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도로[10구간] 괴산 장연면에서
괴산읍까지....
[알맵지도 사용]
지난번 여행때 탄금대에서 이번여행지의 출발지인 괴산군 장연면에서 끝이
났다. 끝나는 지점이 중부내륙 고속도로지점을 택한 것은 서울로 귀향하기에 피로도 덜하고 빠른 길 이기에 택한 결과 오늘 10구간 출발지인 괴산군
장연면 삼거리로 가는데도 적지 않게 편리하고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출발한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못된 시간 사뭇 고속도로로만 달리다
보니 새벽 5시좀 넘어 내륙고속도로 충주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 쉬지 않고 왔기 때문에 쉬기도 할겸 또 커피도 한잔할 겸
휴게소에 들렀다. 이곳에서 10여분 달려 괴산매표소에 요금을 지불하며 매표소에서 물었다. 이곳근처에 미선나무 자생지를 아느냐고?...이곳 저곳에
전화해보더니 모른다고 한다. 자기도 근처인 것만 알뿐 자세한 정보는 없다 한다. 할 수 없이 그냥 19번 도로를 올라섰다. 아직도 컴컴한 길로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전에 한번 넘은 고개인데 느릅재이다. 이곳을 넘은 시간이 대략 5시반정도 아직도 해가 뜨려면
멀었다.
[중부내륙고속국도 내에 충주주유소...]
험준한 느릅재를 넘어서려니 안개가 자욱이 끼어 위험하기 짝이없다. 산을
넘어 내려오니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온도차이도 있고 또 감물면을 지나는 달천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야가 좋지 않은
관계로 서행을 하며 525번 도로와 만나는 감물면에 도착해 다리를 건넌후 감물초교를 이번여행의 첫방문지로 만날 수 있었다. 아직은 컴컴해 학교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한번 찍어보았는데 밝기를 올려보니 그래도 어렴풋이 학교 교정이 보여서 이렇게 올려본다.
[괴산 감물면 오성리 감물초등학교 교정...]
감물면소재 감물초등학교는 1933년 5월에 감물공립보통학교로 인가
개교하였으며 학생은 130여명 교직원은 16명의 자그마한 학교이다. 학교의 특징은 요즘 보기 드물게 우리의 것을 많이 가르치는 긍지의 학교라고
자부심을 갖는다. 학교 안에는 민속놀이실이 있고, 우리놀이, 우리꽃, 우리 가락 익히기 등 우리것을 찾아 배워가는데 힘쓰는 그런 정서 어린
학교로 발전시키고 야생화가 160여종을 심어 관리하고 있다 한다. 밤이라 야생화를 보면서도 찍지를 못해 아쉬웠다.
감물면에서 다시 괴산읍을 향해 줄달음을 쳐보려 애쓰지만 시야가 좋지 못해
달릴 수가 없다. 괴산읍내 쪽으로 달려오다 나즈막한 고개를 만난다. 궂이 고개라고 까지도 할 것이 없을 정도의 비탈길인데 고개 이름이
성만이재라고 되어잇다. 다정스러운 동생의 이름같아 좋았다. 새벽이라 차량도 없어 천천히 달리기에는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이내 충민사를 알리는
표지판을 찾았다. 골목으로 들어가다 달천강을 넘어서는 충민교를 지나니 자그마한 관리소와 앞 쪽에 주차장이 마련되어있고 어둡지만 위쪽으로 바위가
있고 옆으로 비스듬히 사당이 보였다.
[김시민장군 충민사 솟을대문...]
"김시민장군 충민사 [金時敏將軍 忠愍祠] -
충청도지정 기념물 제12호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김시민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라고 문화재청 홈에 쓰여있다.
[충민사 사당...]
[충민사 사당 쪽문...]
[충민사앞 달천을 건너는 충민교...]
사당을 둘러보고 관리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할머님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날이 밝기시작한다. 조금 전 넘어온 느릅재 쪽을 보니 훤해지는 것이 금방 해가 솟아오를 것 같다. 전망이 좋은 다리
위에서 일출을 맞이하기로 마음먹고 다리위로 올라섰다. 안개가 많이 끼어서 좋은 사진은 얻을 수 없었지만 안개속의 일출 또한 그 나름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어 무척 마음이 좋았다. 어쩌면 달빛도 같고 어쩌면 햇빛도 같은 그런 황홀함 속의 달천강 위에 비친 그림자가 무척 인상적
이었다고....
[충민교에서 맞이한 일출...]
[충민교를 건너며 맞이한 일출표정...]
충민사는 괴산읍으로 속해있어 충민교를 건너면 괴산군 감물면이 다시 된다.
다시 우회전해 갈 길을 재촉한다. 이제 날도 환해지었고 또 안개도 많이 걷히어 시야가 무척 좋아졌다. 그래도 꼭 비올 것 같은 그런 흐린 날
같은 하늘이다. 산골마을동네를 지나 조금가면 넓은 농토가 오래만에 보이는 구무정리를 달리게 된다. 시야가 좋아진 이후 처음으로 멀리까지 보이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감물면과 괴산읍의 경계점을 지나가게 된다. 이제 괴산읍 이탄리가 된 것이다.
항상 재미있게 생각하지만 어떨 때는 도의 경계를 휙하고 지날 때는 이상한
감정도 느낄 때가 있다. 무슨 세월을 초월해 가는 것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조금지나 이곳 4거리엔 검승리라 쓰여있다. 이즈음에 오니 음식점들도
눈에 띈다. 왼쪽으로는 성불사입구라 쓰여져 있고 나그네집, 나들이가든 등등이 보인다. 좌회전해 성불사로 비탈길을 올랐다. 일주문 앞에 공터가
있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성불산 성불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을 통과 많은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선다.
[성불산 성불사 일주문...]
[성불산 성불사 대웅전...]
[관을 쓴 입석불...]
[성불사 내려오는 길목에...]
성불사는 개인적으로 꼭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다. 그전에 자료를 보다가
직지에 대해 쓰여진 문구에 충북지방의 인쇄에 대한 이야기에 목판본에 쓰여진 문구에 성불사는 성불산에 있다고 되어있다는 그런 글을 본 적이 있어
가까운 청주지역이 인쇄의 발상지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이곳도 너무 일찍 찾아와 누구한테 묻기도 좀 곤란한 그런 시점이었다.
오늘 이시간에 다시 성불사에 대한 조사를 해보았으나 자료를 찾지 못했다.
[삼농 생활문화연구소가 된 ...]
성불사 앞 이탄교를 건너 제월대를 향해 넓은 들을 달려간다. 농로가 잘
발달되어있는 곳이다. 넓고 반 듯한 땅이 많이 농지정리가 잘된 것같다. 거의 입구에 도달할 때쯤 우측에 표지가 있다. 제월초등학교페교자리에
'흙산림연구소' 라는 곳이 있다 고해 들어가보니 삼농 생활문화연구소 라는 간판과 함께 전에 폐교된 제월초등학교의 모습을 담을 수가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연구소 내에는 움직이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려 나와 안내판에 의해 좌회전해 제월대 주차장에
안착하였다.
제월대 주차장은 제법 넓은 시멘트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한쪽구석엔 벽초
홍명희 선생의 문학비가 조성되어있다. 홍명희 선생은 1938년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는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몇 개의 석조물로 조형을 하여 놓았다. 평소 선생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겨서
이곳에....
[제월대에 세워진 고산정엔 호산승집이라는 편액과 고산정사기가...]
"조선 중기 문신인 유근(1549∼1627) 선생이 괴산읍 제월리에 세운
정자인 고산정과 산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암반(岩盤)인 제월대이다. 선생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인 선조 29년(1596)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만송정이라고 했다가, 광해군 때 국정의 어지러움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면서 고산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특히 정자에 걸려
있는 ‘고산정사기’는 명나라 사신인 태화가 보내온 것인데 뛰어난 글로 평가 받고 있다.
정자는 아래쪽으로 맑은 냇물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벼랑 위에 세웠다.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 지붕으로 꾸몄다. 정자 동남 쪽에 있는 제월대 위에서 보면
이 산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제월대 자체가 고산정이 들어서있는 절벽을 가리키는 곳이라 내려가 배를 타지
않는 한엔 강건너 반대편에서 봐야 하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아 포기하였다.
[제월대 위에서 내려다본 달천강과 괴산읍 제월리 일원...]
제월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유근 선생 사당을 찾으려고 작은 산을
헤메이다 내려와 다시 돌려 나와 성불사 앞 이탄교에서 우회전 다시 19번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기곡리를 지나 검승리까지 약 4키로정도 신나게
달리며 봄을 만끽하였다. 특별히 볼곳은 없었지만 정말 시골스러운 표정의 포근함을 주는 동네이다. 약간의 언덕을 넘어 내려서면 애한정이 있는
곳이다. 지도를 보니 작은 야산의 약 8부능선 상에 있어 농로로 들어가보니 산을 돌아 다시 내려가야 될 것같다.
돌아 나와 괴강교가 보이는 방앗간 앞에서 마을로 들어가니 중간에
길이없다. 주민께 물어보니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라 일러주신다. 가려서 안보였지만 조금 오르니 생각보다 커다란 애한정이 넓은 마당
뒤에 자리잡고 있다.
[괴산읍 검승리에 소재 애한정...]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의 유학자인 박지겸이 세상을
피해서 지내던 곳이다. 광해군 6년(1614)에 지었으며, 그의 호를 따서 애한정(愛閑亭)이라 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다시 지었고 숙종 38년(1712)과 44년(1718)에 고쳤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다. 건물 규모는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앞면 3칸·옆면 1칸반의 작은 건물이었던 듯한데, 후에 수리하면서 앞면 6칸·옆면 2칸반 규모로 늘린 것으로 보인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이곳에는 ‘애한정’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광해군 6년(1614)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를 비롯하여 많은 기록들이 있다." 라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이곳은
정자마을이라 칭하며 노송들로 둘러쌓여있는 멋진 자그마한 동산이라해야 느낌이 올 것이다. 마을주변은 지금 한창 조성중인 모양이다. 여기저기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애한정 가는 길목엔 서당도 지어져있다. 동네할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이곳은 함양박씨 지겸선생을 모시는
곳인데...임진란때 왕을 의주까지 모신 공으로 높은 벼슬을 받으셨으며, 노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아였다고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애한정 들어가는 솟을대문...]
[조선정종때 박세무가 저술한 오륜을 가르치는 책 '동몽선습'을 본따 만든
석조형물...]
[향교로 쓰였다는 건물...]
[애한정 둘러보고 나오는 검승리마을 한우물 터...]
정자마을을 둘러보고 마을입구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괴산 만남의 광장
휴게소가 보인다. 괴강교를 건너기전 삼거리인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여 했으나 애한정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며 쉬었으므로 다리를 건너 잠시 휴식을
하기로 마음먹고 괴강교를 건너섰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지금은 쓰지 않는 구 괴강교를 바라보며 밑에 조성되어있는 작은 유원지에 오리배를 내려다
보았다. 한강에서는 못타 보았고 언젠가 수원 원천저수지에서 한번 타본 기억이 난다.
[삼거리 만남이 광장...]
[만남의 광장 삼거리 맞은편 횟집 및 간이유원지에...]
[구 괴강교에서 바라본 새로만들어진 괴강교 전경...]
[괴산읍 개심사 종각...]
[괴산읍 개심사 극락보전...]
[개심사에서 내려다본 괴산읍 내...]
개심사에서 내려와 큰길에서 약 400미터정도 가면 괴산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가는 길에 건너편 강둑 쪽에 커다란 건물이 지어지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청소년 문화센터와 체육장이 지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갓길도
없는 좁은 길로 천천히 내려가 괴산향교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동네로 올라섰다. 동네를 통과 언덕 끝가지 오르니 괴산 향교와 홍살문이 잘
어우러져 멋진 그림을 창출해준다.
[괴산 향교 입구 홍살문과 전경...]
"괴산향교는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53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587년에 다시 짓고 그 후에 여러 번의 수리를 하였으나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동무·서무,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제사공간을 이룬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서재와 함께 배움의 공간을 형성한다.
건물들의 규모와 형식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라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괴산향교 전경...]
[괴산향교 대성전...]
[괴산향교 홍살문...]
괴산향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홍살문과 어울어진 나무들이 발목을 잡아 추억의
한컷으로 남기게 되었다. 향교를 뒤로 하고 다시 돌려 나와 우회전해 군청 앞으로 가 동진천을 건너 사호정이 있는 곳으로 넘어선다. 이곳은 새로
조성해놓은 것 같고 또 건물도 새로 만들어놓은 것 같다. 전희탁 군수님이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이곳 뒤에는 궁도장이 있다. 괴산의 궁도역사는 무척
오래되었고 또 양궁도 유명하다.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곳에 사호정과 중심정 두정자가 있었다 한다.
[사호정 이라는 정자...]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역사의 한 장르를 이렇게라도 새로 만들어
세워 정자의 뜻을 되새겨 보며 역사를 한번 다시 생각해보는 그런 견지에서 정말 바람직한 그런 모습을 본 기분이다. 사호정 옆은 굉장히 넓은
괴산의 광장인 것 같은데 다 막아놓고 한창 공사 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볼 수가 없었다. 이제 애국선열 추모비와 3.1운동추모비, 그리고
미덕사를 찾아보기 위해 동진천변으로 올라 괴산읍내를 다시한번 내려다 보았다.
애국선열 추모비는 괴산읍 내 뒤쪽 산 위에 조성되어있다는 주민의 설명에
우선 3.1운동추모비와 미덕사라는 곳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미덕사를 찾을 수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커다란 회사의
이름이다. 지금도 곡물을 취급하는 대형 방앗간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오래된 건물들과 규모로 보아서 굉장했던 방앗간이었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 미덕사뒷길은 둑방길로 동진천변길이다. 이길로 다시 올라 수진교 앞에 조성되어있는 만세운동 유적비를 볼 수
있었다.
[괴산읍 서부리 만세운동유적비...]
이 유적비는 괴산 만세운동의 지도자인 홍명희 선생의 이름이 빠져있던 것을
작년 10월에 다시 넣었다고 한다. 한 이데오르기의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당시 3월 19일 괴산 장날에
맞추어 충청북도 만세운동의 신호탄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다음장날엔 동생 홍성희에의해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계속 장날마다 만세운동이 연속되었다고
한다. 충청북도의 만세운동은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지역에 만세비가 조성되어있어 곳곳에서 운동이 일어났음을 대변해준다.
[괴산읍 애국선열 추모비...]
괴산읍사무소를 지나 괴산동헌을 보고 경찰서담을 끼고 올라가면 괴산전매소
앞에 애국선열추모비가 있다. 이곳을 오르는 길은 작은 농로이다. 그리고 추모비가 조성되어있는 곳엔 막아놓아 주차할 곳도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밑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 올라갔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는 푸념이 나온다. 잠시 괴산읍을 내려다보며 만세 운동때 이명을 달리하신
님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이 존재하였기에 지금의 아름다운 강산과 또 이렇게 편한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괴산읍 서부리 명덕초등학교 교정...]
추모비에서 다시 돌려 나와 윗길로 오르면 명덕초등학교가 나온다. 멀리
운동장 끝으로 옛 교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커다랗게 새건물을 지어놓았다. 명덕초교는 무척 오래된 학교이다. 건물에서 보듯이 일본식의 건물임이
눈에 들어온다. 1911년 괴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1945년 해방되던 해 명덕국민학교로 변명되었다. 학급수는 각학년이 2개반, 약
360여명이라 한다. 선생님들도 30여분들이 조용한 마을 산밑동네에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신다.
[괴산읍 금산리 동인초등학교 교정...]
이번구간여행은 금산리 동인초교를 기점으로 끝을 낸다. 이곳이 괴산읍의 끝이기도 하다. 물론 약
1.5키로 정도 가야 괴산군 문광면과 경계점에 도달하지만 그곳까지는 그냥 평범한 시골이기에 생략하고 이곳에서 끝을 내는 것이다. 이제 괴산에서
보은을 향해 줄달음을 치어야 한다. 이번구간에서는 나라의 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괴산군의 생각이 담겨있는 그런 여행이 되었다
생각된다. 보은 쪽은 어떤 곳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마음이 설레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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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주전통문화회 까페에서 펐다.. 사진으로나마 충민사,제월대,향교,괴강다리,개심사,명덕초,동인초.. 보니 반갑다.. 소풍때 대부분 가본곳이네... 참, 예전에 명덕과 동인초등학교는 왜그리 싸웠을까~ 그이유 아는 사람? ㅎㅎ 난 정말 모르겠다...
괴강에서 옛날에 오리배 타던거 생각나서 웃어보네..^0^ 추억이란 정말 좋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