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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변씨 (卞氏) 사이세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여해(汝諧)이다. 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 되던 해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權 管)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奉事), 발포 만호(萬戶),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參軍), 사복시 주부(主簿), 조산보만호 , 선전관(宣傳官), 정읍 현감(縣監)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로 발탁되었다. 공은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참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첡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 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 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 40여척을 격파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 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때 사천, 당포, 당항초, 율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엿으며 연이론 안골 포 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웅천 등지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였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보호,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왜(倭)간첩 요시라(要時羅)의 간계로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權慄)장군의 막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원균(元均)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 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 1598년 고듬도(古今島)로 진을 옮겼다. 그 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령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중 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이었고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꺽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개(亂中日記)와 시조(時調)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선조 37년(1604) 덕풍부원군에 추봉(追封) ,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정조17년(1793)에는 영의정에 더해졌다.
묘소는 이곳 어라산(於羅山)에 위치하며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세워졌다.
[이충무공관리소에 의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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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옆의 묘비]
[묘 아래 있는 묘비]
■묘비(墓碑)
묘앞의 이 묘비의 비문은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李鳳祥)의 부탁을 받은 이이명이 지었으며 영조때 세워져 충무공의 증직(贈職)이 좌의정으로 되어있다.
묘소 어귀에 있는 이 비는 1998년 11웕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충무공 후손들이 세웠다. 충무공의 증직(贈職)이 영의정으로 되어있는 이 비의 비문은 강영훈(姜英勳) 전 국무총리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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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어제신도비 비각
정조대왕 어제신도비
정조대왕 어제신도비 설명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
어제신도비는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碑銘)을 지어 1794년(정조 18년) 10월 4일에 세워진 비 로써 이충무공묘소 아래에 있다.
우리 장하신 선조대왕이 나라를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사람의 큰 힘에 의한 것이다. 이제 내가 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랴 (정조 - 어제신도비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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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눈도장만 찍었는데 산을 오르며 계속 아쉬움이 남아 뒤를 돌아보곤
했다.
국사봉 내려오는 산릉에 방향을 마추며 산으로 올랐다.
성내고개 300m, 금산 1,940m의 이정철주가 있는 X165봉였다.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있다.
산릉에 올라선지 얼마되지 않아 음봉과 영인면의 경계인 성내고개로 내려올 수 있었다.
[금산 1,120m]의 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인면 [성내저수지 건너 고용산▲295.8m]가 힛낏히낏 눈에 들어와 금산으로 가는 길목을 잡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지도에 표기된 금산 ▲286.1m가 오기임을 알게 되고 갔던 봉우리 다시 가보니 아뿔싸 x251였다.
가랑잎이 융단을 깐 산길을 걸어 걸어 갔다.
금산 ▲286.1m 정상였다. 4,468번째의 한현우님이 다녀간 흔적이 있는 나무가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금산을 내려갔다.
한참을 가서야 삼각점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뒤돌아가 확인하기엔 너무 늦었는가 싶었다.
5분쯤 내려오니 아산온천이 내려다 보이고 걸어갈 지맥길이 한눈에 보이는 영인산도 들어왔다.
시설물이 있는 봉우리가 영인산인가 싶은데 모르겠다. 투구봉였다.
철탑뒤 둥근 봉우리가 감투봉일꺼란 생각으로 사진에 담고 그 옆으로 어딘가에 영인산은 계속 의구심으로 다가왔다.
산불감시초소도 지난다.
모델 앞으로 허름한 집인지? 개도 있고 염소도 있는 공터를 지나 왔다.
628번 지방도로인 배티고개다.
도로를 건너 혁신사관학교 간판뒤로 다가 가니 나풀나풀 표지기가 어서 오라 손짓하듯 반겨준다.
산길을 오른지 그것도 잠시 산을 내려왔다.
충전소와 주유소가 나란이 있어 주유소에 들려 커피 한 잔 먹고 가려 했으나 자판기는 없었다.
염치읍과 영인면을 경계로 39번 4차선도로인 뒷아산고개였다.
도로를 건너볼까 했으나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충전소 아저씨 말대로 영인면쪽으로 내려가 지하차도를 빠져나왔더니
영인산 주차장인 것 같다.
사람들이 영인산으로 오른다. 큰길처럼 편히 오를 수 있는 산길이 된다.
[상투봉 2.55km, 영인산 5.3km]의 이정철주를 보니 영인산이 멀게 느껴진다.
가던 길 주저 앉아 베낭에서 주섬주섬 꺼낸 계란과 사과, 귤로 배를 채워본다.
지나가는 산객들도 제법 있다.
영인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상투봉은 둥그런 모습으로 오르는 계단까지 선명히 조망되기도 했다.
영인산 수목원 계단이 조성되고 있는 길따라 갔다. 가다가 억새가 가득한 밭으로 가로질러 갔다.
수목원 오른쪽 산릉이 지맥길이기에
[영인산 수목원의 안내도] 앞에 다가선다.
[정이품송 후계목]인 이 소나무는 1995년 1월 1일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 아산시로 새롭게 출발함을 기념하기 위하여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정이품송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던 소나무를 기증받아 아산시청 청사에 기념 식수 하
였던 나무를 관리하고 있던 소나무를 이식한 정이품송 후계목은 조선시대 18 품계 중 제3등급의 품계를 받은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03호라 하네.
왠지 소나무가 작아 보인다.
노산 이은상님의 '나무의 마음'이란 시비도 있다.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 쉬고 뜻도있고 정도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꺽으면 눈물 흘리고
꽃피고 잎 펴저 향기 풍기고 가지줄기 뻗어서 그늘 지으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부르고 사람들도 찾아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 처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게 자라나 집집이 기둥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마음 알아 주는데 사람은 나무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들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나라 빛날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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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을 사면으로 간다. 길이 넓고 편히 걸을 수 있어 좋다.
가랑잎도 채이지 않는다. 그래서 심심타
[산림박물관이 산릉에 있는 것이다.]
영인산 가는 길은 점점 넓어지고 편히 걸을 수 있고 영광의 탑 아래 시멘트길에 점심상을 펼쳤다.
컵라면에 밥을 말아 먹었다. 따뜻한 라면을 먹으니 몸도 따뜻해 지는 것 같다.
사과와 계란과 떡, 따끈한 커피 한 잔할 수 있는 여유도 부려본다.
떠나자.
걸어온 길과 수목박물관과 상투봉이 조망되는 길따라 뒤들 돌아본다.
가지고 있는 지도에 병풍바위가 표기되어 있어 찾아보려니 확인이 되지 않았다.
영광의 탑 오름길은 잘 다듬어진 탄탄대로의 길, 휴양림왔다가 영인산 오르는 사람들이 많을꺼란 생각이 든다
친구도 그래서 한 번 와 봤단다.
시련과 영광의 탑을 가까지 가 보지 않고 돌아선다.
금산에서 바라보던 시설물이 이곳 영광의 탑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솔뫼 박승운님의 '산사랑'도 소나무 아래 서 있다.
산사랑
아산만 포구에서 부는 해풍이 곡교천을 휘감아 미래의 꿈을 잉태하듯 하늘을 머리에 이고 치솟은 영인산정 아니온듯 찾아와 추억만 남기고 가기엔 너무나 정겨운 산하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받기엔 너무도 부끄럽지 않은가 뭉개 구름 잠시 머무는 차령산맥 한자락에 역사의 고뇌와 시련을 잠재우고 준엄하게 우뚝선 곳 너와 나 영원한 푸르름으로 뿌리내려 꽃피움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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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산을 말하는 시다
태백산맥이란 없다란 책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당연 차령산맥이란 없다이다.
아름다운 시에 산을 다니는 나론 옥에 티다.
지나온 산길과 산림박물관, 투구봉을 뒤돌아 본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할 것 같은 깃대봉이다.
그냥 사면을 따라 영인산으로 간다.
드디어 영인산 오름길에서 본 바다가 펼쳐진다.
가야 할 지맥길에 입암산이 조망되는 곳, 아산만방조제는 길다란 끈같이 안중과 인주를 연결하고 있다.
먹구름은 곡교천을 휘감아 비라도 뿌릴듯
끝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 363m의 영인산이다.
전망대다.
올라 올때의 모습보다 다를바 없고 더 높이 보이는 곳도 없는 바다다.
야영과 취사, 쓰레기투기, 모두가 금지인 이곳에 붙혀놓은 글귀다.
그런데 야영하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 영인산이란걸 ..
아까 솔뫼님의 산사랑이란 시가 생각난다.
지맥과 함께 아산만의 풍경이 조망되는 길을 따라 간다. 영인산에서 세심사가는 방향으로 가지만 세심사는 남쪽에
있다.
잡풀로 봉분이 가득한 묘와 영인산을 담아 보았다.
영인산 아래가 절벽이다.
암릉길을 걷는 솔솔함도 있고
628번 도로를 중심으로 입암산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바로 그 아산호이고
평화스런 시골이건만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흉칙스런 산의 모습을 보게된다.
채석장이다.
아산수도센타 철조망을 만나는 지점까지 내려간다.
계속 철조망 옆으로 나와 덤불속을 헤쳐 산줄기와 가까이 가 보려 하지만 허사되고 냉이가 가득한 밭으로 내려온다.
서리태를 수확하고 있는 부부의 주고 받는 몇마디가 충청도 사투리다.
입암산으로 간다니까 멧돼지가 많아 못간단다.
버스타고 가란다.
네~~
628번 도로를 건너 밭과 묘를 지나 잔다리고개에 오니 해는 벌써 어데로 갔는지 알수 없다.
입암산정상까지 2.5km..
木川 馬씨의 무덤을 보는 순간.
고향을 만난 듯 반가웁고
행여 쓸쓸함까지 더해지면서 친구를 부른다.
지나온 영광의 탑, 깃대봉, 영인산의 정상을 가지런히 조망되는 곳에서 뒤를 돌아본다.
하루종일 가랑잎이 수북히 쌓인 길을 걸었다.
햇빛이 있어 따뜻한 겨울,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는 눈이 없어서 미끄럽지 않은 걸어도
걸어도 좋을 만큼 그런 길들과 같이 했다.
입암산으로 가는 길은 점점 어두워진다.
벌써 깜깜해져 간다.
133봉이란다.
채석장이라나. 가파른 절벽으로 쳐다보니 무섭다.
이렇게 산을 깎아 놓았다니 .. 무슨 일일까. 분명 사람이 산을 망쳐 버려 놓은 것은,
도숫골에선 아직도 덤프차 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비친다.
잡풀속을 올라 가는 희미한 길을 가파른 절벽 옆으로 가야한다.
우리의 발자욱에 놀라 '후닥닥 '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새는 꿩이다.
음력 11월 5일 , 초승달이 하늘에 떳다. 알고 보니 상현달이었다.
입암산, 오늘의 마지막 산정에 올랐다.
笠岩亭(갓바위산)에 앉아 본다.
모든 세상이 어두움속이다.
내려가자.
공세성당쪽으로 ..
공세성당까지 1.6km이다.
입암산 삼각점 아산 309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 하였고
삼각점의 번호 아산 309
입암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위하여 제초작업과 함께 환경정화작업을 실시하여 오르는 길은 넓고 편리하다.
천등말갈림길과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 공세리 마을에 도착한다.
현위치 : 공세성당의 이정철주가 세워져 있는 곳이 인주면 파출소와 버스정류장으로 편히 내려올 수 있었다.
공세리성당을 지나 인주Ic도 지나 새원의 ▲54 아래가 아산만방조제가 있는 곳이 이 산줄기끝이 되겠다.
공세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저녁, 6시 40분 음봉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파출소 근무를 마
치고 나오는 경찰께 어데 가시냐고 물었더니 배방에 간다고 한다. 잘됐다는 생각에 가는 길에 우리 둘 태
워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들어준다.
요즘 경찰들은 친절하다. 옛날 어릴적 우리는 경찰이라면 무섭기만 했던 기억만 있는데 그게 아니다.
둔덕산, 영인산, 고용산에 채석장이 많은 것은 이제서 알게 된다. 아산만방조제에 돌이 쓰인다고.
산에서 무서우리 만큼 깎아낸 절벽이 돌을 깎아낸 우리의 마음아픈 흔적인 것이다.
아산만이 교통이 편리해 졌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산이 깎여 나간 상흔을 어떻게 치유게 되겠는가 하는 씁쓸한
생각에 금북영인지맥을 마치고져 한다.
온양온천까지 와 누리호를 타고 부천으로 온다.
오랫만에 산행을 한 탓에 힘들어 했던 친구, 잘가.
[금북영인지맥 종주] 完
첫댓글 와! 차로 지나간 신작로와 산으로 이어져 온 저 산길
감동이다. 영인산도 몇 번 갔지 그리고 고용산 진달래가 붉은 산길 수놓았고
공세리 성당은 꽃 잔디가 고왔던 기억이
아산만 방조제를 쌓기위해서 산을 파헤쳐다고...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