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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탐험대 아이들이 큰 일을 했습니다. 누구도 몰랐던 사실을 알고 문화재 복제품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읽어 보세요...
대전탐험대(토) 주제 : 백제의 수도 웅진과 사비를 경험하다.. 글쓴이 : 송채윤 이번 탐험은 2006년도 우리 대탐(토) 첫번째 탐험이다. 새로운 친구들 예린이, 영이, 승철이는 오늘이 첫번째 탐험이다. 이번 탐험은 흥미로웠고 배울 것도 많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백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박물관 탐방을 갔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박물관이라고 하면 다들 정말 재미없는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오늘만 빼면 말이다. 박물관 보는 방법을 조금만 바꾸면 박물관은 아주 재미있고 멋진 곳이 뒬 것이다. 우리의 첫번째 목적지는 공주의 공주박물관이었다 공주의 옛날 이름은 웅진이었다. 공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두번째 수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 공주박물관은 2년전에 지은 건물이어서 시설도 좋고 깨끗했다. 공주박물관이 1층에 전시하고 있는 유물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보물들이었다 무령왕릉은 배수로 보수공사 도중에 발견 되었다고 한다. 릉이 발견되자 구경꾼들과 신문기자들이 들어가 보겠다고 하고 조치를 하러 온 경찰들도 보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발굴을 하러 오신 분도 흥분을 해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경찰들을 불러서 충분히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신문기자들에게 한번씩 사진을 찍게 해주고 조사도 겨우 11시간만에 끝낸 것이다. 신문기자들 중 한명이 사진을 찍다가 숟가락을 부러뜨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사하신 분이 죽기 직전에 사죄를 하면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가 첫번째로 본 것은 묘지석과 진묘수였다. 묘지석은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묘지석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진묘수는 묘를 지키는 것이다. 돼지처럼 생긴 이 진묘수는 발굴자가 파기 전에 이 진묘수가 꿈에 나타 났다고 한다 . 그 다음날, 파서 보니 꿈속에서 본 그 진묘수가 그자리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진묘수는 뒷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래서 본드로 붙혔는데 본드가 두꺼워서 앞다리가 살짝 들려져 있다. 입구를 보면 흙으로 구운 벽돌로 만들었는데 이 방법은 중국 양나라에서 쓰는 기법이다.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나온 토기들은 거의 다 중국산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는 여러 나라와 교류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굴을 11시간만 했으니 많은 유물들을 거의 쓸어 담듯이 했을 것이다. 발굴자들이 가지고 나와 분류를 하니 왕비의 어금니가 나왔다. 어금니의 주인인 왕비의 나이는 30대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묘지석에는 무령왕이 62세에 돌아가셨다고 나와 있는데 왕비는 30살에 죽었다니 조금 수상했다. 무령왕은 40살에 왕이 됐는데 그전에는 분명히 아내가 있었을 것이다. 왕비와 왕은 30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30살 청년이 1살과는 결혼을 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까 왕비는 두번째 왕비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왕은 왜 두번째 왕비와 같이 묻혔을까? 원칙적으로는 첫번째 부인과 같이 묻혀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두번째 부인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둘째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왕과 묻히고 싶을 것이다. 무령왕릉은 7호분이다. 첫째 부인의 무덤은 6호분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6호분이 훨씬 튼튼하고 멋있다고 한다. 왜그랬을까? 무령왕은 7호분에 있는데 말이다. 내 추측으로는 첫째 부인의 무덤을 만들 때 무령왕이 이 무덤에 묻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조심스럽게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들이 어금니를 그냥 쓰레기로만 샐각햇다면 이런 추측을 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졌을 것이다. 공주 박물관에 가서 유물에 대한 문제를 조끼리 풀었다. 위에서 설명을 한 것 말고 조금 특별한것은 네개 정도 있었다. 첫번째 것은 왕과 왕비의 목관인데 우리가 서울탐험 때 만나 본 박상진 교수님이 목관의 재질이 일본의 특산종인 금송이라는 것을 알아내셨다. 두번째는 왕비의 은팔찌인데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팔찌 안쪽에 세겨져 있다. 세번째는 왕비의 뒷꽂이다. 어떤 모양을 닮았냐에서 새라는 답을 ??춰서 뒷꽂이 모조품을 받았다. 네번째는 보살이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전의 성인이라고 한다. 보살은 화려하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더 멋지게 보이려고 몸을 세번 꼬았다. 그 다음,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우리나라 최초의 쌈밥집을 갔다. 그런데 밥을 상추에 싸먹지 않고 반찬하고만 먹었다. 그 다음은 부여박물관에 갔다. 야외에는 징그럽게 실실 웃고있는 거북이도 있었고 커다란 복제품인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선생님께서 내주신 문제도 풀었다. 우리가 우선 한번 둘러보고, 선생님께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화재 10개를 정해서 한 사람당 하나씩 문화재를 맡아서 조사를 한 다음 선생님께서 내시는 문제를 맞춰야 통과를 했다. 나는 칠지도를 조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훈이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 그다음 내가 고른 것은 그림이 그려져있는 벽돌이었다. 하지만 조민성에게 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박만식교수님께서 기증한 토기를 조사하게 되었다. 영이의 차례가 되어서 백제금동향로를 조사하게 되었다. 우리가 폭포의 위치를 확인했을 때 모조품과 진품의 폭포위치가 달랐다. 용의 발의 앞뒤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가이드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가이드도 깜짝 놀라면서 그 모조품은 군청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원래 백제금동향로가 발견되었을 때 뚜껑이 닫혀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그래서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군청에서 모조품을 만들며 진품을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닫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군청이 모조품을 만들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조사한 것은 박만식 교수님이 기증한 토기전시실 모두이다. 박만식 교수님은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인데 발굴을 할 때마다 가서 신경을 안 쓰는 토기들이 도굴꾼들에게 팔리는 것이 아까워서 토기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박만식 교수님이 은퇴 할 때 모은 토기들을 부여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 처음에 토기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조사를 할 지 막막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이 부여박물관에 대해 쓴 책 견본에서 토기들에 대해 읽어보고 토기들을 구경했다. 시간이 종료되어서 친구들이 문제를 푸는 것을 보고 내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다행히 통과를 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통과했다. 그 다음 우리는 가져온 돈으로 각자 기념품을 샀다. 나는 엄마의 핸드폰 줄을 샀다. 정림사지 석탑도 볼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부족해서 지나가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맛있는 미니 찐빵과 만두를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다리가 쑤시고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 보람있는 체험이었다. 폭포의 위치가 봉황의 오른쪽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네요. ■ 아래의 글은 대전탐험대(토)팀의 송채윤 학생이 부여군청 군정건의에 올린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밭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는 송채윤입니다.저는 지난 토요일 선생님과 친구들이랑 같이 부여 박물관을 가서 박물관 앞의 복원품인 백제금동대향로를 유심히 보고 진품을 모조품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봉황의 머리 부분을 기준으로 폭포의 위치를 확인 했을 때 복원품은 폭포의 위치가 봉황의 꽁지방향에 있는데 진품은 보는 사람의 오른쪽 방향에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면 진품의 뚜껑을 돌리면 된다고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는 용의 발이 있는 위치와 봉황이 보는 위치가 같아야 합니다.그런데 진품과 복원품 둘 다 용의 발과 봉황의 머리가 같은 방향에 있는데 뚜껑부분의 위치가 잘못되어 폭포의 위치가 다릅니다.진품이 만약 분실되거나 파손되면 후손들이 복원품을 보고 진품이라고 배울 텐데 모조품이 잘못 만들어져있으면 후손들이 잘못된 것을 배울 수도 있잖아요.백제를 대표하는 백제금동대향로의 잘못된 대형 복원품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박물관 앞에 세워 놓았는데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확인하시고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 ■ 부여군청의 답변입니다.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내주신 송채윤 학생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송채윤 학생이 알고 있었던 폭포의 형상은 바위를 표현 한 것으로 백제금동대향로 전체에 걸쳐 모두 20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진품과 향로조형물의 다른부분인 바위의 위치에 대하여는 봉황의 방향을 변경하여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한혁탁 (041-830-2255)에게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한밭문화마당 안여종 사무국장이 문화재청의 민원상담에 올린 글입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질문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향로의 방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정확한 위치나 혹 추정하는 방향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여박물관에 문의해 본 결과 아직 학문적 내용이 없어 특별한 방향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였고 단지 사진 찍기 용이하다거나 관람자의 입장을 고려한 전시 방향 정도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 좋은데 그래도 10여년 전에 발견되었고 최소한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위치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에 솔직히 크게 놀랐습니다. 박물관에서도 향로에 대한 전시시 포스터를 보면 발굴 초창기와 현재에는 뚜껑부분의 위치를 달리하고 있는데 명확한 답변이 없어 아쉽습니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학문적 방향을 알고 싶습니다. 아니면 추정하는 의견도 좋습니다. 단지 사진 찍기 좋고 관람자의 입장이 아닌 당시 백제인이 향로를 사용하였다면 분명한 방향이 있었을 텐데 그 부분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재미있게도 문화재청 9층 회의실에 향로 복제품이 있는데 방향에 대한 정말 고민하지 않은 채 유리 케이스안에 있더라구요.... ----------------- 두 번째 질문 부여박물관 앞 도로변에 2002년 10월 16일(신문기사) 9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부여군청에서 백제금동대향로의 대형 복제품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가 있어 이를 바로 잡고자 합니다. 우선 도로에서 바라보는 것을 기준으로 설치된 듯 합니다. 봉황이 바라보는 방향과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의 왼쪽 앞발 방향이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사진이나 기념품 등이 모두 이러한 방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제품 뚜껑 부분에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뚜껑은 봉황부분과 일체로 되어있습니다. 돌아가거나 분리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뚜껑부분의 봉황 방향과 주변의 배치가 진품과 다르게 복제되어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약 90도 정도 뚜껑 부분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것 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엄청난 예산으로 군청에서 복제한 향로가 어찌 어치구니 없게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도록 잘못된 상태로 있는지.... 제가 보기엔 단지 봉황 부분만 시계방향으로 90도 옮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듯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도로에서 바라볼 때 봉황의 뒤쪽 날개를 바라보게 되기에 이는 웃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전체적인 방향을 다시 생각하여 진품의 방향과 같이 해결되어야 할 듯 합니다. 참고> 첨부된 파일은 복제품을 봉황의 뒤쪽에서 뚜껑부분을 촬영한 것입니다. 사진 속에서 보이는 폭포와 머리감는 인물은 진품의 경우 봉황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어야 합니다. ■ 문화재청의 답변 ㅇ 소중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귀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ㅇ 귀하께서 질의하신 백제금동대향로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는 현재 학계에서도 정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여박물관 전시 시 향로 뚜껑(노개)부분의 방향이 과거 포스터와 달라진 것은 뚜껑과 향로몸체(노신)의 아귀가 가장 잘 맞는 부분으로 하였기 때문이란 답변이 있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은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041-834-3193)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ㅇ 또한 부여박물관 도로변에 설치된 백제금동대향로 복제품의 오류에 대한 귀하의 지적에 대해 부여군청은 수정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하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니다. 이와 관련,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부여군청 문화관광과(041-830-2255)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고, 함께 풀어나가는 선생님 화이팅입니다^^
진짜 4학년이 그렇게 썼다는 말임니까????????
선생님 반갑습니다. 싱가폴에서 선생님의 나라사랑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어 뿌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