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운데 조정은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어이없게도 공민왕이 1374년 재위 23년만에 최만생, 홍륜 등에게 시해되고 말았다. 이에 울분을 느낀 공은 채미사(採薇詞)를 읊으며 남하하여 은풍사동(殷豊巳洞: 지금의 예천군 하리면)을 찾아 스스로 율은거사라 칭하며 도정절을 추모하였으니 이곳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남천하여 복주에 머물면서 성을 쌓은 곳이다. 당시 공은 공민왕의 죽음을 보고 그 비통한 심정을 채미가에 담고 있는데 이때 공의 나이 71세였다.
終朝採採吾安適
今見國事淚滿巾
새벽 잠자리 뒤숭숭하여 내 마음 편치 못하더니
이제 국상을 들으며 피눈물이 두건을 적시누나.
또 그간 왕의 은혜를 생각하며 만시 한 수를 지었으니
巍巍聖德繼先王
五百年來世道昌
早增太學招賢者
晩築氷城退賊羌
一生휼慶終無得
千古凶音遽不當
今日宮前輓素輩
深恩遙憶漏淓淓
높으신 성덕 선왕을 이으니 오백년 세도 더욱 빛나도다. 보위에 오르신 초년엔 태학 넓혀 현자를 부르시고 만년에 이르러선 빙성을 쌓아 흉적을 물리치셨네. 일생 동안 닦은 경사 마침내 부질없고 말았으니 천고의 흉음 내 어찌 감당커나. 이제 궁앞에 와 상여를 매어보니 성은이 복받혀 눈물이 앞을 가리네.
공은 개경을 떠나기 앞서 공민왕 즉위 초에 창건한 평양 영명사를 찾아 주지 황영달에게 비감한 심정을 담은 시 한수를 써 주었는데 이 시는 최근까지도 현판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북이 막혀 그 현황을 직접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1934년 영명사를 방문한 어떤 문인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등영명사기에 따르면 그 현판에 걸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