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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無比) 큰스님 妙 法 蓮 華 經 문수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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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게송으로 거듭 밝히는 그런 대목이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부루나가 수기 받는 대목을 설사 못 들었을지라도 게송이 중송으로 거듭 밝히는 대목이기 때문에 여기서 들으면 다시 정리가 되고, 못 들은 사람은 듣는 기회가 되지요. 경전의 짜임이 아주 잘 되어 있다, 라고 보지요.
그 다음에 위에 나온 오백성문이라든지, 천이백 명이라든지 하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문장이지만 오백 명이나 천이백 제자는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니는 그런 대중들이지요. 그 중에서 또 추리라면 오백 명의 제자가 되겠고 거기서 또 추린다면 대개 십대제자, 이런 식으로 추려집니다.
법화경은 상당히 후대에 경전이 결집되고, 또 부처님의 교화하는 시기의 전반에서 볼 때 상당히 후대에다 초점을 맞추었지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의 최후의 8년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결집이 된 그런 경전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경중(輕重)의 문제도 거의 전부다 타당성 있게, 공평하게 정리가 된 그런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경중(輕重)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공부라든지 인격이랄까 수행력 이런 것은 얼마든지 우리들이 생각하고 논할 수 있는 거거든요.
법화경에는 경중이라든가 선후라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또 은근히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리불이 대표로 수기를 받았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자면 제자 중에서도 상수제자라는 거지요. 그 다음에 목건련 이렇게 사대 제자가 나왔지요.
맨 처음에 사리불이 나왔고 그 다음에 사대제자가 나왔고 그리고 그 후에 다른 제자들이 쭉 나오는데 여기 수기 받는 순서를 이렇게 보면 그런 것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보면 천이백 명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오백 명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기도 하는 그런 구절이 있어요.
그래서 이 대목이 [오백제자수기품]으로 그렇게 명칭이 되어 있어요.
우선은 부루나가 수기 받은 내용을 거듭 언급하는 대목이지요.
이시세존(爾時世尊)이 욕중선차의(欲重宣此義)하사 이설게언(而說偈言)하니라, 그때 세존이 이 뜻을 거듭 펴고자 하사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제비구체청(諸比丘諦聽) 불자소행도(佛子所行道)하라, 여러 비구들이여, 불자들이 행하는 바 도를 자세히 들으라.
여기서 비구라고 하는 말은 소견이 좀 없는 사람들, 좀 막힌 사람,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곁에 있는 사람, 그리고 공부를 누구보다도 마음을 써서 해야 할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출가한 사람들이라는 그런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소승 성인들을 말합니다. 출가해서 어떤 크기라 할까, 어떤 제도, 그런데 사로잡혀 있는 소승불교가 한 삼사백년 동안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그런 상태에서 불교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소견 좁게 불교라고 하면서 살아왔지요. 그런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지칭하는 그런 뜻이 비구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 좀 잘 들어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이지요.
선학방편고(善學方便故)로 불가득사의(不可得思議)니, 방편을 잘 배운 까닭으로 가히 생각할 수가 없느니,
방편이 잘 된 그 경지, 불자들이 행한 그런 어떤 경지, 깨달음의 상태, 그들의 높은 지혜, 방편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거지요.
지중락소법(知衆樂小法)으로 이외어대지(而畏於大智)일새, 대중들이 소법 즐겨함을 아는 까닭에 큰 지혜를 두려워 함을 알아,
작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큰 것을 두려워하거든요. 사실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큰 지혜, 그런 지혜를 우리가 목표로 해야할텐데 대개 그건 우리 일이 아니다, 우리로써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고 아예 도외시한다든가 감히 어떻게 내가 그런 것을 넘볼 수 있나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 것을 잘 안다는 거지요. 그럼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맞는 법을 설해야지요. 그게 아니라고 밀어 붙여서도 안 되고, 그 상태의 마음, 근기를 잘 살려주면서 차츰차츰 성숙시켜 가는 그게 중요하다는 거지요.
불교를 곧이곧대로 배운 사람들은 처음에 불교에 입문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편에 끄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정없이 무시해 버려 가지고 처음 입문한 사람들의 신심을 떨어지게 하는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해요. 물론 언젠가 버려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차츰차츰 성숙시켜 끌어올려서 저절로 버려지도록 이렇게 만들어 주어야 바람직한 교화방법이거든요.
여기는 그런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을 상대로 말합니다.
시고제보살(是故諸菩薩)이 작성문연각(作聲聞緣覺)하사, 이러한 까닭에 제 보살이 성문이나 연각을 지어,
보살이 성문 연각의 모습을 한다 이거에요. 일불승에서 보면 성문 연각 보살, 이게 다 삼승에 해당되는 거지요. 말하자면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해서 삼승을 모아서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삼귀일이 법화경의 큰 목적인데 거기서 또 우리가 차별을 두고 이야기 하자면, 성문이 제일 낮고 연각이 그 다음이고, 보살이 그 다음이에요. 그 중에서 보살이 제일 높지요. 이걸 우리가 다 뛰어넘는다면 뭐가 있는가 하면 일불승(一佛乘), 하나의 불승, 부처의 경지,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표이고 부처의 본마음이라는 거지요. 부처의 본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 법화경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사실 내용은 보살이면서, 겉으로는 성문, 연각의 모습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문이나 연각, 보살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은 성문(聲問)은 소리 성(聲), 들을 문(問)자라,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듣고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 가는 그런 모습이지요, 말하자면 현재 상태의 우리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걸 이제 성문이라 그래요.
성문에 해당되는 그 당시 사람들은 출가한 비구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말씀 소리에 귀가 솔깃해 가지고 그 이야기만 내내 듣고, 말하자면 거기서 하나씩 깨달아 가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게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제일 근기가 낮은 사람이지요.
연각(緣覺)은 인연 연(緣)자, 깨달을 각(覺)자라, 세상의 돌아가는 인연들을 스스로 관찰하여 가지고 깨달아 가는 사람, 그래서 연각(緣覺)입니다. 춘하추동 사철이 바뀐다든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어떻다든지, 뭐 현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세계의 정세가 어떻다든지 하는 것을 가만히 면밀히 이렇게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잘 관찰해 보면 그것도 이치가 다 있거든요. 뭐든 이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든지 그 이유와 인연을 잘 관찰해서 거기서 깨닫는 사람이,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깨닫는 사람보다 훨씬 근기가 높고 힘이 강합니다. 자력으로 깨달은 것이니까요.
남의 소리를 듣고 아는 것하고, 자기 스스로 깨달은 것하고는 상당한 힘의 차이가 있지요. 그래서 성문이 제일 낮고 그 다음 연각이지요.
제가 늘 그러지요. 우리 보살님들 맨날 절에 다니면서 불공하고 설법을 그렇게 많이 듣습니다만, 혼자 사회생활 속에서 법당에 한 번 올 일이 없고 설법에 참여할 시간이 없다고 해도, 그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다보면 그 속에서 또 깨닫는 것이 많거든요.
상당히 느끼는 게 많지요. 인생이 뭐고, 세상이 뭐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떻다는 것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정말 깨닫는 게 많아요. 그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속이 툭 트여 있다는 그런 말씀을 내가 종종 드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실지로 대해보면 그렇거든요.
그 다음, 보살은 이제 그도 저도 다 뛰어넘었지요. 누구에게 배우거나, 세상의 이치를 관찰하여 깨닫고 하는 이런 것은 다 졸업을 했고, 몸소 보살행을 실천하는 거지요.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이게 이제 이 사람의 관심사이지요. 무엇을 알려고 하고 깨닫고자 하는 이런 것은 이미 다 뛰어넘은 사람입니다. 보살행을 먼저 실천하는 그런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렇게 봅니다. 셋 중에서는 최고의 경지이지요.
보살이 성문, 연각으로 자기의 내용보다는 훨씬 못한 모습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보살로서 성문이나 연각의 모습을 지어보이고는
이무수방편(以無數方便)으로 화제중생류(化諸衆生類)하대, 무수한 방편으로서 여러 중생의 종류를 교화하되
어떤 사람은 이 대목을 해석하기를, 성문이나 연각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사실은 속이 보살이다, 사실 그렇듯이 우리도 중생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속에는 부처일지 모른다, 모르는 게 아니라 사실 속은 부처이고 겉으로만 그저 중생일 뿐이다, 이렇게까지 비약적인 해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자설시성문(自說是聲聞)이라 거불도심원(去佛道甚遠)이라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성문이라 하고, 불도에 가기가 심히 멀다고 하고.
제일 못난 제자라는 거지요. 불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이지요. 내 이 못난 입장에서 부처의 경지에 가려면 심히 멀다, 우정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하고 어른이 모일 때, 어른의 위치를 다 묻어 둬 버리고 어린아이들의 수준에 맞도록 같이 놀아주는 거지요. 아이구, 나는 어른들하고 못 놀아. 나는 너희들하고 놀기 딱 좋아, 하고 아이들에게 맞추어 놀아 주는 거지요.
도탈무량중(度脫無量衆)하야 개실득성취(皆悉得成就)하며,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고 다 성취를 얻게 한다.
문제해결을 해 준다는 거지요.
수소욕해태(雖小欲懈怠)라도 점당령작불(漸當令作佛)하며, 비록 중생들이 욕심이 적어서 게으를지라도 점점 마땅히 부처를 짓도록 하며
욕심이 적다는 말은 여기에서 부처될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개 그렇지요. 부처될 욕심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저 우선 당면한 문제나 해결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좀 하고, 이런 저런 신심 좀 키우고 그런 정도이지, 아이고, 내가 석가모니 같은 그런 아주 역사 속에 남는 큰 성인이 되어야겠다, 하고 거기까지 꿈꾸는 사람들은 사실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소욕이면서 해태하다 이거지요. 욕심이 적고 해태한 사람에게도 점점 마땅히 부처를 짓도록 한다는 거지요. 그런 사람도 점점 근기를 성숙시켜 가지고 부처가 되도록 한다는 거지요.
대개 크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처음부터 목표를 크게 잡지는 않았더라고요. 전기(傳記)나 취재한 내용들을 가만히 보면 일단은 자기 바로 앞에 있는 거, 눈에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요. 그래 놓고는 거기까지 열심히 가는 겁니다. 가고 보니까 좀 더 가고 싶고, 좀 더 가고 싶고... 이렇게 해서 크게 성공하는 예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여기는 그런 보통사람들의 마음씨, 속성에 맞추어 가지고 점당령작불(漸當令作佛), 점점 그리고는 꼭, 당연히 끝에 가서는 마땅히 부처의 경지를 이루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부분은 불교에서 잘 쓰는 말이에요. 내비보살(內秘菩薩) 외현성문(外現聲聞), 이렇게 넉자씩 넉자씩 해서 씁니다.
내비보살행(內秘菩薩行)에서 행(行) 자 빼고, 외현시성문(外現是聲聞)에서 시(是) 자 빼서 내비보살(內秘菩薩) 회현성문(外現聲聞), 이렇게 넉자씩 넉자씩 해서 쓰는 말이거든요.
내비보살행(內秘菩薩行)하고 외현시성문(外現是聲聞)이라, 안으로는 보살을 비장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성문의 모습을 나타낸다.
비밀리에 지니고 있는 것에 비(秘)자를 쓰지요. 그러면서 밖으로는 성문의 모습을 나타내는 거지요.
뭐 이 자리에도 안으로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누가 모르지요. 겉으로는 이렇게 와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부처님이 와 계시는지, 관세음보살님이 와 계시는지 알 턱이 없는 거지요. 내비보살(內秘菩薩) 회현성문(外現聲聞),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또 반대로 말하기도 해요, 겉은 보살의 모습을 하고 안으로는 아수라인가 하는 그런 심한 표현도 있다고요.
‘내비수라 외현보살’인가 하는 그런 말도 있긴 있어요.
소욕염생사(少欲厭生死)하대 실자정불토(實自淨佛土)하며, 욕심이 적어서 생사를 싫어하되, 그래서 실로 불토를 청정히 한다.
이 말은, 욕심이 적다는 말은 아까도 그랬지만, 부처가 되어가지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을 욕심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되겠다고 하는 마음은 제일 큰 욕심이지요. 사실은. 욕심이라는 낱말로서 풀이를 하자면 제일 큰 욕심이 부처 되겠다는 욕심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부처님이 제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요. 제일 욕심이 많으니까 소소한 왕위까지 다 버려버리고 자기에게 부여된 온갖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다 버렸지요. 어떻게 보면 욕심이 없는 것 같지만 더 큰 욕심을 위해서 그런 소소한 것을 다 버린 거지요. 바둑 두는 데도 보면 그래요. 자기 말 한 두 마리는 버리거든요.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은 취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습니다.
여기서도 보면 욕심은 적은데 생사를 싫어한다는 말은, 부처님은 생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생사를 우정 받지요. 왜냐? 생사 속에 사는 중생들을 건지려면 같이 생사를 받아가면서 생사 속에 살아야 되는 거지요. 중생 제도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생사 속에 들어와야 돼요. 세상 속에 들어와야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실로 불토를 청정히 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 세상을 불토, 또는 불국토라고 표현을 해요. 세상을 청정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맑고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 정불토입니다. 여기에 보면 자정불토(自淨佛土)라는 말이 밑에 줄에도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도 또 나와요. 자정불토(自淨佛土)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참 좋은 말이거든요. 스스로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한다. 청정하게 한다. 스스로 맑게 가꾸어 간다.
시중유삼독(示衆有三毒)하고 우현사견상(又現邪見相)이라, 중생들에게 삼독이 있음을 보이고 또 사견상도 나타낸다.
그러니까 탐진치 삼독이 있어야 삼독이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삼독이 없는 사람이라고 딱 판명이 되어 버리면 삼독이 있는 사람은 두렵고 재미가 없어서 감히 가까이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안으로는 보살이지만 겉으로는 성문의 모습을 나타냈잖아요. 겉으로 성문의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그저 부처님께 한 두마디 법문을 들으면 그게 달콤하고 그게 재미있고, 돌아오면 역시 중생이고, 이런 모습이 이제 성문이란 말입니다.
부루나가 사실은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부루나가 성문이지만 사실 안으로는 보살이고 겉으로는 성문의 모습이라는 거지요. 부루나는 지난 시간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부처님의 설법을 위해서 순교한 분이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 보다도 애착을 가진 표현이 이 속에 담겨 있는 것을 제가 새삼 느끼고 있어요. 어떤 제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 그렇게 흔치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루나는 중생들에게 삼독이 있음을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독이 있는 사람들이 친구하려고 할 밖에요. 그리고 부루나는 우정 사견상도 나타냅니다. 삿된 소견이 있는 것도 또 나타내 보인다, 그러면 삿된 소견 가진 사람도 또 가까이 할 거 아닙니까?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요.
아제자여시(我弟子如是)히 방편도중생(方便度衆生)하나니, 내 제자 저 부루나가 바로 이와 같아 방편으로서 중생을 제도하나니
약아구족설(若我具足說) 종종현화사(種種現化事)인댄, 만약에 내가 구족하게 말한다면, 구체적으로 충분하게 이야기 한다면,
가지가지 교화하는 일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서, 교화방편에 대해서 다 이야기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중생문시자(衆生聞是者)는 심즉회의혹(心則懷疑惑)이니라, 이것을 듣는 사람들은 마음에 곧 의혹을 품는다.
너무 놀랄거다 이거에요.
야, 부루나가 참으로 그런 정도의 사람인가 하는 그런 의혹까지 품게 될 것이다.
이것 봐요, 부루나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을 것 아닙니까? 대개 그저 부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겠거니 하지요. 저 앞에서 사리불이니 목건련이니 그런 뛰어난 사람들은 앞에서 다 거론을 해 버렸고, 여기에 와서는 하근기 들이에요. 하근기들에게 말하자면 수기를 주는 대목이에요. 상 중 하로 나누었을 때는 하근기들에게 수기를 주는 대목인데 그 하근기 중의 한 사람인 부루나가 이 정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금차부루나(今此富樓那)는 어석천억불(於昔千億佛)에, 이 부루나는 옛날 천억 부처님에게
근수소행도(勤修所行道)하야 선호제불법(宣護諸佛法)하며, 부지런히 부지런히 행할 바 도를 닦아서 불법을 선양하고 보호했다.
호지불법 호선불법이라고 저 앞에서 여러 번 나왔던 일이지요.
위구무상혜(爲求無上慧)하야 이어제불소(而於諸佛所)에, 가장 높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현거제자상(現居弟子上)하대 다문유지혜(多聞有智慧)하며, 현자는 완전히, 분명히, 제자의 위에 거해 있으되 많이 들어서 지식도 많고 지혜도 많아,
이 다문은 지식이에요. 책을 많이 봤다든지 들은 것이 많다든지 견문이 많은 것이 지식에 해당되지요. 지혜는 그것과는 또 다르지요.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지혜가 없을 수가 있고 또 지혜는 많아도 지식은 없는 사람도 있고, 또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사람도 있지요. 다양하게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부루나는 지식도 많고 지혜도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문과 지혜가 있으며...그 뿐입니까?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아도 누구한테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도 또 있거든요.
소설무소외(所說無所畏)하야 능령중환희(能令衆歡喜)하대, 이 사람은 설하는 바 두려움이 없어, 능히 대중으로 하여금 기쁘게 해 준다.
언제라도 당당하게 자기의 소신과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조리정연하게 설득력 있게, 누구 앞에서든지 어떤 외도들이나 대가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한다는 거지요. 말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는 능히 대중으로 하여금 기쁘게 해 준다고 했어요. 환영받는다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서도
미증유피권(未曾有疲倦)하야 이이조불사(而以助佛事)하며, 피곤해하거나 권태해 하지도 않고,
할수록 신이나요. 또 거기에 권태심이나 게으름이나 부처님 법을 폄에 있어 전혀 그런 게 있지 않으며 그래서 불사를 잘 돕는다고 했습니다. 도울 조(助)자 이지요. 불사를 돕는다. 말하자면 부처님 법을 펴는 것이 진짜 불사에요. 그 외는 사실은 부처님 법을 펴기 위한 불사이지요. 그 외는 부처님 법을 펴기 위한 불사이지요. 진짜 불사는 부처님 법을 펴는 것이 불사이고 그 외의 것은 부처님 법을 펴기 위한 준비이지요. 불사를 위한 준비 불사이지요.
예를 들어서 법당을 짓는다면 으레 불사라고 하거든요. 물론 불사에요. 그러나 법당만 있어서는 목적이 아니지요. 그 법당에서 기도하고 수행하고 부처님 법을 펴자고 법당을 짓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기도나 설법이 목적이지 법당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요. 불사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런 데서 분명히 확연하게 염두에 새겨 둘 필요가 있어요.
불사를 도왔다면 그 불사를 어떻게 도왔느냐? 다문지혜로서 설법에 걸림이 없고 대중들을 환희하게 하고 거기에 전혀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음으로 그래서 부처님 일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부처님 일이지요.
이도대신통(已度大神通)하고 구사무애지(具四無礙智)하며, 이로서 대 신통을 완성하고, 사무애지(四無礙智)를 갖추었다.
도(度)자는 건넜다, 완성했다는 말이지요. 사무애지는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요. 법무애(法無礙), 의무애(義無礙), 사무애(辭無礙), 요설무애(樂說無碍) 또는 낙설무애라고 해 가지고 가르침 또는 그 뜻, 말,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다는 거지요.
지제근리둔(知諸根利鈍)하야 상설청정법(常說淸淨法)하며, 여러 사람의 근기가 영리한지 둔한지를 잘 알아 가지고 항상 청정법을 설하며,
설법하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아야 하는 일이지요.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는 잘 알 것 같아도 그것도 알기 쉬운 건 아닌 모양이라, 무엇이 ??되었는지, 성격이 정말 어떤지 무엇을 잘 할 건지 잘 모르지요. 왜 이것도 잘 모르는가 하지요. 자기 자식에 대해서 모를 수 있는 조건이 또 하나 있어요.
물론 남보다 다 더 잘 알겠지. 남보다 더 잘 아는 것이 더 많은데 그러나 더 모를 수 있는 조건 중 하나가 자기 자식이라고 하는 거, 그것이 또 맹점이 된다고요. 남이라서 잘 알 수가 있고, 자기 자식이라서 잘 알 수가 있고 남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있고 남이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있고, 그런 면이 다 섞여 있습니다. 어떤 면은 자식이기 때문에 잘 알지만 어떤 면은 자식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수가 있습니다. 왜냐? 자기 자식이라고 하는 어떤 애착, 욕심 이것이 딱 거기에 게재되어 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중생을 제도하는 데 늘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을 잘 알아서 항상 청정법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 근기에 맞는 법이라야 그게 청정한 법입니다. 아주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청정법이 아니고 정말 소화되고 들어서 환희심이 나고 감동을 하는, 그런 가르침이 청정법이거든요, 그런 것을 항상 이야기 한다는 거지요. 부루나는 그런 분이거든요.
연창여시의(演暢如是義)하야 교제천억중(敎諸千億衆)으로, 바른 도를 펼치고 드러내어서 여러 천억 대중을 교화하는 것으로써,
여기에서 여시의(如是義)라고 하는 말은 바른 도리, 바른 이치, 바른 진리를 말합니다. 바른 도를 연창해서, 펼치고 드러내어서 천만이 되고 억이 되는 그런 여러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으로써
영주대승법(令住大乘法)하고 이자정불토(而自淨佛土)하며, 크고 뛰어난 법에 머물도록 하고 또 스스로도 세계를 훌륭하게 정화해 간다.
소소한 그런 것에 속박되어 있는 법이 아니고 큰 법, 뛰어난 법에 머물도록 하고 다른 사람을 교화해서 그렇게 하게하되 스스로도 세계를 훌륭하게 정화해 간다. 저 앞에도 있었지요? 자정불토(自淨佛土), 여기에서도 자정불토가 나옵니다. 스스로도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한다. 아주 좋은 세상으로 가꾸어 가는 것을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말이 자정불토입니다.
미래역공양(未來亦供養) 무량무수불(無量無數佛)하야, 미래에도 또한 무량무수불을 공양해서
물로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왔지만 앞으로도 이 사람은 그렇게 살 사람이라는 뜻에서 미래에도 무량무수불께 공양 올려서
호조선정법(護助宣正法)하고 역자정불토(亦自淨佛土)하며, 호지하고 조선한다. 도와서 베푼다, 베푸는 일을 돕는다. 부처님의 바른 법 베푸는 것을 도와서 베푼다. 미래의 무량무수불에게 공양하도록 돕고 또 스스로도 역시 이제 이 세상을 청정하게 훌륭하게 만들어 간다. 자정불토가 세 번이나 나온다고 제가 그랬지요.
그 마음에 새겨두라는 뜻에서 아마 경전에서 이렇게 했을 겁니다. 자정불토, 불토를 청정히 한다.
상이제방편(常以諸方便)으로 설법무소외(說法無所畏)하며, 항상 모든 방편으로써 법을 설함에 두려움이 없으며
도불가계중(度不可計衆)하야 성취일체지(成就一切智)하니라, 불가계,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서 일체지를 성취하게 한다. 일체지는 부처님만이 갖는 지혜를 말합니다. 일체의 것을 다 꿰뚫는 지혜니까 일체지라고 합니다.
공양제여래(供養諸如來)하야 호지법보장(護持法寶藏)하며, 제 여래를 공양해서 법보의 창고를 보호해 지키고 가지며
기후득성불(其後得成佛)하면 호명왈법명(號名曰法明)이요, 그 후에 부처를 이룰 것이며 명호는 법명이라는 부처님이 된다는 거지요. 법명여래 응공 정변지...라고 해서 저 앞에 구체적으로 나왔지요. 법 법(法)자, 밝을 명(明), 법명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기국명선정(其國名善淨)이니 칠보소합성(七寶所合成)이며, 그 나라 이름은 선정이니 칠보로 합성이 되어 있어서,
가는 곳마다 칠보가 쌓여있다.
겁명위보명(劫名爲寶明)이라 보살중심다(菩薩衆甚多)하며, 겁의 이름은 보명, 보배 보(寶)자 밝을 명(明)자이고 보살의 대중들도 어마어마하게 많더라.
기수무량억(其數無量億)이 개도대신통(皆度大神通)하며, 그 숫자가 한량이 없는 억이고, 그 보살대중들은 큰 신통을 완성해 갖추어 있고
위덕력구족(威德力具足)하야 충만기국토(充滿其國土)하고, 그 보살들은 위덕의 힘이 구족하며,
그러니까 이 부루나가 성불했을 때 도와주는 사람, 자기네들은 성불해서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주인공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도와주는 사람들이 잘나야 하거든요. 그게 누구인가 하면 보살들이라, 보살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고 그들이 또 뛰어나야 하는 거지요. 여기에서는 보면 대 신통을 다 갖추었고 위덕력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에 충만하다는 거지요. 가는 데마다 좋은 사람들, 잘 난 사람들, 지혜로운 사람들, 지식이 많고 유능한 인재들이 그냥 수두룩 하다는 거지요.
성문역무수 (聲聞亦無數)라 삼명팔해탈(三明八解脫)과, 성문이 또한 무수라, 삼명팔해탈과
보살보다 약간 낮은 성문대중들도 또한 무수해,
득사무애지(得四無礙智)인 이시등위승(以是等爲僧)하며,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인 이러한 이들이 승이 되었으며,
배에다가 칼을 그리고 하는 그런 사람이 중생이 된 게 아니고 삼명팔해탈과 사무애지인 이런 사람들이 승이 되었더라.
[강의 당시 조계사 사태를 지칭]
그 사람들이 전부 조직폭력배라고 판명이 되었어요. 조직 폭력배들이 할 일이 없어 전부 들어와서 거기 지키고 있었다는 거지요. 동지라서 스님들이 다 나가고 없었대요. 어쨌든 난 그건 모르겠고,
이시등위승이라, 팔해탈과 사무애지를 얻은 이런 사람들이 중이 되어 있더라. 그런데 가서 중노릇하면 중노릇이 저절로 잘 될 것 같아요.
기국제중생(其國諸衆生)은 음욕개이단(婬欲皆已斷)하고, 그 나라 중생들은 음욕이 이미 다 끊어졌고
순일변화생(純一變化生)하야 구상장엄신(具相莊嚴身)하며, 순일하게 변화로써 태어나 가지고 상을 갖추고 아주 장엄된 몸을 갖추고, 앞에서도 나왔지요. 거기에서는 32상을 갖추었다고 했어요.
보통 중생들도 몸이 아주 훌륭하고 잘 생긴 그런 모습을 갖추었으며,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하고 갱무여식상(更無餘食想)하며, 법희식(法喜食)과 선열식(禪悅食) 두 가지 식사뿐이라고 그랬지요. 법희선열식, 법으로써 기쁨을 삼는, 정말 먹지 않아도 배부른, 선정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리고는 다시는 다른 음식 먹을 생각을 안 해, 그만큼 좋은 세상이라는 거지요.
무유제녀인(無有諸女人)하고 역무제악도(亦無諸惡道)하며, 남녀 차별이 없으며 또한 모든 악도도 없으며,
이렇게 제가 해설을 했는데 그런 뜻입니다. 저 앞에도 있었지요. 남녀의 차별이라는 게 아예 없고 또한 모든 악도도 없으며
부루나비구(富樓那比丘)는 공덕실성만(功德悉成滿)하야, 부루나 비구는 공덕이 성만하여, 공덕이 다 갖추어져서
당득사정토(當得斯淨土)하고 현성중심다(賢聖衆甚多)리니, 마땅히 이러한 국토를 얻게 되어 그러한 곳에서 부처노릇을 하게 되며 아주 어진이들이 많을 것이니
여시무량사(如是無量事)를 아금단약설(我今但略說)하노라, 이와 같이 한량없는 일을
부루나가 성불했을 그때의 일을 일일이 내가 다 이야기 할 수가 없으니 무량한 일이 있지만 내가 간단히 이쯤에서 설명해 마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수기 주는 대목에 대해서 부루나에게 이렇게 수기를 주니까 부루나 친구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이상하다, 부루나만 수기 받을 처지는 아닌데...아까 저 앞에서 사리불과 목련이 수기 받을 때는 ‘그 사람들이 다 우리 형님이고 잘 났고 우리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부루나까지 수기를 주는데, 아니 우리는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생각을 이제 하게 됩니다.
이시 천이백아라한심자재자(爾時千二百阿羅漢心自在者)가 작시념(作是念)하대, 이시에 마음이 자재한 천이백오십의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천이백오십인, 늘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금강경에 보면 천오백이십인으로 더불어 함께 했다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요. 여기에서는 큰 숫자만 들어서 천이백 명이라 이렇게 하지요. 그 천이백 명이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녔다고 해요. 대개의 경전에 보면 천이백 명의 대중이 잘 나옵니다. 그 천이백 명 아라한, 마음이 자재한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하되
아등환희(我等歡喜)하야 득미증유(得未曾有)호니, 우리들은 환희해서 미증유를 얻었으니,
자기들의 친구 부루나가 이렇게 수기 받는 걸 보니 굉장히 신기해하고 한편 마음이 기쁘기를 이루 비할 데가 없지요. 그런데다가
약세존(若世尊)이, 만약에 세존이
각견수기(各見授記)를 여여대제자자(如餘大弟子者)인댄 불역쾌호(不亦快乎)아 하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왕 부루나에게 그렇게 하셨으면 만약에 세존께서 각각 우리에게도 수기를 입게 해 주기를 저 큰 제자들, 부루나 목련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었듯이 나머지 제자들과 같이 할 지면, 또한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는가.
이왕 이렇게 한 자리에서 공부할 바이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는 것도 좀 그렇지 않는가, 하는 마음보다는 우리도 같이 받을 수 있는 그런 다행이 있다면 참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겠다는 겁니다.
불역쾌호(不亦快乎)아, 쾌(快) 자를 썼어요.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는가!
이런 생각을 막 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부처님이 누구십니까? 모를 리가 없지요.
불지차등심지소념(佛知此等心之所念)하시고, 부처님이 이들이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는
고마하가섭(告摩訶迦葉)하사대, 저 마하가섭에게 고하사대
시천이백아라한(是千二百阿羅漢)을 아금당현전(我今當現前)에, 이 천이백아라한이 현전에 차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하리라. 차제여수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次第與授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하리라, 즉각 이렇게 반응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면 부처님은 바로 응(應)이 있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감응(感應)이라고 하지요. 부처님께 기도해서 감응을 받았다 그러지요.
제자가 생각하니까 부처님에게서 당장에 해답이 오지 않습니까? 이래 되어야 되거든요. 사실은.
제대로 될려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감응이라고 보면 좋겠지요.
천이백아라한들에게 내가 이 앞에서 차례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기를 주겠다는 말이지요.
큰 깨달음에 대한 깨달음을 주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공부하면서 자꾸 뭘 정리하는 훈련을 쌓게 되는데, 다른 곳에서 법화경을 공부하는 걸 보니까 신도들이 법화경 공부한 내용을 줄거리를 추리고 뭐 또 낱말을 정리하고, 핵심정리를 한다든지, 그 안에 담겨있는 사상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나눠주고 하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고요.
이 자리에는 그렇게 공부하는 분들이 없는지, 그냥 혼자 해놓고 그냥 남 안 보여주는지 어쩐지 지금쯤 그런 게 나올 때가 됐는데 소식이 통 없어요. ^^*
그동안 공부하시면서 공덕 교육을 받아 가지고 공부하는 방법도 다 잘 알고 그럴텐데 좋은 게 있으면 정리해서 좀 나눠주면 좋지요. 명구 같은 것을 정리해도 좋아요. ‘아, 이런 것은 좋은 말씀이다, 괜찮은 말씀이다’ 싶으면 보는 대목마다 그런 것만 추려 가지고 그 나름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다음에 가져 오세요. 그 얘기는 이 전에 하려다가 지금 생각이 나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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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_()()()_
호조선정법(護助宣正法)하고 역자정불토(亦自淨佛土)하며~~~은우님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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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근리둔(知諸根利鈍)하야 상설청정법(常說淸淨法)하며...고맙습니다. _()()()_
內秘菩薩 外現聲聞, _()()()_
감사합니다_()()()_
덕분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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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습니다. 은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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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不可計衆하야 成就一切智하니라... 불가계,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서 일체지를 성취하게 하니라...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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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글자 한자 한자에 온 정성을 기울인 너무나 훌륭하신 "은우" 법우님의 노고에 깊은 찬탄의 말씀을 드립니다,,, "漸當令作佛"이라,,우리 모두 自淨佛土를 만들어 설혹 조금 늦더라도 차츰차츰, 그러나 당연히 <부처의 境地>를 이루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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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도불가계중(度不可計衆)하야 성취일체지(成就一切智)하니라............
다문지혜로서 설법에 걸림이 없고 대중들을 환희하게 하고, 거기에 전혀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음으로 그래서 부처님 일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은우님 ! 고맙습니다.
小慾懈怠
;당면한 문제만 해결하고 살지 석가모니같은 대 성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어서 게을러짐
衆樂小法 而畏於大智
;고통을 멸하는 열반에 안주하기를 좋아할 뿐 부처님이 성취한 일체지에는 관심 없고 나에게는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함
內秘菩薩行 外現是聲聞
아수라의 마음을 품고 보살행을 거짓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