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上垈), 아래대(下垈), 남북촌(南北村)- 옛 서울의 모습
서울에 산지 어언 40년이 훨씬 넘어 서울사람이 다 된 듯하지만 정작 서울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이 없다. 우연히 옛글을 읽다가 남들은 잘 모르겠다 싶은 서울의 편린을 알게 되니, 지식을 자랑하고픈 뒷북(양철 북)이 그냥 있을 수 있나? 읽었던 옛글을 윤색도 하고 내가 알았던 것도 조금 가미하여 소개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성계가 고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과 선배 최영(崔瑩)의 명을 받들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혁명을 일으켜 고려왕조를 뒤엎은 후에 송도(松都)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하여 서울이 생겼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에, 그는 정도전(鄭道傳), 하윤(河崙), 조준(趙浚), 무학(無學) 등과 함께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 아래의 신도(新都)터에 궁궐을 짓는 역사(役事)를 시작했다가 폐기한 일도 있고, 서울 안에서도 백제의 고도였던 아차산(峨嵯山) 아래 넓은 광야(지금의 어린이대공원과 수도여대 부근)며, 연희동 잔다리(지금의 연세대학교 일대)를 물색해 보다가 결국 삼각산 아래 백악을 주봉으로 하고 남향판으로 경복궁을 앉혔다.
이리하여 정해진 서울은, 동쪽의 낙산(동숭동 뒷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고, 남으로 한강을 건너서 관악산을 바라보며 강 안쪽으로 명미한 남산으로 안산(案山)을 이룬, 아름다운 신도시로 탄생하게 되었다.
조선조의 시조시인 김수장(金壽長)은 서울을 이렇게 노래했다.
도선(道詵)이 비봉(碑峯)에 올라 국도를 정하올새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성궐을 이뤘는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와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는 귀(貴)격으로 벌여있고,
전대하(前帶河) 한강수는 여천지근원(與天地根源)이라,
태묘(太廟: 종묘)는 가좌(可左)하고 사단(社壇: 사직)은 가우(可右)로다.
삼봉(三峰)이 수려하니 인걸호준(人傑豪俊)하고
와우산(臥牛山) 유덕하니 민식(民食)이 풍족이라.
성덕신승(聖德神承)하사 억만년지 무강(無疆) 이샸다.
하늘이 주시고 뜻을 받들어 만만세를 누리소서.
김수장은 서울을 예찬한 다른 시도 지었다.
진국명산(鎭國名山) 만장봉(萬丈峰)이 청천삭산(靑天削山) 금부용(金芙蓉)이라,
거벽(巨壁)은 흘립(屹立)하여 북주(北主) 삼각(三角)이요,
기암(奇岩)은 두기(斗起)하여 남안(南案) 잠두(蠶頭)로다.
좌룡(左龍) 낙산(駱山), 우호(右虎) 인왕(仁旺),
서색(瑞色)은 반공응상궐(蟠空凝象闕)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미재(美哉)라!
아동산하지고(我東山河之固)여,
성대의관태평문물(聖代衣冠太平文物)이 만만세지(萬萬世之) 금탕(金湯)이로다.
.................
서울 장안이 이렇게 배포되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제각기 제 부류대로 주거지를 마련했다. 조선은 갑오개혁 때까지 봉건제도를 답습해 왔으니, 군주 이외에 개국공신 등 양반계급이 있고, 양반 중에도 문무로 나뉘어 동반, 서반의 차이가 있었다. 무인으로 출세하여 무력으로 왕국을 건설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때 무인정권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며, 무인들의 힘을 경계하였기에 개국 초부터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제도를 써서 무인들을 비천시하는 정책을 폈기에 문관과 무관은 서로 그 계급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인들은 같은 계급의 문관들에게 스스로 “소인”이라고 제 몸을 낮추는 용어를 쓰게 했다.
이리하여 서울 안에는 양반 중에도 문관과 무관의 계급이 있었고 다음에는 중인계급과 그 아래 상민의 계급이 있었으며, 맨 하층으로 노비와 천민의 계급이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로 문벌을 가리는 상하 귀천의 계급을 없앤다고 했고, 그 후 백년이 흘러서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도 극히 일부에는 조상이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어디에 속했는지, 양반인지 상놈인지를 따지는 풍습이 남아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찌되었건, 조선시대의 초기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주거를 정하는데 서울 종로거리를 북과 남으로 갈라서, 왕궁과 가까운 북악 아래쪽을 “북촌”이라 해서 문관의 고관과 세도재상들이 살았으니, 교동(校洞), 안동(安洞), 전동(典洞), 전동(磚洞), 송현동(松峴洞), 간동(諫洞), 화동(花洞), 승동(勝洞), 죽동(竹洞), 팔판동(八判洞), 인사동(仁寺洞), 낙원동(樂園洞) 일대가 다 북촌에 속한다.
종로의 남쪽을 한계로 남산(南山)을 배경으로 한 장교동(長橋洞), 낙동(駱洞), 명동(明洞) 부근을 남촌이라 하여 무관 대장들이 살았다. 소위 장교장신댁(長橋將臣宅)이니, 낙동장신댁(駱洞將臣宅)이니 하던 곳이 이곳인데, 낙동장신은 흥선대원군 시대에 범같은 장수로 이름이 높았던 이경하를 말하고 낙동(駱洞)은 지금의 명동이며, 이경하의 집은 지금의 중국대사관이다.
서울 성안의 서북편 지역을 “우대(上垈)”라 불렀는데, 인왕산이 가까운 쪽인, 옥인동(玉人洞,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 사직동 일대를 말한다. 이조서리(吏曹書吏), 병조서리, 호조서리, 공조서리 들이 살았다. 이 서리(書吏)들은 대개 세습직 이었는데, 모두 다 글씨 잘 쓰고 글도 잘했으며, 행정도 이들의 손으로 운영되었다. 말하자면, 서울의 주인공들인 셈인데 시조시인으로 이름 높은 안민영(安玟英), 김수장(金壽長), 송석원(松石園)의 천씨(千氏) 4형제들이 다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의 딸과 질녀들은 모두 다 왕실의 후궁으로 들어갔고, 대원군이 집정한 이후에 등용되어 국정에 참여한 천(千), 하(河), 장(張), 안(安)의 4사람도 이곳 출신이다.
서울 성벽 안쪽, 동대문과 광희문(光熙門) 쪽을 “아래대(下垈)”라 했는데 주로 군총(軍摠)인 군인들이 살았다. “우대”의 글 잘하는 서리(書吏)와, “아래대”의 활을 든 군인은 좋은 대조거리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진솔하고, 씩씩하고, 기운찼다. 그러나 문기(文氣)가 없어 무식했다. 저 유명한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선혜청(宣惠聽)에서 모래를 섞은 쌀을 급료(요차쌀 이라 했음)로 주다가 이것이 병사들의 화를 돋우는 계기가 되어 병사들이 세도(勢道) 민겸호를 죽이고 궁중에까지 뛰어 들어가서 한규직, 이경직을 어전에서 때려죽이고 민비로 하여금 충주로 도피케 했던 그 사건의 본거지가 이 “아래대”와 광희문 밖의 왕십리였다.
종로 4가 배고개(梨峴)의 북편인 원남동(苑南洞)을 “통안(統안)”이라 했다. 대개 왕의 연(輦), 즉 왕이 타는 수레를 호위하는 무예청(武藝廳)과 그의 수반인 무예통장(武藝統長)이 살았기 때문에 통안, 또는 통안병문이라고 했다.
중인들의 거주지는 광교천변(廣橋川邊)이나, 다방골(다동), 수하동, 구리개(을지로 입구)였다. 중인은 대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다. 글도 잘하고 이재(理財)에도 밝았으며, 역관(譯官: 외국어 전문가), 의사, 관상감(觀象監), 도서서(圖書署), 건재약국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개국공신이 되지 못했기에 양반이 되지 못했을 뿐, 세습적으로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을 연구하고 통변(通辯)하였다. 이 중에도 제1의 지위에 있는 집안이 한어(漢語)역관이다. 중국에 사신이 갈 때는 반드시 따라갔고, 국난이 있을 때는 임금의 어전에서 중국 사신과 임금 사이에서 통변을 하니, 어전통사(御前通事)라 해서 그 대우가 대단했다. 그드은 다 일류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세습적으로 통사의 지위는 주되 양반으로는 대우하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자연 이재(理財)에 힘을 기울였다.
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부호(富豪) 변승업(卞承業)은 실존인물로서 당시 조선 제1의 갑부였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음죽(李蔭竹), 이덕유(李德裕) 등도 다 관철동 부근에 살던 실존 인물이었다.
이같이 하여 서울에는 남촌, 북촌, 중촌, 우대, 아래대, 종로상가인 육주비전(六矣廛)이 있었고, 경복궁 앞 넓은 길 좌우에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조(六曹) 아문(衙門)이 왕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벌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