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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끝 (3)
-꿈을 보여 준 사람들-
4. 베토벤
천지창조: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1, 1-3).
— 교향곡9번(Op. 125, "합창")은 이렇게 시작한다.
1
베토벤 – ‘이 희대의 음악가에 대해서 무엇이 더 개진되어야 하는가. 그에 관해서 관심을 끌만한 것으로 아직도 세인世人들에게 가려진 것이 있는가. 한 민족, 한 대륙, 한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 이미 인류 역사의 소유가 된 지 오래인 이 사람은 더 이상 무슨 이야깃거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서로의 관계란 언제나 특이한 데가 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나에게도 베토벤은 그렇다.
한 음악가가 자기 예술을 통해서 그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간 자세는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 음악가의 삶, 그를 소유했다는 느낌이 그의 음악을 통해서 가능할까. 그 느낌을 듣는 이 자신의 삶에서 힘으로 환원시킬 수도 있는 것인가.
나는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베토벤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끌어 갔는가, 음악이라는 삶의 수단, 삶의 지배 영역, 삶의 승화 예술을 통해서 베토벤이 어떻게 그의 삶을 끌어 올렸는가, 자기 삶을 대하는 그의 음악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베토벤의 삶을 그의 음악을 통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것은 나의 이십 대부터의 바람이지만, 지금은 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일종의 소유의 느낌이 힘으로 환원된 것을 나 스스로 즐겨보고 싶은 것으로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베토벤 자신이 번호를 붙인 작품들, 번호 외의 작품들 그리고 음부音符의 기록일 뿐인 불완전한 것까지도 악기로 녹음한 음향기록들(CD 85장)을 여러 번 들어보았다. 그가 남긴 음악 작품이나 음악적 단상의 음향기록들은, 작가로 치면 한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작품들이나 미발표 유고들과 작가수첩의 메모 등과 다를 것이 없어서, 그의 음악적 실험의 자세도 드러낸다.
그런데 음향 기록들은, 작가들의 수첩메모나 노트를 읽어보는 때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 그 사람의 호흡이, 그 혼의 결이 피부에 느껴질 듯 바로 끼쳐오는 직접적인 느낌이었다.
2
베토벤 그의 음악 세계의 시각화—오랜 기간 그의 음악을 듣고 난 후에 나에게 전개되는 세계는, 인적과 실개천이 끼인 작은 계곡들과 언덕들이 사이사이 없지는 않은 대평원과 남색을 띤, 험준하나 멀지 않은 느낌의 신비롭고 숭고한 높이들이 한 지평에 들어온다.
그의 광활한 시야에는 대리석 모태母胎들이 곳곳에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며 박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끌과 망치로 천연의 원석들을 조형해 나가는 동안 그 원석들은 우뚝우뚝 줄기를 이루었다. 그의 음악세계는 사방으로 벋어나 있는 음악적 조형 그 개념의 준령들이다.
베토벤이 일생 밟아나간 큰 줄기들—7곡의 피아노삼중주, 32곡의 피아노소나타, 5곡의 첼로소나타, 10곡의 바이올린소나타, 5개의 피아노협주곡, 9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사중주곡, 3곡의 종교음악(1곡의 오라토리오와 2개의 미사곡) 등—을 따라가 보면 그가 음악적 표상을 구상화해 나간 자취가 역력하다.
그것은 베토벤 그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어떤 것, 그 유동적인 존재를 새로운 음향 개념에 붙여내 보는 실험적 전개였다. 그의 음악 어느 한 장르에서 일련의 작품을 들어 보면 그의 음악적 구상에서 조형 개념의 실험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데, 베토벤의 이런 모색의 자세는 비단 음악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한 번 들어 보면 바로 눈에 띄는 것들이다. 예로 들어 첼로 소나타들—27세 때의 1번과 2번(Op.5), 12년 후인 39살 때의 3번(Op.69), 다시 8년 후인 47살 때의 4번과 5번(Op.102)—을 대하면 이런 탐구적 자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의 베토벤이 J. S.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조곡]들에서 바흐가 표상해 놓은 첼로 음악의 조형 세계를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의 시작이었을까? 첼로소나타 1번은 다소 조심스러운 행보로 시작한다.)
30살에 베토벤이 첫 교향곡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미발표 작품들이나 각 성부와 악기들의 악보들을 들어보거나, 그가 각종의 실내악곡들, 현악사중주, 피아노협주곡과 관악 실내악, 피아노와 관악 오중주나 관현악 협주곡, 칸타타 등을 작곡한 것을 보면, 이 관현악의 대가는 각 악기의 활용을 실험적으로 숙지하면서 자기가 지향하는 세계를 향해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준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한 번뿐인 삶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자기’라는 의식을 부단히 심화시켜 나가는 이런 자세는 베토벤이 [디아벨리 변주곡(Op. 120)]에서 집대성하여 보여주듯이, 자신의 삶을 움켜쥐려는 그의 의지를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드러낸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후기에서 슈베르트나 멘델스존 등의 차세대 음악인들과 시대적으로 걸쳐 있으면서, 음악적 개념의 실현 양식도 고전의 틀에서 서서히 벗어나, 그의 후기 작품들인 피아노소나타 30번이나 31번에서 보는 것처럼, 감성을 자유로운 양식으로 담아내며 풀어나간다. 피아니스트 쉬프(A Schiff)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해설하는 중에,
“그의 피아노소나타는 ‘교향적’이다. 베토벤은 하이든과는 공유한 것이 많으나 모차르트와는 서로 닮은 것이 하나도 없다.”
고 한 적이 있다.
3
나에게는 베토벤의 창작 스타일의 근원이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그의 3곡의 피아노 삼중주(Op.1)와 3곡의 피아노소나타(Op.2)를 시작으로 하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남다르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하이든에 대해서
“나는 그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공공연히 말한 것을 알고서도, 나는 ‘젊은 베토벤이 자기 스승인 노대가를 질투하고 있었다.’고, ‘베토벤은 무척이나 자부심이 강하고 오만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베토벤의 음악에 관해서 읽어보는 적이면, 그의 초기음악을 언급할 때에 따라다니는 것으로 ‘베토벤이 아직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 하에 있다.’거나 ‘이제 베토벤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기다운 음악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표현을 곧잘 대하게 된다. 베토벤의 음악을 모두 많이 들어본 후에 나는 베토벤이 이 두 음악의 대선배에게서 받은 영향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가 알고 싶었다. 이런 호기심에서 들어보게 된 하이든이었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보편화된 덕으로 하이든의 음악—그의 100여개의 교향곡이나 50여개의 피아노소나타를 초기, 중기, 후기의 것—을 짚어가면서 조금씩 들어보고 나서 나는, 쉬프의 표현을 빌리면, 하이든의 모든 곡들이 교향적인데, 베토벤의 음악에서 오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교향적으로 하이든을 빼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의 전개에 있어서, 악기들의 음색을 조합하는 데에 있어서까지, 흡사 하이든이 베토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따를 정도로, 나는 하이든의 음악에서 베토벤의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그런 뒤로, ‘이 두 사람은 천성적으로 서로 닮아 있었고, 그래서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또 하나의 자기를 보게 된 것이었다. 베토벤이 스승을 질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나대로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하이든의 교향곡이나 피아노소나타를 라디오에서 듣는 경우,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 베토벤’을 듣고 있다는 생각이 번번이 따랐었다. 들어서 거의 다 식별할 수 있다고 여겨온 베토벤의 음악인데, 라디오에서 처음 듣는 그 음악은 베토벤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일 수가 없는 음악이었다. ‘혹시 체르니?’ 하고 베토벤의 제자를 떠올려보기도 했었다. 제자라면 스승의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논리적인 추측에서였다. 그런데, 끝까지 유심히 들어본 뒤의 해설에서 하이든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베토벤의 출발점은, 그의 재능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렇게 높았다.
베토벤은 헨델을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존숭했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선망했으며, 병상의 자기를 찾아온 슈베르트와 그가 가지고 온 악보를 보고는 슈베르트와의 늦은 해후를 한탄했을 만큼 이 세 사람의 음악세계를 높이 보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고 베토벤의 음악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앞의 세 사람과 그의 음악은 그 구상의 세계가 다른 데에 속해 있었다. 전자들의 세계가 직관적, 감성적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의 세계는 보다 이지적, 구상적構想的이다.
청년시절의 베토벤은 예술가의 자질에 철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은사 네페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철학을 청강하기도 했다. 표제음악 ‘전원’(교향곡6번 Op.68)을 작곡하여 소리를 통해서 표상의 구상화에 첫발을 내디딘 만큼 베토벤은 사물의 음향적 파지把持 능력을 타고났고, 그의 음향 세계에 대한 교향적인 감각은 많은 작품을 통해서 사상이나 정서를 음악적 표상으로 구현한다. 음악사는 이러한 베토벤을 서구의 고전음악과 낭만음악의 교량적 위치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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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때로는 끌로, 때로는 망치로 사용한 피아노는 그의 필생의 도구였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음향의 조각가 베토벤의 광장은 건반 위였다. 여기서 베토벤은 자신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 불멸의 조각상 둘을 세워 놓는다.
[열정 소나타](피아노소나타 23번 Op.57 ‘열정’) — 35살의 이 거장은 세계가 담아내지 못하는 자기의 사랑을, 넘쳐흐르는 그 불꽃을 극도로 억제하여 얼음에 이르도록 압축한다. 내면으로 다듬어 들어가서 그는 절제되어 더 강렬하고 순수한 만큼 더욱 투명한 한 조형물을, 얼음 불꽃으로 분출하는 그 자신을 새긴다(1악장).
천장이 높은 홀에서, 한 왕녀王女가 품위를 갖추고 그를 맞이한다. 그녀는 기품이 어린 걸음으로 다가와서, 홀로 그의 앞에서 춤을 시작한다. 그녀는 걸친 옷자락을 한 겹 또 한 겹 풀어헤치며 그를 인도한다. 궁륭 높이 불빛이 휘황한 가운데서 너울너울 맴도는 이 성스러운 모습을 그는 마음의 율동으로 섬세하게 좇는다. 심장은 고조되고 호흡은 짧아진다. 둘은 한동안을 그러다가 이윽고 자신으로 온다(2악장).
이지적인 이 장인匠人은 자기의 이런 이상을, 그의 끌과 망치로 새겨나간다. 이상, 열정 — 자신의 힘과 위치를 확신하고 삶과 이상을 향한 폭발적인 열정을 구가한다(3악장).
이런 그의 조상彫像은, [하머클라비어 소나타]에 비해서, 극히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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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머클라비어 소나타](피아노소나타29번 Op.106 ‘하머클라비어’) — 48살의 베토벤은, 병고와 가난과 불화 등으로 힘든 한 때를 보낸 뒤에,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로 긴 침묵을 깬다. 그는 그간의 모든 것을 [하머클라비어 소나타]에 거인답게 담아낸다. 그는 완숙기로 접어든다.
나는 이 곡을 몇 번이고 들으면서 빠져 들어갔던 그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1969년 겨울, 애신스에서 크리스마스 전야의 학교 교정을 내다보면서 저녁모임을 기다리던 때였다. 어둑한 실내에서 무거운 오버코트를 걸친 채로 밖을 내다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눈이 하얗게 덮인 골프장을 둘러친 철 줄이 검게 드러나 있었고, 교정의 기숙사 건물들은 방학으로 학생들이 모두 떠나서 적막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마음을 붙일 데가 없던 초기 유학시절에 향수에 말려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곡이 그날 오후에는 몹시 아프게 들렸었다. 특히 3악장이 그러했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건반의 누름 하나하나가 고통스럽게 뇌벽腦壁을 치고 심장을 울리는 것이었다. 피부에 소름이 끼치도록 안겨오던 그 피아노의 울림이 그 이후로 잊히어진 적이 없었고, 지금도 들으면 여전히 그때의 아픔이 살아난다.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는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이 곡을 만나면 나는 한 번도 무심히 지나치지 못했다.
지금 나에게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는, 베토벤이 자기 존재와 본질을 형상화한, 음악의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여겨진다.
긴 침묵 끝에 베토벤은 ‘나, 여기 있다.’ 고 자기의 [존재]를 선포한다(1악장).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다소는 미심쩍은 해학, 자의식을 금하지 못한다(2악장).
그러고 나서 3악장이다. 이 북극의 거인은 힘들었던 시절의 침묵, 그 내면을 건반 위에 쏟아 붓는다. 못질하듯 한 아픔이 건반 위에 가득히 쌓이고, 그러는 그의 모습에 듣는 이의 마음도 뼛속까지 저려온다. 그의 모든 소리 중에서도 가장 아픈 소리이다.
자신의 존재를 선포하고—특유의 해학을 풀어 보이기도 하더니—뿌리에 이르도록 내려가서 스스로를 대면하고 거기서 서서히 걸어 나온—그는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하며 푸가적으로 상승한다(4악장). 건반은 이제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무한으로 확장한다. 희고 검은 돌밭 위에서 디오니소스는 제멋대로 발 구르기를 시작한다. 피아노는 화성도, 리듬도, 멜로디도 새로운 개념의 세계를 전파한다. 그때까지 거치적거리던 인간적인 것들—희노애락—은 디오니소스의 광희狂喜 가운데서 모두 극복된다. 흑백의 건반들이 뒤엉키며 사유를 조형해나간다. 베토벤은 지극히 이지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자신을 형상화해 놓는다. 나는 내가 흐트러져 있을 때에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찾고는 했었다. 감각적인 것들은 모두 날아 사라지고, 뼈와 힘줄만으로 남아 있는 삶의 골수—색도 빛도 없는 희열, 그 자유—를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대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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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것일까, 베토벤의 음악을 따르다 보면 그에게서 오는 느낌은 점점 변화한다.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소리가 아니라 이제는 눈앞에 확연한 존재로 드러나 있다. 그는 직접적인 느낌으로, 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나는 이런 느낌과 생각으로 번번이 끌려들어간다 — 끊임없이 요구하는 베토벤. 그는 이런 자세로 자기 삶에서 무엇을 주장했던 것일까? 그는 나에게 지금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 것일까?
베토벤의 이러한 예언적 본성은 지금도 실제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그의 현악사중주곡 ‘대푸가’(Op.133)가 증언하고 있다. 베토벤의 생전에, 이 곡을 처음 대하는 연주가들은 연주가 불가능한 곡이라고 했다. 이 곡이 다른 작품의 한 악장으로 연주되었을 때에 청중의 재청 대상이 다른 작품으로 향하자, “당연히 이 곡을 재청했어야 한다.”고 하면서 개돼지 같은 놈들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을 만큼 베토벤 자신은 이 곡을 높이 여겼다. 당시에는 이 난곡難曲의 출현 배경을 작곡자인 베토벤의 난청難聽탓으로 돌리기도 했는데, 초기의 몰이해도 스트라빈스키(1882-1971)에 이르자 ‘영원한 현대음악’으로 변한다. ‘대푸가’의 음악적 표상 감각이 미래의 어느 때라도 언제나 그 시대에 앞서고 있을 것이라는 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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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의 베토벤은, 스승 네페Neefe의 인도를 받으며 변주곡(WoO 63 드레슬러 변주곡)으로 음악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이어서 곧 푸가(13세, WoO 31)의 세계에도 발을 내딛는다. 이처럼 변주곡과 푸가 양식은 베토벤에게는 음악의 표현 양식으로 일찍부터 도입되었고 이후에도 이 두 양식의 정신은 그의 음악 작품들 도처에서 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서도 여전히 베토벤은 그가 첫 발걸음을 뗀 곳, 변주곡과 푸가의 세계에서 떠나지 않는다. 베토벤은 생애의 후기로 가면서 변주와 푸가 양식을 함께 자주 사용한다.
그는 다기多岐한 삶의 음악적 구상具象을 여러 갈래들이 엮이어나가는 푸가적 진행에서 보았던 듯하다. 연륜에서 온 삶의 경험과 음악의 만남이었으리라. 이러한 그의 경향은 피아노삼중주 계열의 마지막 작품(Op.121a, ‘나는 재단사 카카두’ 변주곡), 피아노 소나타의 마지막 작품들(29번~32번)과 첼로소나타의 마지막 작품(5번), 바이올린 소나타의 끝의 작품들(9번과 10번), 디아벨리 변주곡(Op.120)이나 장엄미사(Op.123), 마지막 교향곡인 9번‘합창’교향곡(Op.125) 등에서 보이고, 현악사중주곡 계열에서는 마지막 작품 군에 속하는 대푸가(Op.133)에서 한 발 더 대담하게 내딛는다.
일상적 생활에서 삶의 한 변주로서의 나들이들—만남, 생각, 시도, 나날—을 생각할 수 있다면, 베토벤의 작품들은 일생을 음악으로 짚어 나간 그의 삶 전체의 변주들이 아닐 수 없다.
(공자孔子는 자기 생애의 단계마다 그 의미를 구분했다; 세간에 회자膾炙되어 온 바 1.지학志學-15살, 2.이립而立-30살, 3.불혹不惑-40살, 4.지천명知天命-50살, 5.이순耳順-60살, 6.종심從心-70살 등이다. ‘공자의 수명이 80살 이상이었다면 어떤 자세가 가능했을까?’는 논외로 하고, 삶 전체를 하나의 변주곡으로 본다면, 공자는 자기 삶을 6개의 변주로 구성했던 셈이다. 변주의 주제는 물론 그가 표방한 인仁으로 생각해 봄직하다. 여기서 나의 뜻은, 베토벤이 변주와 푸가의 양식을 시종 가까이 두고 사용한 것에 의미를 두어보는 정도이다. 내게는 삶을 이런 시각에서 조향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56세, 그의 마지막 해에 이르면 베토벤은 그가 살아온 삶 전체를 음악이라는 틀로 삼는다. 말년의 현악사중주곡들에서 이런 그가 드러난다. 삶의 본질을 조형할 수 있도록, 그는 종래의 음악 형식을 삶의 면면에 맞추어서 변형한다. 악장의 길이도, 그 구분도, 악장의 수도 임의롭다. 어느 누구의 삶도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 삶 그 이상이다. 이러한 삶의 표현으로서 음악은 형식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야한다. 베토벤은 이렇게 자기 삶을 보기에 이른다; 알 수는 없으나 베토벤 그 자신도 함께 얽히어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을, 오직 네 악기의 용틀임으로 묶어 내려고 한다. 현악사중주곡의 줄기에 서면 베토벤 이후로 유일하게 마주 보이는 바르토크(1881-1945)는 자기의 6개 현악t사중주곡들의 연원淵源이 베토벤의 현악사중주곡14번(C#단조 Op.131)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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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그의 음악에서 오는 폭발적인 쾌감이나 긍지, 또는 집요한 긴장감, 광포한 격정의 힘은 그의 끊임없는 추구의 자세, 지배와 명령의 자세, 주장의 자세에서 비롯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은 그의 음악에 내재하는 베토벤 그 자신의 자세가 듣는 이에게 이입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 그 가치에 대한 유일무이한 느낌을 지녀보게 하기 때문인가? 그의 음악에서 분출하는 힘이 삶에 대한 의식, 자신의 가치, 자신에 대한 개념에 유일무이한 확신감을 일깨우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려 본다.
베토벤의 음악적인 표현과 그의 인성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편의 논문을 내기도 한 조수철 정신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베토벤의 인성은 기분의 기복이 심하고 충동성이 강했다. 베토벤은 원하던 사람들과 맺어지지 못하는 운명을, 과대적인 자아 표현을 통한 자기애적 욕구를 음악을 통해서 드러냈다.”
음악가로서 베토벤은 환영받았으나 실제로 그가 원했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교제는 힘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는 음악이 내적 지향의 분출일 수밖에 없었다. 불같은 그의 성정에서 그의 음악은 그 자신의 존재 주장, 음악을 통한 자아의 표현이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그의 갈망의 해답을 자연 속에서, 숲속의 고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연은 그에게 음악이었고, 친구였다. 그의 교향곡 ‘전원’을 들어보면, 조성도 부드럽고 밝은 바장조에다, 시골 전원의 소박한 산뜻함, 시냇물 소리, 마을 축제의 분위기, 구름과 소나기와 뇌성의 오고감, 목동의 피리소리,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신선한 자연 속에서 신에게 올리는 감사의 기도 등은, 그의 성정으로서 사람들과의 어울림 가운데서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베토벤은 “음악 안에서 신이 소리의 가장 위대한 주재자라고, 자기는 예술의 신성을 기릴 것이라고 천명”하기도 한다.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을 신성하게 여겼다. 신은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고 여기며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악을 대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신에게 드리는 기도였다. 베토벤은 자기의 신앙적 조망眺望, 그 세계, 그 안의 평화를 장엄미사(Op.123)에 담아 놓는다. 이 음악 안에서 베토벤은 신‧인간‧자연의 일체로서의 자기 삶을 보여준다. — 장엄미사에서 베토벤은 깊고 넓으며 멀고 높은, 그때까지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시공時空을 그 자신만의 신앙 속에서 창조한다. 듣는 때면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 각 악장마다 등장하는 독창과 중창, 관현악과 합창의 푸가적 진행이 전개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시공이 듣는 이의 온 존재에 삼투渗透하여 그의 혼을 압도한다. 미사곡들 가운데서 음악사상 둘 만이 서로 비견된다고 하는 바흐의 [나단조 미사곡]이 바로크적 교회 안의 나를 보여준다면, 베토벤의 장엄미사는 이 교회를 삼라만상 자연 가운데로 넓혀 놓아서 나는 그 안에서 온누리의 신성을 체감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신과 함께 하는 베토벤의 걸음걸음이 전해오고 느껴지고 보인다. — 이처럼 절대 존재인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베토벤은, 천성적으로 부족한 자신의 사회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꿈을 키워나갔다. 베토벤은 “자기의 예술을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의미를 “열정적으로 실천하고, 과정과 행동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이상이 그의 예술을 통해서 만인의 공감을 자아내고 감동을 안기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베토벤의 음악은 신 앞에서 인간적인 것을 결코 비속화卑俗化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에는 관능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담백한 검소(Op.40 로망스1번)가, 감상이 아닌 비애의 승화(교향곡7번 Op.92, 2악장)가 있다. 동경(WoO.59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소나타17번 Op.31-2 ‘템페스트’, 3악장)이, 철갑鐵甲 아래 사라진 고대 문명의 회상(Op.114 ‘아테네의 폐허’)과 프로메테우스적 삶(Op.43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 있다. 명예와 효성의 기로에 선 영웅의 고뇌(Op.62 ‘코리오란’서곡)가 있는가 하면, 망루 아래의 광활함(Op.117 ‘슈테판 왕’서곡)이 있다. 혼의 열락(피아노소나타32번 Op.111, 2악장), 명상(바이올린협주곡 Op.61, 2악장; 피아노협주곡5번 Op.73 ‘황제’, 2악장)에 잠기고, 리듬의 향연(현악사중주곡7번 Op.59-1 ‘라주모푸스키’, 2악장), 열정과 율동(교향곡7번 Op.92, 3 & 4악장)에 도취한다. 고독(현악사중주곡7번 Op.59-1 ‘라주모푸스키’, 3악장)과 적막(피아노삼중주5번 Op.70-1 ‘유령’, 2악장)에 휩싸이기기도 한다. 천상의 햇살 그 투명한 행복감(피아노소나타30번 Op.109)을 드높이며 아폴론적 질서와 조화의 심미적 세계(피아노협주곡4번 Op.58, 1악장; 교향곡4번 Op.60, 1&2악장)를 담아내는가 하면, 아프게 지나온 시절을 회상하는 노년의 어느 하루(현악사중주곡13번 Op.130, 5악장)가 있고, 긴 병고 끝에 펜을 쥘 수 있는 힘을 다시 얻자 신에게 감사의 노래(현악사중주곡15번 Op.132, 3악장)를 바치기도 한다. 이지적(피아노소나타 26번 Op.81A ‘고별’, 1악장)이며, 구상적構想的(교향곡3번 Op.55 ‘영웅’, 1악장)이고, 절제(교향곡5번 Op.67 ‘운명’, 1악장)의 대가인 그는 자연 속 동심의 명랑함(교향곡8번 Op.93, 2악장)을 그려내기도 하고, 신비로운 아지랑이의 떨림(피아노소나타15번 Op.28 ‘전원’, 2악장) 사이에서 목가적인 평화로움을 맛본다. ‘인간 육성肉聲을 통한 신의 기림’을 궁극의 높이에 둔 베토벤은, 그가 갖춘 음악적 형식을 모두 동원하여, 신에게 찬미(Op.123 ‘장엄미사’)를 드리며, 삶의 기승전결起承轉結(교향곡 9번 ‘합창’ Op.125—1악장:창조—2악장:약동—3악장:관상—4학장:환희)을 ‘환희’로써 인류 앞에 헌정한다.
베토벤은 그의 작품속의 모든 순간에 ‘음악 속의 자신’을, ‘자기 안의 음악’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교향곡5번(Op.67 ‘운명’, 3악장—4악장의 경과 부분)에서 자신의 섬세한 의식을 따라가는 베토벤의 신비스런 시선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의식’을 또한 형상화(피아노소나타 17번Op.31-2 ‘템페스트’, 2악장; 21번 Op.53 ‘발트슈타인’ 2악장)하기도 하고 시공時空의 품격을 소리의 투명성透明性으로 그려내기도 한다(피아노삼중주7번 Op.97 ‘태공太公’).
이와 같은 음악은 이미 하나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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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음악-기도-삶의 신성함-감사: 이러한 내적 지향의 결과로서 전인화全人化한 베토벤의 음악을 모두 듣는다는 것은 그의 삶을 소유한다는, 소유해 보았다는 느낌과 다를 수가 없다.
한 인간의 불굴의 삶을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다는 이러한 느낌은 누구에게나 그 자신의 삶에서 힘의 느낌으로 환원한다. 베토벤의 음악 안에서 듣는 이 그는 현실에서 새롭게 소생하는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나 자신의 삶에 힘의 느낌으로 이입되고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음악이 의지의 화신化身임을 깨닫게 된다.
로망롤랑은 [베토벤의 전기]에서, 베토벤을 당시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며 결론을 내린다.
내게 베토벤은 정치‧사회적으로, 문화‧예술적으로, 신‧자연‧인간을 아우르는 하나의 종합이다. 베토벤에게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복락의 요소들: 혈육, 성격, 건강, 경제, 계층 등에서 결손이 많았다. 반면에 그는 한 인간의 힘으로 만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또한 만났다: 천품 즉 재능과 의지력, 조기교육,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 음악사의 대가들을 비롯한 다양한 스승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괴테, 실러 등 정신‧문화‧사회적인 시대의 흐름, 상류층 후원자와의 유대, 성정과 난청으로 인한 세속적 교류의 단절로 비롯된 신과 자연과의 역설적인 친화력 등. 그는 사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격리되고 스스로에게 사로잡혀서 지냈으나, 예술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의 오염과 구속에서 해방되어 음악의 세계를 통하여 천상을 오르내렸다. 이것은 베토벤에게 내려진 운명이었다.
내게는 이렇게 보인다;
베토벤(1770. 12. 26~1827. 3. 26)은 멍에처럼 메고 온 자기 삶의 세계를 이렇게 음악 안에 담아 놓는다: 그의 첫 출발지였던 변주곡의 세계를 [디아벨리 변주곡(53살, Op. 120)]으로, 신앙의 세계를 [장엄미사(53살, Op. 123)]로, 삶의 세계를 [교향곡9번 ‘합창’(54살, Op. 125 )]으로, 푸가의 세계를 [대푸가(56살, Op. 133)]로, 명상과 관조의 세계를 [현악사중주곡14번(56살, Op. 131)]으로.
니체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베토벤은 그 자신 안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조화와 격정을 동일한 힘으로 서로를 지양하도록 지니고 있었다.
베토벤 그는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그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나, 또한 그는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음악이라는 수단, 영역, 지배력을 가지고, 신-인-자연의 합일체를 자신의 예술로써 구현해 냈다. 그의 창조 과정은 신의 뜻인 양 사람들 사이의 일체 관계를 넘어서 우뚝하다.
베토벤. 그는 음악으로 삶을 철학한 철학자로 그의 삶 일체가 ‘삶의 철학’의 위대한 구현이다.
참고한 서적:
베토벤의 위대한 생애(로맹 롤랑 저/이휘영, 이성삼 역, 도서출판 두로, 1996)
베토벤, 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솔로몬 외 저/윤소영 역, 도서출판 공감, 1997)
작곡가별 명곡 해설 라이브러리, 베토벤(음악지우사 저/김방현 역, 도서출판 음악세계, 1999)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조수철 저/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베토벤 작품 수록집(85 CD)
(출처: [처음과 끝 - 꿈을 보여 준 사람들]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