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11> “화평”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에 대해서 쭉 말하면서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종교적인 어떤 행위나 도덕적인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으신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 인간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그 어디에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의 일을 용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택한 자에게 덮어 씌어 주심으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의 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하신 것은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싶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라고 한다고 해서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은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까? 그것은 죄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죄 때문이라고 할 때 대부분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불편한 관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으면 되고,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고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로부터 이루어져 온 인간의 행위였고, 신앙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홍수처럼 강원도에 홍수가 내려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길이 파손되고, 그러는 가운데, 들에 일하러 갔던 사람이 산사태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집이 무너져서 깔려 죽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잘 못한 일이 있기 때문에 신이 노하였나 보다 라고 해서 제사를 드리거나 흠 없는 양이나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신의 진노를 삭히려고 하는 것이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가리켜 미신 혹은 우상종교의 대표적인 행위로 치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들여다보아도 이런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금식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이유가 대부분 다 여기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까? 새 집을 짓고 입택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새 차를 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이나 교인들이 어떤 사업 처를 개업을 하여 개업식 예배를 드리는 행위들이 배를 진수하여 고사를 지내는 행위나 용왕 신을 찾아 제사를 드리거나 산신령께 제물을 바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래놓고는 나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과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까? 흔히들 교인들이 나는 화평하다 혹은 나는 마음이 평화롭다 라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슨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도 가정도 다 편안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아 믿음이 생겨서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을 두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그런 소리를 합니다.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당에 다니는 분들도 그렇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이건 종교가 없는 사람이건 제각각 나름대로 평화를 추구하고 평안을 누리고 산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평안함이 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 되는 화평에 속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화평은 내가 어떻게 하였더니만 마음의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믿음도 우리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처럼 하나님과 누리게 되는 화평도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인해 주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화평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롬’(평화)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인데 여러분 반새 안녕하셨습니까? 태풍에 폭우에 홍수에 사람들이 죽어나고,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세간이 무너지는 엄청난 난리를 겪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멀쩡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는 것은 평안하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이런 인사를 받으면 주안에서 평안합니다. 라고 답을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과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느냐 말입니다.
진정한 화평을 누리는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이며,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인내하며, 연단을 받으면서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누리게 되는 화평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나의 행위에서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의로운 행위나, 또는 종교적인 행위나,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겠다는 착한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번은 제가 광주에 계신 어느 집사님 얘기를 하면서 그분이 기독교 학교 행정실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목사님이고 장로님들이랍니다. 그런데 그런 고상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목사님 장로님들이 존경은커녕 욕만 나온다고 하면서 도둑놈들이고, 형편없는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기독교학교도 그러한데 하물며 일반 학교 교사들은 오죽하겠느냐 라고 하였더니만 옆에 있던 소위 말하는 신자라고 하는 교인이 하는 말이 저는 장사를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고 정당하게 장사를 한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한테 말했습니다. 만약에 지금은 큰 이익이나 손해가 나지 않으니까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큰 이익이 생기거나 엄청난 손해가 나에게 닥치게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양심 운운하면서 그것을 지킬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가 죄의 권세 아래 갇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자기도 질세라 자기교회 목사님도 나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권세 아래 갇혀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권세아래 갇혀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는데,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예를 들면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죄의 권세 아래서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에 죄가 될 뿐이라고 하였더니만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더 이상 말하지 말랍니다. 듣기 싫다는 것이지요. 너무나도 충격이고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런 상태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경건하지도 않다고 합니다(6절). 또한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그런가하면 더 심하게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10절).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죽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죄 안 짓는 모습을 보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의 모습은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을뿐더러 죄 속에 파묻혀 있을 때 하나님께 원수 같은 짓을 하고 있을 때에 이미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평의 근거는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나 신앙심 또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는 유일한 길은 구약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듯이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서 화평의 관계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인 것입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못난 죄인인가를 아는 자입니다. 못난 죄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라면 어디 하나님 앞에서 감히 구원해 달라느니 내 기도를 들어 달라느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주제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지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