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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및 성장
1921년 서울 출생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펴낸 모더니즘 시집
2. 활동 및 작품경향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냄. 그는 지속적으로 사랑과 자유를 주제로 하는데, 자유는 그의 시적, 정치적 이상이고,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이다.
5.16 이후 : 군사정권 득세 이후,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작품화.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
사후 :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 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詩의 자유정신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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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작품론('풀') 풀과 바람은 대립과 호응 이중적 관계 - 오형엽 (문학평론가ㆍ수원대 교수)
풀 김 수 영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중요한 해석적 성과들을
<황혼의 자유여행 / mckim41>
서랍속에 든 「불온시(不穩詩)」를 분석한다 ― 김수영의「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읽고
3. 시의 가치관
4. 하나의 질문지
<『思想界』,1968년 3월호>
김수영 詩모음
풀
풀이 눕는다
<1968. 5. 29>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1953>
눈
눈은 살아 있다.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1957>
그 방을 생각하며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1960. 10. 30>
거대한 뿌리
나는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1964. 2. 3>
병풍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1960. 6. 15>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한번 정정당당하게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1965. 11. 4>
거미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1954. 10. 5>
사랑의 변주곡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1967. 2. 15>
꽃 잎(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기 도 詩를 쓰는 마음으로
<1960. 5. 18>
<어둠속에갇힌불꽃 / 정중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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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왜 우는가 - ‘명동백작’을 아는가
김수영은 왜 우는가
‘명동백작’을 아시는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극화한 교육방송(EBS)의 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나는 ‘명동백작’의 팬이었다. 주말의 늦은 밤이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명동백작’을 보곤 했다. 이 방송의 시청률이 대략 1퍼센트 전후였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명동백작’의 시청자들은 나와 같은 골수팬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컬트 무비’라는 것이 있다. 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 영화에 열광한 나머지, 영화를 보는 일이 마치 신성한 제의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때, 그것을 컬트 무비라 일컫는다. 내게, 혹은 나와 비슷한 열정으로 ‘명동백작’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그 드라마는 그런 열광적인 관극 체험을 가능케 했었던 것 같다.
‘명동백작’ 때문에 나는 내가 존경하는 두 분과 원치 않는 뜨거운 논쟁을 한 적도 있다. 그 두 분들 역시 그 프로그램의 골수팬이었던 까닭이다.
첫 번째 논쟁은 이런 것이었다. ‘명동백작’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 작품인데, 자연히 거기에는 당시로서는 평균적이라 할 수 없을 문화인들의 일상도 잘 조명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다방문화’라는 것이다. 1950년대라면, 한국전쟁 직후의 그야말로 ‘폐허’와도 같은 현실이 지배적이었을 터인데, 그 드라마 속의 문화인들은 기껏해야 ‘다방’에서 시가 어떠니 문학이 어떠니, 그렇게 커피나 술을 마시며 떠들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그들을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존경하는 사회학자인 한 선배의 항변이었다. 그 선배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시의 평범한 시민들은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는데 말이지!”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의 기반 자체가 험악한 상황에서, 가령 시인 박인환 식의 ‘버지니아 울프’를 읽거나, 또는 ‘목마를 타고 간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현실의 편에서 보면, 철딱서니 없는 몽상이자 현실에 대한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문화인들이 그 험악했던 ‘시민’들의 악다구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중산층의 삶을 살았냐 하면, 역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화인들에게도 1950년대의 평균적인 궁핍은 동일한 조건이었다.
물론 가령 이승만이나 이기붕 등의 문민 독재권력에 야합하여 호가호위한 문화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개는 시인 김수영의 경우처럼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오히려 ‘자유’나 ‘혁명’과 같은, 인간성의 좀더 높은 경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문화인들은 그것이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상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고통을 방기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상황의 고통을 뛰어넘어 더욱 완전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희구하는 ‘꿈꾸는 존재’로서의 본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시인 김수영에 관한 것이었다. 왜 이 드라마 속의 시인 김수영은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그려졌느냐는 것이다. 김수영 뿐인가. 화가 이중섭이 그러하고, 시인 박인환과 김관식 역시 그런 문화인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던 존경하는 친구에게, 드라마 속의 김수영은 히스테릭한 것이 아니라 지금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치부 기자인 한 친구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도대체 김수영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김수영의 울음은 두 차원의 대답을 준비하게 만든다. 첫 번째 차원의 대답은 1950년대라는 시대적 성격에 힌트가 있다. 시인 김수영을 보더라도, 그는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했고, 석방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레드 콤플렉스’로 고통 받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체험은 ‘인간’을 이념에 희생된 동물의 차원으로 하강시켰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었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이 그 ‘한 줌의 이념’ 때문에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죽였던 전쟁의 체험은 민족 전체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김수영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번째 대답은 예술가가 꿈꾸는 자유의 속성이란 비타협적인 완전성에 있는데, 195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이런 꿈은 처절한 몽상에 불과했다는 점에 있다. ‘평화통일’을 외치는 일조차 용공으로 내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 1950년대라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 안에서 예술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완전하고 비타협적인 예술적 자유는 질식상태에 처한 것이다. 그러니 김수영은 4.19 전후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명동백작’의 1950년대가 아니라, 21세기의 이 시간대에 김수영이 다시 살아온다면 그는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현실을 긍정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지구화의 시대라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이념 시계는 아직도 1950년대라는 과거에 멈춰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대륙과 연결된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상상지도 속에서는 휴전선 이남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것이다.
이 ‘정신의 섬나라 근성’을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삼대에 걸쳐 대물림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착오다. ‘명동백작’에서의 김수영의 눈물은 21세기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제 시계를 21세기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김수영의 눈물이 멈출 수 있다.
이명원(문학비평가)
김수영 하이데거를 읊다
‘병풍(屛風)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김수영의 시 ‘병풍’)
시인 김수영(金洙映·1921~1968)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 구절이었던 ‘병풍’(1956)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육칠옹해사’는 바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Heideg ger·1889~1976)를 지칭하는 암호와도 같은 단어였다는 해석이 나왔다. 김유중(金裕中) 항공대 교수(국문학)는 최근 낸 단행본 ‘김수영과 하이데거―김수영 문학의 존재론적 해명’(민음사)를 통해 이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육칠옹해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60~70 정도 나이로 바닷가에 숨어 사는 선비’ ‘병풍에 찍힌 도장에 새겨진 인명’ 정도였다. 김유중 교수는 이에 대해 ▲‘병풍’의 내용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죽음에 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병풍’이 쓰여진 1956년은 하이데거가 정확히 67세가 되는 해이며 ▲하이데거의 중국어 표기가 ‘해덕격(海德格·hai de ge)’인데 셰익스피어를 ‘사옹(沙翁)’, 톨스토이를 ‘두옹(杜翁)’이라고 지칭했던 관례에 비춰볼 때 김수영이 하이데거를 ‘해사(海士)’로 표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사상이 하이데거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가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반박하고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고,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인간은 항상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삶의 매 순간을 소홀히 보낼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이런 하이데거 죽음론(論)의 핵심이 들어있는 대표적인 시가 바로 ‘병풍’이라는 설명이다.
제1행의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는 진술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현존재가 내뱉듯이 하는 말”이며, 2행의 ‘등지고 있는 얼굴’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는 모습이다.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는 행은 결국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인식’을 통해 죽음이 삶의 단절이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삶의 생산적 의미를 찾는 실존적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김유중 교수는 “하이데거가 김수영 문학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 후기 문학에서만 거론됐거나 무시됐지만, 초기 작품인 ‘병풍’에서부터 이미 이 같은 사상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인 구연상 박사는 “하이데거와 김수영의 관계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영원한 자유의 시인 金洙暎?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신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글: 이재광 월간중앙 학술전문기자 / 사회학 박사
1968년 6월15일 토요일 오후 3시. 김수영(金洙暎)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고료 7만원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 문인에게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경영이 어려운 출판사에서 쉽게 돈이 나올 리 만무하다. 김수영도 이미 떼인 돈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7만원이라는 거금이 생긴 것이다. 그는 당연히 술을 떠올렸다. 내노라 하는 ‘술꾼’으로 통하는 그에게 돈이 생겼으니 그냥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낮이었지만 그는 신구문화사 편집장 신동문에게 빨리 나가자며 재촉했다.
막 나가려는 순간 한 사내가 들어와 넙죽 인사를 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뒤늦게 문단에 데뷔했고 최근 “마술사”라는 단편으로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병주였다. 김수영은 그 친구의 첫 인상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관심이 갔지만 호탕한 웃음소리라든가 어딘가 으시대며 걷는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어쩐지 오만하게 보여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기분 나쁘다 해서 안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수영 · 신동문 · 이병주, 그리고 함께 있던 한 일간지 기자 등 네 사람은 곧장 청진동 곱창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수영은 그 날 밤 술이 몇 순배 돌았어도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소주와 맥주를 타서 술을 마셔 댔으니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은 여전히 별로였다. 오히려 취기는 평소보다 더 올랐다. 걸음조차 걷기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이병주가 기분 나빴다. 여유만만하고 호방한 그가 영 꼴사나워 보였다. 시비를 붙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니 자신만 우스워진 꼴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11시30분. 김수영은 술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병주와 정달영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영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뿌리치고 혼자 술집을 나왔다.
그는 취한 걸음을 간신히 바로 세우며 을지로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 서강 종점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몸은 여전히 바로 서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부웅’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그의 뒤로 무엇인가가 달려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자신에게 닥쳐오는 거대한 물체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성한 사람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앙선 침범 차량을 피하려던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한 것이다. 술에 취한 그의 나약한 팔로는 인도로 뛰어드는 버스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의 두개골은 심하게 파손됐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부분의 사고에는 죽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법이다. 인간으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크든 작든 죽은 사람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돌려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 책임도 없는 경우다. 이때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몫으로 돌려진다.
김수영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에게 책임이 있다면 늦은 시간 술을 많이 먹고 비틀거리며 걸었다는 정도일까. 그가 차도로 뛰어든 것도 아니요, 신호등을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넌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비록 취하기는 했어도 인도로 천천히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김수영은 생활에서도 아무 책임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회적 책임이 있고 또 대다수는 어느 정도 그것을 지키며 살아간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김수영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되는 대로 술이나 마시며 되는 대로 친구들과 어울렸다. 한 가족의 장남이자 또 다른 가족의 가장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기 위해 푼돈을 벌었으며 그나마 어려우면 아내에게나 동생들에게, 심지어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노모에게도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시인 김수영은 삶에서도 죽음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것이다.
무책임하게 살다 무책임하게 죽은 시인
그는 사회적 책임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살았다. 그것은 치장이며 위선이기 이전에 그에게는 짊어지기 어려운 부담이었고 지기 싫은 부담이기도 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가 만일 그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 역시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패륜아로 취급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남아 있다. 해방 후 가장 주목받는 시인-. 그것이 바로 무책임하게 살다 무책임하게 죽어간 김수영에 대한 평가다.
그가 무절제한 삶을 꾸려 나가면서도 그같은 좋은 시를 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에 주눅들어 살면서 책임지지 못했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범인들의 눈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예술가다. 생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까지, 한량이나 룸펜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살다 아무 책임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간 시인 김수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아무런 책임도 없이 살아간 것일까. 역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기에 사회적 책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국내 현대시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식되는 한 시인의 난해한 삶은 아무래도 다음 시 한 수에서 풀어 나가야 할 것 같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울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국내 시사(詩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시의 역사에서 가장 난해한 시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김수영의 변화된 시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 이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어(詩語)와 시의 형식을 구사했다. 이전에 보이던 한문투의 문장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어가 줄어들고 대신 일상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등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정시 일색이던 한국 시단에 모더니즘적인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와 함께 일상용어를 과감하게 시어로 차용(借用)함으로써 새로운 실험을 단행했다는 평가를 이끌어 냈다.
이 시는 1953년 “자유세계” 4월호에 발표된 것이다. 통상 잡지라는 것이 표지에 붙어 있는 호수보다 한달 빨리 발행되니 실제로 발표된 시기는 같은 해 3월 경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잡지에 실리는 글은 대체로 길면 발간 한달 전쯤 입수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시가 실제로 쓰여진 시기는 대충 1952년 말에서 53년 초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 연구자들이 이 시가 쓰여진 시기를 이같은 방식으로 추론까지 하면서 알고자 하는 것에서도 이 시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이름 석자는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김수영이 쓴 단 한편의 시의 제목이나 시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탓할 필요는 없다. 김수영이라는 사람은 평범한 우리네 독자들이 읽기에 적당하지 않은 시만 골라 썼고 그래서 범인들의 가슴을 적셔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시인을 가리켜 비(非)대중적인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평론계나 문학계에서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시 분야에서 김수영만큼 문제작을 많이 쓴 시인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한 평론가는 “해방 이후 활동을 펼친 시인 가운데 김수영만큼 주목받은 이는 없다. 그에 대한 비평적 탐사의 활기는 ‘김수영 비평의 역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현대시의 역사에서 김수영의 위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에 대한 국내 학위논문만 60여편. 물론 최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김수영을 가리켜 ‘대중에게는 가장 비대중적인, 하지만 평론계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시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유독 김수영에 대해서만큼은 평론계나 학계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현대시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그 이유를 찾기에는 어딘가 미흡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해방 이후 50여년 동안 국내 시단은 숱한 시인들을 배출했고 그 중에는 김수영에 버금가는 기라성같은 시인들이 적지 않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해석의 난해함, 그리고 다양성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현실참여, 민중주의, 산문시, 고백시, 역사와 자유 등 어떤 종류의 시각에서도 좋은 분석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달나라의 장난’은 이같은 독보적인 시인이 시세계의 대전환점을 맞은 것이니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기회에 김수영이라는, 난해한 시인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달나라의 장난’이 쓰여진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아내 김현경이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당시 이들 부부는 따로 떨어져 살았다. 김수영은 부산에서 대구를 오가며 살았고 아내 김현경은 수원에서 누군가에게 의탁해 있었다. 이들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물론 전쟁 탓이었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김현경은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김현경의 생활은 아주 곤궁했다. 남편도 없이 세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으로서는 인심이 각박해진 전시 상황에서 도저히 혼자 먹고살 길이 없었다. 김현경은 이때 생계를 잇기 위해 다른 남자와 동거 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김현경은 꿈에 그리던 남편이 살아 부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지막 남은 금시계를 팔아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으로 가기 전 그는 편지 한통을 남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라는 것이 아주 걸작이었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안부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앙꼬빵 세개를 그린 그림을 같이 보낸 것이다. 이후 김현경은 산문 ‘임의 시는 강변의 불빛’에서 그 때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굶주림에 떨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서 따뜻한 유머로 위로도 하고 익살을 부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시가 담긴 답장을 받아 들고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남편의 생사가 비로소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전쟁이 터지자 우왕좌왕하다 피난을 떠나지 못했고 지옥같은 서울에 남아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문학가동맹에 참석했다가 평생을 이데올로기적 피해를 입을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정도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 그가 겪었던 행적은 말 그대로 한편의 소설감이다. 인민군이 문인들을 대거 의용군으로 끌고 갔을 때 그 안에 포함됐고 두 차례의 탈출 끝에 간신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두 차례의 탈출 모두가 또한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처음 의용군 부대에서 탈출했을 때는 다시 붙잡혔는데 숨겨 둔 인민복을 찾아내 입은 후 탈출병이 아닌 패잔병이라고 속인 후에야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두번째 탈출은 일단 성공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서울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성공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더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경찰의 심문에 걸려 첩자로 오인받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쇠의자로 두들겨 맞아 정강이가 으깨졌으며 급기야 인천을 거쳐 그 유명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이때 김수영은 깨진 정강이에서 구더기가 나올 정도로 심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거제도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월이었다. 전쟁이 한창이어서 수용소는 온갖 포로들로 미어 터졌고 그만큼 사고도 많았다.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으로 나뉜 포로들은 살인사건이 예사로 일어날 만큼 극심한 대립을 보였다. 그는 이 곳에서도 늘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이 와중에서 그를 살려 준 것은 영어. 일찍이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김수영은 영문 잡지 번역이나 영어교사 등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며 술값과 담배값을 벌었을 정도로 출중한 영어실력의 소유자였다. 이 곳에서도 통역이 필요했던 수용소는 결국 그의 탁월한 영어실력을 높이 사 통역으로 일하게 했고 그를 잘 본 고위직의 힘으로 ‘민간억류인’ 자격으로 일찍 수용소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겁 많고 소심하지만 자존심 강한 아이
수용소를 나와 밥벌이를 한 것 역시 통역이었다. 김수영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지인의 소개로 미8군 수송관의 통역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자리는 막대한 이권이 개입돼 있었다. 군수물자 수송 부대였던 만큼 화물차 배정에서 각종 물자의 선적까지 관장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전시에 비싼 값의 미제 물자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김수영이 그런 것에 연연할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미군들의 천박한 행동이 싫었고 이유없는 우월감이 싫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우월적인 언행을 인정해 주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굶어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자신의 속물근성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바로 이때 그는 아내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앙꼬빵 세 개가 그려진 그림과 함께. 이때 그의 심경이 담겨 있는 시가 바로 ‘달나라의 장난’이다. ‘도시 안에서 쫓겨 다니듯 사는, 어느 소설보다 신기로운 나의 생활을 내던지고’ 가만히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팽이는 참으로 무심하게 방안을 돌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 있고 그래서 한사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데 생활에 쫓겨 그 사명과 운명을 다하지 못하니 팽이는 나를 비웃듯 돌고 있다…. 그의 심경은 참으로 괴로웠던 것이다.
아내는 훗날 시를 읽고는 무던히도 후회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남편의 어두운 고뇌를 괜히 자극만 한 셈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남편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결과적으로는 후회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심한 말다툼 끝에 아내는 다시 그가 있던 수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말다툼 끝에 “통역이란 더러운 직업이며 오늘로 그만두겠다”는 얘기만 나왔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겪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가족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남편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리 생활에 눈이 어둡고 당장 굶는 것보다 귀족같은 자존심을 더 찾는 남편이기는 했지만, 때가 때이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내로서는 원망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김수영은 자기 말대로 그 ‘더러운 통역일’을 때려치우고 만다. 남들의 눈으로 보면 여간 아까운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부산 동생집으로 내려갔다. 동생의 ‘집’이래 봐야 뻔했다. 별반 직업이 없는 피난민이 살던 곳이었다. 기껏 한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토담집에 불과했다. 이 곳에서 김수영은 동생 수성과 함께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느냐는 한마디, 그리고 동생이 돈 벌러 나가면 멍하니 있다가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룸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당시를 회고하며 동생은 “담배값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룸펜-. 김수영의 일대기를 보노라면 이 단어만큼 그의 생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없다. 그는 딱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 져 본 적도 없고 자기 입 하나 간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나서 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그 주변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모두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피난민 시절에도 그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귀족과도 같은 자존심을 지켰고 주변에서도 그런 그를 이해했다. 본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환경이 더욱 어렵다 보니 자신의 생활패턴을 유지하기 위한 갈등이 심화됐을 뿐이다.
1953년이면 그의 나이 31세. 사회적으로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아내과 노모 그리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번도 그같은 역할을 담당해 본 적이 없다. 늘 놀고먹었으며 늘 시인이나 화가·소설가 등 예술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는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만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술 예찬론자였다. 술과 함께 살고 술과 함께 대화하고 술과 함께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나 과음으로 답답해진 가슴과 쓰린 속을 다독거리며 시를 썼다. 고통스러운 심신을 더욱 쥐어짜야 시어가 나오는, 그런 시인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고 안스러워했으며 그의 그런 삶을 인정했다.
가족의 뒤치닥거리로 힘들었던 어머니조차 장남 김수영을 위해 식당을 경영하며 술과 안주를 대줬을 정도다. 30년 가까운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가족들의 그같은 태도에도 이해가 간다. 그는 1921년 생이다. 일본의 경제공황의 여파가 한국에도 밀려오던 시기에 태어나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고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 곳 저 곳으로 도망 다녀야 했다. 간신히 전쟁의 포탄을 피한 사이 피끓는 24세의 나이에 해방을 맞았다. 그래도 안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부 혼란은 극에 달했고 그래도 간신히 시작(詩作)을 개시할 무렵 전쟁이 터져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제 말기에는 어떻게 총알받이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호된 시련을 겪은 것이다. 그는 인민군의 의용군이 됐다가 간신히 탈출하자 국군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해야 했다.
4·19를 거치며 그는 겨우 언론의 자유를 얻어 ‘자유’를 주창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봤지만 그것도 잠시,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詩) 창작에 전념하여 겨우 이름을 얻게 되고 생활도 안정되어 가던 1968년 그는 47세의 나이에 ‘재수 없는 사고’로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술을 한잔 걸치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그것은 생활에서의 책임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그저 자유롭게 살다가 자신이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죽음을 맞은 것이다.
거치고 앙상하게 드러나는 김수영의 비극성
그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주변인들은 그에게 뭔가를 하기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셋째이자 장남’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셋째로 태어났지만 첫 아이와 둘째 아이가 낳자마자 죽어버렸으니 장남이 됐다는 뜻이다.
그는 첫돌을 지날 때까지 집안 어른들을 조바심 나게 했다. 설사에 감기에 잠시도 쉴 틈 없이 아파하더니 급기야 폐렴에 걸려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살아났다. 집안 사람들의 정성 어린 보호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강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기도 했다. 병약한 그의 체질로 인해 병마는 오래지 않아 다시 그를 찾았고 두고두고 그의 삶을 괴롭히는 결정적인 일을 저지르고 만다. 초등학교 시절 급성 장질부사에 걸린 김수영은 거의 죽다 살아났지만 그로 인해 중학교 입시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깟 중학교 입시 때문에’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아이들에게는 얘기가 다르다. 김수영이 꼭 그랬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부는 아주 잘했지만 겁이 많고 소심하고 말이 없고 여리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로 그를 기억한다.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중학교에 떨어졌으니 상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아파 다시 입시를 준비할 수도 없었던 그로서는 2차로 선린상고 전수과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수과는 현재 야간고등학교나 매한가지로 돈이 없어 낮에 직장에 다녀야 했거나 주간 학교에 갈 능력이 안되는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그저 좋아하던 여자가 도쿄로 갔기 때문”이라며 그는 도쿄행을 여자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차지했다는 자존심이었다. 비록 몸이 아파 중학교를 잘못 갔지만 대학만큼은 식민 모국 일본의 최고학부를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도쿄에서 예비학교를 다니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좌절을 겪는다. 예비학교를 다니며 도저히 일본의 엘리트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일본연극학교에 진학하며 그의 생애 처음으로 연기와 시 창작을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사실 그의 할아버지대 까지만 해도 김수영은 부유한 집안에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종로 국일관 근처 육간대청의 집에서 살며 매년 500석이 넘는 땅을 갖고 있는 지주였다. 매년 추수 때면 곡식이 줄을 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이재(理財)와는 거리가 멀었다. 돈을 벌 생각보다 쓸 생각을 먼저 했고 어쩌다 돈을 벌겠다고 나서면 벌기는 커녕 까먹기 일쑤였다. 조금씩 가세가 기울던 그의 집안은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그의 학비나 생활비를 대기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 역시 김수영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돈을 보내 주면 썼고 안 보내 주면 스스럼없이 친구에게 얹혀 사는 사람이 그였다.
그가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은 전적으로 징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극을 향해 달려갈 무렵 그는 징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에게 넉넉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무렵 그는 이미 거지가 돼 있었다. 가족들은 이미 서울에 없었다. 생활을 책임 져야 했던 그의 어머니가 중국 지린(吉林)성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다 아예 지린성에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따라 지린성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여전히 무기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병든 아버지를 포함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려 분주하게 다녔고 김수영은 지린성으로 모여든 젊은이들과 연극판에서 어울렸다.
그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것은 해방 직후였다. 일제 치하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명동 부근에 박상진이 설립한 ‘청포도극단’을 찾아 연극쟁이들과 어울렸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정식으로 등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46년 “예술부락”이 ‘묘정(廟庭)의 노래’‘공자(孔子)의 생활난’‘거리’‘꽃’ 등을 추천해 줬던 것이다. 시인이 됐다고 해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심심하면 통역을 했고 극장에 간판을 그리겠다고 돌아다녔고 폭음한 후 식구들에게 난폭한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내버려 뒀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혹 불화가 있을 때면 그의 어머니는 “수영이는 본래 그렇게 살아야 한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생계의 책임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대가족을 꾸려 간 것은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을 김수영은 놀기 위해 찾아갔다. 친구들과 함께 밤새 술을 퍼 마시고는 했다.
전쟁을 겪었다고 해서 그가 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저 현실의 냉혹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전까지는 놀고먹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나 동생이 담배값을 줬고 술을 대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굶주리는 상황이었다. 그는 스스로 담배값과 술값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자존심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그는 심지어 아내와 별거 중 여의사와의 혼담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 그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강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도 나가 보고,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도 근무해봤지만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통역이란 더러운 직업, 때려치우겠다”
그런데 바로 아내가 그 일을 해줬다. 1954년 김수영 부부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새로 합쳤다. 아이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 한 김현경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계를 책임질 위인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아내는 그 일을 자신이 지지 않는 한 남편과의 재결합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김현경은 아예 직업전선으로 나섰다. 무허가이기는 하지만 마포 서강에 500평짜리 집을 얻어 양계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김수영도 이 일만큼은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어 다시 알을 낳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 산문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 같은 자홀감을 가졌다’고 썼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생활의 주역이 아닌 조연에 불과했다. 스스로 인정하듯 양계사업에서 김수영은 아내의 조수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책임한 시인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인가. ‘달나라의 장난’을 읽어 보면 그에게도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라고 쓰고 있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는 왜 그토록 자학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까. 그에 대한 추도시 한 구절은 그가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김수영에게는 비극성이 거칠고 앙상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그 거칠고 앙상함은 뒤에 생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자유가 가용공간을 거느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콩코드 광장과 같은 넓이와 크기를 그의 자유가 가질 수 있었다면, 그런 광장의 공기를 그의 자유가 가슴깊이 들이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 광장을 갖지 못한 그의 자유는 그리하여 마침내 지치고 메마르게 되어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김수영의 시세계의 화두를 ‘자유’로 꼽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기 싫어하는 예술인들의 자유다. 그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해 무던히도 생활의 구속을 벗어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곤궁함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그를 사로잡는 악귀였음이 분명했다.
양계사업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둘째 아들 우가 태어나자 그는 더욱 생활의 기쁨을 누리게 됐다. 생활에 자유를 얻었던 탓일까. 그는 1958년 ‘눈’‘폭포’‘여름밤’ 등이 시단의 주목을 받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까지 받았다.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낼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1960년 4월19일 부패한 권력을 쓸어버리겠다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그는 비로소 자유를 화두로 꺼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나 처음 가져 보는 자유였다. 그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이처럼 흥분한 적은 없었다. 4·19는 그의 시세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다. 그는 4·19 이전의 권위주의와 부패를 가리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 밑씻개로 하자’는 표현까지 동원하고 있다.
그러니 5·16 군사 쿠데타가 그에게 줬던 충격을 이해할 만하다. 시내 곳곳을 무장한 채 돌아다니는 군인들은 15년 전 전시(戰時)의 악몽을 되살려 줬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영은 군인들에 대해 공포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 전쟁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를 근본적으로 말살시키는 흉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사그러 들었고 그의 눈길은 다시 내부로 향했다. 시나 산문을 쓰고 번역을 해 푼돈을 벌었고 아내가 경영하는 양계장의 조수로 생계를 꾸려 갔다. 아이들이 커가니 원고료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돼 아예 돈 일부를 술값으로 할당해 두거나 아예 얻어 먹거나 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5·16 이후의 시기를 그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한번 맛본 자유와 사회참여에 대한 의지는, 비록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못했지만 시세계에서는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구현됐다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 역시 막연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여름뜰’의 시 구절을 보자.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예의 그 난해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지만 자유를 향한 보다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평론가는 노장사상과 그의 자유관을 빗대어 보기도 한다.
(이 글은 다음 책들을 참고했음· 최하림 지음, “김수영”(문학세계사, 1993)/김혜순 지음, “김수영”(건대출판부, 1995)/최성침 지음, “물의 모험”(아세아문화사, 2000)/김승희 외 지음, “김수영 다시 읽기”(프레스21, 2000))
문학의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전투구로 끝났던 60년대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
1968년 “사상계” 1월호는 연초부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60년대말 경제성장이라는 사회적 담론이 끌고 가는 폐해를 조목조목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의 펜끝은 권력층과 세도층,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만들어 주는 지식인을 향해 있었다.
‘주장은 독재를 욕하고 독재는 주장을 보고 욕을 한다. 그러다가 힘이 약한 주장이 명령을 넘어서서 어쩌다 행동으로 나올 때 독재가 어떤 수단을 쓰는가에 대해 최근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누구나 다 아는 6·8 총선거의 뒤처리 같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문다운 신문이 없다는 것과 잡지다. 공정한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신네 신문이 지난 1년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의 긴급한 과제를 얼마나 주장하고 얼마나 실천했는지를 반문하고 싶고….’
술자리라면 모를까,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토록 강하게 정권과 신문에 칼을 들이댄 것은 소심하고 겁 많은 김수영으로서는 의외였다. 나아가 ‘동백림사건’까지 거론하며 “문화와 예술의 자유의 원칙을 인정한다면 학문이나 작품의 독립성은 여하한 심판에도 굴할 수 없고 굴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논쟁의 발단은 김수영이 이 글에서 이어령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언론과 문학의 양면성 또는 이중성을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이어령은 한국문화의 한 단편을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로 규정했다. 아이들은 ‘에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는데 이 아이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과 불안은 가상적인 것이며 국내 문화인들 역시 정체불명의 공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김수영은 이같은 이어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는 이때의 ‘에비’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억압으로 한국문화의 퇴영성은 문화인의 허약성과 비겁성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문화인들을 그렇게 만든 유무형의 정치권력의 탄압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어령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문화의 위기는 억압된 정치상황에서보다 자유 속에 내던져졌을 때 더 컸다는 것이다. 그는 8·15와 4·19의 예를 들며 문화의 죽음은 정치권력에 의한 타살보다 자유로 인한 자살의 경우가 더 많았다고 주장했다. 4·19 예찬자였던 김수영은 충격을 받은 듯 4·19와 문학이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까지 쳐가며 이어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줬다고 해서 그 책임이 당시의 정치적 자율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소아적인 단견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논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점차 인신공격적이고 말꼬리잡기식이 되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김수영의 분노는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쟁 직후 부산 세미나에서 강연할 때도 그는 논쟁을 의식했다.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주제로 연단에 선 김수영은 이렇게 외쳤다.
“치열한 자유는 아무런 원군도 없는, 원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그가 죽기 2개월 전, 그는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토해냈다. 지인들은 그 날 밤 김수영이 술을 먹고 몹시 슬프게 울었다고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