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金 ?1455(세조1)
초명은 빈( ), 자는子和, 호는拙齋. 1411년(태종11)문과에 급제하고 1416년 (태종16) 문과 중시에 아원(亞元). 1434년(세종16)直殿으로 갑인자 주조(甲寅字鑄造)에 참여했다. 1477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조사(正朝使), 1451년(문종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김극일(金克一);
김관(金管)의 현손(玄孫)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서는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곱똥을 맛보았다. 전후 여모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 먹이매, 극일이 제사지내고 나머지를 먹이며 가축을 기르둣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생시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어서는 期年服을 입엇다. 天順 甲申年(1464)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청도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때부터 김해 김씨 삼현파 문중(청도군 화양면 백곡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계희(金係熙);
金順生의 아들이다. 자는晦叔, 호는退隱. 世宗乙卯(1435)에 生員探花郞, 辛酉(1441)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 검열에 들어갔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니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한강까지 나와서 송별하고 시로 읊으니 太虛亭 崔恒(뒤에 영의정)은 "청운의 뜻은 백운의 뜻을 빼앗지 못하더라",(靑雲未奪白蕓思) 집현전 校理 魯山李永瑞는 "어버이 떠나 벼슬 하는 이 몇 사람인가 마는(離親 仕宦知多少)강위의 가을 바람에 홀로 그대만을 보내네"(江山秋風獨送君)라 읊으니 모두가 조선명시다.
그때지은 퇴은정은 그의 손자金克儉, 증손金寬, 현손金庾信등이 모두 한람학사를 역임하여 세칭 한림정이라 부른다.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그 마을을 한람정이라고 칭하고 그 면을 한림면, 翰林亭驛, 한림중학교 등이 있다. 홍문관교리, 사헌부감찰, 경상도도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가 간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어버이 상을 당한 것 같았고 寶(계)를 세워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1462년(世祖8)吏曹參判으로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漢城判尹을 지냈으며, 1463년(世祖9)에 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김호인(金好仁);
1430(世宗12)1491(成宗22)金琢의 4대손 자는乃克 호는梅岩. 文宗更午(1450)에 문과하여 부사, 충주목사를 역임하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侍中公派 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김수광(金秀光);
김불비(金不比)의 아들이다. 文宗경오(1450)에 문과하여 사간원 헌남에 이르다. 등과시 三場末坐하여 왈 "三場壯元은 천하에 많으나, 삼장말좌는 천하에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새티문중(김천시 마암면 장암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자정(金自貞);
朝鮮成宗 때의文臣. 1453년(端宗1)문과에 급제하여, 1472년(성종3) 宣慰使로 충청·전라·경상도에 파견되었고, 1476년 承文院判校로 역시 선위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섬에 가서 삼포의 왜인을 刷還한 공을 치하했다. 1477년(성종 8) 再嫁禁止의 논의가 일어나자 예조참판 李克墩·한성부우윤 沈瀚등과 함께 幼弱한 과부인 경우에는 재가를 허락하자고 주장했고, 1481년(成宗12)盧思愼,姜希孟등과 함께 <여지승람>을 편찬했다. 1491년(성종22) 正朝使로, 1495년(연산군1)에는 正朝副使로 각각 명나라에 다녀와 工曹判書를 지냈다.
김적복(金積福);
김감(金鑑)의 7대손이다. 1454년(단종2) 문과에 급제하여 縣監을 지내고 요유문즁(평남 강동군 요유리)을 일으키다.
김극검(金克儉);(1439∼1499)
김계희(金係熙)의 손자다. 자는士廉, 호는淡軒,乖崖(괴애)다. 1459년(세조5)에生員,進士에 모두 일등. 같은해 문과에 오르고 翰林을 거쳐 1466년(세조12)에 文科重試에 壯元, 拔英試에 3등에 올랐다. 慶尙都事, 梁山, 咸安郡守로서 치적이 있고, 도승지, 홍문관 副提學, 황해·전라 觀察使, 안동 대도호부사 名宦이 되었고 사헌부 대사헌이다. 그가 죽자 벼슬이 이품에 이르렀으나 집도 없고 저축도 없다고 하여 나라에서 크게 부의를 하고 서울에서 고향인 김해까지 안장을 하니 그 마을을 지금도 觀察使촌이라 부른다. 史臣의 평론에 "극검은 性行이 淸簡하여 사림이 복종한다."하였다.
김귀(金龜)
사정공(司正公) 김이형(金利亨)의 아들이다. 1466년(세조 12)문과에 급제하여 翰林, 사헌부지평, 僉正을 지내고 세칭 곡목문중(창원시 동면 화목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만호(金萬戶);
(金寶文의딸).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앓자 하늘에 맹세하여, "만약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죽어 버리겠습니다."하더니, 아버지가 죽자 그 아우한테, "너는 살아서 어머님을 섬겨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를 섬기겠다."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1491년(성종 22)에 나라에 보고되어 집을 정묘하였다.
김일손(金馹孫);
1646(세조10)1498(연산군4). 金克一의 손자다. 자는季雲, 호는濯纓.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의 史草를 썼으며 전라도觀察使 李克墩의 비행을 直筆하고 헌납때 이극돈과 成俊이 새로 朋黨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金宗直이 쓴 <弔義祭文>을 史草에 실었는데 1498년(연신5)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柳子光·尹弼商·盧思愼등이 그 일을 燕山君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金馹孫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스승 金宗直을 닮아 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큐탄했다. 諡號는 文愍公이다. 청도의 자계서원 천안의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김대유(金大有);
1479(성종10)1551(명종6). 김일손의 조카다. 자는天佑, 호는 三足堂, 提學金駿孫의 아들. 무오사화로 숙부 일손이 사형을 당할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1) 풀려났다. 1519년(중종14) 賢良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칠원현감등을 역임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罷榜되자 사임하고 청도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청도의 紫溪書院에 祭享 되었다.. 저서:탁영연보
김유신(金庾信)또는 유신(有信);
김극금(金克儉)의 손자다. 鄭希良의 文人. 胎夢때 흥무대왕이 一童子를 보내어 같은 이름으로 지었고 후손들이 김유신이라 부른다. 자는興老, 호는洛園. 1510(중종5)에 進士를하고 1516년(중종11)에 문과 장원에 오르다.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교리에 올랐으나 자문점마(咨文點馬;외국에 왕래하는 사신을 점검하는 의무)로서 평안도 郭山에 이르렀다가 동헌에서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눌려 까무라쳤다.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이 그의 배를 동여매는 것 같았다. 옆 사람들이 칼로 그 실끈을 배면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 홀연히 밖에서 어떤 서생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鄭翰林은 그대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가 누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장난질인가"하였다. 서생은 郡守에게 청하여 대나무 통과 朱砂를 약간얻어, 종이 두장을 잘라서 그 위에 부적을 그려 하나는 대나무 통 바닥에 하나는 대나무 통 위에 얹어서 공중에 날려 보내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대나무 통속에서 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서 들리다가 차츰 사라져가고 有信은 즉시 끼어났다. 서생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살았지만 오던 길로 다시 가서는 안된다."하며 가짜 널을 만들어 '金有信의 널'이라 쓰게 하고 큰길을 따라 가게 하였다. 또 有信은 변복을 시켜 황해도 수안 산골짝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 有信은 살긴 하여도 마치 넋을 잃은 사람 같다가 3년 만에 죽었다. 그 뒤 서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서생은 鄭希良이고 有信은 新羅金庾信의 황생자이며 그 여자는 高句麗의 國母인 柳花夫人이라 불렀다. 그 후 김유신의 후손 또한 곤궁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 후 얼마가지 않아 宣祖 壬辰倭亂을 당하여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유리 산재 하였다.
김련광(金鍊光);
1524(명종19)1624(인조2)版圖判書公 金添劒의 8대손이다.자는彦精 호는松巖 1555(명종10)문과에 급제하여 여려직을 거쳐 창평군수가 되고 淮陽府使로 있을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인과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공은 성문앞에 정좌하여 적에게 참살당했다. 지식이 해박하여 詩文에능했으며 후일에 禮曺參判에 추증되고 開城의 崇節祀에 배향하고 있다
김경서(金景瑞)
1564(명종19-1624인조2)초명은 應瑞, 자는聖甫,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21) 감찰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평양 방위전에서 守灘將으로 大洞江을 건너는 적병을 막은 공으로 평안도 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 7,700의 병력으로 李如松의 明軍과 함께 平壤城을 탈환, 1594년(선조27) 경상도 방어사에 전직되었다. 이해 남한 일대에 도적이 횡행하자 都元帥 權慄의 명으로 이를소탕, 그 공으로 이듬해 경상도 兵馬節度使에 승진되었으며, 1618년(광해군10)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建州衛의 後金을 치기 위해 명나라의 援兵要請이 있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副元帥가 되어 元帥姜弘立과 함께 출전했다. 이듬해 深河地方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富車에서 패전한 뒤 姜弘立이 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몰래 敵情을 記錄하여 본국에 보내려 했으나 姜弘立의 고발에 의해 사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대고 시호는 襄毅公이다.
김완(金完);
1577(선조10)1635(인조13). 中祖 金鍊의 6대손이다. 자는子具.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방어사의 막하로 있다가 남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15년(광해군 7) 觀武才試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2) 昌城防禦使로 있을때 李适의 난을 만나 元帥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에서 반군을 격파, 振武功臣으로 鶴城君에 피봉되고 황해병사를 지냈다. 시호는 襄武公이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四君派門中(전남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덕승(金德承);
1595(선조28)1658(효종9)자는可久,호는少 ·巢睫·義禁府都事 盡善의 아들. 1617년(광해군 9) 문과어ㅔ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다. 經史와 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도 능통했으며, 漢學敎授를 겸하였다. 禮曹正郞·相禮등을 거쳐서 司僕寺正이 되었다. 서화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김예직(金禮直);
자는文伯, 임진왜란 때 白衣從軍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통제사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光海君이 仁穆大妃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仁祖反正후에 임금께 죄를 청하였으나 仁祖는 禮直을 매우 가상히여겨 오히려 상을 내렸다. 시호는 毅憲公이다.
김우항(金宇杭);
1649(인조27)1723(경종3). 金德承의 손자다. 자는濟仲, 호는甲峰. 1682년(숙종7) 문과에 급제, 1689(숙종15) 기사환국 뒤 관계를 떠났다. 그 후 1694년(숙종 20) 폐비 민씨가 復位하자 주로 侍講院에서 司書를 보다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713년(숙종39) 右議政을 역임, 1722년(경종2) 金一鏡의 私親追尊論에 반대하다가 辛壬士禍 때 화를 입었다. 시호는 忠靖公이다.
金華重;자는士雄, 호는眉泉. 1687(숙종7) 문과에 오르고 현감을 거쳤다. 수는88세로 세칭 김해김씨 미우리 문중(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21)? 자는士能, 호는檀園·西湖. 戶曹參判 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후 王世孫의 肖像畵를 그렸고, 1781(정조5) 御眞畵師로 正祖를 그렸다. 1795년(정조19) 新昌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고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父母恩重經>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諧謔·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그렸고, 당시의 화단에 고착된 무력한 중국 北畵樣式을 탈피, 대담하게 南畵樣式을 시도하여 신선핱 조형미를 완성하였다. 作品으로는:雙雉圖·群仙圖·神仙圖屛風 등
김제준(金濟俊);
1786(정조10)1839(헌종5).자는信明, 敎名은 아그나티우스, 金大建의 아버지. 충남 당진출신.1839년 己亥迫害때 아들을 마카오로 留學보냈다 하여 國事犯으로 체포되어 殉敎했다.
김대건(金大建);
1822(순조22)1846(헌종12).우리나라 최초의 神父. 세례명은 앙드레이고, 兒名은 再福이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1836년(헌종2) 프랑스神父 모방에게 영세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뽑혀 충남 내포에서 상경하여 譯官 劉進吉에게 中國語를 배운후, 모방神父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귀국하던 劉方濟(中國神父)를 따라 최방지거·최도마와 함께 마카오의 파리 外邦傳敎會에 가서 신학을 비롯한 프랑스어·중국어·리틴어 등을 배우다가 미카오의 민란때문에 마닐라로 피란하여 매스트르 神父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842년(헌종8) 수업을 끝마치고 6개월간 프랑스 함대제독 세실의 통역을 하다가 기해박해(:1829 헌종 5)이후 천주교도에게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故國에 밀입국하여 의주를 거쳐서 서울로 오다가 감시가 심하여 몽고로 갔다가 재입국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1845년(헌종 11) 다시 혼자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여 위축된 敎勢擴張에 진력하였다. 5개월 후에 프랑스 외방전교회 지원을 받기 위해 쪽배를 타고 상해에 가서 金家港神學校에서 한국인 최초의 神父職을 받고, 萬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1846년(헌종8) 5월에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登山地方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후 선교사와 심부들 ·교우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고 25세로 노량신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해 殉敎하였다. 1857년(철종 8) 敎皇廳에서 可可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다시 諡福式이 거행, 韓國 全聖職團 大主保로 정해지고,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福者位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