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텍스트(hypertext)는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료를 찾아 자유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백과사전의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는 순차적이거나 단계적인 방식으로 항목들을 배열하는 백과사전과는 달리, 다양한 링크(link)들을 통해서 더욱 더 역동적인 읽기와 정보검색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의 속성, 즉 하이퍼텍스트성(hypertextuality)은 멀티미디어와 결합된 하이퍼미디어(hypermedia)의 형태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 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하이퍼텍스트:현대비평이론과 기술의 수렴}(Hypertext 2.0: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and Technology)의 저자인 죠지 랜도우(Goerge P. Landow)에 의하면, 1960년대에 시오도 넬슨(Theodor H. Nelson)이 만든 것인데, 전자적 텍스트의 형식,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보 기술과 출판의 양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비연속적인 글쓰기, 즉 독자가 선택하여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상호작용적 스크린 상에서 가장 잘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를 뜻한다(3).
그런데 하이퍼텍스트 개념을 선구적으로 예시한 사람은 바네바 부쉬(Vannevar Bush)이다. 그는 1945년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발표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As We May Think')라는 글에서 활자에 의존한 정보관리의 방식, 즉 지식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법이 인간의 정신활동의 방식과 달리 유연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연상에 의한 선택(selection by association)"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정신활동의 방식과 유사한 장치를 고안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을 그는 "메멕스(memex)"로 지칭했는데, 이 아이디어가 그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구체화된 것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Landow 7-10).
하이퍼텍스트는, 엄밀하게 말하면 컴퓨터 기술과 연관된 개념으로서, 비연속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노우드(node)들로 구성된 전자적 텍스트이다. 노우드라는 것은 정보의 구성단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노우드의 내용 안의 한 영역을 앵커(anchor)라고 하는데, 그것은 강조된(하일라이트된) 부분으로서 마우스로 클릭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앵커와 앵커 사이의 연결을 링크라고 한다. 그리고 웹(web)은 링크들에 의해 상호연결된 일련의 노우드들을 뜻한다. 소리, 그래픽, 동영상 등이 포함됨으로써 하이퍼텍스트는 학술(교육)자료의 다각적인 정리와 수록의 수단만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가 되어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예술생산의 도구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특히 하이퍼텍스트 픽션 (혹은 하이퍼픽션)은 기존의 활자매체에 의한 문학의 방식에 대한, 즉 단선적인 진행의 방향 혹은 선형성(linearity)에 토대를 둔 문학형식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무엇보다도 시작--중간--끝의 유기적인 조직화를 중심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개념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랜도우에 의하면, 하이퍼텍스트의 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cs)에서 정립한 플롯 개념과 함께 (1) 고정된 연속(fixed sequence) (2) 확정적인 시작과 끝(definite beginning and ending) (3) 스토리의 "특정의 확정적인 크기 혹은 양"(a story's certain definite magnitude) (4)통일성(unity) 혹은 전체성(wholeness)의 개념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도록 만들고 있다 (181).
물론 활자와 책의 문화가 하이퍼텍스트 때문에 종식될 것이라는 예단은 성급한 것이지만, 인쇄문화에 의해 고무된 선형적, 논리적, 연속적 사고가 하이퍼텍스트의 역동적인 방식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양식의 활용은 문학을 포함한 모든 글쓰기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정보검색 체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 하이퍼텍스트 방식은 기존의 선형적인 텍스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활자인쇄 문서들을 디지털 하이퍼텍스트가 모두 대체할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활자와 디지털 양식의 공존과 상호침투가 지속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활자매체에 의한 문학작품과 하이퍼텍스트에 의한 디지털 문학 양식의 발전도 상당한 기간 동안 공존하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교환할 것으로 보인다.
활자매체 책으로서는 불가능한, 소리와 영상이 삽입된 형태로 전달하는 하이퍼텍스트 방식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그래서 종이로 된 책이 지닌 유연성은 없는 한계가 있지만 시청각적인 즉각적 호소력과 효율성 등에서는 상당히 유리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퍼픽션을 비롯하여 소설집과 시집, 그리고 각종 문학잡지도 조만간 그와 같은 형태로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특히 하이퍼텍스트(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이 논문에서는 우선 하이퍼텍스트성에 대해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문학적 적용인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특성을 조사할 것이다.
Ⅱ
1. 하이퍼텍스트성의 이념
하이퍼텍스트성의 이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필서법에서 활자 인쇄기술/책을 거쳐 디지털 전자기술에 의한 하이퍼텍스트에 오기까지의 글쓰기 기술의 변화와 그것에 수반된 문화적 변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기술은 언제나 누군가를, 사회 속에서의 어떤 그룹(들)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주는데, 때로는 어떤 희생을 치루면서 그렇게 한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기술이 어떤 그룹(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는가?라는 것이다"(275)라고 말하는 랜도우의 관점은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필서법과 활자인쇄술을 거쳐 전자언어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에 대해 살펴볼 때에도 우리는 기술은 우연한 발견의 산물인데, 사회는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찾게 되고 그 이후 사회변화가 뒤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의 방향으로 사회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특정의 기술의 창조를 유도하면서 조정하는 추동력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세시대의 서양에서 말을 탈 때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간단한 장치인 등자(stirrup)를 만든 이후 사람이 말을 타고서도 두 손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기마 전투를 가능하게 했으며, 나아가 봉건사회에서의 지주 기사들의 세력을 증강시키게 된 것으로 인도했다는 설명이 있다 (Lynn White, chapters 1-2). 그런데 이와 같은 등자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봉건사회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활자 인쇄기술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전자기술로의 변화 이전에, 즉 활자 인쇄기술 개발 이전에 있었던 필서법의 고안이 야기한 변화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필서법의 고안과 활용은 기록보관(서생), 과세(관리), 종교적 전례(성직계층)의 출현을 통해 사회조직의 서열적 구조를 파생시켰다. 또한 필서법의 고안과 활용은 고대세계에서 고귀한 기술로 간주되었던 "기억술"의 약화를 초래했다. 많은 문화들은 그들의 신화 혹은 무용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비문학의 방식을 수세기 동안 활용해 왔다. (오늘날에도 수 천 행들에 이르는 민족적 서사시를 기억하는 음유 시인들이 있다.) 필서법의 활용이 인간의 풍부한 기억의 재능을 파괴한다는 것은 이미 플라톤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다. 필서법은 또한 발화된 말(로고스), 즉 말하는 사람의 호흡을 포함한 육체성(어조, 속도, 고저, 강약 등에 의한 정서적 속성)을 반영하는 말을 우선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보는 전통을 약화시킨 면도 있다.
고대와 중세를 통해 문자해독능력과 필서법은 귀족과 사제 계층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층계층 사람들의 무지를 영속시킴으로써 지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고자 한 셈이다. 그런데 활자 인쇄기술의 개발로 인해 인본주의적 고전학문에 대한 관심이 부흥됨으로써 변화가 시작되었다. 구텐베르그가 15세기에 개발한 인쇄기술은 유럽사회에 다양한 문화적 변화들을 야기했다. 특히 종교개혁은 문자해독 능력을 지녔던 소수 성직자 엘리트 계층에 의한 바이블의 독점을 불가능하게 한 인쇄기술의 결과이다.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구텐베르그 갤럭시}(Gutenberg Galaxy)에서 지적하듯이 인쇄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문자해독 능력의 확산이 없었다면 산업혁명, 자본주의 발흥, 민족국가의 형성 등 종교개혁 이후의 사회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216).
그런데 맥루한은 활자인쇄술의 사용은 인간의 모든 감관들이 공감각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었던 문화를 파괴하여 시각중심의 문화로 변모시켰다고 진단하고, 또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텍스트들을 재생할 수 있는 활자인쇄술은 결국 통일된 동질성 혹은 획일성을 중시하게 함으로써, 일상언어가 본래 지니고 있었던 독특성, 다양성, 이질성 등을 폄하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136). 따라서 전자 미디어 시대는 활자문화에 의해 상실되었던 다양성, 공감각성, 그리고 획일화되지 않은 독특한 개성들의 회복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관점이 생기는 것이다. (인쇄된 책은 맨 윗 줄에서 아래로 한 줄씩, 첫 페이지로부터 끝 페이지까지 읽는 것으로 상정된다. 필사본 문화에서 확립되었던, 이와 같은 선형성과 위계질서적 구조는 인쇄기술에 의해 강화되었고, 그 결과 구술문화의 특성, 즉 일탈의 가능성 혹은 지엽으로 흐르는 경향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무엇보다도 텍스트의 선형적인 진행이라는 형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구술문화의 속성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전자 미디어는 필서와 인쇄에 의해 상실된 즉시성, 현존의 의식, 동시적 참가의 느낌 등을 회복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전자적 텍스트들, 전자잡지(E-zine)들, 즉 하이퍼텍스트/하이퍼미디어로 형성되는 전자 미디어가 문명 그 자체의 종식을 야기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문명을 지탱해 온 책/텍스트/단어/인쇄/선형성을,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전통적인 문학과 영혼의 형식을 전자 미디어가 결국 종식시킬 것인가? 제 2의 구텐베르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변화를 활성화시키고 있는 탈인쇄/하이퍼텍스트/전자 미디어의 확산은 어떠한 문화적 변화를 야기할 것인가?
하이퍼텍스트 개념 그 자체가 서구와 미국에서 일어났던 60년대와 70년대 반체제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성을 선구적으로 시도하고 응용한 넬슨과 같은 사람들은 사회적 비젼을 지니고 있었다. 즉 전자적 텍스트 프로젝트는 중앙집권적 권위를 해체하고 각 개인들의 힘을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사실은 개인용 컴퓨터의 개발과 활용도 초창기 하드웨어 해커들의 탈중심화 정신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디지털 텍스트 검색은 대중이 정보 데이타베이스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와 같이 컴퓨터를 통제의 수단이 아닌 지식의 확산과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인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은 탈중심화 정신인 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하이퍼텍스트가 독자의 힘을 증강시키도록 촉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텍스트와 결합된 아이콘-윈도우-마우스 환경 혹은 포인트(point)-클릭(click)은 사용자 위주의 친숙한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념은 결국 "연결(connection)"이라는 것의 속성과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정보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선택하여 결합시키는가라는 것은 분명히 넓은 뜻에서의 정치적, 윤리적 함의를 지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자료와 자료 사이의 "연결"을 유도하는 관련성, 중요성, 목적성 등이 누군가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그 "연결"의 정치적, 윤리적 함의를 반성적으로 검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결"은 무엇보다도 선형성, 규율성, 통일성, 위계질서적 통제와 관련된 서양에서의 근대성(modernity)의 원리와 관계가 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선형성, 규율성, 통일성, 위계질서적 통제와 같은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적 비판의 맥락에서 프랙탈(차원 분열 도형), 혼돈, 복잡성, 노매돌로지(nomadology) 혹은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적 뜻에서의 유목민(nomad)과 근경(rhizome), 즉 유동성, 다양성, 다원성, 연결성, 분절성, 이질성, 탄력성 등이 활성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인 비종결성과 비선형성은 그와 같은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적 비판의 산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이론과 포스트모던 이론/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성의 이념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일라나 슈나이더(Ilana Snyder)의 지적과 같이 하이퍼텍스트 이론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중심과 주변, 위계질서, 선형성 등에 근거한 체계 대신에, 다선형성(multilinearity), 노우드들, 링크들, 네트워크들로 된 체계를 수용 한다는 점에서 같다 (39). 하이퍼텍스트와 멀티미디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퍼미디어적 디지털 텍스트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 즉 역동적이고, 양방향적이며, 개방적인, 이미지와 소리가 언어적 의미보다 더 중요한 세계가 포스트모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인식은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구성론과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저자적"(writerly) 텍스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론, 혹은 저자의 죽음(death of the author)론 등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의 텍스트론과 텍스트성 이론은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경험을 통해 더욱 분명해 질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전자매체를 통한 하이퍼텍스트의 구현과 하이퍼텍스트 이론의 형성은 바르뜨, 데리다, 푸코(Michel Foucault) 등에 의해 제기된 새로운 포스트구조주의적 언어관, 즉 "관계들의 네트워크"로서의 언어관과 텍스트, 저자, 독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들의 네트워크"로서의 언어관은 들뢰즈가 "수목적"(aborescent) 문화와 구별한 "근경적"(rhizomatic) 문화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예견된 추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1).
슈나이더는 작품(work)과 텍스트(text)를 구별한 바르트의 관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작품은 "전통적인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저자의 이름이 표시된 한 권의 제본된 책 속에 한정되어 있는, 우리에게 친숙한 물리적 대상"이며, 텍스트는 "영원히 팽창하는 의미들과 결합하기 위해서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히는 활동"으로서의 읽기를 위한 하나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텍스트 개념이 하이퍼텍스트 개념의 선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47). 바르트가 "작품"과 구별한 뜻에서의 "텍스트"는 다른 담론들, 즉 다른 저자들과 비평가들의 작품들과 독자들의 반응, 그리고 비문학적 문서들까지도 연결하는 언어의 웹(web) 혹은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독자를 텍스트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인 생산자로 만드는 바르트의 "저자적" 텍스트관은 하이퍼텍스트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Barthes 4).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서 중시되는, 그와 같은 상호텍스트성과 하이퍼텍스트성은 많은 연관이 있다. "상호텍스트성"은 1960년대말 쥴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의해 도입된 용어이다. 크리스테바는 모든 의미화의 체계가 선행의 의미화 체계를 변형시키는 방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이론적 입장을 개진한다. 문학작품도 단일한 저자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59-60). 상호텍스트성 개념은 전통적인 뜻에서의 "책"의 전체성이라는 이미지를 무제한적인 연결의 양태로 분산시킨다.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들과 하이퍼텍스트 픽션 작가들이 구축하는 텍스트적 공간은 바로 이 상호텍스트성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이퍼텍스트는 상호텍스트성이라는 프랑스 이론과 미국의 컴퓨터 기술의 수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트래비스(Molly Abel Travis)는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대화주의(dialogism)와 이질언어(heteroglossia)론이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의 조립(bricolage)과 같이 내러티브의 하이퍼텍스트적 확산을 예시한 점이 있다고 말하고, 또한 데리다의 로고스의 해체와 탈중심화, 푸코의 저자 기능(author function),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연결(connection), 이질성(heterogeneity), 다양성(multiplicity), 의미화의 균열(ruptures in signification) 등에 대한 강조도 하이퍼텍스트성과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117).
또한 볼터(Jay David Bolter)는 독자반응 이론가들로부터 해체주의자들의 텍스트관은 많은 점에서 하이퍼텍스트성을 예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와 스탠리 피쉬(Stanley Fish)가 독자가 독서행위 속에서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하이퍼텍스 트를 묘사하고 있다. 해체주의자들이 텍스트는 제한이 없고,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들을 포함할 정도로 확장된다고 강조할 때, 그들은 새로운 링크들과 요소들을 부가함으로써 성장하는 하이퍼텍스트를 묘 사하고 있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과 텍스트에 대한 그의 유명한 구별 을 할 때, 그는 인쇄매체의 책 형태로 쓰는 것과 컴퓨터로 쓰는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한 완벽한 성격규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1992:24)
비록 인쇄된 책의 형태를 통한 것이긴 하지만 데리다는 {글라}(Glas)라는 책에서 텍스트의 선형적 진행이라는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이 책의 각 페이지들은 두 열로 구분되어 있으며, 왼쪽이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이며 오른쪽은 쟝 쥬네에 대한 논평으로 되어 있다.) 이미 데리다는 {오브 그래머톨로지}(Of Grammatology)에서 비선형적 글쓰기가 선형적 진행이라는 형식의 확립에 의해 억압되어 왔다고 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예상했다 (86). 그 새로운 방식이, 데리다는 비록 예상하지 못했지만, 바로 하이퍼텍스트로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하이퍼텍스트성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텍스트성 개념 그 자체의 발생과 확산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맥락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딘(Jaishree K. Odin)은 선형적(linear), 동음적(univocal), 폐쇄적(closed), 권위적(authoritative) 미학으로부터 비선형적(nonlinear), 다음적(multivocal), 개방적(open), 비위계적(non-hierarchical) 미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탈식민주의적(postcolonial) 미학과 하이퍼텍스트적 미학이 동일한 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599). 즉 서구의 메타서사들(metanarratives)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되었던 차이들과 분열들을 회복시키는 것이 탈식민주의 전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차이들과 분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하이퍼텍스트성을 기본으로 하는 최근의 정보문화의 특징인 것이다. 이 경우 하이퍼텍스트성은 "혼합"(hybrid) 혹은 이질적 인 혼성(heterogeneity)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혼합"과 "혼성"은 유희성(playfulness)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1. 모던/포스트모던 소설과 하이퍼텍스트성
하이퍼텍스트성의 문학적 적용은 하이퍼텍스트 픽션으로 구체화되기 이전에는 유희적인 다양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들로 시도되었다. 볼터는 양방향 혹은 상호작용적(interactive) 픽션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형성은 기존의 확립된 예술과 문학의 구조를 해체하려고 했던 다다이스트들의 실험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태동된 것으로 본다.
다다는 현대(모던)적 실험의 의지를 보여주는 초기의 영향력있는 예 이다. 현대(모던)적 공격은 종종 사건들의 분명하고 설득력있는 리듬 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실주의적 소설의 관습들을 겨냥했다. 공격의 과정에서 현대(모던) 저자들은 인쇄된 페이지의 제한들을 극 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쇄된 책의 선형적-위계질서적 제시가 사실주의적 소설의 플롯과 인물들의 관습에 대단히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설의 형식을 공격하는 것은 또한 인쇄의 기술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1991:131)
영문학사에서 그와 같은 사실주의적 소설 양식, 즉 "인쇄된 책의 선형적-위계질서적 제시"에 대한 비판과 실험은 이미 18세기 소설의 발생 시기때부터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로렌스 스턴(Lawrence Sterne)의 {트리스트램 쉔디}(Tristram Shandy)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사건들의 일관된 서사적 전개에 대한 공격이며 동시에 제시의 방식, 즉 글쓰기와 인쇄의 기술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스턴은 소설 형식의 고갈 혹은 종언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전자적 글쓰기를 예시한 면이 있다.
또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Ulysses)와 같은 작품에 보이는 "거듭 쓴 양피지 사본"(palimpsest)적 글쓰기도 전자적 텍스트를 예시한 점이 있으며,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작품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볼터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문학이 결론적인 종결, 단일한 스토리라인과 대단원에 구속 되어 있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으로 본다. 문학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증 식하기 위해서, 가능성들을 차단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으로 써야만 할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와 같은 픽션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생 산할 수는 없다. ... 보르헤스 자신은 텍스트가 발산하고, 수렴하고, 평행 하는 시간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전자적 공간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인쇄매체에서의 문학의 고갈이 결코 전자적 매체를 고갈 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1991:139)
그 외에도 트래비스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파도}(The Waves)에서의 인물들이 느슨한 웹으로 연결된 단자(monad)들로서 모던/포스트모던 픽션들의 실험들 중의 하나이며, 거투르드 슈타인(Gertrude Stein)의 {미국인들의 제작}{The Makings of Americans)도 연상적이고, 반위계질서적인 구성으로 된 산문 편린들의 묶음이라는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픽션을 예시한 면이 있다고 보고, 또한 토마스 핀쳔(Thomas Pynchon)의 {중력의 무지개}(Gravity's Rainbow)는 하이퍼텍스트적으로 백과사전적이며, 블라디머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창백한 불}(Pale Fire)도 단순한 선형적 진행을 방해하는 구조이며,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만약 어느 겨울 밤 여행자가...}(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도 10개의 서사적 통로를 제시하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하이퍼텍스트성을 활자매체로 시도한 예들이 된다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117-18).
하이퍼텍스트는 시작과 끝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발상을 전환하기를 요구한다. 시작이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적 지속과 공간적 연장을 예상하는 과정의 최초 지점(시간, 공간, 활동)이다. 하이퍼텍스트의 경우에는 시작의 지점은 읽기를 시작하는 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한 다양한 지점들에서 텍스트를 끝낼 수 있으며 텍스트를 첨가하고 확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는 전통적인 완성이라는 개념을 훼손한다. 기존의 활자매체에 의한 문학작품들 중에서 앞에서 예로 든 실험적인 모던/포스트모던 작품들은 그와 같은 점에서 하이퍼텍스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19세기 영국시에서도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의 {인 미모리엄}(In Memorium)이 선형적인 내러티브 형식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소네트의 약강 5 음보(iambic pentameter)의 통사적 구문(syntaxis)과는 달리 중세의 밸라드의 병렬(parataxis)형식도 넓은 뜻에서의 하이퍼텍스트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인쇄매체에 의해서도 시도된 그와 같은 하이퍼텍스트적 소설이나 시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하이퍼텍스트의 개발과 이론화작업에 의해 가능하게 된 점도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성 그 자체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랜도우가 우려하듯이 그와 같은 논의는 선형성을 기본적인 요건으로 하고 있는 내러티브가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성에 의해 받게 된 도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182-183).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핵심적인 논의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선형성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인가? 비선형성(non-linearity)의 추구는 어떠한 문화적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비선형성의 추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어떠한 사회적 동인 때문인가?
2. 내러티브와 비선형성의 관계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내러티브가 하나의 "메타약호"(metacode)라고 말한다(1-2). 이것은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인간의 의미화 과정의 기본적인 전제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라는 말은 일종의 모순어법(oxymoron)인가? 료타르(Jean Francois Lyotard)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incredulity toward metanarrative) (xxiv)이라고 한 것은 비선형성을 특성으로 하는, 다른 말로 하면 내러티브의 기본을 해체하는 하이퍼텍스트성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한 속성이라는 점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논의는 내러티브와 문화 사이의 관계, 내러티브와 지식 사이의 관계 등을 포함하는 넓은 뜻에서의 내러티브론 혹은 서사학 (narratology)의 맥락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이퍼텍스트 이전의 비선형적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선형성을 부인한 이유는 선형성이 본래의 체험을 왜곡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선형적 내러티브가 세계와 체험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왜곡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로렌스 스턴이나 테니슨이 단편화 수법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랜도우는 테니슨의 {인 미모리엄}이 내러티브와 그것에 기초한 문학형식에 도전함으로써 전자적 하이퍼텍스트를 예견했다고 말한다.
{인 미모리엄}은 간결한 서정시들이 [친구를] 잃고 난 이후의 자신을 희롱했던 무상한 정서를 가장 잘 구현한다는 것을 알았던 테니슨이 관 습적인 비가와 내러티브가 독자에게 비애와 수락의 체험들에 대해 지나 치게 통일된, 따라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변형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둘 을 거부했음을 보여준다. 단편들로 된 비선형적 시를 창조함으로써 테 니슨은 {인 미모리엄}의 독자를 비애와 절망으로부터 회의를 거쳐 희망 과 신앙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각 단계마다 집요한, 대조적 정서들이 틈 입하여, 신앙의 한 가운데에서도 회의를, 해결의 한 가운데에서도 고통 을 직면하는 것이다. (54)
그런데 연대기(chronology)와 연속성(sequence)에 대한 회의는 동시성(simultaneity)에 대한 체험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내러티브를 "탈연대기화"(dechronologize) 하는 일, 즉 "시간에 대한 선형적 재현"(the linear representation of time)을 극복하는 것이 현대의 내러티브 이론의 경향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30).
물론 독자로서의 우리는 분리된 부분들로부터 하나의 전체적 이야기를 직조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 환경에서는 선형성의 결여가 내러티브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독자들은 언제나 특히 이 환경 속에서, 그들 나름의 구조들, 연속성, 의미를 구성하고, 따라서 스토리를 읽거나 읽으면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놀랄만하게 전혀 어려움이 없다"라고 말한다 (197).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자적 텍스트 시대에서의 활자매체 책의 위상과 의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문학과 연관해 볼 때, 책이라는 물리적인 형태는 단지 저자의 기록을 보관하는 중립적이고 정태적인 용기가 아니라 내러티브 그 자체에 일정한 형성적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이퍼텍스트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퍼텍스트가 문학이론과 문화이론을 검증하는 특별한 효율적인 수단이 된다고 보고 "선형성에 기초한 내러티브와 모든 문학형식에 도전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플롯과 스토리 전개에 관한 생각들을 의문시한다"고 말하는 랜도우의 관점은 옳다 (181).
Ⅳ
1.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특성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물리적인 책의 형태가 아니라 컴퓨터 화면으로만 읽게 된다는 점과 저자와 독자가 대단히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활자매체에 의한 내러티브와는 다른 문학적 유형이다.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하이퍼픽션:컴퓨터를 위한 소설들]('Hyperfiction:Novels for the Computer')이라는 글에서 "하이퍼픽션은 새로운 내러티브 예술 형식이다. 단지 컴퓨터 상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으로서, 발전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미디어 기술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8).
하이퍼텍스트 픽션을 쓰고/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미국의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Eastgate Systems)사에서 제작하여 판매하는 "스토리스페이스"(Storyspace)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쓰고/만드는 방법이 있다.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글을 쓰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가까운 장래에 "스토리스페이스"와 같은 방식의 프로그램이 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플라피 디스켓이나 시디롬으로 제작되는 하이퍼픽션의 창작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에서도 우리말로 된 하이퍼픽션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월드 와이드 웹은 하이퍼픽션을 수용하는 장소가 된다. 사실 "스토리스페이스"와 같은 소프트웨어가 없어도 하이퍼텍스트 마크 업 랭귀지(html)를 이용하여 웹 상에 하이퍼픽션을 올릴 수 있다. 하이퍼픽션들은 대부분 밑줄, 굵은 글자체 등으로 하이퍼텍스트의 다른 부분과 연결될 수 있는 낱말들이나 귀절들을 알려준다. 강조된(하일라이트된) 그 앵커들을 클릭하여 다른 등장인물들이나 다른 이야기 줄기로 건너간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며, 빠져나오는 통로를 찾을 수도 있다. 전통적인 기존의 활자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가지게 되는 기대, 즉 이야기의 질서 혹은 플롯을 파악하려는 의지와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동기 등에 대한 호기심을 하이퍼픽션도 이용하지만, 선형적으로 읽게 하지 않고 다양한 반응들을 야기하게 하며, 특정의 통로를(강조된 부분들을) 선택하게 함으로써(클릭하여) 다른 무수한 부분들과 상호연결되도록 한다. 양방향적/상호작용적 소설이 아닌 전통적인 소설은 단선적인 방향으로,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양방향적/상호작용적 소설은 언제나 어느 방향으로나 진행된다. 독자는 "다음에는 무엇을 읽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계속 대답해야 한다. 즉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2.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예: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의 {오후, 하나의 이야기} (Afternoon, a Story)의 경우
인쇄매체에 의존하는 소설에서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선형적인 내러티브의 유형들이 시도되었다. 다시 말하면 종결을 향하는 서사적 산문의 구조적 속성에 대한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하이퍼책(hyperbook)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위적/실험적 소설들이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 하나의 이야기}라는 하이퍼(텍스트)픽션의 향방을 예시한 점이 있다.
마이클 조이스는 "스토리스페이스"라는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의 계발자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스토리스페이스"는 전통적인 텍스트를 쓸 때 이용하는 연필이나 타자기와 같이 하이퍼텍스트를 쓰는 수단인데, 미국의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에서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최초의 본격 하이퍼텍스트 픽션 작가인 조이스는 {오후, 하나의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많은 다른 페이지들 속의 문단들이 또 다른 페이지들 속의 문단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1995:31). 이것이 인쇄된 책에 의해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문단을 이동할 수 있는 일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이스의 방식은 저자가 미리 정해놓은 일정한 계획과 구도 속에서 독자들이 문단에서 문단으로 이동해 나가는 것이므로, 랜도우가 지적하듯이 저자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 모더니즘의 강령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79).
물론 최초의 하이퍼텍스트 픽션들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인쇄된 책의 형태로 구입하여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를 통해 플라피 디스켓 안에 입력된 형태로 판매되고 있다.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에서 발행하는 카탈로그에는 "전자 픽션의 고전. 복합적이고 풍부한 상상의 산물로서, 이 작품은 어느날 오후, 피터라는 사람이 몇 시간 전에 본, 사고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차가 자신의 전처가 소유했던 차인 것 같다고 추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라는 간략한 해설이 첨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한 가지 방식의 읽기에 의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짧은 삽화들로 구성되는데, 각 삽화는 낱말, 문장, 문단으로 되어 있다. 독자가 키 보드로 입력하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여 방향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삽화들 사이의 연결의 하이퍼텍스트적 네트워크이다. 물론 독자가 스토리를 실제로 변경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게 되는 첫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보인다.
I try to recall winter. "As if it were yesterday?" She says, but I do not signify one way or another.
By five the sun sets and the afternoon melt freezes again across the blacktop into crystal octopi and palms of ice--rivers and continents beset by fear, and we walk out to the car, the snow moaning beneath our boots and the oaks exploding in series along the fenceline on the horizon, the shrapnel settling like relics, the echoing thundering off far ice. This was the essence of the wood, these fragments say. And this darkness is air. "Poetry" she says, without emotion, one way or another.
Do you want to hear about it?
문장들 아래에는 화살표와 "예"/"아니오" 등의 몇 가지 표식들이 있다. 만약 "예"를 택하여 마우스로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떠오른다.
She had been a client of Wert's wife for some time. Nothing serious, nothing awful, merely general unhappiness and the need of a woman so strong to have friends. ...
그러나 "아니오"를 택하면 다른 삽화가 출현한다.
I understand how you feel. Nothing is more empty than heat. Seen so starkly the world holds wonder only in expanses of clover where the bees work. ...
또한 문장들 속의 어떤 낱말을 클릭함으로써 다른 삽화들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스토리의 네트워크에는 500개 이상의 삽화들과 900개 이상의 지선(支線)들이 있다. 한 삽화에도 대개 6 개 이상의 지선들이 있다. 이 스토리는 모호한 사건, 사고가 난 차에 내레이터의 아들이 타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한 일종의 미스테리적 추적의 과정이 독자의 읽기의 과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볼터는 이 작품을 해설하면서 이 작품 그 자체가 "독서행위의 알레고리"(an allegory of the act of reading)라고 말한다(1992:29). 이 작품에 대해서 아세스(Espen J. Aarse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후}는 소설과의 단절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대조적으로, 오랜 실험 적 문학의 전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실험적 문학의 주된 전략 들 가운데 하나는 내러티브에 대한 전복과 저항이다. 세르반테스로부터 누보 로망에 이르기까지 소설("새롭다"는 슃인 [나블])은 언제나 반(反) 장르였으며, {오후}는 그것을 확인하는 가장 최근의 예인 것이다. (71)
3.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유형들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에서 만든 카탈로그에는 다양한 하이퍼텍스트 픽션과 하이퍼텍스트 난픽션들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후, 하나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스튜아트 멀스롭 {승리의 정원}(Victory Garden), 팀 맥래플린(Tim McLaughlin)의 {절대적 영(零)을 향하여}(Notes Toward Absolute Zero), 에드워드 팰코(Edward Falco)의 {악마들과의 꿈}(A Dream with Demons), 디나 라슨(Deena Larson)의 {마블 스프링스}(Marble Springs), 그리고 마이클 조이스의 {황혼, 교향곡}(Twilight, A Symphony 등을 찾을 수 있다.
랜도우는 다양한 유형의 하이퍼텍스트 픽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크게 4 가지 양식의 대조적인 방식들로 (8 가지 유형들을) 분류한다. (1) 저자의 힘이 배가되는 유형도 있지만 캐롤린 가이어(Carolyn Guyer)의 {핑계}(Quibbling)와 같이 저자가 독자와 함께 저자로서의 힘을 공유하는 방식, (2) 저자가 정해 놓은대로 본질상 하나의 주된 내러티브를 독자가 구성하거나 발견하는 마이클 조이스와 같은 방식도 있지만 독자가 주어진 전혀 다른 스토리들의 묶음이나 내러티브의 단편들로부터 하나 이상의 스토리를 직조해 내는 방식, (3) 아무리 암시적일지라도 주로 허구적인 렉시아(lexia)들로 이루어진 스토리들과 내러티브를 이론이나 난픽션 재료들과 함께 직조하는 스토리들, (4) 저자 자신의 창조적인 글쓰기로부터 전적으로 유래한 허구적 하이퍼텍스트와 저자가 다른 많은 작품들의 틈 속에서 작업을 한 텍스트 등이다 (180).
"탐색적"(exploratory) 하이퍼텍스트와 "구성적"(constructive) 하이퍼텍스트를 구별하는 마이클 조이스의 관점을 응용하여 탐색적 하이퍼픽션과 구성적 하이퍼픽션을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선택하는 연결들에 따라 텍스트가 스크린 상에서 달라지지만, 하이퍼픽션 그 자체는 그 모든 다양한 읽기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불변인 채로 있는 것을 단순한 "탐험적" 하이퍼픽션으로, 독자에 의한 삽입으로 적층적인 하이퍼픽션의 형성이 가능한 것을 "구성적" 하이퍼픽션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조이스는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하이퍼텍스트를 그것의 활동에 따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적 하이퍼텍스트는 전개되는 지식의 체제 내에서 특정의 조우(遭遇)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네트워크, 회의, 강의실, 혹은 전자적 텍스트의 다른 형태들과 같이, 구성적 하이퍼텍스트들은 '생성중인 것의 번안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한 구조'이다"(1995: 177-79)라고 말한다. 플라피 디스켓(혹은 시디롬)의 형태로 제작/판매되고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하이퍼픽션 외에도 월드 와이드 웹 상에 올려진 하이퍼픽션들 중에서, 특히 "구성적" 하이퍼픽션의 형태는 저자/독자들의 상호작용과 공동창작을 통해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쿠버가 시작한 {하이퍼텍스트 호텔}(Hypertext Hotel)은 공동창작적인 "구성적" 하이퍼픽션의 한 예이다.
하이퍼픽션의 형태들은 우선 조이스의 {오후, 하나의 이야기}와 같이 재현의 방식보다 스토리/텍스트 중심인 "고전적" 하이퍼픽션(월드 와이드 웹에 온라인된 것도 있지만 플라피 디스켓의 형태로 판매되고 있는 방식)과 "현대적" 하이퍼픽션, 즉 텍스트가 그래픽이나 색채, 소리, 비디오 등과 연결된 형식(아직은 온라인된 것이 많지 않으며, 판매되기 위해 제작되는 것도 별로 없는 방식)으로 구별될 수도 있다. 그리고 "구성적" 하이퍼픽션도 "모험선택" 하이퍼픽션과 "공동창작" 하이퍼픽션으로 구별될 수 있는데, 전자는 각 페이지 끝에서 독자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며, 후자는 독자가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삽입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저자/편집자의 결정에 따라 독자가 쓴 것이 텍스트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독자에 의해 부단히 수정되고 가감될 수 있도록 완전히 열려 있는, 즉 "구성적"인 공동창작 하이퍼픽션들이 많이 있을 수 있겠으나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시도되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와 첨가를 상당히 제한하는 하이퍼픽션들은 웹 상에 온라인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저자가 진행 중인 픽션에 첨가될 수 있는 글의 방향을 미리 정해 놓고 관리하는 웹 매스터 혹은 웹 디자이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앞으로의 글쓰기는 "구성적"인 공동창작적 하이퍼픽션의 제작과 비슷한 방식, 즉 원고지/타자기/키보드 앞에 "홀로" 앉아서 쓰는 작업이 아니라, 동아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상호네트워크 작업/인터넷 작업을 하는 멀티 미디어 공동 저작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디지털 하이퍼픽션과 "디지털화한" 픽션이 구별될 수 있다. 둘 다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읽을 수 있으나 후자는 프린트해서 읽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화한" 문학형식, 즉 전자적 텍스트로 된 작품은 종이 위에 프린트하여 읽을 수 있으나 "디지털" 문학형식은 단지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서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엄밀한 뜻에서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디지털" 문학형식을 뜻하는 것으로 쓰는 편이 좋겠다. 즉 디지털 하이퍼픽션이라는 용어에서의 "디지털"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존 맥다이드(John McDaid)의 {엉클 버디의 유령의 집}(Uncle Buddy's Phantom Funhouse)과 같이 언어 텍스트와 상호작용적 비디오를 결합하는 하이퍼미디어적 작품도 시도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 사에서 나온 대부분의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주로 언어적인 것이었는데, 보다 더 복합적인 멀티미디어적 소프트웨어가 응용됨으로써 소리와 이미지, 그리고 동영상이 가미된 상호작용적 픽션의 형태로 변모되는 경향이 있다.
4.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한계
다양한 하이퍼픽션들을 월드 와이드 웹을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웹 상에서는 프린트 문화에서 중시되었던, 질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선별하는 작업자(심사위원/편집자)가 없어진다. 이러한 변화가 해방적인 과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질적 수준이 의심스러운 텍스트들의 범람이 문제가 된다. 사실상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하이퍼픽션들은, 특히 월드 와이드 웹에 올려진 온라인 상태의 것들은 (이스트게이트 시스템스사에서 제작하고 판매하는 플라피 디스켓으로 된 것들 중에는 예외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하이퍼텍스트성 그 자체에서 나오는 특이한 형식적 속성만이 두드러질 뿐 그 외의 미학적 요소들이 간과되고 있는 편이다.
하이퍼텍스트의 특수한 속성을 "비선형성"에서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활자 매체의 선형적 구조와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비선형성은 다선형적, 다중심적, 반위계질서적인 글쓰기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하이퍼텍스트성의 핵심이다. 그런데 하이퍼픽션도, 물론 새로운 형태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체로 서사적인 글쓰기를 우선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체의 특성에 대한 물음과 함께 활자 소설의 경우와 같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하이퍼텍스트 픽션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즉 픽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의 동기는 무엇인가? 사건들은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인가? 요컨대 이야기를 읽을만한 "재미"가 있는가? 등이다.
그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하이퍼텍스트가 과연 독자와 저자를 특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효과를 가지는가? 즉 저자와 독자를 구별하는 활자문화의 개인주의적 방식을 해체하고 저자와 독자가 보다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적 구술문화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가? 등의 물음도 제기된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하는 자가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내에서 토로한 것에 대해, 구술문화에서의 관객/청중이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듯이, 읽는 이가 클릭을 하여 이야기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물론 독자가 겉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 모든 선택의 가능성들이 이미 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통제는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육용의 하이퍼텍스트 방식도 인덱스, 각주, 참조물들, 참고문헌들의 목록 등을 통해, 철저한 연구라는 일종의 착각을 만들어내고 있는 백과사전과 같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쉽다. 이 점은 인터넷 상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자칫 가지기 쉬운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이다.)
또한 탈중심적인 이야기의 성격 그 자체에 의해 독자는, 해방된다기보다는, 방향감을 잃고 당혹스럽게 되는 때가 많다. 힐마 슈문트(Hilmar Schmundt)는 하이퍼픽션을 포함한 하이퍼텍스트 방식에서의 "텍스트 분절들의 간결성은 탈산업주의적 정보 사회의 분리된 피상성에 필적하는 것같다"(311)고 진단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정된 선형적 텍스트의 통일성과 일관성이 해체되면 동시에 도덕도 붕괴된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플롯과 도덕성 혹은 이데올로기를 연관시키는 헤이든 화이트가 말하는 내러티브성 혹은 서사성(narrativity)은 실제의 사건들에 허구적인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허구적 일관성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는 다양한 실험들이 모더니스트 작가들에 의해서도 진행되었고, 포스트모더니스트 픽션으로 활성화된 셈이다.)
Ⅴ
하이퍼텍스트는 멀티미디어와 만나는 것이, 즉 하이퍼미디어가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이퍼미디어와 하이퍼텍스트는 서로 연결된 문서들과 다양한 미디어들로 이동할 수 있게 지정된 매체를 뜻하는 "하이퍼링크"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이퍼픽션도 하이퍼미디어 픽션이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자가 소리와 그림과 영상 이미지와 결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새로운 문학형태 혹은 문학의 확장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이미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다른/새로운 예술양식으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트래비스가 말하듯이, 하이퍼텍스트 픽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가상현실기술에서 나온다.
마리-로르 라이언(Marie-Raure Ryan)이 지적하듯이, 가상현실 체험의 힘은 "신체의 중개를 통한 상호작용성과 몰입"의 화해로부터 나온다. 한편 문학에서는, 인쇄 텍스트이건 하이퍼텍스트이건 간에, 독자가 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체험할 수는 없다. 픽션 작품이 몰입적이면 몰 입적일수록(독자가 불신을 중지할 정도로 생생하면 할수록) 그것은 상호작용적인(텍스트적 구성으로서의 픽션 그 자체에게로 관심을 기울 이게 하는 메타픽션적인) 것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어진다. 비록 포스트 모던 인쇄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 픽션이 텍스트적 의미의 구성에서의 독자 자신의 능동적인 역할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높은 정도의 상호작용성을 촉진시킨다고 할지라도, 픽션의 이와 같은 상호 작용적 형식들은 종종 허구적 세계 속에 몰입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127)
하이퍼텍스트가 실질적인 예술의 형식이 되기 위해서는 가상현실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는 판단은 옳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래픽, 오디오, 영상 등과 같은 다양한 매체들과 결합해야 한다. 또한 독자가 텍스트를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인 실행자가 될 수 있도록 독자에게 상호작용성의 기능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사실주의적 소설이 성취하는 것과 같이, "상상된 현실 속으로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미적 즐거움"과 가상현실 기술의 목표가 되는 "상상된 현실 속에서의 행동의 즐거움"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미성숙 단계인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이러한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율겐 파우스(Jurgen Fauth)는 "하나의 인공물, 세계 내의 한 사물로서의 예술은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행한 수많은 창조적 선택들의 결과물이다. 이 선택들은 창조적 정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며, 목적을 지닌 것이다. 예술가가, 이 경우엔 작가가, 이러한 선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하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독자에게 넘겨버린다면, 그의 작품은 독자의 힘을 증강시키거나 민주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다른 가능성들을 폐기하고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하나의 인공물이 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가능성들을 다 포함시킴으로써 그 작품에는 실제적인 하나의 형태가 없게 되며 혼합(하이브리드)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라고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하이퍼픽션을 읽는 과정도, 즉 다양한 연결고리들을 선택하여 나름대로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결국 하나의 선형적 텍스트를 구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읽는 때에 따라서, 다른 선형적 텍스트가 되는 결과를 낳게 되긴 하지만. 즉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은 "비선형적"이라기보다 "선택적"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맞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를 읽는/보는/듣는 과정은 시간적인, 결국 순차적인, 과정이다. 물론 하이퍼텍스트는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단일한" 선형적인 순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선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전자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알파벳을 능가할 것이며, 전자기술이 지구촌 사람들의 친밀도를 강화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지만 전자문화는 공동체 의식을 오히려 약화시키고 각 개인의 단절과 고립을 조장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습적인 책의 형태로 된 텍스트의 선형적인 구조를 해체하는 하이퍼텍스트는 그 선형적인 구조를 매우 억압적인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 다시 말하면 일련의 서사적 순서를 따르는 이야기의 진행을 힘겨워하는 사람들, 두툼한 책의 첫 장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장까지 차례대로 읽어나가는 일을 힘들어 하는 조급한 사람들, 리모우트콘트롤로 텔레비젼의 채널들을 파도타기하듯이 바꾸는 것(채널 서핑)에 익숙한 사람들은 클릭을 통한 읽기/보기, 즉 하이퍼텍스트성을 활용한 일종의 "문학적인 MTV"를 당연히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형성이 우리의 삶에서 불가피한 것임은 새삼스럽게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존 바스(John Barth)는 "우리의 인생 체험의 대부분이 비선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인생 체험의 중요한 일부는 결국 대단히 선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판명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지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시간은 연속을 함의하며, 연속은 곧 서사를 발생시킨다. ... 그리고 우리의 인생 체험의 양상들 중에서 공교롭게도 선형적 특성을 지닌 양상들의 경우, 오로지 활자 매체만이 적절한 표현수단이 된다"고 말한다(43). 물론 하이퍼텍스트 픽션은 새로운 문학 혹은 예술 양식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부산외대)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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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Hypertext Fiction
Chung, Hyung-Chul
The term "hypertext," coined by Theodor H. Nelson in the 1960s, refers to non-sequential writing that exists on-line in a computer. Unlike printed text, hypertext allows readers to move from one node to another in a non-linear fashion. This electronic or digital environment of hypertextuality promotes an interactive relationship between writer and reader. Hypertextuality, most of all, disturbs our linear notion of literary narratives. Hypertext fiction or hyperfiction is a new literary form that subverts the conventions of the realistic novel.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concept of hypertexuality in terms of the postmodernist/poststructuralist critique of modern ideas of hierarchical control, linearity, and unity. In fact, the most significant poststructuralist ideas such as Roland Barthes' "writerly text," Julia Kristeva's "intertextuality," and Deleuze's "rhizome" can be clarified by an experience of reading hypertext fictions. I also attempted to identify the defining characteristics of hypertext fiction. In a sense, hypertext fiction like Michael Joyce's Afternoon, a Story resembles several pre-hyperfictional experimental narratives of modern/postmodern writers scuh as James Joyce, Thomas Pynchon, Italo Calvino and others. The absence of narrative closure in hypertext fiction can easily force readers to drift into the state of aimlessness and repetition. The inclusion of extra-linguistic texts such as images, sound, motion in hypertext fiction, however, will eventually conribute to the development of a new mode of literary narr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