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교실 아홉 번째 이야기-웃고 있어도 눈까지 웃지 못하는 그녀.
신 연숙(단유)시인과 함께.
볼 때 마다 모자를 쓰는 시인.
그녀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교래리 겨울 나들이 하던 날, 눈밭에 굴러도 춥지 않을 만큼 그녀가 단디 준비를 했다. 털모자, 털장갑, 털부츠, 발목까지 내려오는 방수점퍼... 그녀는 지금 새 생명을 품고 있다.

1971년생 신 연숙 시인은 돼지띠다. 복이 그저 굴러온다는. 그런 만큼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여섯 남매 중 맏이였다. 시인의 집안이 부유했던 것은 2차대전 후 일본에서 사시던 조부모 덕택이었다. 일본에서 번 돈으로 조천과 신촌 일대의 땅을 거의 다 할아버지가 샀다.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은 시인을 보며 ‘공범이 딸이구나’ 하시며 ‘이 땅도 니네 할아버지 땅, 저 땅도 니네 할아버지 땅이다.’ 하셨다. 손재주가 없던 할머니께서는 제삿날이면 사람을 두고 살림을 할 정도였으니...
장녀의 자리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첫째로서 강압적 책임감을 주시던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큰 딸로서의 자리, 소꿉놀이나 공기놀이는 해 볼 수도 없었고, 특권이라는 명목 하에 따로 주어진 방 안에서 그녀는 고독했다. 형제간의 다정다감보다는 상하가 분명한 관계로 자랐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찰흙을 빚어서 색을 입히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책장과 책상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꽃, 나비, 나무, 물감이 배어들며 새로운 모습이 되어가는 책장이나 책상을 보며 저도 저렇게 화려한 삶을 살리라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방에서 그 가구들을 다 치워버리게 했다. 장녀란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없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유화물감을 처음으로 접했다. 색의 농도와 명암을 발견하면서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진학은 법대였다.
구창모 “희나리” 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가 였고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는 “엄마 밖에 난 몰라” 로 바꿔 부르며 방황할 시기였다. 하루하루 힘겹게 보내던 그때, 비 오는 날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던 첼로의 현소리는 시인의 동아줄이 되기도 했단다. 그래서 후에 아이를 낳으면 악기 하나는 꼭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쯤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의원을 다니며 호르몬 주사를 맞았고 , 만 3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 때 그녀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체가 걸어 다닌다고 말했다고 한다면 그녀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삼십대에 갱년기 증상까지 다 겪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인생의 굴곡을 몇 구비 돌고 온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함이 묻어난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발생한 건 시인의 나이 서른쯤이었다. 유일하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시던 분이셨는데, 그런 분이 7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결국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 믿기지 않은 상황을 어느 것으로도 주워 담지 못했다. 어머니를 잃은 허무함이 원망으로 변하여 아버지에게 닿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별도봉 바닷가에서 비디오를 켜놓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피눈물을 담았다. 한밤에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기를 수 십 번. 밭담을 몇 개 건너서야 당도하는 어머니 무덤이 찻길에 세워진 자동차 불빛만으로도 선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서른을 갓 넘긴 시인에게 아버지와 다섯 형제는 짐으로 남았다. 그리고 제가 남겨놓은 짐까지 누구 하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주인이 없는 집안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으며, 가족들이 일으키는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 다녀야 했다. 정신과 몸이 너무 지쳐 탈진 상태에서 몇 날 며칠을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고 혼자 누워있다가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옛날 할머니들이 하셨던 ‘살아진다, 살아진다, 나도 이 등짐 지고 산다, 너도 살아진다’ 말씀이 뼈 속까지 스며왔다. 그 때의 기억을 살려 쓴 그녀의 시 한편.
집게와의 대화
절벽만이 반기는 왕따들의 휴식처
제주항 등대 길에 자꾸자꾸 내려간다
파도여 모두 가져가! 돌 위에 모진 삶
‘꼬당 꼬당 몽니 돌트멍에 붙여 놔!’
주변상황 살피며 집게가 하는 말
‘확 가라! 니도 나 모양 등짐지영 살암시라!’
‘박박 우김도 몽이도 멍청허민 생기주’
‘어우렁 더우렁 살다보민 살아진다’
등대가 환한 미소로 늦었다고 알린다.

그 해 여름이 가면서 전환기가 찾아왔다. 명상관에 다니면서 몸도 나아지고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살아 있음에 대한 본능, 바닥에 이르면 튀어 오르려는 반동의 힘, 살려는 힘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윈드서핑 모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진국이었던 마음 하나 믿고 프러포즈를 먼저 했다.
사십대가 들어서 나뭇잎을 닮은 올리브그린이 좋다는 시인! 숫자 4의 의미에 도달하려고 그녀는 지금 앞으로 나간다. 강은미 선생님이 막내이모 친구였단다. 글쓰기 시간의 인연으로 ‘다소니’에서 얼떨결에 시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 글 쓰는 건 나의 치료다. ‘젊은시조문학회’는 나의 돌파구였고 관념적으로 빠졌던 나의 사고를 버릴 수 있게 해줬다. 그런 선에서야 행복이 올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울던 날, 웃어도 눈가까지 웃지 못하는 시인을 봤다. 커다란 눈망울만큼 금방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폭포수의 낙하점일까. 그녀는 안다. 때가 되면 그 정점에 닿으면 다시 출발하여 햇살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참 편한 사람이다. 똑똑하면서 지혜로운, 많은 걸 품어서 아픈, 어떻게 안아 줘야 할지...... 그녀는 우주를 돌고 소우주를 몇 바퀴씩 돌며 지금 이곳에 있는 듯하다. 아마 머릿속은 지금도 하얗게 바튼 숨을 쉬고 있을테지. ‘지금껏 살아온 게 상입니다’ 또다시 새 꿈을 만드는 시인, 백합 같은 웃음을 눈가까지 피울 날을 이 겨울 함께 해 본다.
첫댓글 이 글은 초록님이 쓴 글인가요? 잘 읽었고 그래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게 아픔들을 그려냈군요...신연숙님의 시화에서 예술적인 재능이 번득였습니다. 잘 손질만 해내면 좋은시화가 별처럼 반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아픈 만큼 성숙하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삶이란 공평한 것 같습니다. 단, 자포자기 하지 않는 자에게 오는 보상 같은 것 말입니다....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려갈수록 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단유님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짐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설우님의 글처럼 자포자기 하지 않았기에 지금 단유님의 삶이 있지 않나, 성숙하고 깊은 삶이 되지 않았나 감히 짐작합니다. 단유님! 잘 하셨습니다!!
초록님 이 글 쓰느라 고생많았네요. 차분히 정리해나가는 솜씨가 어른스럽답니다. 이 글을 통해서 단유님의 재기의 꿈을 다시 봅니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은 온통 아픔투성입니다. 젊은시조문학회 회원 모두의 한편한편 작품들이 아픔의 토양에서 뽑아올린 꽃송이라는 걸 다시 확인합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모두들 따숩게 입고다니세요.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건너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아픔의 강을 온전하게 건넌 이편의 땅에서 따스한 햇살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단유님.
차분하게 모든 걸 정리해 주신 초록님 고맙습니다. 님의 글로 인해 단유님이 그간 흘렸던 눈물들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
초록님이 꼼꼼하게 차분하게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다시금 그날 그방으로 돌아가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이리 아픔을 품고 계셨기에 남의 아픔도 보듬을 줄 아셨군요. 이제는 내려놓으시고 새생명과 함께 행복한 날들만 꿈꾸십시요. 님의 아픔이 거름이 되어 곳곳에 향기나는 꽃들을 피워낼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이미 피워내고 계십니다. 단유님, 사랑합니다.^^
단유님, 초록님 사랑합니다. 녹차맛 같은 삶과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