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언제 어디를 가든 업장 탓으로 재난을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천수경의 호신진언《護身眞言》인 `옴 치림’을 많이 외우면 모든 호법신장들이 여러분들을 가호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천수경을 독경하거나 관세음보살님을 찾게 되면, 삿된 기운이 다 흘러나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인 `옴 마니 반메 훔’《aum mani padme hum》은 정법계진언이나 호신진언과 다 연결되는 무척 중요한 진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진언입니다. 이 `옴’이라는 것은 `옴 남’ `옴 치림’에도 나와 있듯이 진언마다 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이 `옴’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각 진언마다 들어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옴’을 온전하게 잘 설명해 놓은 책이 우리나라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뜻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영어로 번역해 놓은 영국 책을 보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옴’《aum=om, m, 唵》은 인도인들이 옛부터 신성시 해 온 소리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사후《死後》에는 그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시작할 때는 om으로, 끝에는 hum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나 본래는 같은 글자입니다.
옴《aum》의 세계
`A〓아
이것은 `아’ 발음으로 `아이우에오’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베체데’ `에이비 시 디’ 하듯이 그 `아’란 것은 모든 만상의 시초음《始初音》으로 스타트《start》란의미입니다.
`U〓우
아이들에게 자동차가 어떻게 달리느냐고 물어보면 `붕’하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계가 돌 때는 `웅-‘하는 소리가 납니다. 즉 바퀴가 돌아갈 때는 `웅-‘하고 소리가 나는데 이것을 과정【process】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우’음은 과정음《過程音》이라고 합니다.
`M〓ㅁ
우리나라 말을 포함해서 전세계 언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전세계 모든 민족들의 언어가 하나의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하나의 근원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말 문법에 《단어》+ㅁ이나, 《단어》+기는 명사형 어미《語尾》라고 하는데 마침, 먹음, 멈춤, 달림, 잠자다 의 명사형인 `잠’ 등은 모두다 ㅁ을 씁니다. 이것은 영어도 마찬가지로 ㅁ【M】발음을 끝【end】이라고 해서 이것을 종음《終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옴《aum》’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고 하는 뜻으로써 이 우주 만유의 처음이자, 과정이자,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어에 나오는 Α《Alpha》과 Ω《Omega》도 다 `옴’에서 나온 것이며, 기독교의 아멘《Amen》도 바로 이 `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멘에도 M자가 들어 있는데 이 M은 우리나라 말로는 ㅁ에 해당됩니다. ㅁ은 굴러갈 수 없으나 ㅇ은 굴러갑니다. ㅁ이 명사형 어미라거나 혹은 끝【end】, 종음《終音》이라고 형용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空, ㅇ】의 근원적인 성품이 이제 잠깐 형체로 머물러 있다 해서 명사형으로 ㅁ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서리가 진 것은 세월이 흐르면 점점 변해서 깨어지고, 깨어져서는 다시 둥글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와서 머물러 있다가 다시 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에도 우주의 기운 자체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만상을 형용하는 내용이 문자로 정착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말에 현재진행형【~ing form】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발음기호가 ` ‘으로 ㅇ입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 노래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singing, riding, playing 등등 모두가 다 바퀴를 달고 있습니다. 바퀴를 단 것은 굴러간다는 것을 뜻하고 있지요.
문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며,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으니 그 말을 잡으면 바로 그 마음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꾸만 말을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에도 그러한 말의 뜻이 형성될 것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 딸 이름 지을 때나 상호《商號》 지을 때도 이 같은 뜻을 꼭 유념해야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들 딸 이름을 근사하게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정성 들여 지었겠지만, 지나다 보면 여러 가지 덜컥덜컥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말의 뜻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직업을 바꾸든지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특징적인 사실은 이름자에 ㅁ이나 ㅂ이 들어간 사업체나 사람들은 뭔가 덜커덩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들만 잘 살펴보아도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성, 금성, 우성, 선경, 쌍용,동양 등 대부분이 바퀴가 달린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또 다들 잘 나가고 있는 기업들이죠.
이미 언급했듯이 말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며, 또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원리를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거나 이름을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언학《眞言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들 딸이나 남편을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러한 흔적들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성할 창《昌》, 행동할 행《行》, 꽃 화《花》, 성품 성《性》, 영화 영《榮》, 꽃뿌리 영《英》자와 같은 글자는 굴러가는 바퀴를 가지고 있는 글자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아이의 생년월일《生年月日》과 생시《生時》을 타고난 기《氣》에 잘 맞춰가자고 굴러가는 바퀴를 달아주면 건강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상호《商號》들도 연구해 보면 여기에는 뭔가 무시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꼭 죽을 사람도 이름을 바꿔 놓으면 사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말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말 가운데에 마음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굴러가는 기운이 그의 몸과 마음 가운데에 스며들어 그 곳에 좋은 기운이 입혀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름은 사람의 간판입니다. 그러기에 이름은 뭔가 아름답고, 뜻이 있고, 부르기 좋고, 듣기 쉽고, 모가 안 나고, 쓰기도 좋은 것이 좋습니다. 법명《法名》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중에는 터져나가는 소리가 있는데 화, 행, 수, 성과 같은 좋은 음이 있는 법명을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이 무장무애, 별 탈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 것도 법명에 그렇게 좋은 음을 쓰고 있는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계속 관찰해 본 결과 그 말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음이 지니고 있는 기《氣》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 자체가 마찰이 많으면 부서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레셴도, 디크레셴도
굴러가고 터져가는 소리는 당장 음악에도 있습니다. 점점 가다가 막히는 것, 즉 `점점 약하게’의 디크레셴도《decrescendo》은 입이 오무라져 입의 기운이 약해지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크레셴도《crescendo》은 `와’하고 터져나가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함성을 지를 때는 `이’라고 하지 않고 `와’라고 합니다. 그리고 웃을 때도 `하하하’하고 웃습니다. 환하다, 밝다, 아름답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자로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ㄱ ㄴ ㄹ과 같은 글자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 글자들은 중성 음이라고 해서,자기의 주체적인 의지 보다는 외력《外力》에 의해 많이 좌우하게 됩니다.
하여간 음이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뭔가 치명적으로,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 전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매일같이 부르는 이름은 그래서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이름이 본인이 들을 때도 막히고, 말하는 사람도 막히는 음이면 기운도 가다가 막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름이 꽉 막혀있는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활달하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꾸 그렇게 불러왔고, 그런 막힌 기운이 쌓이다 보니까, 뭔가 하려고 하다가도 그냥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들에게도 터지는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여자 이름에 계집 희《姬》자를 많이 썼습니다. 여자 이름에 계집 희자를 붙여 놓으면 비교적 얌전하고, 안존《安存》하는 그런 뜻이 그 글자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음운《音韻》이라는 것이 사람의 성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활달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억제하는 힘이 강해 남편 말 잘 듣고 순종하지만 마음 가운데 맺히는 것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많은 분들을 관찰해보니까 능력이 100% 있는데도 발휘를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의 이름을 바꿔놓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라는 세계는 그냥 웃고 넘겨버릴 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옴《aum》이란 음의 세계도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한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일본 여자 이름을 보면 `~꼬’자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꼬’자는 동글동글한 양성모음의 `오’ 발음으로서 부드러운 기운을 가져 옵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상냥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왕조의 왕명《王名》인 태종, 세종 등도 모두 굴러가는 발음이며 태조의 `오’ 발음도 모두 양성 발음을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중국인들은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한자에도, 여자 이름 하나 지을 때도, 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해서 여자들 이름에 막히는 글자를 넣어 기를 못쓰게 해 놓은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중요한 지맥《地脈》마다 쇠파이프를 박아 놓은 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풍수적으로 본다면 기가 흐르는 맥을 꽉꽉 막아 놓은 것입니다. 꾸불꾸불 흘러가는 산의 정기《精氣》을 강한 자성《磁性》을 띈 쇠로 그 자리에 꽉 묶어놓아 버렸으니 발전이 어려울 것입니다. 이 같은 대 우주의 기운은 옛날의 도인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여자들 이름에 디크레셴도 음《音》을 달아 놓으니까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꾸만 자기 스스로 억제하게 되고, 그러다 속병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요즈음 여자들의 이름에는 희자 이름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마니 반메 훔
마니《mani》
옴 마니《aum mani》의 `마니’는 원래 여의주라는 말입니다. 여의주란 문자 그대로 여의주에다 자기 소원을 정성 들여 빌면 만사길상 여의 원만하게 형통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니《mani》라고 하는 것은 또한 무진장《無盡藏》이란 뜻도 있습니다. 장《藏》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축적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많다는 말은 `many’이며,한국어에서는 `많이’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언어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과거 이 지구상에 내려온 어떤 존재들의 언어 현상은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어, 산스크리트어, 희랍어 등을 망라해 보면 비슷한 단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굴러가는 바퀴’는 전 세계가 공통입니다. 영어도 ~ing form이고, 우리나라 말도 `ㅇ’이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도 다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건 뭔가 하나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원류《源流》이 하나라는 얘기이지요.
반메《padme》
`반메’란 연꽃이란 말로 번역이 되지만, 여기서의 연꽃이란 거대한 우주의 소용돌이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대연화《大蓮花》은 대 우주를 뜻하는 것입니다.
훔《hum》
`훔’이라는 것은 `옴’의 마감으로 `옴’과 같은 뜻입니다. 모든 진언은 참으로 묘하게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옴 치림’에서는 `림’으로 끝이 나고, `옴 남’에서는 `남’ `옴 마니 반메 훔’에서는 `훔’으로 모두가 다 ㅁ으로 마감되어 완결을 시킵니다.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해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추해서 생각해 보면 `우주의 처음이시자, 과정이시며, 모든 것이신 무진장의 존재, 대 우주의 주재자이신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하는 산스크리트어의 뜻으로써 문자 그대로 우주 그 자체의 어떤 근본 성품을 음성으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옴 마니 반메 훔’을 여러 번 하게 되면 몸과 마음 가운데에 우주의 기운이흘러 들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염불 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같이 수행하던 한 도반이 `옴 마니 반메 훔’을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단계가 되니까 신통이 열려오더군요. 물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진언과 음성의 세계는 참으로 무서운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세계라고 말씀 드릴 수도 있지요.
부처님께서 성자즉실상《聲字卽實相》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말이 곧 실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도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옴 마니 반메 훔’이란 말을 계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부처님으로, 관세음보살님으로 형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너는 이 다음에 참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계속해 말하면 그 아이는 그렇게 되어져 갑니다. 그리고「나쁜 놈 같으니라구」란 말을 계속하면 정말 나쁜 놈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족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 자체에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까 밝고 환한 소리를 쓰면 그 사람은 점점 밝고 환한 길을 가게 되고, 자꾸만 막히는 음을 쓰게 되면 음으로 양으로 자기의 능력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주저앉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법당에 나와서는 세속 이름을 부르기보다 법명《法名》에다 보살을 붙여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속과는 다른 새로운 장《장》이 열리게 됩니다. 소리가 운명을 형성하고, 미래를 형성하며, 부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간 미학의 세계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음운에 어려있는 무한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anstein》이란 구조주의 언어 철학자입니다. 그는 말을 쓸 때 정말로 말 하나하나의 음운조차도 아주 의미 있게 쓰라고 했습니다. 까숑 바슐라르라고 하는 불란서의 시인도 언어 미학에 매우 박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에드워드 워홀이라는 미국의 미학자는 그가 연구하는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분위기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건물들 분위기가 시민들의 정신 세계를 그런 분위기로 양성합니다. 아파트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미국에선 이런 부분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건물을 세우는 데에도 너무 건물을 떼어 놓으면 똑같은 동질의 건물일지라도 분위기가 틀려집니다. 공간 미학에서는 이 공간과 공간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연구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도 각이 진 건물과 타원의 건물, 원형의 건물이 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양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는 무형의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런 거리감이 많이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뭔가 밀쳐내는 장벽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거리감이 적은 친근한 사람에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다 이 같은 원리가 작용된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절에서 보면 스님들은 절에 왔다 가는 신도들을 그냥 보냅니다. 그래서 거리감이 많이 생기지만 목사들은 나갈 때 대부분 악수를 하고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감을 축소시키는 길입니다. 비록 남남이라 할지라도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그 부부가 각방을 쓰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 부부 사이는 이미 많은 거리감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어릴 적부터 다른 방에서 키웁니다. 따라서 그 아이가 자라도 부모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잘 공경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아이들이 커도 엄마들이 계속 끼고 지냈습니다. 석학 라이샤워교수 같이 동양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이러한 거리감이 주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확실히 터득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공간 미학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아기자기 합니까? 생활 구조를 보아도 그 조그만 공간들은 정말 섬세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사는 인간들도 상냥하고 아기자기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요즈음 건축 미학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양성하는 공간 감각을 크게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건물들은 이와 같은 감각을 전혀 백안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초대형 건물들이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딱딱하게 되어 버렸지요.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을 설계한 사람은 이러한 공간 미학을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건물을 잘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고 양쪽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으로 화합의 분위기가 돌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분위기에 많은 관심을 써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너무 건조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가구를 배치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와대에서 회의를 할 때 원탁회의를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사각으로 각이 져 있으면 뭔가 딱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건물도 가능한 한 원형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곡선을 내려면 물론 돈은 많이 들어가겠지만, 정성을 들인 만큼 부드러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에는 중요한 측면인 형태 미학의 세계, 건축 미학의 세계, 공간 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어의 음을 보면 흐, 크, 프, 트와 같은 강한 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다툼을 많이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일본도 역시 많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일본말의 음운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모난 점이 많고 골이 들어가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나 부부간에 말을 나눌 때도 가능한 한 뭔가 그 말에다가 기운을 실어 보십시오. 단순한 사무적인 언어가 아니고 거기에 어떤 공간 미학적인, 뭔가 정감 어린 내용을 넣어 톤을 부드럽게 해서 보내 보십시오. 중국어를 연구하다 보면 평상거입《平上去入》의 사성《四聲》이 있는데 중국인들이 뭔가 응집력이 강한 이유도 그러한 연유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아는 것 만큼 산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 했듯이,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만큼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어 `모르는 것이 약이다’란 말도 나왔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들은 아는 것만큼 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그저 눈에 보이는 세계밖에 없다면 보이는 세계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가운데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계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 세계는 우리에게 부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우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며 항상 우리를 응시하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이미말씀드린대로`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保護持》’`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일천 개의 팔로 고통 속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시고 일천 개의 눈의 광명으로 온 세상을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꼭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부처님께서는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터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데 입으로만 외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엔지니어다’하면 그 방면밖에 모릅니다. 물론 그 방면 하나만 해도 새로운 기술이 자꾸 개발되니까 공부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우리 중생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밖에 모릅니다. 엔지니어도 그렇고 의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자기 공부하기 바쁘니까 시야가 넓질 못해요.
제 친구 하나가 종합병원에 취직해 있다가 어느날 직접 병원을 개업했는데 그 이후 부인의 행동이 크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친구는 진료하는 것밖에 모르고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고, 그래서 부인이 구청 세무서 경찰서 등 가리지 않고 외부 일까지 보다 보니 자연히 적극적이 되더라 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다른 병원에 취직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병원을 개업하고 난 다음에는 구청과 세무서 일까지 보다 보니 정말 왈패가 다 되었다고 한탄하더군요.
사람들이 한 방면에만 몰두하여 오래 가다 보면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기가 볼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넓은 세계를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을 그 만큼 폭 넓게 사는 것이며, 마음의 폭 또한 그 만큼 넓은 것입니다. 보이지않는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의 마음은 항상 영원성을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머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영원답게 산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등한시하고 보이는 세계에만 탐착하다 보면 금생의 삶이 끝인 줄 알고, 악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아는 것 만큼만 살고 있습니다.
소리의 세계, 색채의 세계, 공간의 세계 등 우리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통제하는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조그마한 아파트의 공간 속에 살다 보면여러 가지 답답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집에 가구를 배치하는 것이나 색채나 공간을 배려하는 슬기로운 가정 주부의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그 모두가 부처님세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가 아는 것 만큼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이 괴로워지고 문제가 생기기에 앞서 나 자신이 먼저 괴로워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상대방의 귀에 가기 전에 나의 귀에 먼저 들어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귀는 내 귀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말을 한번 허공으로 날리면, 그 미움과 증오의 말이 내 귀를 타고 흘러와 내 마음 속에 먼저 새겨집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 그에 대한 상스럽고 격한 소리를 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세뇌가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세포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 몸의 세포들이 전부 다 상대를 미워하는 세포들로 형성되어 갑니다. 상대를 미워하면 세포들은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을 품게 되어 내 얼굴이 먼저 밉상이 되어 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 수록 내 얼굴이 그만큼 빨리 밉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함으로 인해서 자기를 밉상으로 창조해 가는 결과가 됩니다. 이 우주의 원리가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 가운데 모가 난 세포들이 생겨나고 세포가 모가 나니까 인상도 모가 나고 날카로워지고 상대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얼굴에 배어 있게 마련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와 같은 몸체와 마음체를 형성해 가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자라난 아이들은 몸에 그런 기운이 배어있습니다. 보살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어렸을 때 가족 가운데 뭔가 문제성이 있게 자란 사람들은 자꾸만 모든 일을 왜곡되게만 생각합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일 수록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비뚜러지게 생각하며 왜곡된 시각으로 보곤 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은 다 어렸을 때 시작되어 오랜 세월 쌓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을 몇 마디 나눠 보면 그분의 커 난 배경에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마음 연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다 보니까, 정말 단 몇 마디에도 그 사람의 과거 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행동 양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왔는가의 여부를 알 수 있게 되더군요.
관성의 법칙
우리 삶의 모든 면모들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소한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하여 그것이 또 다른 여파를 일으켜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그렇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때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조그마한 악행이라도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떠오른다고 생각될 때 빨리 밟아서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그냥 방치를 해 두면 그것이 새끼를 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줄 생각하나 그런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 한 마디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은 사람보다 다음에 또 다시 거짓말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두 번은 예사로 하다가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면 다음에 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 관성의 관《慣》자가 습관 관자입니다. 습관이 계속되면 습벽《習癖》이 됩니다.
제2의 천성이 습관이라 하지만 그 습관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고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벽에 이르면 떼기가 힘든 상태가 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도벽이 있는 사람을 보세요. 무의식적으로 손이 남의 물건으로 가고,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 투성이입니다. 습벽이 쌓이면 업이 됩니다. 업이 되면 이것은 완전히 알라야식《Alaya識》에 새겨져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깊고 깊은 참회를 하지 않으면 그 업이 녹아져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장소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업장소멸이다, 선근《善根》의 증장이다 하지만, 한번 쌓인 업은 참으로 지워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겁《劫》을 두고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습관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 날은 감방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것도, 부처님이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감방에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파고 들면서 마음의 세계를 연구해 보면 전부가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어찌해서 사람들은 다 하느님 아버지가 판가름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자기를 판가름하고 결정 지우는 것이기에 우리가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쌓이고 쌓여서 좋은 미래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프로이드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로이드가 아프리카에서 한 흑인을 데리고 와서 컵에 설탕을 타서 마시기 좋게 해서 주었더니 극구 안 마시려고 하더랍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흑인이 살던 나라에 설탕이 없었기 때문에 하얀 분말을 소금이라 생각했던 거지요. 프로이드는 그 사실을 목격한 다음부터「인간은 현재 이 순간에도 철저히 과거의 지배를 받는다.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의 인간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통찰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삶을 살아가고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가지 지견《知見》과 공부한 것들이 올바른 것이라면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견과 공부가 왜곡되고 편견에 치우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 좋지 못한 지견들이 마음 가운데 가득 차서, 그가 선택하는 카드도 왜곡되고 아집에 차서 전혀 볼품 없는 카드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도 볼품 없이 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자꾸 듣고 공부하면서 진리를 생활화해 나가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판단의 척도와 준거와 틀을 형성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바르게 형성된 여러분들의 판단과 척도는 여러분들의 미래를 밝고 바르게 열어갈 것입니다.
그 옛날 도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물을 관찰하고 통찰하는 정도가 예상 밖으로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 건축 일을 하는 어느 분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옛집을 전통 양식 그대로 보수를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조로 된 몇 백년 된 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 목공들의 기술이 굉장한 수준이더랍니다. 현재의 이름있는 건물을 찾아 옛날 기술과 비교해 보니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옛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했더니「어째 한국에 이렇게 쓸만한 목공이 없느냐?」고 한탄을 하더랍니다.
목공이라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하나 하나 기술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패로 나무 한 토막 밀더라도 정성스럽게 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 선조들은 대단했던 거지요. 끌을 대고 대패로 밀 때 정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니까, 놀라운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과 같은 경제성 위주의 목공들에게 맡기면 옛날 같은 집이 지어 질리가 있겠습니까? 장인 정신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건물에는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들어나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을 장인답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우리는 인생을 너무나 함부로 살아갑니다.
상학《相學》에 보면 얼굴 표정 짓는 것 하나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딱딱한 마음으로 얼굴 표정을 짓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표정도 굳어집니다. 무언가 남을 경멸하는 것 같은 인상으로 변해갑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굴에다 별난 그림을 다 그려갑니다. 통찰력이 깊은 사람은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조금 똑똑하거나 지혜가 많아 남에게 칭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어딘가 공손하지 못합니다. 교만심과 아상에 차서 쌀쌀 맞고 냉정해 보이며, 상대방에게 썩 훌륭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밝고 맑은 인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도《道》답게, 진리답게 엮어나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주의 종이다’라는 식의 위압적인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宗敎》은 글자 그대로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듯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으뜸이 되게, 도답게 펼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하면 오장육부도 함께 우울해집니다. 따라서 우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내장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기계가 활력 있게 돌아가야 100% 기능 발휘가 되듯이, 우리 몸도 기능 발휘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시면서 마음의 세계가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항상 마음을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격렬한 마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자기가 자기에게 심판 당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자신의 심판은 외부에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자신을 심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공부는 먹고 살기 위한 공부지만, 부처님 말씀 공부는 영원으로 가기 위한 공부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불모《佛母》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원
준제진언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우리의 앞날을 기원하는 간절한 내용의 게송을 공부하겠습니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아금지송대준제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내가 지금 대준제보살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올리오니 하는 뜻입니다. `지송’할 때의 지《持》은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지송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독송한다는 뜻이고, 계속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도할까요? 준제보살은 부처님이 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부처님이 될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부처가 되려는 사람들을 가호하시는 불모《佛母》보살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자비롭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 보살님들도 다 불모이며 부처님의 어머니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이 다 부처님들이시니까요. 그런데 불모는 불모인데 쓸데 없는 소리나 하고 사는 불모이고, 매일 남편에게 바가지나 긁는 불모들이십니다. 그러면 여러 불모의 아이도 자라서 허튼 소리만 해대는 부처님이 되게 마련입니다.
`아금지송대준제’라, 내가 이제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기도는 올바른 해답을 얻게 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세상이 복잡한 시대에는 마음을 맑히는 작업인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삶을 살아 가노라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될 순간들이 많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마다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맑은 마음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맑고 아름답게 전개되어져 갑니다. 맑은 마음이 아니면 선택의 카드를 올바로 잡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불보살의 가호지묘력도 대단히 중요한 측면이지만, 우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된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측면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엔더슨 파이트《Enderson Fight》란 사람이 미국의 성공한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영감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답니다. 그들 중에서 영감에 바탕을 두고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사람이 10명 중 9명, 그러니까 90%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영감이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보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도 많고, 선심이 두텁고,좋은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감이 강한 사람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앞장 서 나가는 부류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더럽고 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영감이 발로될 수 없습니다. 엔더슨 파이트란 사람이 발견해 낸 것은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각도로 연구해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냥 공부만하고 믿기만 하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것 이상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심《信心》이라는 것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 가시면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정진하면 진실로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선택하며,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등등, 우리가 선택을 강요 당할 때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를 계속하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마음이 탁해져 있으면 세상을 탁하게 봅니다. 나밖에 모르고 이기심만 가득해집니다.
마음이 탁한 것은 거의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독심이 가득 차서 마음이 탁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해서 그 마음의 탁한 부분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게 됩니다. 영감이 강화되고, 마음의 세계가 점점 열려갑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면 이기심이 녹아져 내리고 업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즉발보리광대원
`아금지송대준제’, 다시 말해서 기도를 열심히 끊임없이 하면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발보리’란 깨달음의 길을 나가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광대원’은 나만 잘 살겠다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구제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며 원력보살이 되겠노라는 서원입니다. 기도도 처음엔「우리 남편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이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하지만 나중에는 `광대원’의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같이 치열한 입시에는 참으로 기도의 힘이 무섭게 작용되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말하는 것도,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가 달라져 갑니다. 원력보살이 되어집니다.
원아정혜속원명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하옵건대 정과 혜가 속히 밝아지게 하여 주소서의 뜻입니다. 기도를 계속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지혜로워져서 두루 원만해지고 밝아집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됩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런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참선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기도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정과 혜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작업인 것입니다.
`원아정혜속원명’, 마음이 안정되고 지혜로워져서 뚜렷이 밝은 부처님 마음 속히 갖추게 하여 주옵소서의 의미입니다. `즉발보리광대원’, 즉 넓은 원력으로 살아가는 마음이어야만 대원《大願》을 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뚜렷이 밝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이 여러분들 눈에는 보이게 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막이 씌어서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만약 눈에 까만 안경을 쓰고 있다면 아무리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이겠습니까? 눈이 밝은 사람만이 다이아몬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기도를 하게 되면 눈이 밝아지고 마음의 폭도 넓어집니다. 내 마음의 세계가 넓어지니까 모든 것이 뚜렷이 밝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그런 사람들은 저절로 남다른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원아공덕개성취
부처님 말씀은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나옵니다.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크고 넓은 모든 공덕 모두 모두 이루어지게 하소서의 뜻입니다. 기도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짓지 못하는 수승한 공덕을 짓게 됩니다.
원아승복변장엄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가장 수승한 복으로 나의 삶을 장엄하여 주소서의 뜻입니다. 공덕을 많이 짓다 보면 가장 우월한 복인 부처님의 복으로 마음을 장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따지며 깍쟁이처럼 살지 마세요. 여러분들 보다 더 많이 공덕을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 보다 인생을 더 진지하게 정진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내가 전생에 복을 조금 지어서 금생에 좋은 남편 만나 먹고 살기가 웬만하니까 자기만 잘나서 그런 줄 알면 그것은 정말로 큰 오산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중생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 정말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수승한 복을 지어서 자기 몸과 마음을 장엄 하십시오. 그리하여 공덕장엄이 되면 저절로 회향이 됩니다.
원공중생성불도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두루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의 뜻입니다.
불교의 이상은 모든 중생들의 성불입니다. 예불문에도 나오듯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 부처님의 이상이며 불자의 이상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원《願》을 세우고 정진하는 구경《究竟》에는 성불의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그 목표가 성불에 맞춰져야 합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에도 성불, 둘에도 성불이어야만 합니다. 그 길을 위한 것은 받아 들여야만 하고, 그 밖의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성불은 우리 모두의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여래십대발원문【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 痴》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여래십대발원문은 여래의 발원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여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런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는데 있어서 중생제도에 필요한 발원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개가 분리되어 있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중생인 우리를 제도하려고 하는 발원이든,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하는 그런 근본적 금과옥조이든 간에, 역시 우리의 마음을 갈고 닦는 지침이라고 하는데는 다를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된다는 부처님의 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수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순간 순간 밀도 짙게 내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만, 그 의미가 얼마나 심중한 것인가를 항상 공부를 해나가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삼악도를 떠나라 ◐원아영리삼악도◑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삼악도인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을 버리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며 공덕장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선 모두 아십니다.
내가 베푼 만큼 내 마음이 열리기에 내 몸의 세포들도 건강해지고 또 그 건강해진 세포가 허공에 그 만큼 좋은 기운을 뿜어내니 화엄신장님들도 그 만큼 가호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빈 구석이 없습니다. 우연이란 절대 없습니다. 진정 우리는 마음 가운데 아귀, 지옥, 축생의 마음을 버려야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6바라밀행을 닦고 기도를 하고 살면 모든 것이 서서히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이 베푸는 것 만큼, 기도하는 것 만큼 되는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되게 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디 먼 곳에 계시는 분입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체험해 본 사람들은 `부처님! 당신은 누구 시길래 이렇게 바로 이 마음속에 임하시는가요?’하는 감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삼독심이란 쓰레기를 다 내려 놓으십시오. 쓰레기가 있는 곳엔 독충과 해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쓰레기 속에서는 파리, 모기밖에 생기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의 세포가 더럽고 탁하면 병균 밖에 안 생깁니다. 더러운 세포 속에서는 암이 생기고 각종 질병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이란 책을 쓴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이 쓴 글을 보면 인간 개조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탁월한 인체 생리학자 엘마 게이트《Elma Gaytt》이 조사 연구한 글을 보면 감방에 들어 앉아있는 알콜중독자와 마약중독자들의 체질을 연구하다 보니 마약과 알콜중독자들은 세포 반응이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침, 땀, 혈액 등의 세포 반응 상태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약중독자와 알콜중독자의 땀을 채취해서 독물을 검출하는 시약, 셀레인 애시드《Celane Acid》을 넣으니까 보통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들의 세포는 완전히 알콜과 독소에 절었을 테니까요.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세포가 완전히 바뀌어져서 생각이 건강해지고, 부처님의 기운을 머금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포용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개조 시키려면 항상 불`법`승을 들어야 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매일 들어야 합니다. 들은 다음엔 행동으로 옮겨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팔만사천대장경을 백천만겁 동안 머리 속에 넣어 놓고 있는 것 보다, 한 마디를 듣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백번 천번 남에게 `베풀어라, 어떻게 해라’하는 것보다 당장 하나를 주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많이 들으라고 그렇게 이끌어도 한 번 몸을 움직여 법당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요?
여래십대발원문은 그 의미가 굉장히 깊은 내용입니다. 우리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과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렵고 힘겹고 험난하다 할지라도 마음을 닦고 정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말씀 드리기는 쉬울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이 금방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우선 나의 입에 들어오는 호떡 하나가 더 중요하고, 나의 입에 들어오는 콩 깎지 하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밀도 짙게, 보이는 세계에만 마음을 주고 살다 보니까 무슨 도《道》을 닦는다는 식의 도덕군자 같은 내용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만한 필요성이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원아영리삼악도’의 설명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악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 있고, 아귀의 마음이 있고, 축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닌 나쁜 마음들이 아주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문제성이 많은 마음입니다. 나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남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런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지옥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은 동료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면 참으로 참담한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귀란 굶주린 귀신을 말합니다. 아귀 같다는 말은 굶주린 귀신 같다는 말입니다. 축생 같다는 말은 사람 같지 않고 동물 같다는 뜻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도 전혀 사람 같지 않은 짐승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마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들어 있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신매매 범들이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경찰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사람을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살상해 놓고도 얼굴엔 유유한 웃음을 띄우는 악마의 탈을 쓴 존재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왜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 자꾸만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에서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이 좀 녹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삼독심을 버리라 ◐원아속단탐진치◑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 痴》’라, 하루 빨리 탐`진`치를 끊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에 교만한 마음【慢】과 남을 의심하는 마음【疑】까지를 더해 오독심《五毒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삼독심, 오독심이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전혀 다른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탐욕의 포로가 되고, 성질 내고, 신경질 부리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이같이 중요한 가르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내 앞에 호떡이 하나 떨어져 있으면 나 먼저 먹기 바쁘지, 반쪽 나눠서 앞에 있는 친구하고 나눠 먹기를 즐겨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습니다. 서당개는 매일 서당 앞에 매어 놓으니까 흉내라도 내겠지만, 사람은 그저 법당에 가뭄에 콩 나듯, 오면 오고 말면 말고 하니 부처님 법이 제대로 터득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세속에서의 대학교 몇 년 공부는 인생 몇 십년 먹고 살기 좋은 길로 나가기 위한 것이겠지만, 불교 공부는 영겁의 세월 잘 살고 못사는 것을 좌우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진짜인가 거짓인가, 이런 것만 주판 놓기에 바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꿈결 같이 흐르다 가는 것입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 가듯이 어느날 한 순간에 가버리는 것입니다. 경전에도 우리 중생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산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을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안 끌려 가려고 두발로 버티면서 털석 주저 앉으며, 어떤 때는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 주인이 와서「어이, 일어나 일어나」하면 마지못해 일어납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야, 저 사람 용하다. 소 부리는 도사인가 보다」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큰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는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제 주인 말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주인 덕분에 일생 동안 자기 몸을 살찌워왔기 때문에 빚을 져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막 달려들던 강아지도 제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자기 주인에게 밥을 얻어 먹고 사니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물 중생들도 빚진이에게는 순종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생에 인연이 있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 번 봐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다 전생의 인연들이란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공연히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데도 공연히 내가 명령만 내리면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내가 뭐 하나 얻어 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 그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나 송아지도 주인에게 빚을 졌으니까 거역하지 못하고 자기 고깃덩어리를 팔아 주인에게 값을 치르려고, 할 수 없이 끌려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호떡 하나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전생에 내가 그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리는 경우가 있는 것은 내가 그에게 빚을 져서 그렇고, 그저 나에게 잘 해주고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그가 나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뭔가 밀리는 것 같고 켕기는 것 같으면 되도록 빨리 점심이라도 사고 호떡 하나라도 사서 빚을 갚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좀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생《生》을 송아지로 와서 그 주인에게 봉사를 하게 되면 얼마 정도의 빚을 갚게 될까요? 200석 정도의 빚을 갚는답니다. 소의 평균수명이 20년인데, 20년 동안 200석, 그러니까 쌀 400가마니 정도의 빚을 갚고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퇴직금 얘기입니다. 일반 기업체나 공무원들이 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받습니다. 30년이나 40년 일한 다음 퇴직금을 한 몫 받으면 그것은 일생 내내 일해서 마지막 전리품으로 받는 돈이니까 정말 무서운 돈이지요. 자신의 반 평생을 환산한 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 부처의 어느 국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나왔다가 전부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퇴직금을 날린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난 인생 전체를 사기 당한 기분일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일생 내내 벌어 들인 그 귀중한 돈을 사기를 당해 참담한 상황이 되도록 그냥 놔 두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경전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말입니다. 남에게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갚아야 된다고 나옵니다. 여유가 있으면 돈으로 갚고 그럴 능력이 못되면 송아지로 와서라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빚진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이 뭔가 자꾸 밀리는 것 같고, 공연히 눈치가 보이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퇴직금을 날려버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 십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공짜도 바라게 되고 뇌물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결코 공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신 퇴직금이 날아가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송아지도 도살장에 안들 어 갈려고 떼를 쓰다가 자기가 빚을 진 주인이 야단을 치면 죽을 길도 마지 못해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공짜 좋아하다 보면 마지막에 퇴직금을 날려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갚을 능력이 안되면 다음 생에 소로 오고 돼지로 와서, 살을 먹히고 가죽을 바쳐 그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불공의 중요성
예전에 제가 큰 절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교구 본사 같이 큰 절에는 절에 딸린 논밭이 많습니다. 그 논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깁니다.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좋아졌으니까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소작인들이 가난해서 스님들에게 와서 송아지 한 마리 살 돈을 빌려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송아지를 먹여 키워서 새끼를 치면 그 송아지를 절 송아지라면서 빌린 돈 대신 갚아줍니다.
그런데 가끔 소가 죽은 송아지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산《死産》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죽어서 나오는 송아지도 그 송아지는 스님네 송아지니까, 그 소작인들이 스님들께 와서 상의를 합니다.「스님, 그 죽은 송아지 우리들 주세요. 우리들이 잡아 먹을께요」그러면 스님네들이 그렇게 하라고 쉽게 승락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야! 그 송아지 녀석 전생에 복 많이 지었구먼」이러십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까지 자기 몸을 몸 보시하니 그만큼 빚을 갚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한 것은 사산이 돼서 나오는 송아지라도 동네 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큰 스님들이「저 송아지 녀석은 전생에 복도 못 지었구나!「 하시면서 행자 스님을 시켜서「저 송아지를 땅 파서 묻은 다음 그 위에다 과실수를 심도록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 몸이 거름이 되어 과일 나무를 충실히 키움으로써 복을 짓게 하라는 것입니다. `송아지가 썩어서 과일을 열게 하고, 그 과일을 사람이 먹게 해서 송아지 복을 지어준다. ’
옛날엔 그런 말을 들을 때 그 논리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부처님 말씀 공부하면서 많은 분들을 대하고 살다 보니 그게 다 일리 있는 말씀들로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빚진 기분이 들 때 점심 한 끼 사주면 당당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우리가 대중공양이니 무주상보시니 하는 것도 다 같은 이치로, 그 보시의 기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허공에 뜨는 것입니다. 생일날 생일불공을 해서 떡 한 조각씩을 나눠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고, 또 옛날부터 신랑이 먼 길을 떠나면 꼭 밥 한 그릇씩을 이불 속에 묻어두어 그 기운 때문에 집 떠난 사람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돌아가신 분들 3년 동안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아이들 돌이나 생일에 떡을 해서 한 조각씩 돌리는 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건 과거에 어떤 형태로 건 남에게 베풀었던 것이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둬야 공덕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 법입니다. 떡 한 조각 밥 한 그릇을 공양하는 공덕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래 풍속 같은 것을 보면 무슨 때가 되면 떡 하고 음식 차리고 해서 밥 한끼라도 나눠 먹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음식을 주고 받는 가운데 은연중에 서로가 잘 해주고 싶은 마음 생기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우호적인 연관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고사를 지내거나 생일 같은 날 떡 돌리고 밥 한 그릇 나눠 먹으면 그만큼 좋은 기운이 허공에 뜹니다. 그런 공덕을 짓는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은 복업이 수승한 아들입니다. 고사 때나 개업식 날 떡을 만들어 돌리는 공덕이 다른 데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꾸만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부처님 경에 나옵니다. 천명의 도둑을 먹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착한 사람을 먹이는 공덕이 더 크고, 천명의 착한 사람보다 한 사람의 수행자를, 천명의 수행자 보다 한명의 아라한을, 천명의 아라한보다 한 분의 부처님을 공양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속엔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도둑들 백명 천명 먹여봤자 그들은 또 다시 악도에 갈텐데, 내생 어느 세월에 그들에게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언제인가는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나 도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워주게 되면 그 빚을 받기도 쉽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등급이 높아 내생에는 재상이나 왕후장상으로 태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은 수행 도인이 아니고서는 재상이나 왕후로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지요. 보살의 급수가 높아야 왕후로라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이치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총사령관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을까요? 졸병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을까요? 공덕론이란 철두철미하게 그 속에 계량을 깔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은 바에 따라 사람의 급수가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낱낱이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자손들을 위해서 생일날 꾸준히 생일불공을 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아들 딸 손자들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보세요. 축원을 하며 마음을 발하는 순간 허공계 신장님들이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기도를 붙이는 순간, 여러분들의 정성이 공중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강렬한 파장이 떠서 허공계에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미풍양속 안에도 그런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지어주는 것도 다 그 의미가 수승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허공으로 쏘아 올린 그 파장은 절대로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대사와 구렁이 뼈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잘 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전생의 사연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명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명대사가 두 제자를 데리고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한곳을 가다 보니 큰 구렁이의 뼈다귀가 다 삭아서 산 중턱에 걸쳐져 있는 걸 보고 사명대사께서 첫번째 제자한테 땅을 파서 그 구렁이의 뼈를 묻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는「아휴 스님!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구렁이 뼈를 뭣하러 묻어줘요?」라면서 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제자에게 다시 시켜 그 뼈를 묻어 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 언덕을 넘다가 배첨지네 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가 그때 문득 절에 양식이 떨어진 것이 생각났습니다. 배첨지에게 가서 양식을 좀 얻어오도록 첫째 제자를 보냈습니다. 첫째 제자가 배첨지에게 가서 절에 양식 떨어져서 왔노라고 했더니 다른 때는 무엇이든 잘 주고 하던 배첨지가 그날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서 쫓아 내 더 랍니다. 야단만 실컷 맞고 돌아 왔노라고 사명대사에게 고했더니 그럼 둘째가 가보라며 두 번째 제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째에게는 이유도 없이 야단을 치던 배첨지가 둘째 제자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접을 하면서 쌀 한 자루를 주더랍니다. 하도 이상해서 첫째 제자가 투덜대며 대사님께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그래, 참 이상스럽지.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게 없단다. 우리가 저 능선을 오를 때 묻어 주었던 그 구렁이 뼈는 전생에 배첨지란다. 그 구렁이가 사람으로 다시 와서 지금의 배첨지가 된 것이지. 전생에 쓰던 자기의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주니까 그 기운이 하늘에 떠서 배첨지의 마음에 닿은 거란다. 첫째, 너는 미물 중생에게도 다 불성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구렁이 뼈라고 몰인정하게 무시하니까 배첨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를 무시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준 공덕의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가 모아져서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배첨지에게 전달되어 그렇게 잘 대해준 것이란다. 이 우주에는 정성스러운 마음의 흐름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답니다.
사명대사의 이야기와 같이 여러분들도 살아가시다가 상대방이 이유없이 소리치며 야단을 칠 때는「아, 내가 과거에 그에게 뭔가 몰인정하게 대한 적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말 한마디라도 상냥하게 건네서 과거의 빚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유없이 남에게 구설을 듣고, 자주 다투게 되고, 질타를 당하는 것도 과거의 어느 생에서 좋지 못한 일을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허공에 우리 마음의 염파가 발사되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KBS나 MBC에서 나오는 전파는 물질파여서 언젠가는 힘이 약해 사라지겠지만, 이 마음의 염파는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떠도는 것입니다. 염파를 방송하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한대한 우주와 통하는 채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허공에 뜨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지내고 고사를 지내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은 정말 엄청난 슬기의 소산이라 하겠습니다.
탐`진`치, 탐심《貪心》과 진심《 心》과 치심《痴心》을 가지고 나의 욕심만 차리는 마음은 부처님의 정도《正道》에 어그러지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한 생만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위해서 일하고 항상 남들 앞에 밝고 맑은 인상을 보여 주면 언제 어느 생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는 남의 우두머리가 되어 남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대장이 되려면 대장의 기질을 기르고 그릇을 키우라고 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 좋은 얼굴로 미소를 띄우며 좋은 일을 자꾸 하다 보면 내생에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들이 가정 법회니 기도재일 같은 날 자꾸 모이고 만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생에 다시 어디서 무엇이 되더라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가능한 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고 만나면 그것이 모두 또 다시 어디서 만나게 되는 인연 자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인선원에와서 자꾸 부처님 공부하고 영혼의 등급을 높여 나가다 보면 내생에는 분명히, 적어도 최하위로 떨어진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처님 경에도 나옵니다. 영혼의 승화와 향상을 통해 내생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은 법문 중에 만난 사람들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에 있는 중생들은 모두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밑바탕에 깔고 만나니까 그런 중생들하고는 내생을 기약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도 법의 문중은 세속보다는 욕심이 덜한 사회 아닙니까? 자주 모이고 만나서 마음의 등급을 높이고 복력도 짓는 그런 불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법의 표상, 아사지
부처님의 제자중에 아사지란 제자가 있었습니다. 아사지【馬勝】비구가 어느 날 사위성을 걸으면서 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그가 걸식하는 구역은 사리불존자와 마하목건련의 집을 돌아서 오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이 자기집에 와서 걸식을 하는 승려를 보니까 그 행동거지가 매우 맑고 밝았습니다. 사리불이 그를 불러서「수행자여! 자네가 우리집을 드나든 지가 여러 차례 되었는데 내가 눈 여겨 보니 자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법에 맞고 정확하고 존중할만하다. 자네의 스승은 누구인가?」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사지가 대답했습니다.「나의 스승은 고오타마 시다르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문 속에 들어가 깨달음을 여신 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인연의 법칙을 통해서 우주를 깨달으신 분, 바로 그분이십니다」그 말을 들은 사리불 존자가 감복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사지가 있는 동쪽으로 발을 두지 않았답니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를 부처님의 문중으로 이끌어 준 스승 격인 아사지가 고마우신 분이라 해서 그가 있는 쪽으로 꼭 머리를 두고 일생 동안 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절 바르고 수행자다운 아사지란 비구 한 사람의 자세가 지혜 제일 신통 제일의 수보리와 목련존자를 함락 시킨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도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우리 보살님 중에서도 마음이 닦이고, 마음의 문이 열려져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남에게 아사지와 같은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 여러분 나오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인 속을 걸어다니는 법당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한 분이 나오셔서 이 우주를 다 뒤덮으셨는데,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경지까지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아사지의 마음을 키워가면, 모두가 머지 않아 아사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사지가 되려는 사람은 베푸는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남에게 호떡 하나라도 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호떡을 줄 수 없는 처지라면 그를 위해 관세음보살 한마디하는 마음, 기도라도 한번 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 줄께’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말 그대로 실천된다면 기도해 주는 사람의 힘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새벽 기도와 백일기도도 계속하면 그 원력이 결코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아속단탐진치’, 이생에서 탐`진`치, 삼독심을 끊어 버리십시오. 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그런 생각을 고쳐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내생을 기약 받을 수 없습니다. 법문 중에 들어오는 사람 외에는 이런 마음을 끊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 중에 들어와 만난 사람들만이 내생을 기약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법문을 들으라 ◐원아상문불법승◑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항상 부처님 말씀을 잘 듣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복되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선조들로 부터 쌓아온 공덕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 팔자 반팔자’란 말이 있는데, 사실은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자기의 공덕입니다. 아이들 가운데도 복을 짓고 나오는 아이가 있고 복이 없는 아이도 있다고 들 합니다. 똑같은 부모의 배속에서 세 아이가 나왔는데 첫째 아들녀석은 장가갈 적에 아버지가 잘 살던 때라 한밑천 단단히 보태 줬는데, 둘째 녀석에게는 사업이 크게 기울어져서 냄비 하나도 제대로 못해 줬습니다. 그런데 또 사업이 슬슬 일어나 세 번째 딸 시집갈 때는 해주고 싶은 대로 다 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자기 복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란 다 그렇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많이 지어 주세요. 또 남편과 아이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덕도 열심히 지으시고요. 흔히 보살님들은 남편과 아이들 생일은 잘 찾아주는데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자기 생일에도 부처님께 공양을 하세요. 그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일전《一錢》이 만전《萬錢》이 되어 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씨를 뿌려놓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백 개 천 개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가르침을 따르려면 제일 먼저 법문을 들어서 깨우쳐야 됩니다. 문`사`수《聞`思`修》라 했습니다. 불`법`승을 받들어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공부하는 건 굉장히 영광스럽고 자부심이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무슨 종교를 믿으세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잘 안합니다. 다시 물으면 무슨 죄인처럼 마지 못해서 모기만한 소리로「절에 다녀요」그럽니다. 그것은 절에 다니는 자기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데 대한 어떤 근본적이고 튼튼한 관《觀》이 서 있질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투철한 신심이 서 있질 않으니까 그렇게 행동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절에 다녀도 남들이 하는 대로 향이나 켜놓고 옥수나 올리고 그렇게 다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내면서 속칭 나이롱《?》으로 복이나 빌러 다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초상날 소가 고삐가 풀려 마당을 왔다 갔다 하자 아들이 소를 끌어다 대들보에다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손주가 그 광경을 보고 `아, 사람이 돌아가시면 저렇게 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얼른 외양간으로 들어가서 소부터 끌고 나와 대들보에 묶더라는 것입니다.
절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들이 대개 다 이런 식입니다.「이런 건 틀렸어, 저렇게 해야돼」하면서 한 스님들이 올바르게 해 놓으면, 다른 스님은 틀렸다고 합니다. 절 집에 와서 보살님들이 하는 의식이 무지몽매하고 미신처럼 보이니까, 며느리들이 자기 시어머니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절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 젊은 보살들이 절에 갔다가 놀랄 만도 하지요. 절을 해도 앞뒤 사람 쳐다보지도 않고 마구하다 보니 부딪치기 예사고,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싸웁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가관입니다. 그런 중생들을 모아 놓고 법회를 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한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하니, 어느 세월에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달이라도 계속해서 불러낼 수만 있다면 무언가 한 줄거리를 가르칠 텐데, 일요일에도 가뭄에 콩 나듯 왔다 갔다 하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뜻밖에 큰 효과를 거두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교육이 참으로 무서운 효과를 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지런히 수행하라 ◐원아근수계정혜◑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부처님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끝을 내서는 곤란합니다. 불교는 듣고 끝내는 종교가 아니라, 닦는데 의의가 있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를 빼고 빛【光】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우선 첫째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 계심《戒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선정삼매의 경계를 공부합니다. 그 마음 가운데 혜심《慧心》이 열립니다. 예불문 강의 때 계《戒》의 중요성에 대해 낱낱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란 부처님 되는 길이며 부처님 세계로 올라가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을 통해 부처님으로의 길이 열려옵니다. 진정 불자들은 참된 마음으로 계의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신도5계라든가 보살계 등은 불자의 첫걸음인 동시에 무한 번창의 길이요, 무량복덕의 길이기도 합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강한 힘이 배양됩니다.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경계가 열립니다. 이른바 정《定》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선정삼매《禪定三昧》의 경계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에 해당하는 경계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한없는 지혜의 바다입니다. 지혜의 세계는 조화롭고 장엄 된 세계이며, 무량한 복락의 세계입니다. 지혜는 광명이요, 무지《無智》은 무명입니다. 어두움 가득한 칠흑의 밤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롭고 위험하겠습니까? 찬연한 광명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불교는 지혜의 종교가 아닌가요?
우리 모든 불자들이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은 바로 계`정`혜의 삼학《三學》입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戒》을 가리켜 몸과 입과 생각으로 범하는 나쁜 짓을 경계하는 내용이라 한다면, 정《定》은 산만한 마음을 다스려 부처님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요, 혜《慧》란 무명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실천 방면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세 가지 가 서로 도와 불과《佛果》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또 불경을 분류하여 율장《律藏》을 계학, 경장《經藏》을 정학, 논장《論藏》을 혜학으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 ◐원아항수제불학◑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발원하는 내용입니다. 수《隨》란 수행원이라 쓸 때의 수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받들고 따라가는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마음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자신들이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믿는다 하면서 부처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저 한 달에 한번, 일년에 한번 절에 나올 때만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단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어서는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악과 결부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광명이시라,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암흑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인 8만4천대장경을 마음 가운데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가운데 광명의 세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도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듭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며 정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육이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점은 한 둘이 아닙니다. 종교의 당위적 존재이유, 불교의 존립 근거는 중생의 제도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나는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들의 교화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화란 바로 교육의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 8만4천 대장경의 장광설을 펼치신 것도 모두 중생들의 제도를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고 또 배워야만 합니다. 스님을 가리켜 스승님의 준말이라 하지 않습니까? 또 스님을 가리켜 법사《法師》라 하지 않습니까? 모두 가르침에 가장 큰 의미를 둔 내용들입니다. 진정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을 마음 가운데 놓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 불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운데서 열려오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금강경 가운데 한귀절 만이라도 스스로 깨우치고 남을 위해 전달하는 공덕은 항하사 만큼의 칠보를 보시하는 것 보다도 낫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를 전달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고 강조하신 것은 부처님께서 불법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공덕을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지 거듭 생각케 하는 대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따라 배우는 길, 그 길만이 우리들의 숙명인 것입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 ◐원아불퇴보리심◑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위대한 인간들의 일생은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물러남이 없는 투지의 화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수확의 기쁨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고통 끝에 낙《樂》’이라고 하듯,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는 결코 즐거움의 시간이 도래할 수 없다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과 쓰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위대한 인간들의 삶은 불퇴전《不退轉》의 마음으로 한길로 꿋꿋하게 나간 삶입니다. 그들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탱크였습니다. 영원한 성불의 문을 열어가려는 모든 불자들은 이같은 마음을 견지해야만 합니다. 물러남이 없는 마음, 그 마음은 모두 위대한 구도자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억겁을 두고 닦아오시면서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견지하셨기에 결국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 역시「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라」이셨습니다.「가시밭길이 있으리라, 아픔과 쓰라림의 능선도 있으리라, 그러나 결코 굴치 말고 나아가라」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서도 수행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경계, 물러남이 없는 경계를 참으로 중요시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 되는 법이 없습니다. 고통이 닥쳐올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십시오. `아! 이 고통은 부처님께서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시기 위한 배려이시구나’하고 말입니다.
작은 고통은 작은 즐거움을 가져오고, 큰 고통은 큰 즐거움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다만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고통은 모두 즐거움과 낙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고통을 희롱할 줄 아는 사람, 역경을 유희로 아는 사람만이 위대한 성공자의 대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성불에의 길은 물러남이 없는 마음, 어떠한 고통도 극복해내는 의지에의 화신들이 걷는 길입니다. 고통 끝에 낙《樂》이 오듯이, 위대한 고통 끝에는 위대한 즐거움이 오는 법입니다. 성불의 의지를 돈독히 세우고, 보리도를 증득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부처님의 세계는 열려옵니다. 보리심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이요, 성불의 마음입니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 Myak Sam Bodhi》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준말입니다. 결코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의지가 모든 불자들에게 절대절명으로 요구되는 요즈음입니다.
결정코 극락에 나리라 ◐원아결정생안양◑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끊임없이 갈고 닦아나가는 불퇴전의 자세는 결국 영원한 안락의 세계를 약속합니다. 작은 고통을 이기면 작은 즐거움이 오고, 큰 고통을 이기면 큰 즐거움이 옵니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 부릅니다. 모든 고통과 번뇌가 녹아진 자리는 진실로 무한한 즐거움의 자리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그와 같은 경계에 나아갑니다. 안양《安養》이란 말은 극락 국토의 별호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지고《至高》의 복락 세계입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극한 수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 가운데 무한 번뇌와 고통을 녹여 내려 마음에 한없는 복락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번뇌를 극복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려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끊임없는 수행 가운데 우리들은 물질의 세계에 대한 각양각색의 속박을 이겨내게 되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결정코 극락에 나게 될 것입니다. 극락에 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수행의 과보로 받아 들입니다. 극락에 나게 될 경우 부처를 보장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경전에 나옵니다. 극락에는 언제나 법문이 울려 퍼지고 있어, 무량한 극락의 주인들이 그 법문을 듣고 성불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없다 합니다.
이 우주 광대무변한 세계는 화엄경의 가르침대로 무량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듯, 중생의 업《業》이 다르기에 사는 별【星】도 다 다릅니다. 이 우주의 무량한 다양성은 중생들이 짓는 업의 다양성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경전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삶을 엮어 나간다면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이고 좋은 환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무량한 별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별들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배정되는 업력의 세계입니다. 그들 중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보의 결과인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입니다. 마음의 극락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속히 아미타불을 뵈리라 ◐원아속견아미타◑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의 아미타란 말은 원래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의 뜻입니다. 진리는 광명이라, 진리답게 산 사람은 광명의 존재와 같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세계를 극락, 아미타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명《無明》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진리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명중생이라 부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진리 따라 사는 사람, 진리를 생활화하는 사람들만이 가는 곳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부처님 법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는데 직접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량복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도 훌륭한 선생을 만날 때 참으로 흥겨운 마음이 되어집니다. 선생을 잘 만나서 어렵고 힘겹던 과목을 쉽게 깨치게 되고 흥미를 갖게 됨을 우리는 학창시절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도 크나큰 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신 부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요? 문자 그대로 무량한 영광과 무량한 복덕을 가져올 것입니다. 성불의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쪽 집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선생님들을 만나자면 많은 액수의 수고료를 드려야만 하듯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그만한 공덕을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대통령을 만나면 일을 쉽게 풀 수 있듯이, 부처님을 만나면 모든 일은 쉽게 풀리는 법입니다. 기도 역시 부처님을 만나는 성스러운 행위이기에 기도 가운데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미타부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불의 대도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왕을 한 번 만나기 위해 많은 단계를 거치고 통과해야 되는 것처럼,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고 그를 통과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공덕과 많은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쌓아야만 하는 고행과 수행은 참으로 헌신적인 것이 아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의 분신들로 가득차게 하리라 ◐원아분신변진찰◑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이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노라면 갖가지 어려운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때 마다 내 마음 같이 함께 일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은 사람, 즉 분신《分身》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곳곳 마다에 나의 분신들이 있다면 참으로 모든 일은 순조로이 풀려나갈 것입니다. 분신변진찰의 의미는 나의 분신들이 우주 곳곳마다에 함께 하여지이다 의 뜻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누구든 나의 분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진리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진리와 하나된 사람은 우주와 하나된 사람이고, 이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인 분신들이 될 것입니다. 우주 곳곳 마다에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 같은 사람은 부처의 분신이며, 부처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나의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불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며, 여래와 하나된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물질 세계에 대한 모든 번뇌를 이긴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이와 같은 `분신변진찰’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합니다. 좋은 친구를 원하는 사람, 탁월한 분신들을 주변에 포진 시키려는 사람은 마음을 비워야만 합니다. 특히 여래가 되겠노라는 큰 뜻을 세운 사람들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한계는 장벽이요, 스스로의 발전을 차단하는 마음입니다.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의 마음은 바로 모든 물질적 번뇌를 이긴 자의 마음입니다. 그 같은 마음 가운데 무한자비의 마음이 열립니다. 천수경의 앞부분에 나오듯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입니다. 우주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모두를 나의 분신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무위심《無爲心》의 사람입니다. 대자대비심의 사람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이 땅 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나의 분신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분신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무량중생들을 모두 제도하리라 ◐원아광도제중생◑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道諸衆生》’ 여래의 발원 속에 사는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소망은 중생제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有情衆生》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이 되라 강조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존재들을 가리켜 대승보살이라 부릅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길을 모릅니다. 그것은 세속 중생들 뿐만 아니라 출가 수행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출가 수행자들도 머리만 깎았지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전혀 보살심이 아닙니다. 그저 절 뺏기 싸움, 주지 싸움에 날을 지새는 스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같은 마음은 `광도제중생’의 마음이 아닙니다.
`광도제중생’의 마음은 나를 버려 남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여래십대발원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말로 `광도제중생’, 널리 뭇 중생을 제도하리란 마음을 낸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여러분들의 따뜻한 손길을 원합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생활하기가 궁핍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멀고 마음의 귀가 멀어 무엇이 바르고 참된 삶인지를 전혀 모르는 채,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등불을 밝혀야만 합니다. 어둡고 괴로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심어 주어야만 합니다. 금강경의 한 귀절처럼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지닌 참 보살들이 이 땅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참으로 20세기 말 현대 이 땅 이 시대는 어렵고 힘겨운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고, 애욕과 관능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 시대 이 땅 위에 부처님의 말씀을 펼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치고 치료해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광도제중생’, 이는 부처님의 원대한 뜻이요, 우리들 모두의 삶의 지표이어야만 합니다. 진리에 미혹하고 깊은 어둠 속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일이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입니다. 여래십대발원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 가르침은 바로 `광도제중생’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법을 공부하고 깨우친 불자로서 우리들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진지한 자세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광도제중생’입니다.
1. 불국토《佛國土》의 구현을 위하여
발사홍서원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중생무변서원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란 가없는 중생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나의 형편 닿는 대로 부처님 전에 공양하듯 베풀어 주고, 공부한 것 한마디씩이라도 그들에게 전해 주어 끝없는 중생들 모두를 제도하기를 서원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교리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지만, 불교는 마음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파고들어서 마음을 변혁시키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정도 가지고야 어떻게 그 마음을 변모시킬 수 있겠습니까? 보통 중생들은 천번 만번 들어도 `소 귀에 경 읽기’이기 쉽습니다. 마음에 파고들어 뒤흔들어 놓아야 그 마음이 조금씩이라도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느 자리에 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그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전하는 바로 그 자리가 반야선이 되고 연화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울 곳곳에 가서 부처님 말씀 전하면 서울 시내가 반야용선이 될 터이니까 그것을 보시는 부처님 마음은 얼마나 좋으실까요? 여러분들도 가능한 한 자기 능력대로 부처님 말씀 전하셔서 그 어느 곳이든 반야용선을 만드십시오. 가정이면 가정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동창 모임이면 동창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학부모 모임에 가면 학부모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계속해서 반야용선을 서울시 내 곳곳에 띄워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모이는 곳곳마다, 가정 법회 소구역 하나하나 그 모두가 다 반야용선이 될 것입니다. 그 반야용선을 타고 우리들은 함께 영원의 항로를 나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노력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려운 문제일까요? 다만 노력하고 정진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내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은 항상 허공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데 어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행《行》을 그대로 하면 부처님이 항상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내림하신다 하셨으니 내 모든 정성 다 해 무변한 중생들을 다 반야용선에 태워야 되겠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쓰라림을 우리 모두가 기회 닿는 대로 아물게 해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다 전법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본래 부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한 탓에 중생이라 부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이와 같이 깨닫고 못깨닫고의 한 생각 차이라 하셨습니다. `한 생각 깨달으면 그 자리가 부처요, 한 생각 어리석으면 그 자리가 중생이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래 무한 능력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입니다. 무량한 부처님들께서 깨달음의 길을 통해 부처의 길을 가셨고, 위대한 성자, 현자들은 모두 이 길을 통해 영원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깨달음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이 길을 모르는 자들은 영원히 암흑 속을 헤맬 수밖에 없고 영원히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은 광명이요, 등불입니다. 이 땅을 가득 채운 중생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마구잡이로 함부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풍요로운 존재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천박한 생활을 능사로 알고 인생을 헛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스스로가 부처의 분신임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스스로가 가장 존귀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중생무변서원도’의 길입니다. 우리들 불자들은 스스로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맹세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들은 맹세코 제도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을 받고서 태어났으며 그 은혜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온 중생은 모두가 일찍이 축복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축복 받은 자들이며, 거룩한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거룩한 광명과 은혜로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였습니다. 저들에게 지혜의 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착각을 일으켜 육체를 자기로 삼고, 듣고 보는 물질로서 세계를 삼으며, 거기서 얻은 생각으로 가치를 삼고 그를 추구하기에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 세계는 겹겹이 장벽에 싸여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막혀 있습니다.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잠겨 지냅니다. 이 모두가 미혹의 탓이며, 착각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그릇 인정 한데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제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너와 나의 서원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우리의 가정과 사회 위에 생명의 참가치가 구현되며 불국토의 공덕장엄이 구현 됩니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끝이 없지만 모두 끊겠다는 서원입니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 시켜 퇴락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모두를 번뇌라 부릅니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생사의 세계를 헤맵니다.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번뇌에는 많은 구별이 있습니다. 3독 번뇌 5독 번뇌 등을 비롯, 8만4천 번뇌를 말하기도 합니다. 108번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번뇌들은 성도《成道》을 방해하고, 열반의 길을 차단합니다.
그러나 열반경 등에는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번뇌 그대로가 보리라는 의미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은 경지에서 보면, 미망《迷妄》의 주체인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는 전혀 다른 차원 같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 두 가지가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번뇌는 마음의 때와 같은 것으로 흡사 거울에 때가 묻었기에 닦으려는 마음이 나고, 거울의 때를 닦기 때문에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마음의 때가 깨달음을 이루는데 중요한 측면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먼지가 허공에 많이 떠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먼지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지가 없으면 우리들은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지 입자들에 수증기가 묻어 비가 되는 근본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은 맑아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의미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지닙니다. 번뇌를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번뇌를 녹여 내려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번뇌가 다 하게 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는 번뇌의 제반 양상에 대해 많은 설명이 등장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학술적 설명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복잡한 설명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들은 이른바 3독 번뇌 탐. 진. 치와 5독 번뇌 탐. 진. 치. 만. 의《貪. . 痴. 慢. 疑》 등의 번뇌를 끊어가도록 항상 정진해야만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한없는 무진번뇌가 있더라도, 맹세코 끊어 내겠다는 서원 속에 불자의 수행 생활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한 없지만 모두다 배우겠다는 서원입니다. 우리는 성불의 대도《大道》을 걷기 위해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안내자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부릅니다. 경은 `길’의 의미이고 성불의 대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 작업을 불도《佛道》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도를 닦아가기 위해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법《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불법《佛法》 교법《敎法》 정법《正法》 따위로 부릅니다. 무릇 진리라 하는 것은 불변의 보편적 도리이므로 법이라 부릅니다. 법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광명의 세계이기에 진리를 따르는 자, 법을 따르는 자는 한없는 광명의 세계를 열어갑니다. 그래서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펼쳐지는 한없는 광명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불법을 공부하고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기쁨을 법락《法樂》, 법희《法喜》, 법열《法悅》, 불법의 진리에 대한 맛을 느끼는 경계를 법미《法味》, 불법의 강력한 위신력을 법력《法力》, 불법은 열반의 문이기에 법문《法門》, 불법을 따르는 자에게 열리는 광명의 세계를 법광《法光》, 불법은 만 중생들의 어둠을 밝히므로 법등《法燈》, 불법은 인간중생들에게 혜택을 주므로 법우《法雨》라고 합니다. 그밖에도 법을 바탕으로 한 술어는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 만큼 법의 세계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세간의 모든 것은 잠깐이요, 번개나 아침 이슬 같은 것입니다만, 부처님 법은 영원이며, 영겁의 보배 그 자체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중생은 대해탈을 성취하며, 이 세계는 부처님 법으로 불국토로 승화됩니다. 법이 머무는 곳에 태양이 있습니다. 법이 사라진 곳엔 어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실로 진리의 태양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 법을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있음으로 해서 중생의 희망도, 국토의 평화도 가능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거짓과 다툼과 고통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중생들이 불법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진실로 불법은 중생과 세계를 찬연히 밝혀나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지혜이며 법입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항상 듣고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량한 법문을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해야만 합니다. 법문이 무량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모든 선 지식들과 스님들께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불행과 악과 재난을 쓸어버리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법문 뿐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법문 듣기를 서원하고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드높지만 모두다 이루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도《道》이 있습니다. 많고 많은 종교와 가르침들이 저마다의 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고 많은 도가 이 땅에 존재함은 많은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물론 목적지로 가는 길이 한길 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길【道】가운데 불도《佛道》을 위없는 도《道》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도란 바로 부처님과 하나되는 도이고 진리와 하나되는 도이며 절대 그 자체로 승화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도들은 하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이 따로 있는 상대성의 도입니다. 그 같은 가르침을 꼭 도라 부를 수 있는지 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고서는 우리들의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도는 그 같은 주장을 낮은 차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무한한 창조주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대로 창조주임을 선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창조주임을 깨닫고 창조주답게 살아가기를 가르칩니다. 우리 스스로 무한한 창조주임을 선언한 도는 불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가 곧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장엄한 가르침이요, 위없는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도 가운데 부처님과 하나되고 영원과 하나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불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안겨옵니다.
우리는 진정 위없는 불도를 성취할 것을 서원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번뇌 망상 등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무한의 존재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갖가지 물질을 바탕으로 한 독심과 악심들의 번뇌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하나됨을 방해합니다.
불도를 닦는다는 것,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번뇌를 녹여 내리고 부처와 하나되는 작업입니다. 참으로 성스럽고 지고《至高》한 값어치를 지닌 숭고한 작업입니다. 우리 모두 위없는 불도를 성취하겠노라는 굳세고 굳센 서원을 다짐해야만 합니다.
불도를 다른 말로 보리도《菩提道》니 해탈도《解脫道》니 등등의 술어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문자 그대로 도를 닦는 작업입니다. 외부의 힘이 아닌 스스로가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흔히 도로를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길을 닦으면 그 길을 따라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 동안 길을 닦아나가다 멈추어 버리면 우리는 다음 생에 그 길의 끝에서 다시 길 닦는 일을 시작해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은 부처님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아불퇴보리심’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불도만이 위없는 도이며 영원과 하나되는 도임을 자각하고 쉬임없이 나아가 그를 달성토록 서원해야만 합니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내 마음속에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기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를 맹세코 끊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법문을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불도를 맹세코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내 중생부터 제도하고 내 마음의 번뇌부터 끊어가면서 나부터 열심히 법문을 공부하고 나부터 불도를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리하여 아사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사지가 되어야 친구 따라 능인선원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몸과 마음을 다해 가르치려고 작심을 한건, 누구나 가 다 소중한 분들이며, 누구나 다 아사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보리, 목건련들과 연결되어 있겠습니까?
2. 한없는 예경의 마음
발원이귀명례삼보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발원이《發願已》, 발원을 마치고 의 뜻입니다.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란 삼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예배드리옵니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발원은 이제 마쳐졌습니다. 사홍서원 이상의 발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삼귀의로 귀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심귀명례’하듯이,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참으로 고귀하고 장엄한 것이기에 그 길은 삼보님의 위신력과 더불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원력의 달성을 위해 항상 삼보님과 하나됨을 선언하고, 한없는 예경의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하나되는 마음이고, 우리들은 `지심귀명례’를 통해 그를 확인합니다.
나무《南無》의 뜻은 바로 지심귀명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상주《常住》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시방《十方》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서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너의 마음 나의 마음이 부처이듯, 이 세상 모두를 부처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바로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우주를, 만상을,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보님 전에 귀의해야만 합니다.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시는 부처님, 항상 함께 계시는 가르침, 항상 함께 계시는 스님들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합니다’의 의미입니다.
1. 영원한 정진을 위하여
정삼업진언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여기서 부터는 불공을 올릴 때만 외우는 부분입니다.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진언의 내용을 해석하면 `옴, 본래 청정한 일체 법성이여, 내 자성도 청정해 지이다’의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은 원래 청정하니 자신 또한 이 법과 더불어 청정하게 되어지며, 그렇게 될 때 삼업도 깨끗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 구. 의,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삼업을 잘 다스리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제일 처음 천수경을 독송할 때 삼업을 청정히 하고 독송합니다. 법요식이나, 법회, 제사, 불공을 올릴 때 천수경을 제일 처음 독송합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부터 제단, 불단, 지장단, 신중단, 영단을 여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의 문을 부처님께로, 관세음보살님께로, 지장보살님께로, 화엄신중님께로, 영가님들께로 연다는 뜻이 다음에 나오는 개단진언입니다.
개단진언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개단진언《開壇眞言》, 제단을 여는 진언입니다.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이란 진언의 의미는 `옴, 금강의 문이여, 열어지이다. 삼매에 두루 들어가리라’의 뜻입니다.
우리가 법당 문을 열었다고 하면 법당의 분위기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단을 열고 불공을 올리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천수경을 공부하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가 완전히 펼쳐집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이 개단진언입니다. 문을 열면 그 세상은 별천지로서 부처님의 세계로 만들어 갑니다. 정법계진언은 앞에도 한번 나왔는데 또 한번 더 법계를 맑히는 진언을 하고 부처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완전히 맑고 깨끗한 별천지가 되는 것입니다.
건단진언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건단진언《建壇眞言》, 제단을 세우는 진언입니다.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의 진언을 풀이하면 `환희신장이시여, 단을 세우는 신장이시여, 희열의 낙원을 펼쳐 주소서, 모든 일을 성취케 하옵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단을 세우고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청해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기쁨과 환희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2. 정상에 놓으라
정법계진언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법계를 맑히는 진언입니다. 앞에 나오는 정법계진언인 `옴 남’과 관련지어 해석하면 됩니다. `옴 남’은 원래는 `옴 람’ 입니다.
귀절마다 장엄한 뜻
나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여피계명주《如彼 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색깔도 선명하게 글자로 풀어서 기록한 이 천수경은 한 귀절 한 귀절이 모두 다 부처님의 점, 공점으로 장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공점’이란 부처님의 점, 공의 마음, 부처님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수경은 중요한 것이고 그 공덕이 무량한 것입니다. 천수경에 쓰인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부처님의 마음으로 장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피계명주’, 흡사 계명주 같다는 뜻입니다. `계’는 꿸 계자로 흡사 밝은 구슬이 꿰어져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하며, `치지어정상’은 항상 처음과 정상에 두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다같이 생각을 좀 해 봅시다. 눈앞에 새로운 신천지가 열리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줄줄이 꿰어져 있는 세계를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뉴욕에 갔을 때 티파니란 유명한 보석상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보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천수경에 나오는 보석은 티파니보석상의 그런 보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방울 다이아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천수경을 부지런히 독경하게 되면 수천 캐럿트 다이아몬드 목거리보다 더 값 있는 보석을 가슴에 달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고 기도하게 되면, 여러분들 마음에 그만큼 아름다운 보석으로 꿰어진 마음의 목걸이를 거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걸려있는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보이십니까? 다이아몬드 한 알도 비싸다는데, 그 비싼 다이아몬드를 줄줄이 알사탕으로 엮어 놓았으니 이렇게 값진 보석을 어디에 보관하겠습니까? 물론 최정상의 자리에 보관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경은 소중한 것이기에 그래서 소중하게 보관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만, 스님들이 공부하시는 어느 강원에서 스님들끼리 싸움이 났습니다. 싸우는 도중 한 스님이 화가 나서 보고 있던 경전을 던졌는데, 나중에 그 스님이 내려가다가 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들이 우리 눈에는 그냥 종이로 보이지만, 허공에 계시는 화엄신장님들의 눈에는 아주 밝은 황금 빛 덩어리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이 들어있는 책들이나 경전을 함부로 다루지 말고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천수경은 법계 그 자체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
일체촉예처《一切觸 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진언동법계’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진리란 영원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천년 전 진리는 지금도 진리인 것이고 미국에서 진리인 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차원 더 나아간다면 지구에서 진리인 것은 저 멀고 먼 우주의 어느 별에서도 진리인 것입니다.
진언이란 진리의 말이고 진실된 말입니다. 우리들의 진실된 말 역시 법계와 하나 된다는 의미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진언동법계’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만, 법계《法界》의 의미는 법이 유통되는 세계, 즉 광대무변한 우주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참말을 하면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은, 참말을 하면 우주가 그를 가호하게 되고 우주의 도움을 힘입게 된다는 가르침과 통합니다.
우리가 참말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우주가 나를 가호하게 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는 참말, 진실된 말을 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릇된 말, 삿된 말을 하게 될 경우 우주는 그를 저버립니다. 그는 결코 우주 법계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존재로 전락될 것이고 크나큰 재앙이 그를 압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말 중의 참말은 역시 염불이요,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란 우주의 복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읊어대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있습니다.
참말 중의 참말은 기도이고, 또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부처님 말씀을 독경하고 항상 그 같은 가르침을 생활화면 그 역시 우주의 복이 내립니다. 진실로 부처님의 힘, 법계의 힘을 부릅니다.
진언이 법계와 하나되는 위신력을 가지고 있다면, 법계는 청정하고 법계 자체가 부처님이니까 참말을 하고 사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쌓여진 무량한 중죄는 녹아져 내립니다. 기도를 하면 업장소멸이 되고 무량한 중죄가 다 녹아진다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기도는 진심으로의 참회이며, 기도는 헌신적인 참회이다’라고 했듯이, 기도 가운데 참회가 되고 참회 가운데 무량한 중죄가 녹아집니다. 그래서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라 한 것입니다.
천수경은 바로 부처님 말씀이고 진언이기에 천수경은 부처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기에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피력을 힘 입을 수 있습니다.
`촉’은 접촉할 때의 촉자이며 `예처’란 괴롭고 힘겨운 곳이란 말씀입니다. `일체촉예처《一切觸 處》’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괴롭고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천수경을 독경하게 되면 모든 것이 순순히 풀려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이 바로 그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천수경의 문을 열고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송하고 기도하고 나아가면,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모든 일들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슬기롭게 극복되어 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넘어가려다가 ...^^* 조금 보충! <정법계진언>의 <옴 람>의 <람>자는 마치 한자 <라>자 위에 점 하나가 콕 찍힌 모양의 <실담문자>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그 <나>자 모양 꼭대기(정상)의 <공점>이 계명주와 같다는 겁니다..^^* 죄송.. 좋은 글에 약간의 뱀발이었습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감사히 잘 들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좋은 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천수경]을 독송할 때마다 참으로 삼라만상이 죄다 신기루같더군요^^* 그 신비감을 늘 좋아합니다^^*
천수경에 대한 깊은뜻을 자상하게 해석해주셔서 마음속깊이 감사드립니다.._()()()_
그냥 넘어가려다가 ...^^* 조금 보충! <정법계진언>의 <옴 람>의 <람>자는 마치 한자 <라>자 위에 점 하나가 콕 찍힌 모양의 <실담문자>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그 <나>자 모양 꼭대기(정상)의 <공점>이 계명주와 같다는 겁니다..^^* 죄송.. 좋은 글에 약간의 뱀발이었습니다
^^* 매일 [천수경]을 밥먹듯이 독송하는, 가장 한국적인 편집 경전인 [천수경]을 넘 좋아하는 비구로서 양해를 구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수고 하셨읍니다. 좋은 법문공부하게 되여 즐겁게 잘수행하고 갑니다.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좋은글 함참보았습니다. 이좋은글끝 까지 읽으신분들 모두 소원 성취 하시길....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천수경을 독송했습니다. 뜻을 자세히 알려고 한적도 없이... 이제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두어번 더봐야 하겠지만.. 성불하십시요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불심을 키우는 마음에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천수경독송을 매일 하고 있는 중인데, 앞으로도 매일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감사함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좋은자료 잘 공부하고 새겨듣습니다...
좋은글 보고 갑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무척이나 긴~~글인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 다시한번 정독할 생각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불,법,승,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귀한말씀잘보고갑니다..
마음깊이 새기겠습니다.나무아미타불관새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마음깊이 새기겠습니다.나무아미타불관새음보살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법문도 너무 좋았고요 천수경 독송시 정말 신중히 해야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좋은법문감사했습니다..마음수행공부에많은도움이됐습니다..나무석가모니불_()_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새롭게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긴글 깊이 장시간 읽고 배우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깨우침의 글 감사드립니다 ,,_()()()_
법보시 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