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손에 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1>-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이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
-<난초4>-
가람 이병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 <난초>다. 가람은 세 가지 복을 타고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첫째가 난초복이요, 둘째가 제자복이며, 세째는 술복(酒福)이라 했다. 그의 취미는 난초 기르기와 장서 모으기였다.
그는 1942년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되던 날 이른 아침 일본 경찰(형사)에 연행되어 가면서 부인에게 아이들을 잘 키우라는 말은 하지 않고, 난초를 잘 돌보라고 했다니, 난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제자복은 어떠한가. 50여년간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다. ≪문장(文章)≫지와 ≪동아일보≫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호우, 조운, 조남령, 오신혜, 김상옥 등이 모두 가람의 추천을 거친 이들이며, 이태극, 장덕순, 남광우 등등의 제자들은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국문학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주복은 병후에도 이어졌을 뿐아니라 임종시에도 술을 잔에 부어놓고 쓰러졌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더져놓인 대로 古書는 散亂하다
해마다 피어오던 매화도 없는 겨울
한종일 글을 씹어도 배는 아니 부르다
좀먹다 썩어지다 하찮이 남은 그것
푸르고 누르고 천년이 하루 같고
검다가 도로 흰 먹이 이는 향은 새롭다
홀로 밤을 지켜 바라던 꿈도 잊고
그윽한 이 우주를 가만히 엿보고
빛나는 별을 더불어 가슴속을 밝힌다
-<古書>-
가람의 시조<古書>다. 그외 취미중의 하나인 장서 모으기는 1913년 교편생활을 하면서 박봉을 떼어 고서적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서적에 대한 애착은 전시하인 1952년 많은 고서를 트럭에 실어 고향집의 진수당(鎭壽堂) 서실에 갖다놓을 정도였다. 그는 평생 모았던 장서 4205권을 1963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병기(1891~1968)의 호는 가람(嘉籃)이다.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고 쓴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끝끝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했다. 그는 1920년에 쓴 일기에서 ‘가람’이라는 호(號)를 결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이어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가 된다. 그러면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니 영원하며 이 골물 저 골물 합하여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니 완전하며 산과 들 사이 사이에 끼어 있어 뭍(陸)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 이 세 가지 뜻을 붙이어 지음이라. 우리 말로는 ‘가람’이라 하고 한자로는 ‘任堂’이라 하겠다.
-<1920. 7. 31. 일기>-
그는 시조시인이요, 국문학자이며 수필가이기도 하다. 변호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 때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 문법강의를 들었다. 졸업 후 남양, 전주제2, 여산 등의 보통학교 훈도를 지내면서 국어, 국문학, 국사학에 관한 문헌을 수집했고, 시조를 중심으로 한 시가문학 창작에 전념하는 한편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그 간사에 취임했고, 이어 동광, 휘문고보 교원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 시조 연구와 창작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영도사(永導寺)에서 시조회를 발기하였다.
한글강습회에서 <한글과 시조> <한글과 고가요> 등을 강연하는가 하면, 논문 <시조의 현재와 장
래(新生, 1929. 4)>, 기행문 <낙화암을 찾는 길에 (新生, 1929. 6)> 등을 발표, 수필에 있어서 대상의 신선한 감각과 묘사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한글 연구에도 참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의 활동을 했다.
1937년 무렵부터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 경복, 덕수상업, 연희전문 강사, 동아일보 학예면의 시조란 담당,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피검(1942. 10)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출감(1943. 9)한 후 귀중 서적을 가지고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우리 어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광복(1945) 후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1945. 8), 편찬과장, 서울대 교수, 전북대 문리대학장, 학술원 회원, 중앙대 교수 등 여러 대학의 교직을 맡다가 정년으로 사임하고 학술원 추천회원이 되었다.
닭이 자주 울고 산머니 달은 잦고
푸나무 들 언덕 상긋한 새벽 바람
너무도 익은 이 길에 발도 한결 가볍다
달은 넘어가고 먼동이 밝아온다
누른 보리밭 종달새 소리소리
마을의 곤한 잠들은 몇몇이나 깼는지
어제 선거에는 누가 당선하였을까
고샅 고샅에 모이어 수군수군
말마다 男女老少가 모두 政客이었다
-<고향>-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쪼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계동 입구에서 뇌일혈로 졸도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이후 10여년을 병마와 싸우다가 1965년 8월 이후부터는 고향에서 요양했다.
학술원 공로상, 문화포장,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고, 동학혁명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던 그의 순수한 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업적은, 1920년대 이후의 우리 시조를 현대적인 참신하고 사실적인 시풍으로 일신하여 부흥시킨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문학계에 지대한 공로를 끼친 그는 많은 작품을 발표, ≪가람시조집(문장사, 1938)≫을 내어 시조의 고루한 구투를 타파하고, 자연의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현대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 시조의 중흥을 이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밤은 깊어지고 비는 줄줄 내린다
타던 거문고 한엽에 비껴놓고
무단히 눈물지으며 누를 그려 하는고
-<비>-
보릿잎 파릇파릇 종다리 종알종알
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더져두고
따듯한 언덕머리에 콧노래만 잦았다
볕이 솔솔 스며들며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
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
이 몸도 저 하늘로 동동 떠오르고 싶다
-<별>-
일제의 강압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절조를 지켜 단 한 편의 친일문학도 남긴 일이 없었던 영광스런 작가, 선비다운 정신으로 지조를 지킨 작가, 국문학자, 서지학자, 시조시인답게 그의 시조는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시조를 귀족문학으로부터 명료하고 평이한 대중문학으로, 과장된 고전문학에서 진실한 사실문학으로 이끌자고 주장한 가람 이병기는 황진이(黃眞伊)를 스승이라 하였고 김수장(金壽長)의 사경적(寫景的)인 작품을 매우 칭찬하며, 항상 자연과 인생을 느낀 그대로 나타내려 하면서 관념을 배격했다.
한몸에 지은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짐을 다 버리고 이리저리 오고가매
새로이 두 어깨 밑에 날개 난 듯하고나
쌀값은 높아가며 洋貨는 범람하고
거리 거리에 자동차 트럭 버스
이것이 서울특별시 새 풍경이로고나
늙어가면서도 술잔은 놓을 수 없고
늙어가면서도 분필은 던질 수 없다
분필과 술잔으로나 내 한 生을 보낼까
-<내 한 生>-
겨우 六十里 지나 땅거미 지는고나
한 고개 넘어 한편엔 假葬서리 한편에는 靑樓들인데
차라리 觸樓를 안고 한밤 새워갈거나
-<人生의 고개>-
- 황송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