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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麻衣太子)
요약 『마의태자』는 이광수가 1926년 5월 10일부터 1927년 1월 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최초의 장편 역사소설이다. 1928년 1월 15일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동아일보』에 총228회 연재된 『마의태자』는 상편과 하편의 구성을 취했다. 상편은 궁예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면, 하편은 제목으로 삼은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천 년 사직 통일신라의 망국사를 두 주인공의 패배한 개인사로 그려낸 『마의태자』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비극적 정조로 당시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얻었다.
구성 및 형식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이어진 『마의태자』는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어 연재되었다. 하편을 예고하면서, 상편은 궁예편이며 하편인 마의태자편의 서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마의태자편의 서문이라고 하기에 상편이 하편보다 훨씬 길게 연재되었다는 점 때문에 서술상의 불균형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김동인은 전체 700여 페이지 중 400여 페이지나 되는 대부분의 내용을 궁예의 이야기에 할애한 것은 소설의 일관성과 주제 의식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반면 『마의태자』의 서사 구성이 지닌 개별 에피소드의 중첩은 독자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는 정반대의 의견도 있다. 이를 종합하는 매체적 접근은 일제의 식민 권력을 대신해 조선의 공론장 역할을 자처한 대중 매체의 이중 욕구가 『마의태자』의 서사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독자 확보의 상업성과 교화의 계몽성이 통일신라의 임박한 멸망과 영웅 궁예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궁예편을 마의태자편보다 확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마의태자』의 서사적 불균형은 당대의 매체 환경을 고려한 신문 연재소설의 일반적 특징임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내용
『마의태자』 상편 궁예편은 유모의 손에 자란 소년 미륵이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 설부인은 경문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나 질투에 눈이 먼 영화, 정화왕후에 의해 모함을 받아 죽게 되고 미륵은 유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지난 사연을 듣게 된다. 출생의 비밀을 안 미륵은 궁에 침입해 복수를 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는 태백산으로 도주하여 승려가 되고, 여기서 신비한 도승 백의국선을 만나 의리와 인정에 대해 가르침을 얻는다. 우여곡절 끝에 궁예로 이름을 바꾼 그는 태봉국의 왕이 되어 인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태평성세를 이룬다. 하지만 신하 왕건의 배신으로 죽게 되고, 왕건이 뒤를 이어 왕에 올라 고려를 창건한다.
『마의태자』 하편 마의태자편은 고려 왕이 된 왕건이 견훤의 침략으로 혼란한 신라의 구원자로 나서 항복을 받아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건은 딸 낙랑공주와 태자 김충을 혼인시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했지만, 그 속셈을 알아차린 김충은 혼사를 거절한다. 반면 낙랑공주의 뛰어난 미모에 반한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는 조건으로 낙랑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신라를 바치려는 왕의 뜻을 만류하고 직언했던 태자 김충은 망국의 슬픔을 안고 궁을 떠난다. 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한 그를 세상에서는 마의태자로 불렀다. 세월이 흘러 낙랑공주는 홀로 연모하던 김충을 우연히 만나 출가하고, 왕건은 권력의 덧없음과 회한으로 김충에게 용서를 구한다. 김충은 복수의 무상함을 말하며 왕건을 용서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난다.
의의 및 평가
『마의태자』는 번역 소설을 제외한 창작 소설 중에서 역사소설의 타이틀을 단 최초의 작품이다. 상편과 하편을 통틀어 총 128회에 걸쳐 연재된 본격적인 장편 역사소설의 서막을 연 작품이기도 하다. 『마의태자』를 기점으로 이광수는 역사소설가로 확고한 입지를 굳혔으며, 근대 역사소설 장르를 확립하는 데 일조했다.『마의태자』는 구성의 결함이 일찍부터 지적되었다. 『마의태자』를 사화(史話)에도 못 미치는 강담(講談)으로 평가 절하했던 김동인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지닌 동정과 감화력은 조선 사회에 논란을 야기한 「민족개조론」의 소설적 형상화로 볼 수 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소설이 연재된 1926년 순종 인산(因山)이라는 동시대적 사건은 천 년 사직 신라의 멸망과 교차하며 식민지 조선인이 처한 현실의 비애와 울분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 마의태자의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은 사료 부족에서 비롯된 창작의 한계로만 볼 수 없으며, 비극적 대단원을 향해가는 강렬한 서사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을 고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신라의 멸망을 성적 과잉과 타락으로 규정하는 ‘멸망의 젠더gender화’는 비판의 소지를 남긴다.
이광수 작품영향묘소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 1950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 필명은 춘원생·경서학인(京西學人)·노아자닷뫼당백·Y생·장백·장백산인 등.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순한글체 소설을 쓰며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망명, 1919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그러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대일협력)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혔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을 집필하고 연설을 한 것이 눈에 띄며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징병제도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 제하에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생애:출생과 가계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아버지는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 세명은 모두 요절하여 사실상의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종원은 42세였고 두 번 상처한 후 재혼한 상태였으며, 어머니 충주 김씨는 세 번째 부인이었다.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그 뒤 21대조 사마 시(施)는 종정경 평해군(平海君), 20대조 행 원주병마만호(行原州兵馬萬戶) 희무(希武)는 종정경 윤산군(崙山君), 19대조 진사 춘흥(春興)은 종정경 동남군(潼南君)인데 이들은 모두 생전에 왕족을 지낸 것이 아니고, 조선 건국 후 한참 지난 1872년(고종 9)에 왕족의 예로서 군으로 추증된 벼슬들이다
그의 가계는 이후 농민처럼 지내다가 6대조 때부터는 아들이 하나라서 4대 독자였고, 할아버지 리건규가 아버지 형제를 보았다. 어릴적 이름은 보경(寶鏡)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종원은 꿈에 늙은 승려 한 사람이 거울을 주고 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보경이라 하였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올보리라는 별호도 있다. 할아버지 건규(建圭)는 증조부가 학행과 효자 정려를 받았으므로 음서로 통덕랑을 지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글씨와 술을 즐기다가 기생 한 명을 첩으로 들인 뒤 주막집을 차렸다. 아버지 이종원은 초시에는 합격했지만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도 의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집안의 가난과 세를 댈 돈이 없어 이광수가 유아기 중후반일 무렵 정주군 내에서만 9번 이사를 다녔다. 그위 위로 형이 세 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므로 유년기에 심한 기침과 발작을 한 것을 본 일가들은 그가 일찍 죽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5,6세가 되도록 잔병치레가 심하여 부모의 간호를 받거나 의원이 그의 집을 자주 출입하였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1] 일찍부터 글을 떼고 기억력이 남달리 좋아 신동 소리를 들었다. 처음 이름은 보경이라 하였다가 뒤에 광수로 개명하였다.
청소년기
그에게는 이복형제들이 여러 명 있었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2] 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몇 안되는 친구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후일 시인이 된 백석(본명은 백기행), 근처 곽산면 출신 김소월 등이 있었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3]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춘원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고아가 된 그는 재종조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동생들을 두고 재종조부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그 뒤 이광수는 우연히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와 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1]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4]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과 안창호, 유길준의 초빙 강연을 듣고 감화된 그는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연설, 어록 등을 입수하여 탐독하곤 하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사표이자 민족의 사표로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을 손꼽기도 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바로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그에게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어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11월에 일시 귀국했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몸이 병약하여 고된 일을 하기 힘들었던 그는 경성부의 상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다. 1906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그해 3월 복학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시내에 있던 개신교 목사의 집을 알려주었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1] 타이세이 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일평, 홍명희 등과 함께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5] 이어 일본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