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더폰테인(Helderfontein). 헬더폰테인 취재는, 기자에게는 1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최고의 취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크 글리슨(Mark Gleeson)에게 전화를 걸어 재킷과 타이를 준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농담하십니까? 이곳은 남아프리카라구요."
여러분이 아프리카 축구를 다룬 어떤 기사를 읽는다면 그것은 마크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아프리카를 종횡무진 여행하며 대륙 축구를 소개한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스타 Star , BBC, 월드 사커 World Soccer , 프랑스 풋볼 France Football , 데일리 텔레그래프 Daily Telegraph , 라 스탐파 La Stampa 등에 기고하고 있다. 몇 개만 이름을 대도 이 정도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컵우승팀대항컵 준결승 경기가 부룬디에서 열린다고 하면 마크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취재해 수십 편의 기사를 써서 각 언론사에 파는 것이다. 그는 하루 평균 4편 정도씩 기사를 쓴다고 한다. 그가 한번은 나를 자동차에 태워 스와질란드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의 차는 아주 작아서 운전대 뒤로 무릎을 바짝 구부려야 했다. (마크는 키가 6피트 8인치[약 2m]이다.) 카메룬 대표팀이 스와질란드 공항에 착륙할지도 모른다는 있을까말까 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카메룬팀은 오지 않았다.) 그는 모잠비크에서 가장 맛좋은 참새우 식당을 알고 있다. 그는 또 한때 로저 밀러(Roger Milla)의 테니스 경기 상대자이기도 했다. 보츠와나와 니제르의 경기 때 출전 선수 통로에서 니제르팀의 많은 고참 선수들이 마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같은 팀의 젊은 선수들은 경외감 속에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6피트 8인치의 키와 백인이라는 사실이 도움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마크를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그와 나는 짧은 반바지와 T-셔츠 차림으로 요하네스버그를 빠져나와 덤불숲을 건너 헬더폰테인[헬더폰테인은 country estate, 그러니까 일종의 영지 같은 것이다]으로 갔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그곳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대표팀을 접견할 예정이었다. '바파나 바파나(Bafana Bafana)'(줄루어로 '소년들'이라는 뜻)는 이틀 후 나이지리아와 시합을 가질 예정이었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경기에서 승리해야 했다. 만델라의 방문은 1년 후에 치러질 사상 최초의 다인종(multiracial) 선거와도 많은 관계가 있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 축구팬들의 평균적 열정과 비교해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은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우리가 그곳에 간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간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언론도 초청을 받았다.
199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 축구계에 복귀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국제축구연맹(FIFA)의 주앙 아벨랑제(Joa o Havelange)와 제프 블라터(Sepp Blatter)가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축구연맹(SAFA) 총서기 솔로몬 '스틱스' 모리와(Solomon 'Stix' Morewa)가 그들을 자신의 메르세데스에 태워 최고 시설의 경기장 일곱 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들을 소웨토에 있는 한 주유소로 데리고 갔다. 그 주유소는 모리와 소유였는데, 그들이 자기 재산을 봐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그에게는 또 해야할 전화통화가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차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음료수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들에게 남아프리카 축구의 순진무구함을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
나는 모리와와 인터뷰 약속을 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축구연맹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 여성이 그의 사무실에 있어서 물었다. "모리와씨의 비서신가요?" "글쎄요. 저도 여기 한 번밖에 안 와봤거든요. 그 분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걸요."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케쥴북 표지에 모리와의 이름이 있는 걸 보고 인터뷰를 예약했다. 약속한 날짜에 모리와를 찾아갔더니 그가 내게 자신의 스케쥴북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그가 다음날 나와 인터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마크가 나를 차에 태워 데려다주기는 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어디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당신이 아마 모리와와 인터뷰하도록 내가 데려다준 4번째 외국 기자일 겁니다. 그런데 그 작자는 아직까지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지요." 마크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모리와는 1992년 6월 취리히에서 열린 FIFA 회의에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거기서 16개 국가가 FIFA의 새 회원으로 가입했는데 이들중 오직 남아프리카공화국만이 회의장 전체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복귀를 기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이 금과 다이아몬드가 지천에 널려 있는 복된 땅이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 가능성을 저해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SAFA 관리들은 취리히 여기저기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머지않은 장래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고국의 팬들도 환희에 차 벌써부터 대표팀 선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은 헛된 미망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 축구 무대에 복귀해 첫 시합을 치르기도 전에 감독인 제프 버틀러(Jeff Butler)가 자신의 이력을 조작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임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나츠 카운티[Notts County, 1862년 창립된 영국 최초의 프로 클럽]에서 뛰었다고 상당히 조심스럽게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사태가 전개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사촌 중 한 명이 증언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자기가 리버풀(Liverpool)에서 뛰었다고 주장하는 선수는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모셔오기 바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선수들중에는, 리버풀에서 전혀 뛰지 않았거나, 겨우 상비군에서 두 게임 정도 뛴 선수들이 고작이죠. 그런데도 이들은 더이상 어떤 경력도 필요 없이 이곳 남아프리카에서 어떤 팀이든지 골라갈 수 있답니다." 스타 의 존 펄만(John Perlman)이 나에게 푸념조로 말했다. 펄만은 이렇게 투덜거리기를 좋아했다.
마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새 대표팀 감독 스탠리 트샤발랄라(Stanley Tshabalala)를 "농부 코치"라고 불렀다. 트샤발랄라는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나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재 시기에 자랐다. 그 기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팀들은 외국 팀과 상대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고 외국 팀들의 시합을 TV를 통해 좀처럼 볼 수도 없었다. 1990년 월드컵 대회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방송된 최초의 해외 축구 경기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예를 들면 달나라나 명왕성보다 조금 덜 멀리 떨어진 고립된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몇 광년은 떨어진 별천지였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축구 선수들은 영국식으로 경기를 했다. 반면 흑인들은 할렘 글로브트라터스[Harlem Globetrotters, 미국의 흑인 프로 농구 팀. 전세계를 순회하며 묘기 농구를 펼쳤다]를 흉내냈다. 트샤발랄라는 축구는 서커스 묘기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피아노와 구두광(piano and shoeshine)', 그는 자랑스럽게 남아프리카 축구 스타일을 이렇게 불렀다. 그리고 브라질도 같은 스타일의 축구를 구사한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바파나 바파나'가 짐바브웨에 4대1로 지자 감독에게는 어떠한 전략도 없었다고 선수들이 폭로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저 그라운드로 뛰어나가 아무런 전략 전술도 없이 되는대로 경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 그가 무티(muti)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곧이어 검은 돌풍 나이지리아와 싸워 4대0으로 대패했다.
기자들이 트샤발랄라를 공격하자 그도 그들을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맞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축구 기자들은 대부분 백인이고 대다수 감독들도 역시 백인이다. "흑인 선수들은 백인 감독을 두려워합니다." 어느날 아침 요하네스버그 스타 사옥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드물게 보는 흑인 기자 필 니아마네(Phil Nyamane)가 이렇게 말했다. "코치가 흑인이면 그들은 안심을 하죠. 치프(Chiefs)팀에서 한 번은 아르헨티나인 감독을 데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와 얘기를 한 번 해보면 그가 축구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감독 지휘 하에서 치프팀이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겁니다. 그가 백인이라는 사실이 선수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단순히 피부 색깔의 문제가 아니다. 남아프리카인들은 외국 사람은 모두 뛰어나고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트샤발랄라는 선데이 타임즈 Sunday Times 의 시 레만(Sy Lerman) 기자의 따귀를 때리고 감독직에서 쫓겨났다. (레만은 다른 기자들에게 '코치'로 통한다. 그가 대표팀 선발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후 페루인이자 레만의 친구인 아우구스토 팔라시오스(Augusto Palacios)가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헬더폰테인 행사의 접수계원은 1982년 미스 남아프리카였다. 보온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접수계 주위에 떼를 지어 모여 있었다. "저한테 온 소식 없나요?" 그들은 1분이 멀다하고 물어댔다. 백인 스트라이커 조지 디날리(George Dearnaley)는 흑인 미드필더 시즈웨 모타웅(Sizwe Motaung)이 여자들에게 하루에 50통씩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즈웨 어머니와 누이에게 그만 좀 전화하시라고 해. 그 녀석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건 내가 분명히 안다구." 디날리가 농담을 하자, 모타웅이 이를 받아줬다. 기자들은 흑인 선수들과 백인 선수들이 좀처럼 융화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해줬었다. 그러나 4주간의 훈련 캠프가 상당한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곧 만델라가 도착할 예정이었고, 선수들은 수영장에서 나와 보온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대표팀에서 3명의 백인 중 한 명인 안경잡이 골키퍼 로저 드 사(Roger De Sa)에게 선수들이 만델라의 방문에 흥분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투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만델라를 기다리면서 드 사와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흑인 선수 이너슨트 음은츠왕고(Innocent Mncwango)가 우리 옆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 사는 포르투갈 식민자의 아들로 모잠비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포팅 리스본(Sporting Lisbon)의 지부라 할 수 있는 스포팅 모잠비크(Sporting Mozambique)팀 선수로 한때 스포팅 리스본에서 뛰기도 했으나 고향에 대한 향수로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에우제비우(Eusebio) 역시 스포팅 모잠비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스포팅 리스본팀에서 뛰고 싶어 포르투갈로 날아갔다. 그런데 약삭빠른 벤피카(Benfica)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그를 붙잡고 평생 구경도 못 해본 많은 액수를 제시했죠. 그래서 벤피카로 가게 됐던 겁니다." 드 사의 주장이다. 드 사는 스포팅팀을 응원한다. 이런 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어렸을 때는 주말이면 모두가 각자 자기 라디오를 들고 포르투갈 클럽(Portuguese Club)으로 모였죠. 함께 모여 우리 팀을 응원했지요." 음은츠왕고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전체를 화제로 삼아 얘기를 나누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전혀 다른 대륙에 살고 있다는 듯이 아프리카 얘기를 한다. "다른 동료들 말에 의하면 라고스에서는 나이지리아 선수들의 도움으로 겨우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지 디날리가 이런 얘기를 해주더군요. 한 번은 그가 버스에 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더랍니다. '드 클레르크[De Klerk,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1990년 2월에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주요 저항조직들을 합법화했다. 이후의 정치변동은 94년 상반기 선거로 절정에 이른다]! 너 이 자식 이리 나와!' 그 말을 듣고는 화가 좀 났죠.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폭발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바파나 바파나'는 콩고에서 원정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원정경기를 치러야 할까요?" 물론 드 사에게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여튼 만델라는 어느 팀을 응원한답니까?" 그가 내게 물었다. 올랜도 파이어리츠(Orlando Pirates)의 총감독이 내게 말해준 적이 있어서 나는 알고 있었다. 이반 코자(Ivan Khoza) 총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만델라는 파이어리츠의 정회원 팬입니다. 우리 집에서 몇 번 묵기도 했는걸요.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도 파이어리츠의 정회원 팬이죠." 내가 드 사에게 이 얘기를 해주자, 그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그렇다면 더욱더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겁니다." 드 사는 모로카 스왈로우(Moroka Swallows)에서 뛰고 있다.
30분 후에 변함없이 중국인 거인처럼 생긴 만델라가 나타났다. 그는 시시껄렁한 얘기도 하고 농담도 했다. 또다른 백인 골키퍼인 스티브 크롤리(Steve Crowley)가 겁에 질려 몇 분 늦게 허겁지겁 달려오자 만델라는 교장 선생님과 같은 인자한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다. 팔라시오스가 이 ANC 의장의 기운을 돋우는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No worry. We win.' 이 말은 당시 흑인들의 희망을 담은 중요한 정치 슬로건이었다] 이윽고 만델라가 기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흑인 기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함께 서 있던 우리 세 명의 백인 기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런 일이 남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여전하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우리는 손을 내밀 생각도 못 했고 그도 악수할 손을 찾지 못해 일순간 낭패스런 상황이 되었다.
나는 줄곧 내가 감히 질문을 하나라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드 사 같은 프로축구 선수조차 나는 두려웠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넬슨 만델라가 아닌가! 그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나와 동행한 사진기자 빌렘(Willem)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었다.) 그는 자신의 석방을 기원하는 웸블리(Wembley) 콘서트까지 열린 인물이다. 그래서 내가, "만델라씨, 우리는 당신이 올랜도 파이어리츠 팬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나는 유창하게 질문을 했고, 그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질문 내용이 그를 자극하지도 않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요! 감옥에 있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그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죠. '나는 모든 팀을 똑같이 응원한다!'구요." 선거용으로 준비된 대답이었다.
선수들 식탁 옆을 지나가고 있을 때 드 사가 나를 불렀다. "그래 그가 어느 팀을 응원한답니까?" 그가 묻자 좌중의 선수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모든 팀을 똑같이 응원한답니다." "그가 스왈로우팀 팬일 거라고 내가 말했죠." 드 사가 외쳤다.
잠시 후 만델라가 연설을 했다. "동지들!" 이란 말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밝히는 고심해서 짜낸 몇몇 일화를 소개하고는 계속해서 축구로 이어졌다. "내일 남아프리카의 전국민이 경기장에 있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실제 경기는 이틀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왜냐하면 우리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반대 투쟁에 아낌없는 지지를 표명해온 나라인 나이지리아와 여러분이 대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상한 중립이 만델라를 헬더폰테인으로 초청한 팔라시오스를 실망시켰음에 틀림이 없었다. 페루에서 뛰었던 팔라시오스는 정치인들의 방문이 선수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축구(soccer)--만델라는 자꾸 '척구'[원문에는 '빠는 사람(sucker)'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발음했다--는 우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위대한 활동입니다."
그날 헬더폰테인에서 그 주장은 각별히 진실한 울림을 가졌다. 만델라 앞에 선 선수들--흑인, 백인, 유색인종, 그리고 인도인들--은 오직 축구라는 공통점만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년 전이라면 흑인들은 오직 하인 자격으로만 그 사유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3년 전만 해도 만델라는 로빈 섬[Robben Island, 남아프리카 흑인 정치범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에 수감된 죄수에 불과했다. 그날 헬더폰테인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는 다른 남아프리카인들이 총격전을 벌이며 서로 싸우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인들은 스포츠라면 아주 미치죠." 모리와가 한 말이다. 인종분리정책을 제쳐놓으면, 이 나라는 세상 끝에 있는 생기 없는 한 시대의 낡은 식민지일 뿐이다. 스포츠 외에는 그곳에서 다른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 요하네스버그는 골프 코스 주위에 건설된 도시이다. 소웨토에서는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기간중에 범죄율이 기록적인 수치로 떨어졌다. 국가를 조직하는 데 스포츠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실제보다는 덜 희망적인 것이다.
1992년 크리켓 월드컵 대회는 의외의 새 사실을 보여주었다. 20년간의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추방이 이제 막 몇 달 전에 끝났고, 국민--온 국민--은 기쁨 속에서 그 대회를 지켜보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7 위켓[크리켓 득점 용어]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격파했을 때 ANC의 체육 담당관이자 과거 정치수였던 스티브 트쉬웨테(Steve Tshwete)는 팀의 주장이자 아프리카너[Afrikaner, 남아프리카 현지 태생의 백인]인 케플러 베셀스(Kepler Wessels)의 품에 껑충 뛰어 안겼다. "나는 로빈 섬에 있을 때도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눈물이 나는군요." 트쉬웨테가 나중에 한 말이다.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인종분리정책 완화 조치를 진전시킬 것이냐를 두고 찬반 투표를 벌였던 때가 바로 그 월드컵 대회 기간 중이었다. 대표팀은 반대가 이길 경우 남은 경기를 포기해버리겠다고 밝혔다. 찬성표가 압도적이었다. 이를 두고 현학자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국제 스포츠계에서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남아프리카 백인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 내부에서조차 인종이 분리되어 있는데 스포츠가 어떻게 국가를 단결시킬 수 있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프리카너들은 럭비를 한다. 영국인들은 크리켓을 한다. 그리고 흑인들은 대부분 축구를 한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럭비와 크리켓을 좋아하고 또 잘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축구 역시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나는 인종에 따라 이렇게 경기 종목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을, 스포츠를 담당하고 있는 한 고위 공무원에게 제시해보았다. 안경을 끼고 약간 똥똥한 그 사람은 보덴스타인(Bodenstein)이라고 했다. "글쎄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민족성의 결과는 아닙니다. 오히려 호감도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러니까, 흑인들은 타고난 공잡이(ball-player)들입니다. 공을 다루는 특별한 재능이 있죠. 게다가 그들은 자라면서 뒷골목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살다시피 합니다. 뒷골목에서 럭비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죠." 많은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뒷골목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보덴스타인에게 그 '호감도'라는 게 소득 수준과도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럭비를 하려면 잔디 구장이 있어야 하고, 크리켓을 하려면 제대로 된 그라운드와 복잡한 기술을 가르쳐줄 코치가 필요하다. "예, 그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보덴스타인이 동의했다. 그러나 덧붙이기를 스포츠 클럽은 이제 모든 인종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인종이 다 함께 좋아하는 종목이 하나 있다. 바로 축구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소수의 중국인만이 심드렁한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게는 월드컵 우승이 필요했다. 아니 적어도 본선 진출은 해야 했다. 따라서 나이지리아와의 대전은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는 시합이었다. 드 클레르크 대통령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의 자문 위원 중의 한 사람이 내게 알려주었다.
나이지리아와의 대전이 있기 며칠 전 나는 요하네스버그 중심가의 한 인도에서 소웨탄 Sowetan 이라는 흑인 타블로이드 신문에 실린 축구 기사를 읽고 있었다. 길을 가던 낯선 흑인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합을 구경하러 갈 건지, 누가 이기리라고 생각하는지, 바파나의 실력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물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모두 서로 몹시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계획이 잘 진행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대해 그들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축구뿐이다.
만델라의 연설이 계속되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지난 27년 동안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휴양지에서 나는 이 나라 '척구' 경기의 놀라운 발전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준이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말입니다." 그 순간, 내 기억에, 선수들이 고개를 숙였던 것 같다. 만델라가 그들의 실패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추방된 사건을 몇 가지 '이유들'이란 말을 통해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팔라시오스--세계 무대에 복귀한 지난 6개월 동안 4번째로 부임한 남아프리카의 감독--는 이제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만델라의 결론은 이랬다. "아프리카 대륙은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특별한 활동 덕분인데, 여러분들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외교관들입니다." 카메룬의 로저 밀러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저 아프리카의 승리가 아니라 제3세계 전체의 승리"라고 했던 말 말이다.
팔라시오스가 만델라에게 '선물'을 증정했다. 카파 로고[Kappa logo, 등을 마주하고 무릎을 구부린 채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옆모습]가 새겨진 야구모자였다. 후원사에서 나온 사람인 듯한 한 여성이 ANC 의장의 머리에 모자를 눌러씌웠다. 그러나 카파사(社)는 이 위대한 인물의 머리 크기를 실제보다 작게 어림했고, 모자는 어정쩡하게 머리 위에 얹혀 있어야 했다. 사진 기자들은 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사이 만델라는 주술치료사가 낸 허리와 얼굴의 상처도 선수들에게 보여주었다. "다 아시겠지만, 이 무티는 새로운 게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대표팀과 함께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사진 기자들이 그에게 닥터 쿠말로(Doctor Khumalo)와 악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닥터 쿠말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한때 애스턴 빌라(Aston Villa)에서 활약하기도 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화 영웅(trickster)이다. 큰 키에 밝은 피부색, 엷은 콧수염을 한 닥터는 축구 선수라기보다는 화가처럼 보였다. 그의 손을 부여잡으면서 만델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제야 손주들에게 나도 한 때는 유명 인사였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닥터는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나중에 나는 팔라시오스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선수들은 두 개의 긴 식탁에 앉았고, 우리들만 따로 먹었다. 그는 따뜻한 응대로 나에게 관심을 표했지만, 나는 이 사람이 누구에게나 다 이런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 무엇도 그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식사용 칼을 떨어뜨려 식탁 여기저기에 밥알이 온통 흩어졌는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국가 대표팀 감독이라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팔라시오스는 내가 식사를 끝내고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식사를 마쳤다. 끝으로 그는 후식으로 나온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마셨다.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처럼 팔라시오스도 페루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그가 몇 번이나 정상을 차지했는지는 여러분이 어떤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자기가 부상으로 인해 1978년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월드컵 대회에서 단 한 번도 뛰지 못한 남아프리카의 모든 감독들이 똑같은 얘기를 해댄다. 1978년 월드컵 대회 직후 마르셀로 하우스먼(Marcelo Houseman)이라는 한 아르헨티나인이 자신의 경력을 이용해 세계를 무대로 단기 체재 여행을 시작했다. 하우스먼은 1979년 코스타리카에서 팔라시오스를 만났다. 거기서 그 아르헨티나인은 스트라이커였고, 그 페루인은 선수겸 감독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코스타리카를 강타하자 하우스먼은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팔라시오스에게 전화를 건다. 팔라시오스의 말을 들어보자. "마르셀로가 전화로 이러더군요. '이봐, 깜둥이 친구--그는 깜둥이란 말을 모욕적인 언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정을 갖고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죠.--, 홍콩으로 오라구!' 처음엔 그 친구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홍콩으로 갔습니다." 하우스먼은 팔라시오스를 홍콩에서 핀란드로,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로 데리고 갔다. 그는 팔라시오스를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기도 했다. 그때는 팔라시오스 혼자만 갔는데 하우스먼 자신이 그곳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5년 하우스먼이 팔라시오스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그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팔라시오스는 흑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는 단지 백인 아내와 살기 위해 법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성공했다. 그는 여러 클럽들을 지도했고, 1992년에는 마침내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현재 요하네스버그에서 중개인으로 일하고 있는 하우스먼은 자기가 팔라시오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내게 말했다. 팔라시오스는 자기에게 그만 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곳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영국인 코치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그들이 영국 최고의 코치들은 아닐 겁니다. 백인 코치들은 때때로--인종분리정책 때문에-- 흑인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고함을 치곤 하죠. 그러면 흑인 선수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자식 밑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내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겨우 한 마디 했다. "기자들이 그러는데, 대표팀 내에서 백인 선수와 흑인 선수들이 잘 화합하지 못한다면서요." 나는 그가 판에 박힌 부정을 하리라고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대답.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내가 처음 팀을 맡았을 때는 도처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죠. 한 번은 더반에 가는데, 차 4대에 나누어 타고 가야 했죠. 1호차가 나타나자 백인 선수들이 몽땅 그 차에 타버리더군요. 식사를 할 때도 작은 식탁 여럿에 나누어 앉아야 했는데, 백인 녀석들은 한 식탁에 몰려 앉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들 모두를 하나의 긴 식탁에 함께 앉도록 조치했습니다. 또, 숙소에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방을 쓰는 걸 중단시키려고 방 배정표를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선수들이 조를 나누어 패스 연습을 할 때도 나는 백인 선수 2명이 조를 만드는 것을 금합니다." 그렇다면 백인들과 흑인들은 경기 스타일이 달랐을까?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백인 선수들이 새로운 스타일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요하네스버그. 자유의 몸이 된 넬슨 만델라가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흑백의 축구 국가 대표팀을 접견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생소했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 상업 지구에 자리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공산당(SACP)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낯선 일이었다. SACP는 최근까지 금지당했지만 아마도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공산당일 것이다.
경비원이 문 앞의 가로막대를 치우고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곳에 에솝 파하드(Essop Pahad)가 있었다. 파하드는 SACP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동시에 ANC 집행부의 집행위원이다. 그리고 그는 축구광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 서섹스 대학과 공산주의 프라하에서 보낸 수 년 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막 고국으로 돌아온 후였다. 그의 형 아지즈(Aziz)는 SACP와 ANC에서 훨씬 더 큰 거물이다. 그의 세번째 형제 이스마일(Ismail)은 축구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매일 급변하는 남아프리카의 정세 때문에 나는 에솝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시간 후 집에 가기 위해 대화를 마치자고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만델라의 헬더폰테인 방문은 선거운동의 막바지 일정이었다. 파하드는 과거 초창기를 회상했다.
파하드는 (키가 아주 큰) 인도인이다. 이 사실은 1950년대에 그가 인도인 리그(Indian league)에서 뛰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었죠." 당시에 대한 그의 회상이다. "팀들도 그랬고, 관중도 그랬습니다. 장소를 예로 들어볼까요. 나탈스푸루이트(Natalspruit)에서 우리 인도인들이 경기를 했죠. 그곳 바로 옆--담장이 하나 가로놓여 있었습니다--에 유색인종 그라운드가 있었습니다. 유색인종 경기장이 좀더 컸죠.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결코 하나로 합쳐지지 못할 거야.'"
그런데 여기에서도 협잡꾼들이 등장했다. 파하드의 한 터키인 친구는, 유색인종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피부색이 아주 밝아서 백인팀과 계약하게 되었다. "그는 백인 행세를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를 응원하러 경기장에 가서 '무스타파!'라고 외쳐서는 안 됐죠. 애칭으로 그를 불러야 했습니다. 오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 당시에조차 인종분리장벽[color bar, color line이라고도 함]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하드와 또다른 인도인 친구는 유색인종 리그(Coloured league)로 옮겨가기로 작정했다. 먼저 그들은 유색인종 리그 위원회에 출두해야 했다. "내 이름을 제랄드 프랜시스(Gerald Francis)라고 속였죠. 당시 최고로 유명한 유색인종 축구선수였습니다. 내 친구는 자기를 베이커 애담스(Baker Adams)라고 소개했습니다. 위원회 사람들이 웃더군요. 그들중에 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거든요. 어쨌든 그들은 별 문제 없다며 우리를 받아들여줬죠." 그도 웃었다. "지금 그 얘기를 하자니 우습게 들리는군요. 하지만 당시에는 피눈물나는 현실이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 파하드는 사상 최초의 다인종 리그를 창설하는 데 힘을 쏟았다. 물론 그 다인종 리그에 백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참여를 묻거나 권유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니까요."
프리토리아. 백인들은 자신만의 리그를 유지하며 계속 경기를 했다. 1977년 2월 18일 프리토리아의 칼레도니아 그라운드(Caledonian Ground)에서 열린 한 경기에 아카디아 쉐퍼드(Arcadia Shepherds)팀이 빈센트 '탄티' 줄리어스(Vicent 'Tanti' Julius)를 기용하여 그라운드에 나섰을 때까지 말이다. 줄리어스는 처음에 최고 골키퍼였고 나중에는 일급의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그는 그 사이에 항상 흑인이었다.
프리토리아의 실업가이자 급진파도 아니었던 사울 삭스(Saul Sacks)가 당시 아카디아 회장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회장으로 있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내게 한 무더기의 스크랩북을 건네주며 말을 시작했다. "글래스고 레인저스(Glasgow Rangers) 선수였던 카이 요한슨(Kai Johannsen)이 우리 팀 감독이었습니다. 그와 나는 법을 어기고 흑인 선수를 기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과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지 지켜볼 심산이었죠. 시합 당일 우리는 줄리어스를 클럽 사무실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 30분, 그러니까 경기 시작 30분 전에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의 마이클 랩(Michael Rapp)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랩은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스퍼스(Spurs)팀의 관리자가 된 사람이다. "내가 말했죠. '이봐, 마이클. 이건 예의상 알려주는 건데, 오늘밤에 우리는 흑인 선수를 한 명 출전시킬 생각이네.' 그가 말하더군요. '상관없어.' 그러더니 10분 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다른 클럽 몇 군데에 알아봤는데 안 되겠어. 자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리그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내가 말했죠. '그렇게 하라구.' 그리고는 그게 다였습니다."
"경기 시작 10분 전에 우리는 줄리어스를 다른 선수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남아프리카 축구 역사상 보안 유지가 가장 잘 된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는 말했죠. '빈센트 줄리어스를 소개한다. 이 선수가 오늘 스트라이커로 뛸 거야.' 우리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백인들까지도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축구를 관전하러 오는 백인들은 아프리카너들과는 달랐습니다." 다음날 신문들은 미쳐 날뛰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다른 백인 클럽들도 흑인 선수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줄리어스는, 흑인팀을 만나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듣긴 했지만 이후 3 시즌 동안 팀의 주요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나중에 그는 남아프리카 흑인 선수로는 최고 계약금을 받고 샌디에고 사커스(San Diego Sockers)로 이적했다.
그가 아크(Arc)팀에서 뜀으로써 다인종 축구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 사실이 분명해지자 정부가 행동을 취했다. "체육부 장관 피트 코른호프(Piet Koornhof)가 이곳 프리토리아에 있는 자기 집무실로 나와 다른 백인 축구 클럽 회장 한두 명을 더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쉬지도 않고 두 시간 동안이나 우리에게 얘기하더군요." 삭스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정부 처지에서 보면 축구는 사생아와 다를 바가 없었죠. 소수의 백인 식민가들만 관련된 흑인들의 경기였으니까요. 그러나 코른호프는 축구와 관련된 정보에 정통했습니다. 선수들과 기구는 물론이고 외국 축구의 동향까지도요. 나는 그가 우리와 만나기 위해 그 모든 자료를 읽었는지 아니면 전부터 그냥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코른호프는 클럽 회장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흑인과의 통합. 이 나라의 미래는 흑인과의 화합에 달려있습니다. 흑인과 백인은 서로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정확한 비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런 발언을 하는 정부 각료는 없었다. "깜짝 놀랐었죠." 삭스가 회고했다. 그러나 코른호프는 이렇게도 덧붙였다. "연맹을 자극하지는 마시오. 그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 아니면 정치 지향적인 사람들이니까요." 연맹은 급진적 인도인들과 유색인종이 운영하는 리그를 말하는 것이었다.
클럽 회장들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부분적으로는 상업적 고려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죠. 흑인 선수들이 관중을 끌어모았으니까요. 그러나 나에게 있어 이 일은 이상적인 일보 전진이기도 했습니다." 삭스의 말이다.
오늘날은 대다수 팀들이 다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팀들은 아직도 백인팀이라는 인식과 흑인팀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위츠 대학(Wits University)과 케이프타운 헬레닉(Cape Town Hellenic)은 절대 다수가 백인 선수이며 팬층도 거의 대부분 백인이다. 반면 이 나라 최고의 클럽들인 올랜도 파이어리츠(Orlando Pirates)와 카이저 치프(Kaizer Chiefs)는 소웨토를 연고로 하고 있으며 대다수가 흑인 팬이다.
축구에서 인종분리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여전히 축구장을 찾고 있었다. "영국과 같은 축구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나는 마크 글리슨한테서 이 말을 들었다. 그는 현재 서른 살로 당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노인이 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는 아카디아 경기를 보러가곤 했죠. 버스를 대절해서 원정 응원을 가기도 했습니다." 하이랜드 파크(Highlands Park)와 같은 클럽들은 시합 때마다 관중을 2,0000명씩 끌어모았다. 심지어 카이저 치프에는 백인 팬들도 많았다.
축구에서 인종분리 장벽이 무너지면서 흑인 축구팬들의 수가 백인들보다 많아졌다. 아카디아와 같은 백인 클럽에서조차도 흑인 팬들이 수적으로 우세했다. 찰튼 어슬래틱(Charlton Athletic)의 선수로 활약하다가 아크(Arcs)의 감독으로 부임한 로이 매튜스(Roy Matthews)가 1979년에 이런 불평을 했다. "심지어는 그라운드에 입장할 때조차도 어떤 응원이나 격려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롱과 야유의 소리만 들립니다. 이렇게 해선 게임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조롱과 야유의 효과는 경영주들인 군중에게 단지 보여주기 위해 선수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경기에 임하도록 강요하는 것뿐입니다."
그 해 말 치프가 그 조그만 칼레도니아 그라운드로 원정경기를 왔을 때, 약 3,0000명의 축구팬이 경기장 입장을 거부당했다. 경기장이 백인 거주 지역에 있었고 입장하지 못한 축구팬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자 지역 주민들이 좋아할 리 만무했다. 프리토리아 시 의회는 즉시 경기장에서 흑인들을 추방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조치로 칼레도니아 그라운드에서의 축구 경기를 모두 금지했다. 이후로 아카디아는 그 경기장에서 단 한 차례의 시합도 갖지 못하고 있다. "축구에서 인종분리 장벽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선데이 타임즈 의 레만이 내게 말했다. "그러나, 관중석이 분리된 경기장에서만 백인 선수들이 흑인 선수들과 겨룰 수 있다는 판단 속에서 장벽은 무너졌던 겁니다. 그리하여 한 쪽 관중석에 2,0000명의 백인이 자리하고, 다른 한 쪽에는 또다른 2,0000명의 흑인이 대치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인종 전쟁을 벌이자는 초대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건 사고가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죠."
백인 축구팬들은 사라졌고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도 그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광기 어린 무장 민병대가 정부의 묵인과 방조 속에 활동하고 있다. 축구 경기장은 이 나라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백인 축구팬이 흑인 거주 지역인 타운쉽(township)의 경기장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존 펄만에게 백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느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내 기억으로는, 1970년대 후반이었던가요, 그때는 정치적 완화 조치가 있으리라는 전망이 전무한 상태였죠. 나는 올랜도 스타디움(Orlando Stadium)에 갔습니다. 꽉 차 있었죠.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모두가 나를 손짓하며 불렀습니다. '와, 백인이다! 이리 와 앉으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누구를 응원하시나요?'"
남아프리카 축구의 가장 큰 후원사인 남아프리카 맥주(South African Breweries)의 아드리안 보타(Adriaan Botha)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타운쉽의 혼란 속에서 축구 경기장이 평화의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늘 놀랍니다. 사실 우리가 즐기는 크리켓 경기에서 폭력 사태를 더 빈번히 볼 수 있죠."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장을 찾는 크리켓 팬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요. 이 사람들은 맥주를 엄청나게 마십니다. 반면 축구장에서는 음주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비록 이렇지만 여전히 백인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대다수 백인들이 현재 유일하게 보는 축구는 케이블 TV에서 방송되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FA Carling Premiership, 아래로 1 2 3부리그가 더 있다]이다. 영국의 명문 팀들은 남아프리카에 대규모 팬클럽을 가지고 있고, 리차드 구프(Richard Gough) 로이 베흘러(Roy Wegerle)와 같이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선수들은 영웅으로 통한다. 흑인들도 프리미어 리그에 관심을 갖고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베닛 '러버보이' 마싱아(Bennett 'Loverboy' Masinga)의 말을 들어보자. "최고 수준의 선수들과 비교해볼 때, 내 키가 너무 작다고 사람들이 말했죠. 하지만 나는 당시에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리즈(Leeds)의 스티브 하지(Steve Hodge) 애스턴 빌라(Aston Villa)의 레이 휴턴(Ray Houghton)과 같은 선수들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왜 영국일까? 펄만의 진단은 이렇다. "우리에게는 한때의 식민지로서 친영(親英)파적 태도가 있기 때문이죠." 헬레닉의 마크 윌리암스(Mark Williams)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TV에서 방송되는 게 영국 축구니까 영국 축구를 보는 거죠."
같은 질문을 마크 글리슨에게 하자 그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스포츠 편집자들은 대개가 영국에서 새로 이민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광, 영광, 최고의 영국(Glory, Glory, England Number One)'이라는 가치에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자 스타 를 한 번 봅시다. 스타 의 스포츠면 편집자는 요빌(Yeovil) 태생의 줄리안 컨스(Julian Kearns)라는 사람인데 영국 축구 관련 기사를 빠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영국 축구 관련 기사가 두 개나 실렸군요. 경기 후퇴로 핼리팩스 타운(Halifax Town)과 스토크 시티(Stoke City)가 손해 보는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네요. 이번 주말 경기에 대한 사전 예상 기사도 길게 실렸군요. 비즈니스 데이 Business Day 의 스포츠면은 요크셔에서 온 테리 로프트하우스(Terry Lofthouse)라는 사람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신문에는 남아프리카 축구를 취재하는 기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글리슨은 또, 각 지역 경기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대개가 흑인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이 백인 스포츠면 담당자들과 교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니아마네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자신이 쓴 기사를 제출하지도 않습니다. 스타 에서 일하던 시절, 편집자에게 '도대체 남아프리카 축구를 다룬 내 기사를 싣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내가 항의하는 게 그가 항의하는 것보다 덜 부담스러웠죠. 이제는 나 스스로 남아프리카 축구의 수준에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쉬워진 상황입니다. 니아마네는 게으른 친구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있는 동안 자네가 계속 싸워준다면 .'"
마침내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축출이 해제되자 남아프리카 클럽들은 영국 클럽 팀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이버튼(Everton)팀이 왔을 때 위클리 메일 Weekly Mail 은 '백인들이 도착하다!'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제목은 그 팀에 놀랍게도 흑인 선수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 것이었다. 초기에 남아프리카를 찾은 팀들은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와 쉐필드 웬스데이(Sheffield Wednesday)였다. 백인들이 구름처럼 경기장에 몰려들었다. 프리토리아에서는 타운쉽의 하층민들도 그들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웬스데이와의 경기를 위해 프리토리아 시 의회는 선다운(Sundowns)이 시 중심부의 로프터스 버스펠드(Loftus Versfeld) 럭비 경기장을 사용하도록 허가해 주었다. 나는 삭스의 집을 나와 로프터스 경기장으로 차를 몰았다. 10여 명의 흑인 노동자들이 관중석을 단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로프터스 버스펠드 럭비 경기장은 자체 기차역까지 갖고 있는 대단히 현대적인 시설이다. 주위에는 백인들의 대저택 지구가 펼쳐져 있고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 건물이 경기장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기장은 케이프타운의 정부 청사만큼이나 정말 대단한 아프리카너의 클럽하우스인 것이다. 선다운과 웬스데이의 시합은 이 경기장에서 개최된 사상 최초의 축구 경기였다.
경기장 뒤에는 로이 베흘러의 모교인 프리토리아 남자 고등학교가 있다. 이곳 럭비 경기장과 크리켓 경기장의 장관은 영국의 어떤 공립학교 시설보다 더 눈길을 끈다. 그러나 축구 경기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축구를 무시하는 남아프리카의 분위기에 맞서 16년 동안이나 투쟁했습니다." 정치 투쟁이 연상되는 이상한 말로 베흘러가 불평을 했다. "백인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나는 럭비나 크리켓을 하리라는 기대를 받았죠. 축구는 흑인 애들이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 1980년대는 남아프리카에서 축구가 공전의 인기를 얻은 10년간이었다. 홍보 충분한 수의 그라운드 최신식 경기장 건설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지금 옥살이를 하고 있다.
인도인에다 가난한 이슬람 전도사의 아들이고 보츠와나의 이스마일 브함제[Ismail Bhamjee, 12장을 보라.]의 형제이기도 한 압둘 브함제(Abdul Bhamjee)는 12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나중에 전국 축구 리그(National Soccer League, NSL)의 홍보 요원이 되었는데, 거기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단신에 아주 활동적이었던 그는 유머 감각도 대단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TV 쇼에 출연했다. 그는 곧바로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관련 인사로 성장했다. 그는 정부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축구를 '전국민의 스포츠'로 발전시켰다. 그는 백인들을 비웃는 일을 즐겼다. 한 번은 자선 축구 대회를 개최했는데 5,8000명 수용 규모의 경기장에 10,0000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브함제는 럭비 크리켓 위원회에도 자선 경기 대회를 열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내 생각에, 그들이 20~30명 정도는 끌어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장권을 강매하면 500명 정도 모을 수도 있겠죠."
홍보 요원이라는 그의 직함이 사태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흑인 리그에는 흑인 의장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남아프리카식 사고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인도인인 브함제가 임명장도 없이 리그를 운영했다. 그는 후원사들을 끌어모았다. 기업들에게는 흑인들을 돕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는 게 필요했다. 그리하여 1989년에 NSL은, 축구 도시(Soccer City)라고도 불리는 FNB 스타디움(FNB Stadium)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 건설 공사에 정부 지원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소웨토와 요하네스버그 사이에 위치한 그 경기장은 7,5000명 수용 규모로 아프리카 최고 수준의 그라운드를 자랑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누구와 언제 어떻게 경기할지를 지시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습니다." 브함제가 경기장 개장식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요크셔 TV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흑인 놈들에게는 아무 거나 던져줘라. 뭘 줘도 다 망쳐버리니까.' 우리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뛰어난 세 가지 자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정직, 성실, 그리고 청렴."
"남아프리카에 1인1표 방식의 선거가 시행되었다면 브함제가 대통령도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레온 해커(Leon Hacker)가 내게 말했다. 각진 얼굴에 홀쭉한 해커는 브함제와 더불어 NSL 위원으로 있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NSL의 놀라운 업적에 힘입어 흑인들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NSL은 흑인이 운영하는 남아프리카 최대의 회사였죠. 뿐만 아니라 백인들에게 굽신거리지도 않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브함제가 어느 시즌엔가 600만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 해에 관중이 400만 명만 찾았다고 가정하고 거기에 스폰서 계약에 따른 수입을 더해봅시다. NSL은 엄청난 돈을 주물렀던 겁니다."
부시 쿠말로(Vusi Khumalo) 기자가 죽기 직전에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착복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마침내 브함제 스캔들이 터졌고 사기 사실 자체보다는 밝혀진 액수가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브함제는 약 200만 파운드를 절도한 혐의로 33개 조항에 걸쳐 유죄 판결을 받았고 14년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홍보 요원이었다. 그는 법정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1992년이 여러분 모두에게 번영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라진 돈은 보츠와나에 숨겨두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사기와 부정은 남아프리카에서 관행이 되어버렸다. 많은 스캔들이 어깨 한 번 으쓱하는 속에 지나가버린다. 선다운팀의 소유자가 여러 은행을 사기쳐 먹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는 그를 동정하는 여론마저 비등했다. 그가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훌륭한 축구팀을 키워냈으며, 선수들에게 런던 여행과 (영국) FA컵 결승전 관전까지 배려했던 것이다. 그와 아내가 금실이 아주 좋았다는 얘기는 지엽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어쨌든 조기에 석방된 그는 새로운 클럽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실패했다. (그는 "가격이 너무 높았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NSL 스캔들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리그가 이미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NSL 위원회는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비쳤었다. 조직의 면면을 살펴보자. 의장직을 맡은 로저 시쉬(Rodger Sishi)는 잉카타자유당을 지지했다. 백인 자유주의 변호사 해커는 부의장이었다. 대변인을 맡았던 인도인은 ANC를 지지했다. "또다른 변호사 출신 백인 대통령 F.W. 드 클레르크가 이 제휴가 성공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나는 1991년 베를리너 타게스차이퉁 Berliner Tageszeitung 에 이렇게 썼다. 당시에는 이 제휴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글리슨이 자기도 똑같은 얘기를 썼었다고 내게 푸념조로 말했다. 그리고 브함제마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저의 변변찮은 견해로 보아도 NSL은 이 사회의 모범입니다."
그러다가 스캔들이 터졌고, 이를 계기로 인종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해커는 축구계를 떠났다. 내가 그에게 NSL을 남아프리카의 화합 모델로 생각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거였죠. 경찰이나 국가 방위군 팀들마저 흑인 팀들과 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도 불가능했죠. 그러나 경기장에서는 가능했습니다." 그 스캔들로 인해 그가 새로운 남아프리카에 대해 환멸을 느꼈을까? "정말로 부적절한 시기에 그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흑인들도 남아프리카를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막 부여잡기 시작하던 때였죠. 이제 냉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돼버렸어요. '거 봐라, 흑인놈들에게 권좌를 넘겨주면 어떻게 되는지.'" 해커는 무엇을 배웠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체제는 흑인들의 권리를 너무 오랫동안 박탈해왔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액수의 돈을 관리하게 되자 유혹에 빠지는 겁니다."
또 대다수 위원들이 브함제에게 고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커는 이 사실에 기겁을 하며 사임했다. "나는 스포츠와 국민, 그리고 국가에 무언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예요.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나는 3개월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국민의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스캔들 이후로는 시합을 보러 축구장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주 힘들군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도 TV로 볼 밖에요."
케이프타운.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케이프타운까지 갔다(17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당시 1993년에는 이틀이나 걸렸다. 나는 케이프타운 헬레닉의 대표를 만났다.
케이프타운은 해변과 산이 있고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도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 외곽의 산업 지역에서 만났다. 헬레닉 회장 George Hadjidakis는 청량음료업계의 제왕으로 이 세븐-업 회사의 핵심에는 Hadjidakis 자신과 '바파나 바파나'의 스트라이커 마크 윌리암스 그리고 두 명의 영국인 자니 '버지' 번(Johnny 'Budgie' Byrne)과 그의 아들 마크(Mark)가 있었다. 1960년대에 잉글랜드 선수로 활약했던 버지는 거의 20년간 헬레닉을 감독했다. 마크는 헬레닉의 중앙 수비수였다.
제재가 끝난 덕분에 헬레닉은 CAF컵 대회--UEFA컵 대회의 아프리카판이라고 할 수 있다--에 남아프리카를 대표해 출전할 예정이었다. 1회전에서 그들은 말라위의 한 클럽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헬레닉이 참가하는 것은 컵 대회 역사상 처음일 뿐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팀이 출전하는 것도 처음이다. 거기다 사상 최초로 백인 팀이 출전하는 것이다." 속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큼직한 체구의 그리스인 Hadjidakis가 대회 참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버지--짧은 반바지에 T-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나에 갔을 때 나는 다 큰 어른들이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봤습니다. 론 그린우드(Ron Greenwood)도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웨스트 햄(West Ham)과 함께 갔을 때죠. 그들 말이 맞더군요. 정떨어지는 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죠." 헬레닉은 로저 밀러와 계약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약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밀러의 독일인 에이전트에게서 아프리카 축구계에 만연한 속임수--상대팀에 대한 방해 공작--를 들을 수 있었다. 버지의 설명을 들어보자. "교통 수단에서부터 숙소, 묵는 호텔 밖에서의 야유와 조롱, 배탈 설사를 일으키려고 음식에 집어넣는 약물에 이르기까지 정말 지독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네들끼리는 늘 있는 일상사더군요." "내 생각에는, 백인 팀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Hadjidakis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말라위에는 큰 규모의 그리스인 공동체가 있고 회장도 제가 압니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사실입니다." Hadjidakis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스인들은 유목 민족이어서 세계 각지에 그리스인 공동체가 있죠. 내 아내는 자이르 출신의 3세대 그리스인입니다. 시합 전날 밤 어떤 그리스인 가정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받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럼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텐트를 칠 수 있도록 마당을 제공해줄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호텔에서 묵지 않아도 되잖아요." 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Hadjidakis가 다시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해봐서 좀 아는데, 말라위인들이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사랑스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입장 관중이 겨우 3000명밖에 안 되는 헬레닉이 어떻게 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흑인 팀들은 규율이 없었다고 버지가 설명했다. "흑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유한 방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흑인들을 지도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데요. 피터 은들로부(Peter Ndlovu)처럼 일찍부터 훈련시키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돼버리는 것 같습니다. 골키퍼 중앙 후위 미드필더 스트라이커와 같이 중요한 포지션엔 백인 선수 한두 명을 중복 편성해 규율을 유지해야 합니다. 헬레닉은 훈련과 규율을 중요시하는데요, 우리에게는 그들의 기술이 없기 때문이죠." 그는 낄낄거리고 있던 팀의 유색인종 선수 윌리암스를 가리켰다. "이 친구야말로 당신이 만나본 선수 중에 가장 규율이 없는 선수일 겁니다. 항상 훈련에 늦어 내 성질을 건드리죠. 해대는 변명도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혹시 사실이라면 이 녀석 똥구멍이라도 핥겠어요. 우리 팀에서 진짜 프로는 두 명뿐이죠. 이 애와," (아들을 가리키며) "납니다. 마크는 훈련중에도 선수를 걷어차 버립니다! 이 팀에서 그렇게 하는 선수는 또 없습니다."
마크 번은 나를 자기 밴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도중에 '바파나 바파나'가 4주간 강화 훈련에 들어간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선수단의 반 정도가 함석판으로 대충 지은 초라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크 윌리암스도 괜찮은 집으로 이사한 지가 얼마 안 돼요. 전에는 그도 허름한 오두막에서 8식구와 함께 살았죠. 바로 이런 이유로 흑인 클럽들이 시합 2~3일 전에 호텔에 투숙하는 겁니다." 버지는 그의 아들을 영국 클럽에서 뛰게 하려고 몇 차례 테스트를 주선했다. 한 번은 포츠머스(Portsmouth)팀과의 연습경기에서 그가 폴 마리너(Paul Mariner)를 마크하다가 이마에 네 바늘, 정강이에 세 바늘을 꿰매야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마리너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다 뭡니까?' 그랬더니 그가 이러더군요. '젠장할, 이길 수 없으면, 빌어먹을, 조져버리라구.' 남아프리카에서 이런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죠."
요하네스버그. 버지 번의 생각을 조롱하여 말하기는 쉽다. 물론 그의 말투와 태도에 품위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양 있는 남아프리카인들조차도 백인과 흑인의 축구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따로 축구를 익혔던 것이다.
스타 의 필 니아마네가 남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 사이에 벌어졌던 1973년 경기를 나에게 소개했다. "백인들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썼습니다. 또 공을 멀리 차내고 공간으로 질주하는 방식이 대종을 이루었죠. 반면 우리 흑인들은 골문까지 직접 공을 몰고 가려 했어요. 우리가 패배했죠. 백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전술을 배웁니다. 그러나 기술(technique)면에서는 우리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사우스햄튼(Southampton) 선수였고 지금은 위츠 대학 감독인 테리 페인(Terry Paine)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같은 진술을 했다. "흑인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아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기질 위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오는 적합한 규율뿐이라고 말합니다." 치프의 백인 미드필더 닐 토비(Neil Tovey)는 자신의 역할이 "흑인 팀에 필요한 백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비는 헬더폰테인에 가지 않고 휴가를 가버리기 전까지 '바파나 바파나'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흑인들이 자신의 축구에서 극적인 묘기와 기교를 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 축구계로부터의 추방 말고도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고 펄만이 말했다. "그들이 운동장에서 극적인 묘기를 선보이며 상대 선수를 농락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말이 있죠. '우리에게는 정말 뭔가 보여줄 게 있다. 우리 공동체에는 정말 비장의 뭔가가 있다.' 흑인 선수가 맹렬히 돌진하는 백인 선수를 재치 있게 따돌리고 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걸 볼 때면 정말 즐겁습니다. 백인 자유주의자인 나도 그 스릴에 대리만족을 느낀답니다. 그러니 그런 묘기의 축구가 흑인 선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당신도 아마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이 지배적인 요즘 남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조국은 모든 게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금 햇빛 흑백 인종의 이상적인 통합. 그들은 새로 건설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스위스만큼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며 범죄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1998년 월드컵도 차지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흑인 선수들의 기술과 백인의 능률을 잘 결합한다면 제2의 브라질이 탄생할 것"이라고 게리 베일리(Gary Bailey)가 예언한 바 있다. 그의 상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백인들은 조직력과 수비가 뛰어나고 흑인들은 창조성과 득점력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흑인들은 절대적으로 수비에 취약하다. 한 번의 실수가 게임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준에 따라 남아프리카 대표팀을 선발해보라는 주문을 받자 그는 수비수로 흑인 두 명, 흑인 미드필더 한 명, 그리고 백인 스트라이커 두 명을 뽑았다. 흑인들은 멋지고 우아하며 백인들은 능률적이라는 관념은 다소 어리석은 것이다.
가보로네, 보츠와나. 나이지리아에 대비하기 위해 '바파나 바파나'는 보츠와나와 친선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래서 글리슨과 그의 동료 기자 페터 아우프 데어 하이데(Peter Auf der Heyde)와 나는 페터 아버지의 메르세데스를 함께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이제 나는 가보로네를 두 번씩이나 방문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축구 기자의 반열에 올랐다.
국경에 도착했더니 팬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래서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안에 정치인 세 명이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옷차림으로 끼여 있었다. 에솝 파하드와 아지즈 파하드 형제, 그리고 작은 키의 타보 음베키(Thabo Mbeki)였다. 물론 마크는 그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음베키는 망명 기간 동안 ANC 런던 지부 대표를 지냈고 그리하여 사상 최초의 다인종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에 임명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런 그가 바로 이곳 보츠와나와의 국경에서 헐렁한 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참을성 있게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국경 반대편에서 또 그들을 보았다. 타고 온 차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공기를 주입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는데 그들이 다 찌그러진 작은 차량을 타고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남아프리카 정치의 미래는 아주 불확실해서 현지인들은 늘 조그만 징조라도 주의 깊게 살핀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인들이 거드름 피우지 않는 태도가 정말 좋았다.
가보로네에서 마크는 국립 경기장(National Stadium)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페터와 나는 가보로네 선호텔까지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간이 의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거기 앉아 함께 술을 마셨다. 직장 리그 골키퍼였던 페터는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축구 보도 기관을 이끌고 있다. 월간 사커 아레나 Soccer Arena 와 남아프리카 축구 연감 South African Soccer Yearbook 을 편집해서 발행하는 그를 주변 친구들은 미친놈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그와 글리슨은 당시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축구 연감 African Soccer Yearbook 을 발간하기 위해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유럽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선수의 국가간 A매치 출장횟수, 체중, 생년월일 따위를 알려면 선수 자신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한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른하게 의자에 앉아서 나는 페터에게 어떻게 혼자서 축구 관련 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가 해고당할 때까지 부텔레지(Buthelezi)의 잉카타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에서 일했다고 했다. 잉카타자유당이 그에게 생활안정 자금을 대주었고, 그는 그 돈으로 출판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쫓겨난 이유는 뭡니까?" "내가 ANC의 첩자였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첩자라면 생활안정 자금을 대준 이유는 또 뭡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는, 정부 보안군이 내가 첩자라고 말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정보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다 안다'고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게 돈을 주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그는 자기가 정말로 첩자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 나라에 축구 관련 보도 기관이 생기게 되었다.
페터는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한 상태였다. 축구 에이전트가 되어 그가 시도한 첫 번째 모험적 사업은 남아프리카 대표팀 주장 스티브 콤필라(Steve Komphela)와 계약하고자 하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클럽을 찾아낸 것이었다. 콤필라도 기뻐했다. 팔라시오스가 그를 소환해 얘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콤필라는 자신이 페터와 관계를 끊고 새 에이전트로 마르셀로 하우스먼과 계약하지 않으면 주장은 고사하고 대표팀에서도 쫓겨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선호텔로 가 피커르트(Fickert)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땅딸막한 사나이 콤필라에게 달려갔다. 그는 중앙 수비수였다. 그와 페터는 긴장된 시선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 일은 지금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경기에만 열중하세요." 페터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콤필라의 방 옆에 있는 소웨탄 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방에도 들어가 보았다. 기자인 듯한 거대한 몸집의 한 젊은이가 침대에 누워 있고, 사진기자는 필름을 보면서 뭔가 하고 있었다. 페터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저 친구가 정말 괴짜죠. 이번에 취재하러 온 모양이군요." 그가 바로 '바파나 바파나'라는 애칭을 새로 만들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전통 속에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 팀들은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애칭을 갖고 있다. 카메룬은 불굴의 사자(Indomitable Lions), 보츠와나는 얼룩말(Zebras), 나이지리아는 초특급 독수리(Super Eagles), 카이저 치프는 아마코시(Amakhosi) 또는 페페니 글래머 보이스(Phefeni Glamour Boys), 그리고 페어웨이 스타(Fairway Stars)는 야 을라 코토(Ya Wla Koto). 이 말은 전투 구호로 "납케리[knobkerrie, 남아프리카 카피르(Kaffir)족의 무기로 끝에 혹이 달린 곤봉]가 적의 머리를 부수었다"는 뜻이다.
남아프리카 선수들은 자신들의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아프리카 흑인 사회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애칭을 얻을 때에만 진정한 인물로 승인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날 '바파나 바파나'에는 존 '슈즈' 모쇼외(John 'Shoes' Moshoeu), 파니 '사담' 마디다(Fani 'Saddam' Madida), 테오필리우스 '닥터' 쿠말로(Theophilius 'Doctor' Khumalo) 등이 있었다. 닥터에게는 테오필리우스와 같은 이름 때문에라도 별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디다 역시 '사담'이라는 별명에 만족했을 수 있다. 걸프전 당시 그는 공격수로서 수비진을 초토화하기 시작했고 그런 연유로 이 별명을 얻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터키의 베직타스(Besiktas)팀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 별명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십 년 전 남아프리카의 경기장들에는 '히틀러(Herr Hitler)'라는 별명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지미 그리브스(Jimmy Greaves)'라는 애칭은 설명하기 쉬운 간단한 별명이다. 그러나 '밥은 1실링이다(Bob is a shilling)' '할렐루야 세제니(Haleluya Sezeni)' '선생님들의 회합(Teachers' Meeting)' '브르ㄹㄹㄹ (Brrrr...)'와 같은 별칭에는 분명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난폭자 쉐퍼드(Baboon Shepherd)'로 통하는 운 나쁜 선수가 있는가 하면, '날쌘돌이' 요한슨('Hurry-hurry' Johanneson)은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로 이적하고 나서 잉글랜드 대표팀으로도 선발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의 별명이 이적 후에도 유효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게리 베일리는 남아프리카에서 '선샤인(Sunshine)'으로 통했지만 맨체스터(Manchester)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패트릭 '공포의' 르코타(Patrick 'Terror' Lekota)는 ANC의 원로 정치인이다. 그러나 선수 시절 얻었던 별명으로 여전히 불리고 있다.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선수도 일부 있다. 술집에 갔는데 누군가가 "어이, 난폭자 쉐퍼드!" 하고 부른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펠레(Pele )는 자신이 두 사람이었다고 늘 말하곤 했다. 공인으로서의 펠레와 사적 개인으로서의 에드손(Edson) 말이다.
국립 경기장은 남아프리카인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많은 보츠와나인들이 일상으로 카이저 치프 셔츠를 입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분명히 내걸린 배너는 전부 '바파나 바파나'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내가 육상 트랙을 따라 돌며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이봐요, 백인 친구! 볼일도 없는 이곳에서 뭐 하는 거요?" 한 축구팬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타보 음베키가 선수들과 대면하고 허물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팔라시오스의 아들은 남아프리카팀 벤치에서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이 시합은 그 페루인이 지휘권을 넘겨받아 치르는 첫 번째 시합이었다. 그는 '바파나 바파나'에 새로운 규율을 심어놓겠다고 언명했었다.
그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여전히 브라질을 괴상하게 모방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힐킥의 남발, 2 3중의 상대 선수 속이기 동작, 득점과는 상관없는 온갖 잔기술. 슈즈(Shoes)가 발뒤꿈치로 공을 가볍게 차올려 머리 위로 올리려 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러면 관중이 박수로 이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최악의 공격수는 닥터였다. 마디다의 크로스패스를 받아 골문으로 몰고 가다가 실패하고도 닥터는 관중석을 향해 당당하게 웃었다. 잠시 후 그가 공을 가볍게 차올려 발끝 위에 올리더니 자랑이라도 하듯 보츠와나 수비수에게 보여주다가 공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보츠와나 선수가 재빨리 공을 낚아채 가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옆줄로 걸어가 벤치에 대고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론 앳킨슨(Ron Atkinson)이 그를 미드랜드(Midlands)팀으로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행운이었다고 할 것이다. 짐바브웨팀이 그를 (닥터가 아니라) '간호사'라고 새로 명명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축구팬들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로이 베흘러(그는 자기 기술은 남아프리카에서 익힌 것이라고 말한다)는 이와 비교해 볼 때 컴퓨터와 같은 정밀함을 갖춘 선수다. 바파나가 2대0으로 승리했다. 네 번의 패스로 연결된 닥터의 오버헤드 발리킥이 두번째 골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FNB 스타디움. 에솝 파하드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1950년대에 남아프리카의 축구팀은 모두 백인 일색이었고, 자국에서 개최되는 모든 국제대회에서는 비백인용 좌석이 따로 두 군데 마련됐었다는 것이다. 파하드의 회고를 계속 들어보자. "경기장을 가득 매우곤 했죠. 모두가 방문팀을 응원했습니다. 남아프리카를 응원하던 덜 떨어진 인도 녀석이 한 명 생각나는군요. 정말 딱 한 명 짜증스러운 인도 놈이 있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경기 내내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남아프리카와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FNB 스타디움 관중석에서는 계속해서 북소리가 울렸고 관중은 나이지리아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소웨탄 T-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나아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구호를 외쳐댔다. 한편 경기장에서는 나이지리아의 네덜란드인 감독 클레멘스 베스터호프(Clemens Westerhof)가 나와 동행한 사진기자이자 그의 동포인 빌렘과 함께 관중석의 동향을 살폈다. "유럽에도 이만 한 경기장 시설은 많지 않습니다." 베스터호프가 빌렘에게 말했다. 영국에도 7,5000석 규모의 좌석 경기장은 거의 없다. 브함제가 감옥에서도 자랑스러워했을 법하다. 비록 NSL이 FNB 스타디움 건설에 단 한 푼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건설 공사 자체가 완료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수는 6,0000명이었다. 기자석은 기자들로 가득 차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앞줄에 앉은 사람들도 일어서지 않으면 경기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우리 뒤쪽 사람들도 그들이 일어서는 통에 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오갔고 소란스러웠다. 나는 '외국 기자석'이라고 표시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 옆자리는 'Sappa'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남아프리카기자협회(South African Press Association) SAPA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 SAPA 기자는 시합 중에 기사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는 경기 시간 90분 동안 기사를 6개가량 썼다. 당연히 시합은 거의 보지 못했다. 득점 기회가 날 때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 흔들어 일깨워주어야 했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뉴스 대행사가 송고한 경기 관련 기사를 읽으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나이지리아는 국가 제창을 위해 한 줄로 도열했을 때 이미 심리적 우위를 점했다. 나이지리아의 독수리들은 키가 모두 8피트[약 240cm, 원문이 이렇게 되어 있다. 계산을 잘못 한 듯하다]씩이나 되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심리적으로 벌써 3대0쯤으로 이긴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다. 나이지리아는 라고스에서 이미 '바파나 바파나'를 패배시켰을 뿐더러 대표팀 선수 거의 전원이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나이지리아 선수 한 명이 남아프리카의 백패스를 가로채 골네트를 갈랐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심판이 오프사이드 반칙을 선언하며 골을 인정하지 않은 게 놀랄 일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백패스를 가로채는 행위가 오프사이드 반칙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파나 바파나'는 전반전 종료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0대0 스코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간 휴식 시간에 마크가 흑인 라디오 기자들과 현장 인터뷰를 했다. 그들도 모두 마크만큼이나 축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흑인이었고, 자신만의 견해를 펼칠 만한 자신감은 없었던 것이다.
후반전 시작과 함께 조지 디날리가 낮은 크로스패스를 가볍게 차넣어 득점에 성공하자 국민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기자석에 있던 남아프리카인들도 흑인 백인을 막론하고 깡충깡충 뛰었다. 나탈(Natal) 출신의 이 장신 백인 스트라이커도 득점 후 관중석에 있는 1,0000명의 흑인과 함께 골을 축하했다. 그러나 잠시 후 보츠와나인 심판이 오프사이드를 이유로 프리킥을 선언하자 우리는 다시 인종분리 장벽이 높이 솟은 과거의 남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결국 경기는 득점 없이 끝났다. 남아프리카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좌절되었다. 쉬지 않고 북을 치며 응원하던 사람들도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베스터호프는 (그는 나이지리아의 낙승을 예상했었다)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영광을 남아프리카에 돌립니다." 팔라시오스도 내게 한 마디 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월드컵을 준비해야겠군요."
주차장에서 펄만과 함께 있다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2명, 스티브 크롤리와 슈즈가 자기 차로 가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보았다. 나는 펄만에게 크롤 리가 얼마나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얘기했다. 그는 자신의 팬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며 교분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축구장이야말로 남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의 피부색을 잊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내가 말했더니 펄만이 버럭 화를 냈다.
"그 얘기는 남아프리카 축구를 소개하는 외국 기자들의 기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입니다! 관중이 디날리에게 환호했을 때 그들은 그가 백인이라는 사실도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축구는 이제 그 단계를 지났습니다. 당신은 이제 다른 이야기를 쓰세요!"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케이프타운에서 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 남자를 또 만났다. 그는 남아프리카 백인으로서 아스날(Arsenal)을 응원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1970년대 이후로 그 팀의 경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말에 FA컵 대회에 출전한 아스날과 리즈의 시합을 보러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몹시 추운 밤 우리는 클락엔드가[Clock End街, 아스날의 홈경기장 하이베리(Highbury)가 있는 런던의 거리]에 함께 서 있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주목을 끌 만한 플레이가 거의 없었다. 특히 우리 앞쪽에 있는 골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네 골 모두 반대쪽 골문에서 터졌던 것이다. 전반전에는 고든 스트라찬(Gordon Strachan)의 활약으로 리즈가 아스날을 압도했다. 우리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니 아스날 수비진에게 외쳤다. "저 스트라찬 녀석. 도대체 어떻게 패스가 이루어지는지를 모르는군. 야, 가서 막아! 넌 뭐하는 놈이냐? 고든 스트라찬 감사위원회에서 나오기라도 했냐?" 유난히도 관중의 눈총을 많이 받았던 비인기 선수 데이빗 힐리어(David Hillier)가 어설픈 마크를 여러 차례 시도하다 계속 경고를 받았다. "심판, 저 자식 퇴장시켜버려!" 한 사람이 외치자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아주 평생 못 나오게 하라구!" "그게 안 된다면, 그래도 가능한 한 오래 출장 정지시켜 버려!" 세 번째 사람이 또 말을 보탰다. 시합은 2대2 무승부로 끝났다. 그 시합은 정말 지독했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5개월 후 아스날은 당당히 FA컵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