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끝까지 흠 없이 산 인물로 신석구 목사가 있다. 그는 일제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고 광복후에는 공산주의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신석구는 1875년 충북 청주의 전통적인 유교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33세였을 때 친구로부터 복음을 들었다. 하지만 철저한 유교 교육을 받은 신석구는 그의 말을 거절하였다. 친구는 “자네가 예수를 아니 믿으려거든 죄가 없는가 생각해 보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 일세”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니 50여 가지 죄가 생각이 났다. 그제야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성경을 사서 읽게 되었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자신을 유학자로 생각한 그는 먼저 유교를 변명하였다. 유교 국가는 쇠퇴해 있으나 이것은 유교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유교 말씀대로 살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니 이것도 답이 되지 않았다. 스스로 물었다. “예수교는 세상이 다 버린 사람이 들어가도 새 사람이 되어 나오는데 유교는 어려서부터 배워도 새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유교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기독교에는 있다고 그는 보았다. 신석구는 1907년 7월 14일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얼마 후 세례를 받아 남 감리교 전도인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복음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의 갈등이 있었다. 확신 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산 기도를 떠났다. 산 기도를 통해 그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신석구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눈앞에 나타나며 주님의 옆구리에 흐르는 피가 내 머리에 떨어진 듯하여 나는 십자가 밑에 엎드린 것과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치오르던 죄 뭉치는 구름이 헐어지듯, 안개가 사라지듯, 아주 없어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넘쳤다.”
이것은 신석구의 성결 체험이다. 그는 죄 뭉치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이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성결한 삶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