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량(李國樑)
[생졸년] 1517년(중종 12)~1554년(명종 9)
[진사]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4위(29/100)
공(公)의 자(字)는 비원(庇遠)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거주지는 경북의 안동(安東) 예안현(禮安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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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이공 묘지명 병서(進士李公墓誌銘 幷序)
김중청(金中淸) 찬(撰)
명나라 만력 경자년(1600)에 장인어른(이영승)께서 장인어른의 아버지(이국량) 무덤을 도산면 온계(溫溪) 마을 입구의 정남향 언덕으로 이장한 뒤에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셨는데, 사양하고 짓지 않은 지 10여 년이 되었다. 이번에 장인어른께서
“나는 늙었을 뿐만 아니라 내 아들은 자식도 두지 못하고 죽었네!
자네가 나의 오래된 간절한 부탁을 저버린다면, 내가 장차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시니, 내가 그 말씀에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장인어른의 아버지는 정덕 정축년(1517) 1월 14일에 태어나 가정 갑인년(1554) 5월 5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38세였고, 훌륭한 선비라고 일컬어졌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과 호방하고 빼어난 운치는 퇴계 선생이 인정하였고, 병오년(1546)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집안의 살림은 돌보지 않고 일찌감치 낙강(洛江: 낙동강) 상류에 살 만한 땅을 정하여 스스로 고산주인(孤山主人)이라고 하면서 작은 집을 지으려고 하다가 완공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집터가 남아있다. 장인어른의 아버지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국량(國樑)이며 자는 비원(庇遠)이다.
통선랑 행 장악원 직장 현준(賢俊)이 아버지이고, 어머니 안동권씨는 전력부위 수경(守經)의 따님이다. 할아버지 흠(欽)은 의정부 좌참찬 행 인제 현감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효손(孝孫)은 사헌부 대사헌 겸 의금부 동지사 행 통례문 봉례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부 파(坡)는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의흥 현감에 추증되었는데, 이러한 추증은 모두 공(이국량)의 숙부(叔父∙1) 효절공(孝節公) 현보(賢輔)가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시조 대영(大榮)이 영천(永川)에서 현달하였고, 군기시 소윤 헌(軒)이 안동 예안(禮安)으로 이주했는데 공의 6세조이다. 공은 예안에 거주하는 진성이씨 인(寅)의 따님을 배필로 맞았다. 부인은 공보다 뒤에 운명하여 공과 합장하였는데,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후손으로 퇴계 선생의 맏형 여절교위 잠(潛)이 할아버지이다.
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순승(順承)이 충의위 박수(朴洙)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은 외동딸은 직장(直長) 금학고(琴學古)의 처가 되었다. 딸은 진사 서천일(徐千一) 에게 시집가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긍(兢). 신(兟). 경(競)은 모두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사위는금윤고(琴胤古). 금몽상(琴夢祥)으로 모두 관직에 올랐다.
막내 영승(永承)은 승사랑 군자감 봉사로 나의 장인어른이고, 장모 안동권씨는 충의위 곤(輥)의 따님으로 영의정 철(轍)이 종숙부이다.
장인어른의 사자(嗣子) 번(蕃)은 충의위 장언보(張彦輔)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운명하여 삼종제 생원 립(苙)의 셋째 아들 영계(榮係)를 후사로 삼았다.
맏딸은 선비 권익민(權益民)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 혁(赫)과 철(喆)을 낳았다. 둘째 딸이 나(김중청)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일찍 죽었다.
내 사위는 충의위 박흔(朴昕)이며, 내 맏아들 주우(柱宇)는 15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막내 주한(柱漢)은 이제 글자를 배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타고나신 자질은 빼어났지만 / 難得之質(난득지질)
불행히도 수명이 짧으셨도다 / 不幸短命(불행단명)
비석에다 사실을 기록하여서 / 石用識哉(석용식재)
후손에게 영원히 알려주노라 / 詔後伊永(조후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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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進士李公墓誌銘 幷序 - ⾦中淸
皇明萬曆之庚子 李聘君乃移其先君墓于溫溪洞口子坐午向原 旣葬屬余識于石 辭不敢者 十有餘年 今其言曰 吾老而兒且無兒以亡 君若負我宿懇 吾將何以死哉 余於是感而識之曰 噫 聘君之先君 生於正德丁丑正月十四日 歿以嘉靖甲寅五月初五日 凡三十八年于世 稱爲佳士 其粹美之禀 豪逸之調 常爲退陶李先生所許 兩中丙午榜司馬 不事家人産業 常卜地洛江上流 自號孤山主人 謀構小齋而未之究 至今遺址存焉 諱曰國樑 字曰庇遠 通善郞行掌樂院直長諱賢俊其考也 妣則安東權氏 展力副尉守經女也 祖欽贈議政府左參贊行麟蹄縣監 曾祖孝孫贈司憲府大司憲兼同知義禁府事行通禮門奉禮 高祖坡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義興縣監 其贈皆公叔父孝節公諱賢輔貴也 自始祖大榮 顯於永川 至軍器少尹軒 移住禮安 少尹於公 實六世也 同縣有眞城李公諱寅 公聘其女爲配 後公歿 祔而葬之 松安君子修後 退陶先生第一兄勵節校尉諱潛其祖也 公之長男順承 娶忠義衛朴洙女 生獨女 以直長琴學古妻之 次女適進士徐千一 兢兟競三男爲擧子 二女郞琴胤古琴夢祥 俱有職 季曰永承 承仕郞軍資監奉事 卽余聘君也 娶花山權氏 忠義衛輥之女 領議政轍 其從叔父也 嗣子蕃 室忠義衛張彦輔女 無子而死 擇三從弟生員苙第三子榮係爲後 女歸士人權益民 生赫喆二子 少女爲余繼配早逝 忠義衛朴昕爲女壻 男柱宇十五中進士 末男柱漢始學字 銘曰 難得之質 不幸短命 石用識哉 詔後伊永. <끝>
출전 : 苟全先生文集 卷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