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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서 사라진 동성왕의 익산천도
사기 근초고기 26년조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말은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겼다는 말로 이해된다. 한산(漢山)은 지금의 남한산이다. 지금의 서울 강남인 하남에서 광주로 옮겼다는 말이 된다. 이 한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서울 강남에 있던 성은 북한성이고 위례성이자 대성이라고 불린 것이다. 남쪽에 있던 광주산성은 남한성이고 소성인 것이다. 말하자면 요즘으로 행정수도 비슷한 개념일 가능성이 많다. 수도를 전부 옮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한산이란 강북의 산 이름은 뒤에 한산이라는 광주의 산 이름이 남한산으로 불리면서 그에 상대되는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이 북한산이란 이름은 훨씬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래 한산이란 산의 이름은 남한산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사서기록에 나오는 백제 수도지명 북한산은 북·한산(北·漢山)이며 지금의 서울 강남이다. 지금의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산에 도읍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또한 사기 지리지에 북한산이라고 나오는 양주에 도읍한 적도 없다. 양주가 북한산이라고 한 기록도 지리지식이 없던 고려 사람들의 추측 내지는 의도적인 왜곡에 불과하다고 본다.
하남 위례성은 풍납토성
사기 개로기에 나오는 「고구려군에 의해 칠 일만에 북성이 떨어지고 남성을 쳤다...」라는 기사와 서기 웅략기에 나오는 「박의 대군이 대성을 친지 칠 일 칠 야만에 함락되어 왕성을 잃고 위례를 잃었다...」라고 한 기사와 일치하므로 곧 개로왕조의 북성이 대성이자 왕성이고 위례성인 것이다. 이 북성=대성=왕성=하남위례성이 곧 풍납토성으로 본다. 동시에 남성은 소성인 남·한산(南·漢山)의 광주성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몽촌토성은 배제된다고 본다. 몽촌토성은 부성인 것이다. 이것은 유사 기이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의 구당서를 인용한 글에 나오는 '동서 두 성' 중에서 서성(西城)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문주왕 웅진천도
개로왕 말년에 북성=대성=위례성이 고구려 공격으로 초토가 되고 고구려의 힘에 밀려 문주왕 때 웅진으로 천도하여 동성대왕 말기까지 웅진에 도읍했다. 이 내용은 서기 웅략기 21년 3월조에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패했다고 듣고 구마나라(久麻那利)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고 그 나라를 구하여 일으켰다」라고 되어 있다. 구마나리를 주었다고 하는 것은 황국사관에 입각한 허기지만 수도를 옮긴 것은 정확히 기술한 것이다. 사기에는 문주기 원년 10월조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라고 나온다.
동성대왕 익산천도
동성대왕이 말년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고 익산의 웅포로 옮겼으나 불과 1년 만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익산은 수도로서 오래 활용되지 못했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서명기에 상세히 나온다. 이 때 백제는 약 3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수도를 두 번 옮긴 셈이 된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서명기 11년 7월조에 아래와 같이 신수도 건설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조하여 이르기를, 금년에 대궁과 대사를 짓겠다고 하고 백제천 옆을 궁처로 삼았다. 이리하여 서쪽백성은 궁을 짓고 동쪽백성은 절을 지었다. 서직현을 대장(大匠)으로 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조를 보면 「백제천 옆에 구중탑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12년 10월조에는「이달에 백제궁으로 옮겼다」라고 수도를 옮긴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13년 10월조에는「9일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하였다. 18일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대빈이라 했다. 이때 동궁개별황자가 16세로서 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 나오는 백제궁을 백제대궁이라고도 했고 대사는 백제대사 또는 대안사라고도 했는데 구중탑은 지금의 익산 미륵사 구층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궁을 완성하여 들어간 지 1년 만에 암살당한 것이다. 빈궁을 9일 만에 설치한 것도 암살과 관련된다고 본다. 동성대왕 세력을 제거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유사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나오는 대목과 흡사하다. 석탈해의 쿠데타를 암시하는 기사다. 동성대왕은 무령왕 측으로부터 암살되었다.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암살했다는 것이 사기에는 동성대왕의 이칭 속에 암호화되어 들어있다.
위의 내용들은 백제의 동성대왕이 지금의 전북 익산 웅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천도를 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다. 당시에는 금강을 백제천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건설은 약 1년 반 만에 완공되고 천도한 지 1년 만에 암살당했다. 암살된 날짜도 정확히 10월 9일(서기 501년)이라고 나와 있다. 사기에는 12월로 나와 있다. 개별황자는 응신을 재 등재한 천지천황이고 동성왕이 가야계이므로 가야계인 응신이 뇌하는 것으로 꾸민 것이다.
익산에 지금도 왕궁리(王宮里)라는 지명이 우연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미륵산, 미륵사, 구중탑 등은 동성왕이 새로운 수도를 익산에 건설하면서 생긴 이름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대에 미륵사 같은 대형 가람이 당시 수도로 알려진 웅진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에 건립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궁을 지은 서쪽백성은 백제인들이고 절을 지은 동쪽백성은 신라의 소지왕이 보내준 신라기술자들로 판단된다. 동쪽백성이란 백제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백제가 그 당시에 문화적으로 열도보다 우위에 있었다 치더라도 표면 기사상으로는 인질을 매번 보낸 것으로 되어있는데 절도 백제대사, 궁도 백제대궁, 강 이름도 백제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황이 붕했는데 빈궁을 백제대빈이라고 하는 것은 위사를 쓰면서도 바로 이 인물이 백제 동성왕이니 그리 알라는 뜻으로 기술해놓은 것이다.
사기의 임류각은 위사
사기에는 이런 백제대궁을 임류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호화사치를 위한 연회장으로 심하게 폄하해서 옮겨놓았다. 동성왕을 가야계라고 심하게 폄하한 서기 무열기의 기사를 고스란히 옮기면서 한 풀 더 왜곡한 것이다. 사기보다 더 낯 뜨거울 정도로 심하게 폄하한 서기 무열기에도 임류각이라는 이름은 안나온다. 임류각은 사기 저자들이 지어낸 위사다. 또 이것은 서기 무열기 3년 11월조에는 전혀 달리 꾸며져 나온다.「대반실옥대련에게 조하여 신농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미마다.노.무라(水派邑)에 성상(城像)을 짓게 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기.노.에(城上)라 한다.」
대반실옥대련은 그의 증조부인 예진의 이칭인데 사실은 동성왕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파읍이 바로 백제대궁이 자리했던 지금의 전북 익산의 왕궁리로 판단된다. 성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고 성의 상을 짓게 했다는 뜻은 동성왕이 익산에 신수도를 건설하고 천도한 지 1년만에 암살당하여 수도로서 1년밖에는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한 말로 판단된다. 서명기의 동쪽백성이 여기서는 신농국의 장정으로 되어 있는데 시나노(信濃)는 원래 시나노(科野) 가야(科野)로서 아나가야의 고명으로 보면 역시 아시라(阿尸良) 신라(新羅)가 된다.
사기 동성기 말년기록은 서기 무열기를 옮긴 것
서기의 이면실사를 해독하여 무열천황이 동성대왕을 등재한 인물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보고 무열기를 옮긴 것이 사기 동성대왕 말년기록이다. 암살을 당한 것도 이런 폭군이니 당연하다는 듯이 합리화한 것이다. 무열기 4년 시세조에 나오는 국인이 함께 제거했다는 기사를 보고 암살자로 백가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는 무령왕의 쿠데타로 암살된 것이다.
서기에 동성대왕을 등재한 무열천황을 폄하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동성대왕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그에 대적했던 인물이 바로 기·기 편찬시의 천황의 직계조상(=무열기의 평군진조)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이 다 들어있는 것이 사서라는 것이다. 헤구리(平群)라는 성씨는 무내숙니의 후손으로 성씨록에 분명히 나온다. 헤구리쯔구(平群都久)가 헤구리(平群)와 쯔구(都久)로 갈라진 것이고 쯔구(木兎)도 마찬가지다.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구원에서 진사왕을 죽이고 아화(=아신)를 왕으로 추대했다던 장군들은 전부 무내숙니의 아들들로서 아신왕의 사촌들이고 그 중에 쯔구.노.스꾸네(木兎宿니)도 들어있다.
어떤 일인학자는 동성대왕을 등재한 이 서기 무열기의 기사를 보고 「무열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 동성왕의 나쁜 기록이 투영되어 무열천황의 기록이 나쁘게 기재되었다」라는 설도 있다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왕이 설사 나쁘다고 하더라도 서기저자들이 멀쩡한 자기네 천황기사에 왜 그렇게 옮겼을까하는 동기를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대장은 백제왕족
대장(大匠)인 서직현은 요즘으로 치면 건설본부장 정도 되는 인물인데 서씨(書氏)로서 왕인의 후손이다. 왕인은 귀수대왕을 위대한 학자로 꾸민 경우인데 그 신분과 연관된 성씨를 창씨하여 쓴 것이 바로 문씨와 서씨다. 왕인이 도왜한 시기로 되어있는 서기·고사기 응신기에 서수·문수의 조가 되었다고 나온다. 같은 후손인데 서기에는 서씨라 하고 고사기에는 문씨라고 했다. 백제왕족들이 동성대왕 지휘하에 있었다는 뜻이다.
구마나리는 세 곳
서기 웅략기 21년 3월조에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패했다고 듣고 구마나라를 문주왕에게 주고 그 나라를 구하여 일으켰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제국은 일족이 이미 망하여 어전에 모여 걱정한다 했지만 사실은 천황에 의지하여 그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했다(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다) 일본구기에 구마나리를 末多王에 주었다 한다. 아마 이는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짧은 기사에 구마나리가 셋이나 나온다. 흔히 구마나리라 하면 구마나리(熊津)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마나리가 무려 세 곳이나 된다. 본문에서 첫 번째 문주왕에게 주었다던 구마나리는 사기에 문주왕이 천도했다던 웅진(熊津)이 맞다. 두 번째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한 구마나리는 익산의 웅포다. 세 번째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라는 구마나리는 임나가 가라이므로 진해의 웅천이다. 열도어로는 구마나리(熊津), 구마나리(熊浦), 구마나리(熊川)인 것이다. 주었다고 하는 것은 위사지만 그 속에 이런 실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위의 기사에 이어 웅략기 23년 4월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백제 문근왕이 훙했다. 천왕은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여 불러들여 친히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시켰다. 그리하여 병기를 주고 축자국의 군사 5백인을 딸려 호위시켜 나라에 보냈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무령왕 출생설화대로라면 무령왕은 곤지왕의 형의 아들이니 동성대왕과 사촌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사기에는 동성대왕의 아들로 나온다. 사실은 서기도 실사와는 다르게 꾸몄기 때문에 틀리고 사기도 위사인 것이다.
동성대왕은 능도 익산에
'여지승람' 익산조에 말통대왕능이 익산에 있다고 나오는데 말통대왕이 백제의 동성대왕인 것을 학계에서는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마도(末通), 모도(牟都), 마다(末多/派/오/股/岐), 모도(本), 모대(牟大), 마도(薯童) 등은 전부 같은 이름이다. 위의 이름들은 전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다. 열도음으로 무쯔(牟都)라고 읽고 같은 음의 무쯔(六)도 쓰고 '이'와 '으'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무지(貴)까지 쓰고 있을 정도다. 서명천황의 빈궁을 설치한 위치를 보더라도 동성대왕의 능은 익산에 썼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 적절한 설을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여지승람 익산조에 末通大王陵이 익산에 있다 하였는데, 이 末通이 동성왕의 末多, 牟大, 牟都 등의 이름과 음이 통하므로 결국 말통대왕능은 동성왕능을 지칭한 것이고 이 능이 익산지역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또 익산에 있는 미륵산, 미륵사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 이 薯童(마동) 역시 末通과 함께 末多, 牟大, 牟都 등과 음이 통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이병도씨의 주장처럼 이 마동설화는 백제 무왕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성왕의 익산도읍을 설화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익산지역이 동성왕의 도읍지로 뚜렷이 부상되는데, 이렇다는 것이 이곳에는 미륵산, 미륵사 및 미륵탑은 물론 왕궁리 등 백제유적지가 집중되어 있고, 특히 익산 웅포에서 발견된 입점리고분 역시 동성왕능일 가능성이 높다.
고분이 발견된 웅포 역시 웅진과 마찬가지로 '곰나루'인데 웅략기 21년조에도 말다왕이 구마나리(구마나리)에 도읍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웅포의 고분 축조연대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이고 무령왕능보다 앞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렇다면 동성왕의 재위가 A.D. 479∼501이고, 무령왕의 바로 전대가 동성왕이므로 그 이상 정확히 일치할 수가 없으며 동성왕일 수밖에 없는 말통대왕의 능이 이곳 익산에 있다 하였으므로 시간과 함께 장소까지도 동성왕에게 무리 없이 연결된다. 그리고 이 웅포의 위치와 미륵사가 있는 곳과를 보면 동서로 벌려 있고, 또한 금강이 공주, 부여 등 백제 도읍지마다 거쳐 흘러 웅포를 지나 서해 바다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소개되어 있는 '서명기'의 백제천, 백제대궁, 백제대사를 보면 백제천 옆에 궁처를 정하고서 서쪽에는 궁을 짓고 동쪽에다는 절을 지었다 하여 이는 바로 익산의 웅포와 미륵사의 위치를 그대로 설명하는 것처럼 들어맞는다. 이를테면 백제천은 지금 금강을 말한 것이고, 이 금강유역의 궁처는 익산으로서 여기에서 서에 궁을 지었으므로 지금 웅포가 이에 해당하며, 동에 지은 절은 미륵사인 것이다. 또 여기에 구중탑을 세웠다 하였는데 이 탑 역시 지금 미륵사지에 남아 있는 미륵탑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은 원형을 잃어 몇 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규모로 보아서는 구중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서명이 이곳 백제궁에서 돌아가자 궁의 북쪽에 빈소를 마련하고서 이를 대빈이라 하였다 하여 동성왕능의 위치를 암시하였다.
입점리고분 무강왕릉설
무강왕의 武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武王과의 연결고리로도 쓰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武는 사서에서 대부분 大의 뜻으로 쓰이므로 武>大로 치환하고 康은 뜻이 같은 安으로 치환하면 武康>大安이 되어 위에서 나온 백제대사>대안사의 오호아나(大安)>오호아나(大阿那)와 같아 역시 가라출신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무강왕이라는 이름도 말을 돌려서 우회표현을 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大加羅王이라는 뜻이므로 동성대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입점리고분 출토유물이 구주 구마모도의 후나야마고분 및 이나리야마고분과 유물과 닮았다는 것은 후나야마고분이 가라왕 아라사등의 장자 예진별명의 능이고 이나리야마고분은 예진별명의 9세손 능이며 동성대왕은 바로 예진의 증손자이므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또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9호고분과 유물이 비슷하다는 것은 전남의 영산강유역도 원래는 가야영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익산 웅포 입점리 고분은 그것이 여지승람 익산조에도 나오는 말통대왕능인데 사정이 이러한데도 학자들이 이런 것을 몰라보는 것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①일본의 기·기가 백제사·가야사를 개작한 사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②기·기상의 천황이 백제·가야왕족을 등재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③일본 고대사서가 우리말 고어로 써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④사기는 우리 고대인들의 반도 밖의 활동사가 거의 전부 결락된 사서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사기나 유사만 주로 믿기 때문에 기·기를 아무리 읽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서를 제대로 해독해 내지 못하니 유물이 아무리 발굴되어도 잘못된 문헌기록 해석과 연결 지어 자꾸만 역사왜곡을 더 하게 되는 형국인 것이다.
시호분석
동성이란 시호에서 東은 '아침'이라는 뜻을 가지는 고어 '아즈마(東)'이고 城은 나라라는 뜻으로 國, 那, 羅와 대치해 쓰일 수 있는 말이며 아침이란 단어는 한자로는 朝, 新, 初 등 세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아즈마는 이 셋 중에서 新에 해당되는데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 신라(新羅)이므로 東城은 新羅와 같은 말이다. 동성대왕은 가야출신이었던 것이고 위의 서기 인용문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동성대왕은 서기에서 무열, 흠명, 서명 등 세 천황으로 등재되어 나오는데 무령왕으로 시작되는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으로 출발하는 아침을 상징하는 아스까(飛鳥) 직전의 새벽이라고 시호에 새벽을 뜻하는 '명(明)'자가 들어간 것이 둘이나 되는 것은 다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밝을 明'이란 글자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해(日)와 그 다음으로 밝은 달(月)이 같이 비추니 밝다는 뜻도 되겠지만 달이 지면서 해가 밝아오고 그 둘의 빛이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대, 즉 새벽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위와 같이 백제는 동성대왕 말년에 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이 있는데 가야사를 폐기처분한 고려인들은 가야출신 백제왕인 동성대왕의 기사를 왜곡 조작하면서 천도건도 절사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