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가 선거를 재미없게 만들어
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4월9일 오후 6시 정각. 전 국민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서울역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설치된 TV 앞에는 예외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화면을 주시했다. 총선의 결과를 한 시라도 빨리 알겠다는 궁금증에서 너도나도 모여든 것이다. 드디어 흥분한 듯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오늘 실시된 총선의 예측조사에서 한나라당은 압도적인 과반수를 넘어 180석 이상까지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통합민주당은 개헌저지선 획득에 실패하고 최저 80석을 밑돌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우선 주요정당의 의석획득수를 말한 다음 이어서 각 지역구별 당선 예상자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청자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지역구별로 일일이 중계화면을 내보내 당락 예상자의 표정까지 잡아냈다. 당선될 것으로 조사된 후보자는 당연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지자들과 함께 환호성을 보냈고 낙선된다고 조사된 후보자는 시무룩하고 오만상을 찡그린 모습이 역력했다.
차마 마주보기 어려운 딱한 얼굴이었다.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예측조사 발표를 보던 지도부는 모두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모양이고, 통합민주당 등 예상보다 저조하다고 발표된 정당지도부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활을 걸고 싸웠던 결과를 출구조사와 전화조사로 예측하는 이 방송 시스템은 이미 15대 총선 때부터 선보여 많은 국민들이 이를 기다리는 프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맞힌 일은 없는 엉터리(?) 예측조사였다. 총선 때마다 출구조사를 발표했지만 방송사에서 주장하는 플러스, 마이너스 몇 프로라는 신뢰도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믿지 못하면서도 왜 예측조사를 기다릴까. 그것은 선거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출구조사가 아주 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칙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상당한 부분 예측조사대로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공공방송의 예측조사가 총론에서도 빗나가고 각론에서도 틀린 게 많다면 그것은 신뢰도 면에서 이미 낙제점수를 받은 셈이다.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한 사람들에게 ‘당선’과 ‘낙선’은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충격을 준다.
2~3% 정도가 틀렸다면 어느 누가 이 문제로 힐난하겠는가. 그런데 이번 예측조사는 전면적으로 틀린 게 많았다. 한나라당이 안정과반수인 180여석을 바라보리라는 예측은 마지막 개표결과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153석을 얻어 과반수에 턱걸이를 한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구별 당락예상도 엉뚱하게 틀린 게 많았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선거구 중의 하나가 한나라당 실세인 이재오와 창조한국당 대통령후보였던 문국현의 대결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여론조사는 이재오가 불리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막상 출구조사는 문국현의 석패였다. 양측의 표정은 현저하게 대조되었지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개표결과는 문국현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무려 15%의 격차를 드러낸 예측조사란 백해무익한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네 차례의 총선에서 모두 틀린 여론조사를 발표하고 있는 방송사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만 한다. 모든 방송사들이 예측조사가 틀린 사실에 대해서 그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과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독 KBS만은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개선노력을 하겠다는 다짐만으로 사과를 얼버무린 것은 공영방송답지 않은 태도다.
여론조사란 원래 미국에서 발달한 것인데 선진국의 예측조사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그 정확도가 높아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다. 똑같은 여론조사 기법을 사용하는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정확성이 약한 것일까. 방송사 측의 변명대로 답변자들이 본심을 말하지 않거나 다른 답변을 하기 때문일까. 또 답변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그렇다면 그 원인을 밝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조사에 응하도록 하는데 힘써야 할 책임은 방송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속셈을 얘기했다가 행여 불이익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으며 비밀누설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것은 오랜 기간 군사독재정권 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지혜다.
방송사는 이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 출구조사에서도 말로 표현하지 않고 비밀투표 하듯이 직접 써서 함에 넣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오차는 여전했다. 따라서 여론조사를 통하여 유권자의 뜻이 오도되는 결과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선거기간 동안 여론조사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쏠림’현상도 생겨난다. 선거는 미리 알면 재미없다. 알고 싶으면서도 마지막 개표가 끝날 때까지 몰라야 흥미롭고 신비하다. 천기누설이 될 수도 있다. 선거를 더욱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도 여론조사 발표는 없어져야 한다.
첫댓글 이제 개표기가 도입되어 투표가 자정을 넘기는 일은 없으니 종전 여론조사방식을 대폭 개선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폐지 하는것이 선거개표의 신뢰를 위해서도 좋으리라 생각 됩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