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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그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사이좋게 지내던 눈과 코가 사소한 일로 서로 삐쭉거리더니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코는 눈을 향해 “너는 쑥 들어가 볼품이 없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얼굴이 예쁜 것은 내가 오뚝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눈도 지지 않고 “뭐야? 내 눈이 볼품이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너 한번 당해볼래?”라고 말한 다음 감아버렸습니다. 결국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흐르는 피를 솜으로 틀어막은 코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냄새를 맡아 주었기 때문에 나쁜 것을 먹지 않아 건강하게 산 것도 모른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궁리하던 코는 대변을 쌈장처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았습니다. 볼 줄만 알았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눈은, 그것도 모른 채 대변으로 상추쌈을 싸 먹었습니다. 세계적인 동기 부여자요, “성취심리”라는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그 어떤 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있어 우리는 누구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감사드리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 지면을 통해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조차도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토니 에반스(Tony Evans) 목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책을 통해 목수의 연장들이 회의 시간에 나누는 대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회의의 참석한 공구들은 망치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화가 난 망치는 만약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면, 원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드라이버도 같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키가 크고 늘씬한 드라이버는 즉시 강단으로 나가더니 자신이 물러나야 할 것이 아니라, 평평한 곳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깊이 뚫지도 못하는 대패가 물러나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대패는 늙은 사포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곤 모든 나무를 거꾸로 문질러 마찰을 일으키는 사포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그때, 나사렛의 목수가 그날 작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도착했습니다. 작업복을 입은 그분은 망치와 드라이버와 대패와 사포를 이용해 원하는 가구를 만드셨습니다. 사실, 그 분은 가게에 있는 모든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때론 한가지 도구를 많이 사용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히 아끼시기 때문이 아니라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도구들도 필요한 때는 거리낌없이 그렇게 쓰십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인가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즉시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b)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삼하17:14)는 말씀은,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으십니다. 자만과 속임과 교활함과 배신과 죄 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의 배후에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역사 하십니다.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당시 다윗을 위한 모략을 베풀고 자리를 빠져 나온 후새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고 자신의 모략을 선택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요단강을 건너라고 전했습니다. 15-17절입니다.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 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더니”
후새와 당시 예루살렘 성안 밖에 숨어 은밀하게 다윗의 명을 수행하고 있던 다섯 사람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후새는 먼저, 다윗이 압살롬의 정세를 캐내도록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던 두 대제사장 사독(Zadok)과 아비아달(Abiathar)에게 아히도벨과 자신이 베풀었던 모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전술에 맞설 적절한 작전을 세울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또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된다면 즉각적인 추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날 밤 요단 동편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전갈을 보낼 경우를 대비하여 성밖에 숨어 있던 아들들에게 후새의 말을 전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비록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지만, 예루살렘과 압살롬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된 환경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음과 뜻은 거친 광야에서 노숙하고 있던 다윗과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주군(主君)으로 섬기고 있던 다윗을 위해서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신 것은, 이 세상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모진 고난과 핍박 속에 십자가를 지신 당신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라는 지적대로, 남녀노소와 인종과 빈부귀천과 직업을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b)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고까지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던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인생을 인도 구원을 위해 바쳤습니다. 자신의 문하생이 되겠다고 찾아온 미켈란젤로(Michelangrlo)에게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한 그의 스승은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누구를 위하여 쓰고 있습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영원한 주군이신 하나님입니까? 대제사장의 아들들인 요나단(Jonathan)과 아히마아스(Ahimaaz)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심어놓은 첩자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18-22절입니다.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도무지 알지 못할러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저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저희가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나이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쌔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여기서 “소년”(나아르 : nah'ar)은 “소년, 하인, 청년” 등의 뜻으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즉시 압살롬에게 보고한 것으로 볼 때 압살롬이 다윗의 은밀한 첩보활동(諜報活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풀어놓은 첩자(諜者)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제사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성 밖, “방랑자의 샘 또는 풍성한 샘”이라 불리는 에느로겔(En-rogel) 가에 있었습니다. 남달리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분이 다른 하층 계급의 계집종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첩자의 눈에 비쳐진 그들의 모습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윗의 정보원으로 확신한 소년은 즉시 그 사실을 압살롬에게 알렸습니다.
결국 잡히기 일보 직전에 놓인 그들은, 바후림(Bahurim)에 있는 한 사람의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한편,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수조(水槽)를 설치해 놓고 거기에 물을 길어다 저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건기 때에는 비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주인은 위급한 상황에 몰린 두 제사장을 급히 우물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의 아내는 재빨리 우물을 덮었습니다. 뚜껑 위에 자리를 깔고 곡식을 널어두었습니다. 수조 속에 사람이 숨어 든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위장했습니다. 곧바로 뒤쫓아 들어와 제사장들의 행방을 묻는 압살롬의 사람들에게, 침착하고 태연하게 다른 방향을 가르쳐 줌으로 추격을 따돌렸습니다.
강변이 안전해 진 것을 확인한 후에는 제사장들에게 서둘러 갈 길을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다윗 진영에 도착한 제사장들은 임박한 위험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이미 요단강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돌발적인 공격을 감행할 경우 요단강을 보호막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제사장의 간첩행위와 바후림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의 거짓말을 통해 다윗을 안전한 곳까지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과 상황과 사건은 물론 사람들까지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 곧 당신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합력 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선을 이루도록 역사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27, 쉬운 성경)라는 말씀대로,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구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약속을 따라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고 계십니다.
간섭하시고 친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우연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되는 우연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모든 만물이 서로 합력 하여 선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는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합력 하여 당신이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뜻과 계획과 장래와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압살롬이 후새를 찾지 않았었다면, 후새가 다윗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지 않았었다면, 압살롬이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신속하게 다윗을 추적하여 잡아 죽였었다면, 다윗이 심어두었던 사람들과 중간에 예고 없이 끼어 든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부의 죽음을 각오한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다윗은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문제를 풀어가기가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구원이 “....다른 데로 말미암아”(에4:14a) 일어나도록 역사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불사하고 다윗에게 충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하는 그들을 당신의 구원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섭리하셨습니다. 합력 해서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쓰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선택된 통로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적 소명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느냐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기회를 신속하게 잡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비록 악한 방식이긴 했지만, 아히도벨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신속하게 움직여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신중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던 후새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빨리 움직였습니다. 물론 그는 신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의 특징은 억제된 서두름과 냉철한 민첩함입니다. 또한 예고 없이 찾아온 모든 상황과 사건은 하나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힘겨운 일을 만났을 때, 나타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십시오. 죽기까지 충성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선한 도구로도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주군인 다윗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동안, 당대의 최고 전략가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3절입니다.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당시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16:23a)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명성 또한 대단했습니다. 자신의 모략이 무시됨과 동시에 압살롬 정권도 곧 끝나게 될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사태를 파악하고 장래를 예견하는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의 모략이 선택되지 못하자 그는 서글픈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장차 정권을 회복한 다윗에게 당할 자신의 비참한 최후까지 생각하게 되자 수치심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55:12-14)라는 말씀에 의하면, 다윗은 그를 가슴으로 안을 수 있고, 항상 평안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거리를 두지 않고 최고의 우정까지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친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환대했습니다. 신임했습니다.
그의 조언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만큼 소중히 여겼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피차 완전히 파악하고 있을 만큼 절친했던 그와 가장 중요하고 비밀스런 모든 것을 의논하고 결정했습니다. 절기나 대규모로 거행하는 국가적인 행사에 항상 대동(帶同)했으며,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도 동행시킬 만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가 아들과 반역을 주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너무도 각별했던 그에게 전후사정을 들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피신을 늦추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어떤 아들보다 사랑하는 압살롬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부랴부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급히 왕궁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26:28),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삼상18:3)라는 말씀에 따르면, 이런 우정은 언약의 식사를 나누거나 둘만 아는 약조를 맺음으로써 시작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였던 그는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에 관한 한 치명적인 판단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왕국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실 그는 기회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빛나고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다윗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이 빛을 잃는 것처럼 보이자 즉시 준수한 용모와 야심과 신비한 매력까지 갖춘 압살롬에게 붙었습니다. 새로운 바람과 함께 정치 판도가 바뀌는 순간, 재빨리 배를 갈아탔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들에게 돌리기 위해서 다윗을 험담하고 인격을 깎아 내렸습니다. 자신을 다윗보다 더 공의로운 사람으로 가장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그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와 분노는 분명 그의 배신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허물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의 모사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밧세바와 관련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다윗에게 충성하고 있는 동안, 분노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 분노가 그의 지혜를 삼켜버리자,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자를 왕으로 세울 만큼 분별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변절한 그의 지혜로운 모략은 반역자로 위장한 후새와 다른 몇 명의 충성과 용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過信)하는 어리석은 자의 말로는 비참한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를 버리는 패륜(悖倫)을 저지른 압살롬을 멸망으로 이끄는 악한 도구로 쓰임 받고 말았습니다. 지혜가 모자란 모델이 아니라면, 자신이 입은 옷과 같은 색을 배경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흰옷을 입었을 때는 짙은 색을 배경으로 삼아야 옷도 살고 모델 자신도 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극히 유한한 인간이 세상 것을 배경으로 삼으면, 자기 자신은 물론 인생까지도 망치고 죽이는 짓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합니다. 결코 그런 자신을 배경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참되고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살게 해 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배경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막혀버린 홍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경제적으로 풀 한 포기 없는 신 광야와 같은 곳에 거하고 있다면, 건강이 물 한 방울 없는 르비딤과 같은 처지라면, 지금이야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배경으로 삼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기 위하여 그와 같은 환경을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당신을 자신의 유일한 배경으로 삼은 사람들을 도구 삼아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 한 분만 자신의 유일한 배경으로 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세계적인 외과 의사인 하워드 켈리(Howard Atwood. Kelly)는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날 밤 일기에 “주님! 내 자신과 나의 시간과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오니 나를 정결케 하시고, 제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어떠한 성공이라도 제게 허락하지 마옵소서”라고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빈민굴에서 생활하며 전도와 사회 사업, 농민운동에 헌신했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스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 폐결핵을 앓던 그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판단한 친척들과 교역자들이 찾아와 고별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 날 밤, 그는 밤새도록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번민했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야 남자답게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인류의 죄와 허물을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이라면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스스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틀림없이 섬길 자를 찾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기도 그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음날, 가재 도구를 정리한 그는 몇 가지 살림만 가지고 빈민굴을 찾아갔습니다. 창녀들을 전도하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떼를 써 받아낸 돈으로 술을 먹고 도박을 즐겼습니다. 창녀들과 음란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막역(莫逆)한 친구는 화를 내며 “도요히꼬! 어찌 이런 것을 예배와 선교라 할 수 있겠는가? 자네야말로 위선자이며 악을 조장하는 사람이 아닌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저들이 나를 열 번 속이고 나를 칼로 쳐죽인다 해도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네. 예수께서는 악에 의해 심장에 상처를 입었으며 찔려 죽었지만 그 대신 사람들 속에 작은 사랑의 씨앗이 심겨졌다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는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머물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과 믿음의 싹이 자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죄로 인해 영원히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한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모진 고난과 핍박 속에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배경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생각과 뜻과 계획과 목표는 물론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두운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