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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나이 김세현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수정동의 유래 와 옛마을 이름
우리두리 추천 0 조회 33 09.12.17 16: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정동>
   수정동(水晶洞)은 조선시대에 동래부 동평면 두모포리(豆毛浦里)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의 기장현 관방조의 기록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장에 있었지만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난 부산포의 방위를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게되자, 울산의 개운포와 함께 부산진 부근에 이설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 지명도 그대로 두모포리로 쓰이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6년(1614)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국교가 회복되자, 두모포에 왜관이 개설되어 약 70년간 존속하다가 숙종 4년(1678) 용두산일대로 옮겨갔다. 용두산일대의 왜관을 신왜관(新倭館)이라 한데 대하여, 두모포왜관은 구왜관(舊倭館) 이라하여 신관, 구관으로 불러왔다.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자리는 황토가 적고 지면에 모래가 많아서 비가와도 신발에 물이 묻지 않았으며, 또 이곳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어서 수정동(水晶洞)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수정동에는 성이 있었는데 정상에 큰 분지가 있으며, 그 일대를 조금만 파도 크고 작은 수정이 나왔으므로 그 산을 수정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산 아래 마을 이름도 수정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또 지금의 수정동·초량동 뒷산을 통칭하여 사병산(四屛山)이라 하였는데, 특히 수정동 뒷산은 마이성(馬餌城, 馬里城)이라 불렀으며, 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흐르는 시내의 이름 역시 수정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수정의 출토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수정1,2,3,4,5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정산의 유래

  아담하고 정겨운 수정산은(315m) 숲이 많아 휴식하기가 그지없는곳인데 해방 후 까지만해도 산에 물이 많고 맑은공기로 인해 중턱에 공원을 조성하여  산상공원이라 불렀으며 이곳에는 왜정시 축조한 계단과 비석(신전기념비?)이 존재하여 서민들은 그곳을 멋모르고 뛰어 놀곤하였으며,  6.25사변에는 수정국민학교 임시가교사가 자리잡아 노천에서 또는 근처 절에서 공부를 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곳은 평평한 곳이 있어며 배드민트 운동장이 들어서서 구민 체육장이 있어며, 가교사자리는 수성초등학교로 개교된 곳이다. 수정산 정상에는 광산같은 동굴이 있었는데 수정을 토출하는 곳(?) 으로 짐작하여 왔으나 사료에는 없으며, 특히 성곽이 없으진것이 아쉬운부분이다.

  한국전쟁은 이 곳 수정동이라고 상처가 없는것은 아니었다  현 수정초등학교자리를 국방부가  범일동에는 교통부가 임시수도시절에 자리잡아 있어서 아직까지 그곳을 교통부라고 버스안내를 한때가 있어며,  현경남여고는 5육군병원이 중앙국민학교는 미군이 준둔하여 학생들은 가교사를 지어 공부를 하엿다.

 

 

관골

지금의 목화목욕탕을 한때  관골목욕탕이라고도 부른것은 이지대 즉,  언급한 관사가 밀집하여 있어며 지금도 790번지 부근에는 그 흔적이  있는 집이 남아 있으며 2동사무소는 세관관사, 해방후에는 학교관사 해경관사등 주로 관사들이 많이 지어져 살고있었으며 고 관사등으로 쓰이다 전부 불하되어 현재에 이르럿다.

 

온정교

 수정2동 사무실을 거슬러 올라가면 복개천 한옥집(박준도택)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 집이 세도가 있는집으로서 복개천의  앞의 다리를 온정교라 불럿다. 일 설에 의하면 수정천 지류인 관골 냇물위에 온천과 같은 따뜻한 물이 솟아서 높은 분이 왕래하엿다는데, 근거는 ?을 수 가 없다.

 

수정시장

 수정시장은 시장으로써 그 규모가 얼마되지 않아 최근에 시장번영회를 정부에서 인정받아 활동을하려고 한다는 예기를 들었다. 지금의 복합아파트시장은 해방 전후에 생겨 다른 동네 보다 규모가 적었다고 볼 수있어며, 해방 후, 귀향동포가 부산에 밀집하여 현동구청뒷편 창고 및 논밭 부지에 정착하여 현재는 불량주택으로 밀집되어 있어며,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늘어난 인구는로 인해 지금의 난장(도로에 무단시장)이 생겨 현재 동구청 새로운 건물과의 조화(?)를 이루고 복잡한 시장거리를 만들었어며 이는 수정2,3,5동의 행정구역 변천처럼 시장이 형성되고 말았다.

 

● 산복도로(망양로)

수정동과 동구의 제일큰 변화는 산복도로 개통이다. 범일동 복개천에서 시작된 도로는 성북고개를 넘어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 지나 영선고개에 다달은 획기적인 도로이며, 산복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향상에 크게 기여 했다. 이시절 부산은 박정희정권시 김현옥시장이 불로도져라는 별명답게 부산역이전 등 큰 사업을 이루었든 시절이라 산복도로와 수정산 일대 중앙산 중턱에서 산위의 모든 가옥등을 철거하여 현재 용호동, 반송동에 이주시키고 나무를 심고 산림화하여 산의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였는데 지금으로 생각하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볼수 있다.

 

외솔배기

 지금의 4동으로 넘어가는 도로 일대로 밭들이 경작되고 있는 가운데 옛날 이곳에 큰 노송  한그루 있어서 이를 일컷는 말이엇다.  왜정시 초량 수정4동 골짜기에는 맑은 샘물이 많이 있었는데 어릴때 이곳을 넘어 놀러다니고, 산에서는 현재의 약수터가 많아 (청조) 시민들의 건강휴식쳐가 되고 있다.  지금의 동일초등학교 일대가 저수지로 해방될때 까지만해도 유원지로 사용되고, 저수지는 철도기차의 용수로 공급하고,  이일대가 철도관사가 있었든 곳으로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소막골

  수정2동 동구청 옆 서쪽 산허리 부분의 아래 마을이며 왜정시  소가축 및 도살장이 있었다고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 해방후에는 분뇨처리 위생차량이 주차하든 곳이다.  지금은 산복 연결도로가 개통되어 차량이 많이 붐비지만 이 또한 산복도로로 인하여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리랑고개 (성북고개)

옛 부산은 좌천동 매축지 일대는 바다 갯벌 정도이고 왜정시 매축을 하고 도로와 전차가 다니고하여 연결되었지만 이조시대에는  부산진과 구관으로 오려면 성북고개를 넘어야 ?다.  이때 이고개를 속칭 아리랑고개라 편리하게 불렸다.

 

능풍장 

 능풍장 (陵風莊)이라는 별장이 있었던 곳은 동구 좌천2동으로 수정초등학교 동편 언덕 중턱일대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골동품을 수집하던 일본인상인 오이까와(及川民次郞)라는 사람이 이곳에 호화 주택을 짓고 이름을 능풍장이라 하였다. 능풍장이라 하면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서 산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름으로 능풍장이라는 이름이 이곳의 지명을 대신하게 되었을 정도이다.

오이카와(及川民次郞)는 1905년 경부선(京釜線, 1901. 1~1904. 11))의 개통으로 영가대가 양분되면서 철거된 영가대 건물 일부를 그의 별장인 능풍장 정원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광복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별장과 함께 영가대 일부 건물도 철거되어 버렸다. 지금도 능풍장 별장이 있었던 좌천2동 일대는 동구지역에서 제일가는 주택가로 꼽을 수 있는 지역이다. 1999년 3월 동구청에서는 골목길 및 소로명 부여사업을 추진하면서, 좌천2동 LG뉴하이샷시~좌천4동 경계간의 길을 능풍장길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부여한 골목길 및 소로의 도로명 부여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변지역의 역사성이나 자주성 검토가 되었으면, 일제강점기 일본인 별장의 명칭 시용은 배제되었어야 했다. 일제잔재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능풍장길’ 골목길 명칭 부여는 좀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료출처부산시홈페이지>

 

고관입구

고관은 다 아시다 싶이 수정 초량일대 왜관이 있든 입구라하여 수정1동 자리를 말하며 그 전에는 전차와 버스가 중앙초등학교 옆 이도로를 넘어 다녔고 밑 도로는 역시 부산역 이전과 부두 계획 도시사업전에는 철도 조차장 역으로  밤낮으로 증기기관차의 소음이 일던 곳이다.

그리고 보면 부산 원도심지는 언덕과 부두의 연결로 이루어 ?다고 볼 수 있다.

 

 ● 부산일보

 부산일보는 중앙동에서 이전해와 현재의 자리에 잡았으며,  그일대 LIG생명과 기타 건물장소는 동아중학교가 자리잡았든곳이 학교가 이전하고 현재와 같이 건물이 들어섰다.

 

  동구청사 (돼지공원)

동구청사 자리는  두모포일대의 왜관으로  일제시대 왜인 들이 공원으로 조성하고 비석과 기념비를 세워 조성한 우리로써는 아픈 역사적인 유물 장소이다.

 

오박골(오마골)

  지금의 3동 버스 정류장 언덕 일대 이지대는 옛날에는 오동나무와 옻나무가 많아서 부르게 되었으며 근세에 들어  닭장, 오리장들이 있었으며 농가를 형성하여 밭을 가꾸고 있든 곳.

 

 ● 감 골

 감나무 산악회가 잇는 곳 ?

 

 ●기타 : 범골, 화장막골  지지내마을(좌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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