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좌청룡 타락산 자락에 자리한 청룡사,
그 안에 서럽디 서럽고 슬픈 단종의 정순왕후 송씨의 사연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정업원 비각이다.
"숭인동 초막에서 홀로 스무 해를 기거한 내게 별안간 아들이 생기고
어미라는 벅찬 이름이 생겼습니다. 미수의 집으로 이사하여
들어가던 날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나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지 흔들는 가마 속에서
잠시 아무도 모르게 혼절하기까지 하였답니다."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에서)
훗날 영조는 정업원 옛터를 창덕궁에 갔다가 이곳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이때 전 참판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슴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다"
라고 자세하게 아뢰었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이란 편액의 글도 영조의 친필이다.
그 비석과 편액에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어필이 있다.
영조는 그들의 사랑이 산과 바위처럼 곧 천만년 동안 영원할 것이라는
염원과 함께 단종과 정순왕후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이 글을 쓴다는 심경을 담고 있다.
정순왕후 송비는 비구니 허경(虛鏡)이다.
그는 후궁 김씨, 후궁 권씨, 그리고 세 상궁과 함께
정업원 청룡사에서 80평생 몸을 맡기고 살았다.
영조에게 정업원과 동망봉을 옮겨가면 송비의 사연을
아뢴 전 참판 정운유는 단종과 송비의 아들 정미수의 후손이다.
정미수의 아버지를 비롯한 그 가족의 운명은
어머니 정순왕후만큼이나 참으로 기구하다.
정미수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와 부마 영양위 정종(鄭倧) 사이에 태여났다.
그 아버지 정종은 금성대군사건에 연루되어 영월에 유배,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끝내는 능지처참된다. 단종의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천민으로 강등돼 순천의 관비로 유배되었다.
관비가 된 경혜공주의 몸에서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순천도호부에서 아버지없이 태어났다.
"아들이면 모두 죽이라!"
세조비 정희왕후는 세조의 어명을 어기고 두 모자를 서울로 불러올려
궁중에서 보살폈다. 몹시 후회한 세조는 그 아이에게는 '미수'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돼 있다. 바로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1456~1512)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에 아드님 해평부원군이 정국공신에 오름으로써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 영양위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증(贈) 순충적덕 보조공신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봉되고
영조 때 헌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의 배식단사,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현재 정업원 터에 자리잡은 청룡사는 매우 유서깊은 비구니 절이다.
고려 태조 왕건때 삼각산 맥의 한자락인 낙산마루에
도선국사의 유훈에 따라 어명으로 창건되어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공민왕비 혜비와 태조의 딸 경순공주, 정순왕후 뿐 아니라
자손이 없는 왕실의 후궁들이 출가하여 비구니로 살았던 절로 유명하다.
정순왕후 허경스님도 이 사찰 정업원에 머물며
옷감을 물들여 팔아 근근히 연명하였다.
허경스님이 힘겹게 옷감에 물들이는 작업을 하던 자주동샘이다.
정순왕후 비구니 허경이 하루도 빼질않고 오르던 동망봉이다.
18세에 동대문 밖 영도교에서 유배되어가는 단종과 눈물로 마지막 이별을 한 후
홀로 64년 간 한 많은 일생을 보내다가 1521년(중종 16년) 82세로 세상을 떠난다.
중종은 대군(大君) 부인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정미수의 해풍 정씨가 정순왕후를 선산으로 모신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는 단종을 잃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가 잠든 오늘의 사릉이다.
왕조정치에서 왕실의 친인척은 양반 위에 군림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정책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최 특권층이 되기도 하였다.
당쟁이나 정쟁으로 멸문의 화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해주정씨 역시 조선의 태종(3대), 세종(4대), 문종(5대), 단종(6대), 중종(11대),
인조(16대)의 여섯 왕실과의 혼인 또는 인척으로 부(浮)와 침(沈)의 영욕을 겪었다.
조선왕실과 단단한 혼맥을 이어온 해풍 정씨이다.
그 중심에는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이 자리한다.
정도공은 태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의 장인이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처남들과 사돈인 양녕대군의 장인,
정순공주(장녀)의 시아버지, 세종의 장인 등 많은 인척들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냈다.
둘째 사돈인 정도공은 권력에 뜻을 두지 않은 청렴으로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세종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올라
해주정씨 번성의 문을 연 선조이다.
1425년(세종 7년) 정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진 오늘의 서오릉 자리에 묻힌다.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세조는 명당 정역의 묘역에
의경세자의 능 경릉을 두었다.여기서 오늘의 서오릉은 시작된다.
그의 묘역은 서초동 법조단지으로 옮겨야 했다.
80년대 법원-검찰에 또 밀려 여주로 이장을 한다.
정역의 큰 아들 정충경은 세종의 여덟째 왕자 영응대군의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