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한국의 북
한국에서 맨 처음 북이 쓰인 흔적은 고구려의 안악3호분 벽화의 주악도(奏樂圖)와 행렬도(行列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후 고려 때 당악과 아악이 들어오면서 장구·교방고·진고 등 여러 종류의 북이 궁중음악에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 전통음악에 쓰이는 북의 종류는 다양한데 그중 흔히 쓰이는 북은 다음과 같다.
①
노고(路鼓):붉은색을 칠한 긴 북통 2개를 위아래로 겹쳐 북면이 4개인 북으로 틀에 고정시켜 쓴다. 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 등 제사 때 신을 맞이하는 음악에 쓰인다. 1116년(예종 11)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아악에서는 입고(立鼓)가 쓰였는데, 노고와 입고가 같은 악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②
노도(路鼗):노고와 같은 모양이지만 노고보다 작다. 북통에 추를 단 끈을 달아 긴 대를 좌우로 회전시킬 때마다 추가 북면을 때려 소리를 낸다.
③
뇌고(雷鼓):원추형 통의 넓은 면에 가죽을 댄 6개의 북통을 둥글게 모아 틀에 매단 북이다. 원단(園壇)·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 등 천신의 제사 때 헌가에 쓰였다. ④
뇌도(雷鼗):작은 북통 3개를 겹쳐 북통 중앙에 긴 장대로 꿰어 세운 북이다. 뇌고와 함께 편성된다. ⑤
영고(靈鼓):8개의 작은 북을 원형으로 묶어 틀에 매단 것이다. 사직(社稷)의 강신악에 쓰였다.
⑥
영도(靈鼗):4개의 북을 십자 모양으로 번갈아 기둥위에 세워 8면을 칠 수 있는 북이다. 영고와 함께 편성된다. ⑦
건고(建鼓):호랑이 모양의 발을 십자형으로 만들고 대를 세워 그 중간에 북통을 놓고 붉은 칠을 한 4각형의 방개(方蓋)를 2개 세우고 비단휘장을 두른다. 맨 위에는 1마리 백로 조각이 올려져 있다. 북 중에 가장 높으며 화려하다. 궁중 회례악을 시작할 때 연주한다. ⑧
삭고(朔鼓):궁중 의식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북으로 헌가의 서쪽에 두고 건고는 중앙, 응고(應鼓)는 동쪽에 둔다. 틀 위 중앙에 해를 상징하는 흰 원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⑨
무고(舞鼓):교방고(敎坊鼓)라고도 한다. 〈악학궤범〉에 당악기로 소개되어 있다. 3개의 기둥으로 된 틀 위에 올려놓고 쓴다. 궁중정재 때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무고를 무대 중앙에 놓고 무용수가 북채를 들고 친다. ⑩
중고(中鼓):제례악에도 썼으며 용고와 함께 군악에도 쓰였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4개의 다리로 된 틀 위에 올려놓고 쓴다.
⑪
좌고(座鼓):양면의 납짝한 북을 틀에 걸어놓고 앉아서 치기 때문에 좌고라고 하며 관현합주·관악합주·무용반주 등에 쓰인다. 장구가 북편을 칠 때 함께 친다. ⑫
절고(節鼓):비교적 큰 북통에 가죽을 씌워 북틀 위에 올려놓고 한쪽 면만 친다. 음악의 시작과 끝에 치는데 음악의 중간에 칠 때는 문묘제례악의 사자일구(四字一句)의 한 소절 끝박마다 2번씩 치고, 종묘제례악의 보태평(保太平)은 악절마다 첫박에 1번 친다. ⑬
진고(晉鼓):〈악학궤범〉에 의하면 4기둥의 북틀 위에 북을 올려놓고 옆에서 치며, 북 중에 가장 크다. 종묘제례악·문묘제례악에 쓰여 헌가에 편성된다.
⑭
용고(龍鼓):북통에 용을 그려놓아 용고라 했으며 북통에 박힌 3개의 고리에 끈을 묶어 허리와 어깨에 둘러메고, 2개의 북채를 가지고 서서 친다. 용고는 태평소·나발·징·자바라·나각과 함께 대취타(大吹打)에 편성된다. ⑮
갈고(鞨鼓):양장고(兩杖鼓)라고도 한다. 장구와 크기·모양이 비슷하지만 장구와 달리 양면의 가죽이 얇고 두 손에 채를 들고 친다. 소리를 조절하는 축수(縮授)가 양쪽에 있다.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장구와 함께 쓰였다. ⑯
장구[杖鼓]:양쪽 북면이 크고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북면은 흰 말가죽을 쓰며 양편 가죽둘레 원철에 쇠고리인 구철을 걸어서 붉은 색실로 만든 축승(縮繩)을 얽어매고 축수를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⑰
소고(小鼓):북통에 손잡이가 있어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북채를 쥐고 친다. 농악에서는 춤을 추며 매 장단에 첫 박만을 친다. ⑱
소리북:판소리 반주에 쓰이는 북으로 고장북이라고도 한다. 고수가 소리북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고 창자(唱者)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소리북은 나무로 만든 북틀에 흰 가죽을 씌워 만드는데 호남지방에서는 가죽의 흰색을 그대로 쓰고 중부지방에서는 채색을 해 쓰기도 한다. 왼편은 맨손으로 치며 나무채를 가지고 오른편을 치거나 북통의 밑언저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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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
풍물북 |
벅구 |
사물북 |
통북 사물북 |
작은 북통의 양면에가죽을 씌워 만든 것인데, 풍물놀이와 여러 가지 무용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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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오동나무 북통이다. 가죽을 씌워 가죽줄로 얽어서 만든 북이며 영남지방의 북은 좀 크며 풍물놀이 할 때 많이 쓰인다. |
소고보다 조금 크며 손잡이가 없다. 역시 풍물놀이에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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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당겨도 늘어지지 않는 로프줄로 얽어서 쐬기를 줄 밑에 넣어 만든 북이며 사물놀이에 주로 사용된다 |
원통의 속을 파내고 원통 그대로 만든 사물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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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북 |
통북 소리북 |
소리북 |
승무북 |
우피장구 |
무속인이 주로 사용하는 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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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조선 중엽이후 성행된 판소리에 사용된 악기다. 소리하는 자의 흥을 돋우며 장단을 잡아가는 고수가 사용하던 이 악기는 굿과 같은 제의에도 징과 함께 사용된다. |
북통에 가죽을 싸서 만든 북으로 판소리 반주에 쓰이며 일명 고장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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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질감을 그대로 사용하여 장식이 무궁화 조각으로 되어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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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궁중음악), 정악, 산조, 시나위, 풍물놀이, 민요, 춤장단 등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며 중앙아시아 서역 계통의 악기로 중국을 통하여 고려때 들어왔다. |
3.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북
보물 제495호 고성 옥천사 청동북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이다.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반자는 지름 55㎝, 너비 14㎝로, 표면에 굵고 가는 선으로 4개의 테두리를 둘러 4개의 원을 만들었다.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돌출 되어 있으며, 그 다음 원에는 연꽃잎이 겹쳐서 도드라지게 새겨있다. 가장 바깥 원에는 덩굴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안쪽의 원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옆면은 중앙에 굵게 돌출된 선이 있어 위 아래로 구분되고, 선 위로 둥근 모양의 고리가 3개 있어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다. 옆면 위쪽에 쓰인 글로 미루어 보아 고려 고종 39년(1252)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자는 처음부터 옥천사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옥천사에 보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반자는 무늬가 뚜렷하고 손상이 없으며, 옆면의 글을 통해 만든 시기와 유래, 관계자의 성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 제576호 봉업사명 청동북
이 반자는 지름 61㎝, 너비 12.9㎝로 비교적 큰 반자이고, 표면의 장식 문양도 특이하다. 3줄의 돌출선을 돌려 3개의 원으로 나누었다. 중심원에 9개의 둥글게 돌출된 연꽃 열매가 있고, 주변에 8장의 연꽃잎이 있다.
가운데 원에는 24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바깥쪽 원에는 네 곳에 구름 무늬가 있으며, 가장 자리에 꽃봉오리 무늬가 새겨져있다. 옆면에는 중간에 돌출선을 돌리고 그 선 위에 3개의 고리를 달아 매달 수 있게 하였고, 고려 고종 4년(1217)에 만들어진 반자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씨가 있다.
무늬의 선은 약하게 새겨져 있으나, 배치에 있어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반자이다.
보물 제1141호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
이 유물들은 1989년 1월 15일 한천사경내 정비 작업중 발견된 유물로 금동 자물쇠 3점과 청동 반자가 발견되었다.
크기가 서로 다른 금동자물쇠 3점중 크기가 가장 큰 자물쇠의 상태를 보면 길이 30㎝, 신폭 3㎝로 몸체의 양단에 문양 및 장식이 있는데 주로 당초문양이며 좌우 끝에도 투각기법으로 정교하게 처리한 당초문계의 문양이 있다. 자물쇠에는 2개의 연결고리를 부착하였고, 열쇠구멍은 왼쪽부분에 설치하였다.
걸림쇠는 연꽃 봉우리로 장식 마감해 놓았으며 언뜻 보기에도 금동비녀 형식이다. 보다 자세히 보존처리를 하면 자물쇠 몸체에 화려한 선각의 문양이 확실히 출현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큰 자물쇠는 길이 18㎝, 신폭 2.4㎝이며, 몸체의 문양에는 능형각을 돌리고 안팎으로 만조(滿彫)한 물고기 알같은 어자문(魚子文)을 찍었다.
좌우 역시 당초문계나 투각을 생략한 단순장식으로 한쪽면은 부식으로 약간 파손되어 있다. 또한 걸림쇠 역시 가장 큰 것과 동일형으로 양단에 연봉으로 장식 마무리하였다.
가장 작은 자물쇠는 길이 17.5㎝, 신폭 2.6㎝이며 자물쇠의 좌우 끝에는 투각의 당초문으로 처리하고 몸체에는 어자문, 점문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몸체의 장방형 구획속에는 중앙에 어자문이 조식되고, 상하에는 점문이 화려하게 찍혀 있다.
고려시대 금동자물쇠는 매우 드문 자료로 희귀하며 특히, 이 유물은 문양이 아름답고 의장이 미술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로서 출토지가 분명한 유물이다.
청동반자(靑銅飯子)는 고려때 반자양식의 일반적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출토품은 금동자물쇠와 같이 출토된 유물로 평면은 원형이며, 이면은 22.5㎝정
도 반구(飯口)가 있으며, 그 주위를 약식화된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반자의 두께는 13㎝이고 이 부분에 한가닥의 굵은선과 두가닥의 가는선을 돌려 장식하고, 또한 3개의 고리가 고정되어 있어 반자를 달도록 되어 있으나 1개는 현재 탈락되어 있다.
(1) 금동 자물쇠
① 길이 30.2㎝, 폭 12.6㎝의 자물쇠는 몸체의 양 끝쪽에 덩굴무늬를 뚫어서 정교하게 만들었고, 열쇠구멍은 왼쪽부분에 설치되어 있다. 걸림쇠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언뜻 보기에 금동비녀처럼 보인다.
② 길이 18.2㎝, 폭 4.3㎝의 자물쇠는 몸체 양 끝쪽에 덩굴무늬가 있지만, 뚫어서 만들지는 않았다. 걸림쇠는 ①번과 동일하다.
③ 길이 17.5㎝, 폭 4.4㎝의 자물쇠는 몸체 좌우 끝의 덩굴무늬들이 전체적으로 ①번과 동일하다.
이 자물쇠는 고려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희귀하며, 문양이 아름답고 출토지가 분명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 청동 반자
반자란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일종의 타악기이다. 고려 반자의 일반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이 반자는 직경 39㎝, 입지름 22.5㎝로 입 부분에 약식화된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3개의 고리가 있어 달도록 되어 있으나 현재 1개는 없어 졌다.
보물 제1604호 영천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
금고는 신라시대부터 사찰에서 사용되어 온 악기로서 기능은 변하지 않았으나, 형태 장식문양의 표현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 왔다.
현재 고려시대 작품은 몇 점(点) 국가에서 지정되어 있으나 신라(新羅), 조선시대(朝鮮時代) 작품(作品)의 지정은 없다.
이 금고는 조선 후기에 많이 쓰였던 재질인 청동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직경 77.2㎝, 두께 12.7㎝로 큰 편이다. 표면의 공간은 큰 동심원을 그린 다음, 금고를 두드리는 자리인 당좌의 원과 안쪽 원, 바깥쪽 원으로 나누었다. 당좌는 3중의 연꽃무늬를 돌을 새김하였고, 안쪽 원에는 봉황무늬 3개와 구름무늬 3개를 배치하였다. 바깥쪽 원에는 연꽃무늬 5개와 이중의 연꽃무늬 5개을 교대로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측면에는 금고를 매달수 있도록 위쪽과 옆구리에 3개의 고리를 달았으며, 뒷면에 만든시기을 적은 글이 있다. 문양의 표현은 고려시대 금고에 비해 앞면의 문양이 두텁고 회화적이다.
금고 뒷면에 새긴 명문을 통해 1646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무늬의 각종 표현이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문양과 그 배치가 금고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전북 민속자료 제5호 선국사 대북 선국사는 교룡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서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원래는 용천사라 하다가 유사시에 나라의 태평과 전승을 기원하는 도량의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전성기에는 승려 수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하며, 지금은 대웅전, 칠성각, 요사채, 보제루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선국사 내에 있는 이 북은 법고(法鼓), 홍고(弘鼓)라고도 한다. 불교의식에 사용되었으며 북둘레 260㎝, 북길이 102㎝ 정도의 큰 북이다. 몸통은 소나무로 만들고, 쳐서 소리를 내는 양면은 소가죽으로 만들었다.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선국사가 당시의 큰 절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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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메우기)
북은 가죽을 통의 마구리에 메워서 이를 두드려 소리가 울리도록 만든 공명을 이용한 타악기로, 각종 의식과 전쟁의 진퇴를 알리는 신호를 위시하여 민속놀이, 창, 무용, 무속에서의 무구 등 다양하게 쓰여 왔다. 북은 통에 씌우는 가죽작업과 북통제작 등 크게 두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오동, 육송, 미송, 피나무, 박달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북통은 통나무를 파서 만드는 통통과 같은 크기의 쪽나무를 여러 쪽 붙여서 만드는 쪽통이 있다. 나무를 길이에 맞게 토막을 낸 후 목심부터 쪼아가면서 파 들어가 안쪽을 깎아 관통시켜 통통을 만드나, 굵은 통목을 구하기 어려워 주로 쪽통을 제작한다. 가죽은 질과 두께, 부위에 따라 소리가 좌우되는데 짐승의 원피(原皮)를 가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털 제거를 위해 석회물에 담그거나 기름기 제거를 위해 닭똥 혹은 된장물에 담그는 작업과 함께 대패질로 알맞은 두께로 만드는 무두질 작업을 거쳐야 한다.
김관식은 충남 논산시 채운면에서 30여 년 간 북을 제작해온 할아버지와 대전으로 옮겨 50여 년 간 북을 제작한 아버지를 이어 3대째 북메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북소리를 좌우하는 가죽의 선별과 가죽 처리 및 통제작 등 재래식 방법에 의한 가공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작품과 상품을 구분 제작하는 능력을 지닌 장인이다.
주제작 품목은 줄북(쐐기북), 고장북(시조, 판소리용), 밀양북(무속인용)등이지만 다른 종류의 다양한 북도 제작할 수 있다. 1989년 서울 올림픽대회 개회식에 사용한 용고와 청와대 춘추관 고각의 용고 등은 그가 제작한 북이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북메우기)
북은 고대 사회부터 제사와 주술용, 경고와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리듬과 선율 악기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북 제작의 일반적인 과정은 가죽무드질과 북통짜기 피씌우기, 고리달기, 북줄메기, 소리잡기, 칠과단청의 순서로 진행되며 조선조에는 신문고(申聞鼓)라 불리우는 대형북을 의금부 당직청에 달아 민의상달의 제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임선빈(1950년생) 기능보유자는 36년간의 북만들기 장인으로 일찍이 북공예의 대가 황용옥, 박일오, 박균석 선생에게 북공예 기술을 사사받았다. 대형북 공예가로 이름이 높으며 1997년에는 "안양시민의 소리북"(북통길이 220㎝, 울림판 240㎝)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대구 무형문화재 제2호 날뫼북춤
날뫼북춤은 대구의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는 북춤이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 모양의 구름이 날아오다 어느 여인의 비명소리에 놀라 땅에 떨어져서 동산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飛山)’라 부르게 되었고, 옛날 지방관리가 순직했을 때 백성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봄·가을에 북을 치며 춤을 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날뫼북춤은 흰 바지저고리에 감색 전투복을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다. 북만이 연주악기로 사용되며,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연출과정은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날뫼북춤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민속춤으로 예능보유자 윤종곤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날뫼북춤은 대구의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민속춤으로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비산농악 등과 그 뿌리를 같이 하지만, 특히 북만을 가지고 추는 북춤으로 발전한 점이 특이하다. 날뫼란 지명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득한 옛날 달천(達川)의 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서쪽 하늘에 요란한 풍악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하늘에서 산모양의 구름이 날아오고 있었다. 여인이 이를 보고 놀라 "동산이 떠온다"고 비명을 질렀더니, 날아오던 산이 땅에 떨어져 동산이 되었다.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는 비산(飛山)이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비산동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지금의 날뫼 '원고개'는 달성(達城)과 금호강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는 '서울나들이'길이었다.
옛날 한 원님이 특히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원님이 순직하자 백성들은 이 원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무덤을 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제사때는 백성들이 원님의 혼령을 달래기 위하여 춤을 추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 날뫼북춤이라고 전한다. 옷차림은 모두 흰바지저고리에 감색 쾌자를 입고 머리에 흰띠를 두르며 연행과정은 정적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
우리 문화의 근원은 무굿과 풍물놀이에서 시작되었다. 풍물놀이에서 유래한 북놀이는 가장 오래된 놀이로 소리와 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놀이는 지역에 따라 각기 특성을 지니는데 전라도의 경우 외북치기와 양북치기로 나뉜다. 외북치기는 전라도지역의 보편적인 형식이며, 양북치기는 진도에 한하여 전승되고 있다.
진도북놀이는 보통의 외북치기와 달리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 치듯이 느린 굿거리에서 시작하며 빠른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가락으로 풀어 나간다.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는 북장단과 더불어 진도북놀이는 뛰어난 춤사위를 가지고 있다.
진도북놀이는 북소리의 강열함과 장구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발휘하는 신명나는 놀이로, 북놀이의 명인 김행렬을 거쳐 현재는 김길선, 박관용, 양태옥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농악에 있어서의 「북놀이」는 판굿의 구정놀이에서와 모내기 할 때 들노래와 어울리는 「모북·모방구」의 두 경우가 있다. 구정놀이 즉 개인놀이를 할 때는 설쇠놀이와 소구놀이, 설장구놀이가 끝나면 설쇠의 유인을 받아 북잽이 4-5인 나와서 북놀이를 한다. 이 때의 가락은 대개의 경우 3채, 살풀이, 세마치, 휘몰이(2채굿)등을 치는데, 춤사위가 곁들여 진다.
북놀이는 지역에 따라 각기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크게 경상도 북놀이와 전라도 북놀이로 나눌수 있다. 전라도의 경우는 다시 외북치기와 양북치기로 나뉜다. 외북은 전라도 지역 불놀이의 보편적 형식인데, 북을 어깨에 매고 한손으로 북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원박(原拍) 가락에 충실하고 소리가 웅장하다.
양북치기는 진도에 한해 전승되고 있는데,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치듯 하기 때문에 잔가락이 많이 활용되면서 멈춤과 이어짐이 민첩하고 가락이 다양하다. 특히 북가락이 갖는 시간적 소리와 몸짓춤이 갖는 공간적 움직임이 어우러져 흥을 돋군다. 그리고 시나위의 즉흥적 북가락과 춤사위가 어우러져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무한한 변주가 가능한 창조적 음악놀이다.
북놀이는 김행률(일명 김오바, 판소리북 김득수의 선친)이 명인이었고 이분에게서 사사한 임장수, 박태주, 김성남(金成南)이 법통을 이었으나 타계하고 지금은 김성남으로부터 장성천(張成天), 박관용(朴寬用), 양태옥(梁太玉), 곽덕환(郭德煥), 박병천(朴秉千)이 고법을 전수받아 활약하고 있다. 양태옥은 김성남으로부터 북을 배웠고, 1954년 진도민속국악원(珍島民俗國樂院)을 창립하여 후진양성과 북놀이 계승에 힘써 왔다.
박관용은 김성남으로부터 북을 이었으며, 김성남의 가락과 몸짓 바탕에 여러 가지 즉흥적인 춤사위를 곁들인 세련된 북놀이를 연출하고 있다. 장성천(1923년 5월 15일 생)은 진도군 임회면 출신으로 20세 때 김성남으로부터 북놀이 가락과 장구, 아쟁, 판소리 등을 배웠다.
그는 농악 판굿의 구정놀이인 북놀이 가락에 충실하여서 그의 북놀이는 선이 굵으면서도 흥겨워 진도의 전통적인 맛을 보여준다. 그는 현지에 거주하면서 1984년 「진도북춤놀이보존회」를 만들어 전승에 힘썼다. 그러나 1992년 작고하여 그 뒤를 김길선이 이었다. 김길선(1936년 2월 8일 생)은 24세 때부터 모방구와 마당밟이에서 북을 쳤으며, 1979년부터 장성천에게서 북을 배워 장성천의 북을 잇고 있다.
5.스토리텔링, 북소리의 흔적
원래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북(鼓)은 그 상징성 역시 소리와 관련된다.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난다”는 속담은 소리 자체의 상징성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음악의 장단을 맞추는 도구이기도 한 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적인 악기이며 원시적인 충동의 유산이다.
고려 때의 한중어(韓中語) 사전 격인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의하면. 북(鼓)이란 말은 우리 민족 고유어이며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를 두드려서 소리 내는 악기는 모두 ‘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나, 다른 어느 악기보다 종류가 다양하다.
원래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북은, 그 상징성 역시 소리와 관련된다.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난다”는 속담은 소리 자체의 상징성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음악의 장단을 맞추는 도구이기도 한 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적인 악기이며 원시적인 충동의 유산이다.
민족에 따라 북의 형태와 리듬이 다르지만 북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충동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공통성을 지닌다. 북은 황홀경(ecstasy)을 느끼게 하는 악기이다. 그래서 북은 모든 악기의 시원(始原)이 된다.
악기의 사용은 의식주의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언어나 문자가 소통되기 전부터 물체를 부딪치거나 두들겨서 서로의 안부나 위치를 확인하였다. 또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영(靈)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믿기도 하였다.
옛 부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의식을 영고(迎鼓)라 했다. 곧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이 북을 울려서 신(神)을 맞이했다는 영신제이다. 추수가 끝난 뒤인 12월, 동네마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천신(天神)에 제사할 때 노래하며 춤추며 또 중요한 일들을 의논하던 연중 최대 행사였다.
이렇게 북은 가장 기본적인 악기이며 때로는 신앙적 의미를 띠기도 한다. 북은 그 사용하는 계층이나 장소가 다양하다. 크고 작은 일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써, 어떤 일의 시작을 알릴 때도 북을 사용하였다.
배가 떠날 때나 군대가 진격할 때, 또는 승전이나 패배를 알리는 데 이용되었다. 흔히 쓰이는 “승전고(勝戰鼓)를 울렸다”거나 “기(旗)를 들고 북(鼓)을 쳤다”라는 말은 각각 싸움에 이겼음을 알리거나 적에게 항복함을 알린다는 뜻이다.
또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북은 국가의 위의(威儀)를 상징한다. 동명왕은 비류국의 송양왕(松讓王)과 주종 관계를 결정 짓는 싸움을 벌여 북과 나팔을 빼앗는다.
그리고 주술로 비류국을 물에 잠기게 하여 송양왕의 항복을 받는다. 그 후 고구려는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여기서 북과 나팔을 빼앗는다는 것은 국가의 위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뜻한다. 또 낙랑(樂浪)의 자명고(自鳴鼓) 설화도 같은 예이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 오면 스스로 울리는 자명고가 있어 정벌이 어려웠다. 고구려 왕자 호동(好童)의 부탁으로 낙랑공주가 몰래 그 북을 찢자, 낙랑은 고구려의 침공을 예방하지 못해 멸망하게 된다.
여기서 북은 스스로 울리는 주구(呪具)인 동시에, 낙랑의 위의를 상징했다. 따라서 북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곧 낙랑의 멸망과 동일시 된다.
판소리 심청가를 보면, 배가 떠나는 장면을 “닻 감고, 돛을 달고, 키 잡고, 뱃머리 들어, 북을 두리둥, 어기야 어기야 어기야, 북을 두리둥 둥둥둥, 두리둥 둥둥둥,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슬플 때나 기쁠 때 역시 분위기를 증감하기 위해 북이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조선 태종 때의 신문고(申聞鼓)도 알림의 상징성을 채용한 것이다. 신문고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에게 소원(訴寃)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대궐 문루에 달았던 북이다.
이 북은 최후의 항고(抗告) 시설로, 북을 치는 자의 소리를 임금이 직접 듣고 당부(當府)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북소리는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소리를 상징한다. 이렇게 북은 악기로서 때로는 신호적 음향으로서 역사 속을 누비어 왔다.
한국의 북(鼓)은 크게 나눠 줄북과 고장북이 있다. 그 밖에 형태상 장고와 소고를 더할 수 있다. 줄북은 두 가죽 면을 끈으로 매어 그 긴장력으로 조율한 것인데 흔히 매구북이라 한다. 농악(農樂)에 쓰이는 북이라는 뜻이다. 매구북은 큰 것이 직경 1자5치이고, 대개 1자2치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가죽 면의 가장자리를 직접 북통 양끝 주변에 고착시킨 것을 고장북이라 하는데, 정악(正樂)에서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북들은 모두 이 고장북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 고장북을 소리북, 창(唱)북이라고 부른다. 창(唱)의 반주용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 말이며, 실내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소리북은 좀 낮은 음이라야 좋다.
6.북소리에 묻어나는 태극문양
북(鼓)에는 대부분 태극문양(太極紋樣)이 그려져 있다. 유교적 전통에 의해 형성된 철학적인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상징인 태극문양은, 대칭적 균형의 원리와 역동적인 힘의 원리가 핵심적인 조형 원리이다.
특히 태극문양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전통사상을 담고 있는 문양으로서,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신성한 부호로서 정신적인 상징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
태극문양의 도형 속에 표현된 음(陰)과 양(陽)을 표시하는 청색과 홍색의 구간을 보면, 중앙의 S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칭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음양 구간이나 그 맞은편의 같은 위치에는 반드시 반대현상이 나타나 있다.
즉 음의 맞은편에는 양이 대응하고, 양의 맞은편에는 음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기적인 반복, 규칙성과 균일성에 의한 불변의 항상성을, 음양이 대립되는 대칭적 균형의 원리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태극문양 내부의 곡선형태는 회전대칭을 이루고 있다. 원운동(圓運動)을 만들어 내고 시계 방향으로 끝없이 움직이며, 각기 동등하게 반대되는 두 개의 대항력으로 서로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적 에너지인 기(氣)가 순환되어 점점 그 힘이 팽창, 발전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태극문양은 대립되는 음양에 의한 우주의 순환과 발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태극은 우주만물이 생긴 근원이라고 보는 본체(本體)로서,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눠지기 전 세상만물의 원 상태를 일컫는다.
주역(周易)에 의하면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천지만물은 모두 음양 이원론으로 성립되었고, 태초에 우주가 생성될 때에 태극이 생겼고, 이 태극이 둘로 갈라져 하나는 음이 되고 다른 하나는 양이 되었으며, 이 음양(陰陽)이 합해져서 천지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음양이 변화하여 모든 것이 변화, 생성되고 새로워져 발전과 번영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기는 이 태극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태극기(太極旗)라 부른다. 즉 붉은 색의 양(陽)과 푸른색의 음(陰)이 서로 조화를 이룬 모양이다. 음양의 상대(相對), 순환(循環)으로 만물의 생성을 지속해 가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태극을 도상화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태극의 관념과 도형은 고대 문화유적이나 생활습속을 통해 나타난다. 고구려 벽화 사신도의 현무도는 음양상화(陰陽相和)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며, 민간신앙에서는 태극도형 자체에 사물의 잘못을 바로잡는 근원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악귀를 추방하거나 사악한 일을 물리칠 때 액막이의 부작(부적)으로도 사용하였다.
또한 태극은 우주만상의 근원이며,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서 진리를 표상한다. 따라서 태극은 사멸이 있을 수 없는 구원(久遠)의 상(相)을 상징한다.
7.자명고(自鳴-鼓)설화
자명고는 낙랑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적인 북.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好童)이 낙랑 태수의 딸에게 외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리는 자명고를 찢게 하여 낙랑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낙랑공주는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 옥저에 놀러 왔다가 최리를 따라 낙랑에 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과 결혼하였다. 당시 낙랑에는 적이 침입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의 부탁으로 자명고를 부수어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뒤늦게 사실을 안 아버지 최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대무신왕이 낙랑을 공략하고자 계획적으로 낙랑태수에게 청혼하여 공주를 자부(子婦)로 삼은 뒤,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자명고를 파괴하도록 하였다는 설도 있다.
낙랑공주설화는 다음과 같다.
32년(고구려대무신왕 15) 옥저(沃沮)에 놀러 왔다가 최리를 따라 낙랑에 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과 결혼하였다. 당시 낙랑에는 적이 침입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의 부탁으로 자명고를 부수어 고구려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뒤늦게 사실을 안 최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고구려 왕이 낙랑을 공략하고자 계획적으로 낙랑태수에게 청혼하여 공주를 자부(子婦)로 삼은 뒤,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자명고를 파괴하도록 하였다는 설도 있다.
호동왕자설화는 '삼국사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 4월 조(條)에 실려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차비(次妃) 소생인 호동은 얼굴이 잘생기고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는데, 어느 날 옥저(沃沮)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태수(樂浪太守) 최리(崔理)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元妃)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나라와 사랑을 사이에 놓고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온 설화이다.
8.홍랑각시의 영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의 홍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호 홍랑각싱의 영험이란 설화가 전해지며, 북소리가 나온다.
『아니 중국 천자는 자기 나라에 여자가 없어서 조선으로 여자를 구하러 보냈나.』
『다 속국인 탓이지요.』
『아무리 속국이기로서니 조정에서 이렇게 쩔쩔매니 장차 나라꼴이 큰일이구려.』
『자, 이렇게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여자들을 피신시킵시다.』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누구네 집에 어떤 딸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신통한 묘책이 없어 수심에 잠겨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 드디어 관원들이 나타났다. 욱모방망이를 든 포졸들을 앞세우고 외쳤다.
『얘들아, 마을을 샅샅이 뒤져 젊은 여자를 모조리 잡아 끌어내라.』
포졸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인들의 치마는 땅에 끌렸으며, 강제로 허리를 껴안고 나오는 포졸들의 입은 헤벌려 있었다.
마을에서 자색이 뛰어난 홍만석의 딸 홍랑 역시 발버둥을 치며 끌려나왔다.
『오늘 우리는 중국 천자에게 진상할 처녀를 물색하러 조정의 명을 받고 나왔느니라. 우리 고을에선 홍만석의 딸 홍랑을 진상키로 하였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왕명을 어긴 죄로 3대를 멸할 것이며 우리 홍법리 마을은 마땅히 폐촌을 면치 못하리라.』
관원은 득의양양하게 일장 연설한 다음 홍랑에게 말했다.
『홍랑아, 어서 분단장 곱게 하고 관아로 가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홍랑은 넋을 잃고 주저앉은 아버지 홍만석의 모습과 자기만을 주시하는 마은 사람들을 보고 결심을 했다.
『가겠습니다. 나으리. 그러나 명나라에 가게 되면 모래 서 말과 물서 말, 그리고 대추 서 말을 가져 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야 천자의 애첩이 될 몸인데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주겠느냐. 어서 가자.』
동헌 마루에 높이 앉은 명나라 사신은 곱게 차린 홍랑을 보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헤헤… 조선에 미녀가 많다더니 이거 참으로 선녀로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광해군 2년(1610), 홍랑은 명나라로 떠났다.
『허- 참으로 아름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인고?』
『홍랑이라 하옵니다.』
『홍랑이라. 이름도 곱구나. 참으로 조선에 천상의 미녀 못지않은 미인이 있었구나. 여봐라, 홍랑을 별궁에 거처토록 하고 매사에 불편이 없도록 하라.』
천자는 명을 내렸다. 천자의후궁이 되면서부터 홍랑은 말을 잃었다.
가져온 모래를 뜰에 뿌리거 목이 마르면 가져온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대추로 연명했다.
홍랑의 아름다운 자태는 날로 수척해 갔다. 고향과 부모를 그리며 염불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씨, 오늘은 제발 저녁을 드십시오.』
『아니 먹을 것이니라. 나는 명나라 후궁이 되었으나 오늘까지 명나라 음식은 커녕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으며 명나라 흙도 밟짖 않았느니라.』
『내일이면 물도 대추도 떨어집니다. 이제 무얼 잡수시겠습니까?』
『내일이면 내 생명은 다할 것이나, 죽어 보살이 되어 천자를 회개시킬 것이다.』
다음날 홍랑은 세상을 하직했다.
홍랑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천자는 우연히 병을 얻었으며 병세는 날로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자는 비몽사몽간에 홀연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 너는 홍랑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소첩이 폐하를 구하러 왔사오니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홍랑의 말소리는 허공에 울리고 천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폐하, 앞으로는 백성을 아끼고 불도를 닦는 착한 임금이 되십시오. 그리고 소첩을 고향으로 보내 주옵소서.』
『내 착한 임금이 되도록 힘껏 노력은 하겠으나 너를 어떻게 고향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제발 짐을 살려다오.』
『폐하,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조성하여 무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 보내십시오.』
『아니 그럼 홍랑은 보살님이시었던가.』
천자는 석달 열흘에 걸쳐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천하유명한 석공과 철공을 모아 돌배와 무쇠 사공을 조성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홍랑의 보살상은 완성될 무렵이면 두쪽이 나곤 했다. 세번, 네번 다시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천자는 쉬지 않고 일심으로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 인시 북소리의 여음에 이어 인자한 음성이 들렸다.
『착하도다. 대왕은 홍랑의 마지막 모습을 보살상으로 새겨야 하느니라.』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천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홍랑의 모습을 그려 봤으나 영 떠오르지를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홀연 한줄기 바람이 일며 홍랑이 나타났다. 수척하면서도 인자한 모습 그대로.
이를 본 천자는 죄업을 뉘우치며 전신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홍랑보살님, 짐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석공을 불러 보살상을 조성한 지 백일째 되던 날 홍랑보살상이 완성됐다. 천자는 크게 잔치를 베푼 후 홍랑보살상을 12명 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서 물에 띄웠다. 돌배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홍법리 홍랑의 고향 앞바다에 닿았다. 때는 광해군 3년(1611)의 이른 봄. 마을에선 홍랑보살의 영험을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우고 홍랑 보살상을 모신 후, 절 이름을 홍법사라 불렀다.
9.당태종의 북소리와 주몽의 이야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2대 왕 남해차차웅을 가리켜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이라 하였다. 차차웅은 무당이며, 왕호이고, 존장자의 호칭이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4년(645) 4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唐)의 장수 이세적이 밤낮을 쉬지 않고 12일 동안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당 태종이 정병을 이끌고 회동해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여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사슬로 된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그것이 전에 연나라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했다. 급기야 포위되자 미녀를 치장하여 부인으로 꾸며 놓으니, 신령스런 무당이, '주몽이 기뻐하여 성은 반드시 완전하게 지켜지리라'고 말했다."
고구려 요동성은 이미 수나라 양제(煬帝)가 1차로 100만여 대군을 이끌고 인해전술 공격을 한 데 이어 2차, 3차 공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격퇴하여 끝내 대수제국(大隨帝國)의 멸망을 초래할 정도였다. 당시 세계적 웅성(雄城)이었던 요동성은 바야흐로 4차로 당 태종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시조 주몽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사제무녀가 성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은 성(城)안 군민들의 초인적인 분전, 사기결속을 고무했을 것이다. 이렇듯 고대의 무속은 국가종교로서 군민 결속의 기능을 했다.
첫댓글 너무 좋은 자료입니다.공부할게요^^
비산 날뫼 북춤 구경은 여러번 한적이 있는데..ㅎ
북의 종류도 다양하구 ....저도 모셔가서 다시 읽고 새겨 두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