 세거하였다.
능주(綾州)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속면이다.
시조 김계원(金繼元)은 안주(安州)에서 살았다. 그의 큰아들 명하(鳴夏)의 자는 성숙(成叔)이고, 1657년(효종8)생으로, 1695년(숙종21) 평안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명은(鳴殷)의 자는 용녀고, 1660년(현종1)생으로, 1687년(숙종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남동에 2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길주로 입북했는지, 또 본관을 능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달성김씨(達城金氏)의 시조 김담(金淡)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고만 되어 있어 여타 사적이나 연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또 전후 세계와 본관을 달성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힐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나타나지 않아 후손들의 집성촌도 알 수 없다.
시조 김인(金忍)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3자 명종(鳴鍾)의 19세손이다. 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憁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무안현 대굴포(務安縣大掘浦: 현 함평군 학고면 대곡리)에 있을 때 좌막(佐幕)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20리쯤 올라온 나주군 마산면 귀업리(현 나주군 왕곡면 송죽리 귀업부락)에 터를 잡아 세거지를 마련했다 한다.
본관은 그의 증조 김남보(金南寶)가 고려 말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조선개국 후 해남(海南)으로 은거하였기 때문에 해남 또는 당시의 지명인 당악(棠岳)을 따서 당악김씨(棠岳金氏)라고도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으며, 음력 3월 3일에 향사한다.
당악김씨는 수군계(水軍系) 집안으로 큰 인물은 내지 못했다. 외손인 박순(朴淳)이 정승 자리에 14년간 있으면서 전남 선비들의 정계 진출에 크게 공헌했는데도 당악김씨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시조 인의 손자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이 분이 전남의 조선조 인맥에서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사암(思菴) 박순의 외조부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당악김씨의 세거지인 귀업(龜業)은 쑥밭이 되고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으며 원경(元慶)의 아들 준(浚)은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23년만에 돌아와서 다섯 아들을 두어 이 집안의 중심을 이루었다. 원록(元祿)의 손자 만영(萬英)은 학문이 높아 남평(南平)의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죽은 후에 풍산사(楓山祠)에 제향되었다.
당진김씨(唐津金氏)의 시조 김자진(金子盡)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 희조(希祖)의 7세손이라 한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확실한 세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382년(우왕8) 문과에 급제하여 선공서령 보문각 대제학(繕工署令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졌다.
한편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상장군을 지낸 익지(益之)를 시조로 하고, 그의 손자 안경(安敬)과 자익(子益)을 파조로 하는 통진(通津)김씨가 있는데 당진김씨와 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관을 당진으로 하게 된 유래는 확실한 설명이 없다.
시조 김삼준(金三俊)은 경순왕의 일곱째아들인 언양김씨(彦陽金氏) 시조인 김선(金鐥)의 후손으로 1486년(성종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김제 군수 등을 지냈다.
언양김씨에서 분적한 연원과 본관을 담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언양으로 되어 있고, 또 족보 세계에 그의 아들 난무(蘭茂)·송무(松茂) 형제 중 난무는 달성계이고, 송무는 언양계로 되어 있어 난무의 후대에서 개성으로 입북하여 조상의 선향인 담양을 본관으로 한 것으로 짐작케 한다.
시조 김락(金樂)은 신라 신무왕의 5세손 무력(武力)의 아들로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통합삼한공신1등으로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대아찬에서 원보(元甫)겸 대장군으로 승진되었다. 927년(태조10) 7월에 대량성(大良城)을 쳐서 강주(康州)등 제성(諸城)을 획득했다. 그 해 10월,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군에게 포위당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태조를 덤불에 숨기고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왕의 수레를 대신 타고 격전하다 전사했다. 익대효절광위갈충위사전망공신 1등에 추봉,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940년(태조23) 공신당(功臣堂)을 설치, 벽상에 도형하였고,994년(성종13)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022년(현종13) 대구의 사우가 표충사(表忠祠)로 사액되고, 1052년(문종2) 삼중대광 당악현 개국공(唐岳縣開國公)에 추봉되었으며, 1120년(예종15) 예종이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그리하여 후손이 태조가 사적한 당악(唐岳)을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의 도로동( 老洞)에 있다고 하나 남북이 가로막혀 향화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
시조 김달(金達)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 중시조인 김방경(金方慶)의 제4자 론의 증손이다. 그는 원래 경북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거주하던 무과(武科) 출신으로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난 때 함경도 길주로 유배당하자 자손들이 배소로 따라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조상들의 세거지였던 대구(大邱)를 본관으로 삼았다.
대구김씨는 원래 무관 가문으로 조선조 5백년을 통해 시조의 아들 여연(麗淵)·부형(富亨) 형제의 후손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분거하면서 국경 수비에 기여하였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때에 전 가문이 충성을 다바쳐 숙종조에 충의 가문으로 포상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구김씨는 우리나라 동·서북 지방에서 벌족을 이루고 살다가 해방 후에 4백여 가구가 월남, 종친회를 구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다.
시조 김량(金亮)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진사에 합격, 후손들이 본관을 덕산(德山)으로 했다. 그 외에 김충한(金沖漢), 김준신(金浚臣)의 후손, 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덕수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이면서 해풍김씨가 족보를 창간할 때 덕수 지방에 거주하던 지파가 참여하지 못했다가 후일에 자기들끼리 족보를 간행하면서 중간세계를 밝히지 못한채 본관을 거주지인 덕수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덕수김씨세보(德水金氏世譜)>에는 해풍 부원군 김숭선을 시조로 하고 중간셰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김수연을 1세조로 하였다. 한편 <해풍김씨세보>에는 김수연을 시조 숭선의 8세손으로 정리하고 있어 이 두 집안의 족보는 본관만 다를 뿐 시조와 연원이 동일하다. 이에 대해 해풍김씨측에서는 고려 말의 사회적 혼란과 조선 개국 당시의 변혁, 그리고 해풍현과 덕수현(지금의 개성, 풍덕)의 지역적 혼란, 그 후에 닥쳐온 임진왜란 등 여러 난리를 겪는 동안 모든 문헌이 소실되고 혈족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각기 가승만 만들어 가지고 내려오던 중 1764년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후손들의 가승과 세단(世單)등을 수집하여 1791년 제1차 세보(世譜)를 창간할 때 참여하지 못한 혈손들이 후일에 족보를 간행하면서 상계를 밝히지 못한 채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조 희조(希調)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와 병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을 지내고 도강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도강으로 하였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어 원경,을경,일,을상등 동본 4파로 분류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회련(檜鍊)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서설(瑞設)은 절도사를 거쳐 강계부윤 등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약묵(若默)은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52년 한산군수로 제임하면서 선정으로 표창을 받고 뒤에 집의,목사,내자시정등을 역임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후진(後進)은 일찌기 이항의 문하에서 경서와 역서를 연구하고 임진왜란때 이귀(李貴)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많은 군량을 바쳤다. 도언(道彦)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과 병조좌랑등을 지내고 1624년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의금부 도사로 평정하여 분무공신일등에 녹훈되었다.
한말의 우국지사 영상(永相)은 학자로도 명망이 높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이 주는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천술(天述)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여 우물에 투신자살한 애국지사이다.
시조 김흥도(金興濤)는 신라 김씨의 분적종으로 경순왕 부(傅)의 후손이라고만 전해질 뿐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조에 이조참의를 거쳐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나갔다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마지막 임지였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파계는 5세 덕붕(德鵬)·덕린(德麟) 형제 대에서 두 파로 분류되지만 덕붕은 후사가 없어 덕린의 아들 수(洙)가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오늘의 동래김씨들은 모두 김덕린의 혈손인 셈이다.
시조의 4세손 선략장군(宣略將軍) 응현(應鉉)의 아들 덕린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덕린의 아들 김렴(金濂)과 김세진(金世珍)은 숙질간으로 각각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참봉 김여집(金汝鏶)의 아들 수함(守咸)은 김렴의 증손으로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이다. 그는 1755년(영조31) 함경도과(咸鏡道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찰방(察訪)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등주김씨(登州金氏)는 본관을 같이 쓰는 중국계 귀화족과 신라계 분적종으로 구분된다. 중국계 귀화족의 시조 김장생(金長生)은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등주(登州:지금의 安邊)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다른 한 계통의 시조 김식(金軾)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의 13세 손인 계림군 김균의 장자인 맹성(孟誠)의 증손자로 전해지고 있으나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김중정(金重貞)의 아들로 무과 출신이며 판관(判官)을 지냈다고 하지만 연대와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시조 김희제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만경의 군산도(群山島)에서 살았으나 선조가 상선(商船)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살면서 관적을 개성으로 했다. 그는 충청도 안찰사를 거쳐 장군이 되고, 1221년(고종8) 의주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금나라의 우가하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다. 1226년 서북면 병마부사로 있을 때 의주·정주지방에 쳐들어온 우가하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석성(石城)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 순문사로 있을 때 최우(崔瑀)가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무고를 믿고 사람을 나주에 보내어 체포하려 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만경(萬頃:現 金城의 속면)을 본관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병공리에 40호가 살고 있었다.
무장김씨(茂長金氏)는 전북 옥구와 황해도 장연에 각각 분산 거주해 왔으나 그 선계에 대해서는 신라계 혹은 가락계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옥구(沃溝)에서 발행한 <무장김씨세보(茂長金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장사가 무장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충(庶)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자진(自珍)은 대사헌을 지내고 옥구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옥구에 세거하게 되었고, 둘째 자무(自武)는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부제학을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사육신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해주의 어차리(馭車里)에 은거, 종적을 감추게 되자 그 후손들이 장연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같은 혈족이면서 옥구와 장연으로 분산되어 4백여년이 지나도록 왕래가 막혀 전연 모르고 지내오다가 1841년 장연파 문중에서 옥구로 찾아가 같은 혈손임을 확인하고 1925년 비로소 통합된 족보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연에서 살다가 6·25동란 후 월남한 무장김씨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조 김자무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선대의 사적이 유실되어 상계를 밝히지 못한다고 한다. 김자무는 박팽년의 사위로 관직은 제주목사였으며, 장인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장연에 은거하면서 무장으로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족보를 편찬하지 못하다가 1924년에 옥구의 무장김씨와 합보하면서 선계를 김수로왕에게 잇대어 시조를 김선으로 하였지만 이를 고증하기 위해 <신라세보(新羅世譜)>등 여러 문헌을 찾아보았으나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고 기타 <김씨본원세보(金氏本源世譜)>등 여러 문헌에 김알지의 후손으로 밝혀져 있다고 한다.
시조 김자무(金自茂)는 원래 무주(茂朱)사람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그는 단종조에 제주목사를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장인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성삼문(成三問)등 6신과 함께 처형되고 그도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자 황해도 장연으로 도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관향도 무장(茂長)으로 바꾸고 은거했다. 그 뒤 숙종 때 사육신이 신원될 때까지 그 후손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겨우 혈맥을 이어 오다가 가야계 무장김씨 선(璇)계에 편입하여 족보를 간행하고 가야계로 행세해 왔다. 그러다가 해방 후 월남하여 여러 문헌을 상고한 바 가야계가 아님이 뚜렷하고 특히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에 의하면 「그는 제주목사로 본래 무주인이었는데 박팽년의 사위로 장인이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자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 본관을 무장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가야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무 이상의 세계를 가리지 못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래서 이족의 동성동본이 생기게 되었다.
무장김씨는 4세 김유광(金有光)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연군 11개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고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는 장연군 대동면 강화군 양사면 등지에 집성촌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주김씨(茂朱金氏)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 국자감 좨주를 지내고 조선 태종 때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러 무주백(茂州伯)에 봉해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무주김씨족보(茂州金氏族譜)》에 의하면 신무왕의 계통이라 하였고, 시조 성은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김의원(金義元)의 13세손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인 김길(金佶) 이상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간 세대가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어 문적이 유실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 의하면 무주김씨의 시조는 신무왕의 16대손이고, 길의 13대손이며 의원의 8대손인 남우(南雨)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우가 의원의 8대손(신라김씨연원도)이고, 성은 의원의 12대손(무주김씨족보)이라 하였으니 남우와 성과의 사이 3대가 실전되었는지 아니면 남우와 성과는 전혀 다른 계통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무주김씨는 수원 등 경기지방에서 살다가 5세 김일(金逸)의 대를 전후해서 충남 홍성의 광천 등지로 옮겨 그 일대를 세거지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2세 김석여(金錫汝)이후 석성·임천 등 부여로 옮겼고, 11세 김사(金獅)는 충남 예산으로 가서 터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6세 김우정(金禹禎)의 후손은 서산의 해미·성연 등지에, 10세 김승서(金承緖)의 후손은 아산의 온양·배방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 김숙(金淑)의 대를 전후해서 보령의 청소 등지에 일부가 살게 되었고, 4세 김자무(金自茂)의 후손은 황해도 장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의 인물로는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검교평리로 의금부 판결사·부제학을 겸직한 김생려(金生麗)와 그의 아들로 세종조에 홍문관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낸 김규(金葵)가 있다.
이밖에 문종조에 집현전 교리를 지내고 뒤에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동생 한지(漢之)·아들 유인(有仁)과 함께 화를 입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된 김선지(金善之)가 있다.
시조 김식(金湜)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고 시호가 충간(忠簡)으로만 전한다. 판관을 지낸 김천극(金天克)의 후손, 옥천김씨(沃川金氏)와 동원으로 전하나 미상이며, 본관을 문소로 하게 된 유래도 알 수 없다.
후손 김진화(金鎭華)는 자가 성관(聖觀), 호는 탄와(坦窩)이다. 1793년(정조17) 창릉참봉으로서 누진되어 한성판윤, 아산, 진산, 무장, 능주 목사를 역임했다. 김응택(金應澤)은 자가 취용(就用)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전사했다. 벼슬은 훈련원정을 지냈다.
시조 김검달(金檢達)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 되어 그의 세계와 사적 및 연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의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에 정착, 세거하면서 조상의 발원지인 문화(文化)를 본관으로 하였는데 문화의 옛이름이 유주(儒州)인 까닭으로 유주김씨(儒州金氏)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느 조상이 언제부터 평안도 지방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후손 김호익(金虎翼)이 1643년(인조21) 평안도과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조 김승조(金承祖)는 신라 제 56대 경순왕 부(傅)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이다. 그는 1271년(원종12) 사직(司直)으로 있을 때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장군으로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금릉군 증산면 은상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영조조에 김봉욱(金鳳郁)이, 정조조에 김성진(金成珍)이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종환(金宗煥)이 헌종 때 문과에 급제,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지냈다.
이밖의 인물로는 김견(金堅)이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김경발(金景發)은 사복시 내승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으며, 인조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급거 상경하여 왕을 호종하다가 순절,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진무공신(振武功臣)의 녹권이 내려졌다.
송정(松亭) 김중명(金重鳴)은 현종 때 무과에 급제, 운봉현감(雲峰縣監)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숙종 때 허견(許堅)등의 모반사건을 염탐,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조 김선(金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 (傅)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25세손이다. 그는 조선 성종 때 전라도 좌수사(左水使)로 있으면서 화를 입어 1476년(성종7) 의주(義州)로 유배갔다가 그곳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백천(白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응상(金應祥)과 김득경(金得景)이 있다. 김응상은 임진왜란때 조방장(助防將)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으며, 김득경 역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고 구암사에 제향되었다.
김계립(金繼立)은 병자호란 때 많은 전과를 거두고 삼학사(三學士)가 후금(後金)으로 끌려갈 때 의주로 돌아와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철수하는 적군을 기습, 포로로 잡혀가던 수백명을 구해냈다.
근세의 인물로는 김승학(金承學), 김경하(金景河), 김시형(金時馨) 등이 있다. 이들은 일제 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김승학은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김경하와 김시형은 1963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포상을 받았다.
시조 김억적(金億積)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라고 전해질 뿐 그 선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관직이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인물로 추정되나 확실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관을 보령(保寧)으로 하게 된 연원도 확실하지 않다. 그 후손 김효순(金孝舜)이 임진왜란 때 역관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왜적이 연안(延安)을 공격하려 하자 그가 〈적병은 보잘 것 없다. 명(明)나라 군사가 와서 곧 격퇴할 것이니 역전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화살에 꽂아 성 안으로 쏘았다. 부사 이정암이 이 글을 보고 사병을 격려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가 탈출하여 행재소(行在所)로 갔을 때 이정암이 이 사실을 알고 상소하여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고, 그 후 누진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시조 김징(金徵)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天年史)》에 의하면 그는 학행으로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당한 김태암(金泰巖)의 후손으로 대사간을 지냈다 한다. 그러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김태암의 본관이 보은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징 이전부터 보은에 관적한 것으로 보이나 문적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명진(金明晋)은 경순왕의 23세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없으므로 세계를 알 수 없다. 김이상(金履祥)의 후손이라 하고 상산김씨(商山金氏)와 동원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본관을 봉산으로 삼게 된 유래와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