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안숙선과 2월 폭설
최명길
밀양고개에서 꼬박 6시간을 갇혔었다. 가히 눈폭탄이라 할만 했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밤눈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눈밭에서 차는 꼼짝 할 수 없었다. 오후 3시(2011년2월11일)까지만 해도 한길은 괜찮았었다.
실은 오후 3시 조금 지나서 방순미 시인의 역마에 얹혀 7번국도 밀양고개를 넘어 휴휴암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안숙선 명창이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기로 오후 4시쯤에 만날 약속을 한 것이었다.
안숙선 명창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빠 내외와 함께였고 일행 몇 분이 더 보였다. 저녁 시간이어서 홍법 스님이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안명창의 우산을 받아 함께 쓰고 휴휴암 좌측 언덕 소나무 숲길을 지나 한 음식점 문을 밀쳤다. 맛깔스러운 복어찜이 나왔다. 우리는 음식을 가운데 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안명창은 자그만 체구에 재담이 넘친다. 타고난 소리꾼에 재담을 더했다고나 할까. 남도 사투리가 가끔씩 튀어나오는 그녀의 말은 좌중을 이야기의 골짜기로 휘몰아갔다.
80년대 초였다. 강릉 강문의 현대 호텔로 모윤숙, 전숙희, 안비취 등 예술인들이 모였었다. 안명창도 함께 갔다. 예술가들을 특히 좋아했던 현대 정주영회장이 초청한 자리였다. 만찬 시간이 되었으나, 모윤숙 시인이 안보였다. 전숙희 작가가 모윤숙 시인 방으로 갔다. 모윤숙 시인은 큰 창으로 파도치는 동해를 굽어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 이광수가 생각나서, 라고 했더란다.
나는 아, 모윤숙 시인의 수필을 읽은 적 있어요. 금강산 유점사인가에 이광수 선생이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모윤숙 시인이 찾아갔었다지요. 두 남녀는 초롱거리는 산별을 보았다지요. 그런데, 이광수 선생은 『렌의 애가』를 쓴 모윤숙 시인의 손목 하나 잡아주지 않았다지요. 어쩌면 그 이야기와 이 이야기가 서로 통하는 점이 있군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좌중은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바짝 모았다. 안명창은 출연 전 가객들의 조마조마한 마음 풍경도 풀어냈다.
이를테면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창은 ‘배뱅이, 배뱅이 배뱅이’를 연창하고, 성악가들은‘푸르르르르 푸르르르 푸르르르’를 연거푸 소리 내어 긴장된 순간을 넘긴다는 것이다. 안명창의 경우는 애가 타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도무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하고 되묻고는 한다는 것이었다. 득음의 경지를 얻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명창들의 길인 줄은 알았었지만, 아홉 살에 주광덕 명인 문하에서 소리를 시작한 안명창의 경우 좀 특별나지 않을까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명창의 고뇌에 찬 솔직한 말을 듣고 보니 안명창의 삶이야말로 불철주야 소리에 묻혀 소리를 향해 가는 수행자적인 삶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스승 김소희, 박귀희, 박봉술 명창이 서로 다투어 빼앗아 갈만 했다.
안명창은 때로는 이야기를 멈추고 소리에 몰입했다. 밥상머리였지만 안명창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정성을 다했다. 안명창이 홍보가 한 대목을 불렀을 때에는 어쩌면 그 작은 체구에서 그토록 강한 폭발력이 일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들었다.
홍법스님은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와 나옹화상의 ‘토굴가’를 낭송해 화답했다. 두 편 모두 짧지 않은 시이지만 줄줄 암송해 괴하고도 놀라웠다. 나는 답례로 시 두 편을 낭송했다. 한 편은 ‘대청봉 초생달’이었고, 다른 한 편은 ‘꽃과 나비의 노래’였다. 그러고 보니 좌석은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작은 시음악회가 벌어진 셈이었다.
안숙선 명창과 나는 1995년 처음 만났었다. 안명창의 판소리가 좋아 ‘가인 안숙선’이란 시를 써 《세계일보》에 발표했었고, 이걸 본 안명창 부군이 안명창에게 알렸던 것이었다. 안명창은 이 일을 마음에 두었다가 지용회 회장을 맡고 있던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에게 만남을 주선토록 해 첫 대면을 한 것이었다.
만남은 그 해 8월 25일 인사동 한 한식점에서 이루어졌었다. 일행은 안명창과 안명창의 제자 3명 그리고 김수남 회장, 다른 시인 한 분과 나를 더한 모두 일곱이었다. 7시에 만나 주안을 겸한 정갈한 저녁을 먹고 난 후 미묘한 소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었다.
그 미묘한 시간이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열락의 시간이었다. 우선 시패를 증정했다. 시패는 내가 자필로 쓴 시‘가인 안숙선’을 김수남 회장이 옥돌에 새겨 담은 것이었다. 나는 옥돌에 새겨진 시를 낭독한 후 패를 전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명창 안숙선의 시간이었다. 고맙다며 벽에 걸려 있던 가야금을 내려 무릎에 얹고 가야금 병창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안명창이 소리 뿐 아니라 일급 가야금 연주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철가와 단가로 이어진 병창은 10시가 되어도 끝날 줄 몰랐다. 소리는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삼천리금수강산을 휘돌아 춘향골 춘향가 쑥대머리로 이어졌다.
단아한 몸에는 오직 한 가지, 소리가 가득 담겨 넘칠 뿐 다른 잡기가 없었다. 안명창의 소리가 고아하다면 바로 이런 몸악기에서 넘쳐나는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리에 빠져들었고, 그 인품에 찬사를 보냈다. 소리는 1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시 한편으로 나는 이 산하가 가꾸어 놓은 소리꾼 안숙선 명창의 소리를 무려 3시간 동안 독락했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눈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는 못 갈 것이라며 휴휴암에서 기숙하라는 간곡한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다음날 춘천으로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내 막내 손녀 승서의 유치원 재롱잔치에 초대를 받고 참가하기로 약속을 해서였다.
눈발은 금방금방 높이를 더하며 차창을 거세게 때렸다. 마치 안숙선 명창의 수궁가 가락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을 들이치는 것 같았다. (200자,14.7장)
[설악신문]‘사는이야기’ 2013년3월18일
첫댓글 그 날이 영화처럼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