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강남 지역은 한나라 때만 해도 낙후된 변방이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개발되어 이제는 중국 최대의 곡창 지대가 되어 있었다. 강남을 차지한 후, 수나라는 세금을 낮추었는데도 국고가 넘쳐서 곡물 창고를 새로 지을 만큼 풍족한 세입을 확보했다. 또한 항복한 진나라의 귀족들은 기존의 화북 군벌들에 맞설 세력으로 활용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수문제는 중국 역사상 한가지 획기적인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 바로 과거제의 실시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구품중정법을 대체한 과거제는 587년에 처음 실시되었는데, 아직은 귀족제를 무너뜨릴 만한 힘을 가질 수 없었으나 뿌리 깊은 문벌귀족의 기득권에 맞서 왕권을 강화할 유용한 수단으로 수나라 멸망 후에도 오랫동안 중국과 한국에서 계승 발전된다.
수문제는 또한 애써 이룩한 통일제국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 이전까지의 군주들과는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먼저 사치를 엄격히 금지하고, 솔선해서 반찬 하나뿐인 식사를 하며 낡은 옷을 그대로 입었다. 궁녀들이 화장을 하거나 비단옷을 입는 것도 단속했다고 한다. 이런 조치는 단지 위선에 불과할 수도 있다. 특히 파괴된 사찰을 복원하며 새로 4천 곳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비용을 쏟아 붓기도 했음을 보면(이는 불교의 힘으로 황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더욱 그런 의심이 든다. 하지만 어쨌든 이는 정권을 잡았다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를 거듭했던 위진남북조의 군주들에 비하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엄격한 법 집행 원칙을 세웠다. 불법을 저질렀으면 황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을 모독한 사람이라도 법조문에 규정된 이상으로 처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582년에 편찬한 개황률은 중앙관제를 삼성육부제로 정비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후일 중세 동아시아의 법률적 틀인 당률에 뼈대를 제공했다. 균전제, 직전법, 부병제 등도 수문제가 정비하여 당나라 때 활용된 제도들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납세 인구가 589년의 400만 호에서 606년에는 900만 호로 급증했다.
외치에서는 돌궐과 고구려가 문제였는데, 수문제는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된 일을 이용하여 두 돌궐 사이를 이간질하고 싸움 붙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는 달랐다. 수문제는 고구려의 복속을 요구하며 “요수가 장강(양자강)보다 넓다고 생각하느냐? 고구려가 진나라보다 인구가 많은 줄 아느냐?”며 진나라도 가볍게 무찌른 수나라에게 대들지 말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오히려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자,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패전의 치욕을 입고 말았다.
‘부부 공동통치’의 말로
그런데 수문제에게는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정치를 독고황후와 함께 의논하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여 매사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 부부를 ‘두 분의 성인(二聖)’이라 부르고, 독고황후가 죽자 “묘선보살의 현신이셨다”는 극존칭이 바쳐지기도 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여성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일은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후일 성리학자들이 이 일을 두고 수문제를 형편없는 군주로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고황후는 실제로 유능하고 헌신적인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사치를 금지하고 법령을 엄격히 세우는 등 수문제의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그녀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한 여성으로서 수문제를 독점하려고도 했다. 통일제국의 황제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문제에게는 후궁이 없었고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독고황후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이는 사치 금지책의 일환이기도 했겠지만 독고황후의 질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한 번은 수문제가 몰래 한 여인을 궁중에 들이자 황후가 이를 알고 수문제가 없는 틈에 그녀를 죽여 버렸다. 그 사실을 안 수문제는 노하여 홀로 말을 잡아타고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고 한다. 신하들이 뒤쫓아갔더니 “나는 천하를 다 가졌지만, 자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통탄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궁궐로 돌아온 수문제에게 황후가 사과함으로써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사의 기록이고, 야사에서는 황후에게 혼날 것이 겁난 나머지 말을 타고 달아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독고황후가 현명하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완벽한 인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식 절차를 무시하고 황후의 의견대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결정은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최대 실수는 수문제의 후계자 선택이었다. 그녀는 맏아들로 태자에 봉해진 양용(楊勇)보다 둘째 아들인 진왕(晋王) 양광(楊廣)을 더 사랑했는데, 태자가 그녀가 싫어하는 축첩을 했기에 더욱 마음이 멀어졌다. 이를 알고 있었던 양광은 어머니 눈앞에서는 늘 온유하고 검소한 체 연극을 했다. 사실은 태자 이상으로 많은 여인을 거느렸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어쩌다 후실들이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죽여버리는 식으로 비밀을 지켰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신하들도 양광 편에 붙어 태자를 참소하고 양광을 치켜세우는 일을 함으로써 수문제 부부는 태자를 갈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600년에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새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뒷날의 수양제(隋煬帝)다. 당시 수문제는 점술가를 불러 수양제의 운수를 물었는데, 미리 수양제와 선이 닿아 있던 점술가는 “희대의 명군이 되실 것”이라고 둘러댔다. 젊은 시절 관상가의 헛된 말 때문에 목숨을 건진 그가 말년에는 점술가의 말 때문에 자신과 나라를 망쳤달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