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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자가 본 일본의 성문화
-申維翰의 海游錄을 중심으로-
鄭 應 洙*
1. 시작하는 말
일본의 근세문학이나 문화를 논할 때 성문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도 지적하고 있듯이,1) 일본의 근세문화를 담당한 대도시 쵸닌(町人)의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가 성적 쾌락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적 쾌락에는 이른바 여색과 남색이 있는데, 여색을 위해서는 막부로부터 공인 받은 유곽이 있고 남색의 대상으로는 가부키(歌舞伎)의 와카슈(若衆)가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難波物語(1655)를 비롯하여 なには鉦(1680)와 같은 유곽의 안내서나 유녀2)의 평판기 등이 수십 종 출판되었고, 유곽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기술한 色道大鏡(1678) 같은 책도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미가타(上方)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好色一代男(1682)이나 好色五人女(1686), 好色一代女(1686) 등도 모두 남녀간의 성적 쾌락을 다룬 이야기이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다색 판화인 니시키에(錦繪)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우키요에(浮世繪)도 이른바 춘화를 만들면서 유녀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편 남색은 14세기 이후에 절에서 성행했다고 하는데, 일찍이 秋夜長物語(14세기)와 같은 소설의 제재로 쓰였고 心田詩藁(15세기 전반)나 流水集(15세기 후반), 三益艶詩(16세기 전반)와 같은 고잔(五山)의 한시집에서도 다루어졌다. 또한 사무라이 집단에도 미소년을 사랑하는 습관이 있었고 心友記(1643) 등의 가나조시(假名草子)도 남색을 다룬 것이 적지 않다. 사이카쿠의 남색대감(男色大鑑)(1687)도 바로 이 남색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동성애를 다룬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3).
이처럼 성의 문제는 일본의 근세문학과 문화를 지탱하는 중요한 중심축의 하나이므로, 이 문제를 외면하고는 일본의 근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소개마저도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일본의 성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근세 일본을 여행한 한 조선 유학자가 일본인의 성 풍속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텍스트로는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1681~1752)의 해유록을 사용할 것이다. 이 여행기는 세밀한 관찰과 유려한 문체로 인해 박지원의 熱河日記와 함께 조선시대 기행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 풍속에 관해서도 다른 여행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자세히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오사카(大坂)의 유곽
근세 조선인의 일본 여행은 주로 외교 사절의 파견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장군이 바뀌면 조선정부가 축하사절을 파견하는데, 에도 시대에만 12번의 사절이 파견되었다4). 신유한 일행은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8대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홍치중을 정사로 한 479명으로 구성되었다. 4월 11일 한양을 떠난 신유한 일행이 일본 3대 도시의 하나인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9월 4일이었다. 사절단은 이곳에서 5일간 머물렀는데, 이 때 신유한은 오사카의 유곽을 보게 된다. 당시 오사카의 유곽인 신마치(新町)는 교(京)의 시마바라(島原), 에도의 요시와라(吉原)와 함께 일본 3대 유곽의 하나였다. 물론 이 유곽들은 막부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즉 사창이 아니라 공창이었던 것이다.5)
일본에 공창이 처음 설치된 곳은 교로서,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마부였던 하라 사부로자에몬(原三郞左衛門)이 히데요시의 허락을 받아 산죠오시노코지(三條押小路)에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1602년에 로쿠죠(六條)로 이사하여 미스지쵸(三筋町)라 불리다가, 유곽이 시내에 있으면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1640년 서둘러 스자쿠(朱雀)로 이전시켰다. 그런데 이 때가 마침 시마바라의 난이 평정된 직후였기 때문에, 유곽이 이처럼 급하게 이전된 것을 보고 교의 젊은이들이 ‘시마바라의 난 같다’고 말한 데에서 시마바라라는 유곽의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6)
한편 오사카의 유녀촌은 에도시대 이전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었는데 1616년 기무라 마타지로(木村又次郞)가 막부로부터 정식으로 유곽 창설을 허가 받았다. 장소는 시모바쿠로쵸(下博勞町)로 늪지대였다. 이곳을 당시 덴마(天滿)에서 유녀집을 하고 있던 사도가시마 요사베(佐渡島與三兵衛)가 개척해 1629년에 완성했다. 이 때부터 허가를 받은 기무라를 위시해 많은 유녀집이 이곳으로 모여 효탄쵸(瓢簞町), 사도가시마쵸(佐渡島町) 등의 마을을 형성했는데 이 지역을 총칭해서 신마치라 부르게 되었다.7)
이러한 오사카의 모습을 신유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풍속에 각 지방에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을 설치하는 법이 없으므로 부상(富商)의 여행하는 자들이 모두 지내는 곳마다 사사로이 창녀(娼女)를 접하므로 이름난 도시의 큰 객점(客店)에는 모두 창루(娼樓)가 있는데 대판(大坂)의 번화한 것은 가장 화류(花柳)로써 이름이 났다. 층층한 다락과 구불구불한 집이 길거리에 연하여 병풍․장막․이불․베개․술병․다당(茶鐺) 등 속이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되었고, 그 가운데 각각 한 미인을 두고 위에 금방(金牓)을 달기를 상상창루(上上娼樓)라 하였는데, 호협한 남아들이 금을 싸가지고 온 자는 자기의 마음대로 따라 요구한다. 상상(上上)의 집이라도 하루의 화채(花債)가 백금(白金) 열 냥에 지나지 아니하고, 중․하는 차등이 있다.8)
우선 일본에서 유곽이 성행하는 것을 기록하고 나서 그 대표적인 예로 오사카의 유곽을 들고 있는데, 사실 오사카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문화의 중심이 교와 오사카에서 에도로 이동하는 것은 享保년간(1716~1735)부터이지만, 에도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文化․文政期(1804~1829)이므로 신유한이 오사카를 방문한 1719년에는 아직 교와 오사카가 일본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을 때였다. 더구나 오사카는 쵸닌의 도시였고 일본 제일의 항구 도시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곽의 규모도 교를 능가하고 있었다. 1670년대에는 오사카의 유녀가 2,2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9)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유곽이 성행하는 이유를 지적한 곳이다. 신유한은 그것을 일본에는 각 도시마다 기녀를 설치하는 법, 즉 官妓制度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관기제도에 익숙해 있는 조선 유학자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선에 매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娼妓’라 하여 주점을 중심으로 매춘을 하는 기녀들이 있었다. 이긍익(1736~1806)이 “양가의 부녀자로서 간음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서 방지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잡아다가 창기로 삼아 더욱 음란한 짓을 터놓게 하게 하니 과연 어디에 음란을 금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10)라고 한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간음한 여인을 창기로 삼았던 것이다.
한국에서 유녀11)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에 유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유녀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和姦한 여인을 ‘恣女(외간 남자와 화간)’와 ‘遊女(친족간의 화간)’로 삼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 중 ‘자녀’를 외국의 상인들이 왕래하던 新倉館에 소속시켜 위안부 노릇을 하게 했다. 일종의 유녀인 셈인데, 이것을 국가에서 관리한 것을 보면 이 시대에 이미 국가에서 승인한 공창제도가 존재했던 것이 된다.12) 조선시대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娼妓’가 있었지만 이들은 관청에 소속된 관기가 아니라 사사로이 영업을 하는 私妓로서, 그들은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성문화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성문화의 중심을 이룬 것은 역시 관기였다. 조선은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확립된 관기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크게 한양에서 활동하는 京妓와 지방관청에 속해있는 地方妓로 나뉘어진다. 그 중에서도 지방기는 ‘房妓’ 혹은 ‘守廳妓’라 불릴 정도로 출장 온 관리의 침실시중을 드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에 기녀와 관리의 러브스토리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또 그것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崔慶昌과 洪娘, 鄭澈과 眞玉이 주고받은 시조나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인 춘향전도 모두 기녀와 관리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이러한 관기문화라 부를 수 있는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신유한이므로 돈을 매개로 하는 일본 유곽의 풍습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유녀는 돈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천박하다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보자.
내가 통역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웃으며 흉보기를,“ 옛적부터 정(情)과 색 가운데는 빠져서 혹한 남녀들이 있어, 남자는 인연을 기뻐하여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여자는 정에 감동되어 한 푼의 돈도 사랑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상상(上上)의 풍류스런 일인데, 지금 너희들이 말하는 상상주(上上姝)라는 것은 추잡한 놈이나 이름난 사람들 가리지 않고 다만 돈만 계산하여 애교를 바친다 하니, 이것은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하품(下品)으로써 몇 푼 어치도 못되는 것이로다.”13)
나름대로 풍류의 등급을 정한 일종의 풍류론이라 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상등의 풍류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랑 없이 돈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의 유녀는 말 그대로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유한의 비난에 대해 통역관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고 한다.
나라의 풍속이 서로 다릅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일본의 호귀(豪貴)한 집에서 그런 특수한 미인을 사 가지고 이익을 얻는 물건으로 삼기 때문에 소위 창루(娼樓)에 화려한 온갖 기구를 다 주인이 설비하여 놓고 문에 간판을 붙여서 그 값을 정하고는 매일 세(稅)를 받아가니, 저 미인들은 감히 제가 임의로 할 수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서러워하는 자도 있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억지로 몸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14)
여자의 마음은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지만, 일본의 유녀가 돈에 집착하는 것은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일본은 조선과 달리 개인이 유녀를 거느리고 장사를 하기 때문에 돈을 밝히는 것이지, 원래부터 일본 여자와 조선 여자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기제도와 유곽제도의 차이가 두 나라 여자를 다르게 만들었다는, 일본과 조선의 제도와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지적한 말이다, 신유한의 비난은 물론 이 지적처럼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유곽제도라는 일본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국 문화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조선의 문화적 우월주의가 자리잡고 있지만, 신유한이 굳이 통역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그가 통역관의 해명을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3. 여색을 소재로 한 시 - 「浪華女兒曲」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신유한은 이어서 “화자(花紫)는 22세요, 약자(若紫)는 20세요, 소자(小紫)는 15세요, 만주춘(滿州春)은 20세요, 보야향(保野香)은 25세요, 발지(發枝)는 20세요, 우영(友影)은 17세요, 촌춘(村春)은 16세요, 촌우(村雨)는 21세이니, 이들이 상상(上上)․상중(上中)의 미인입니다”15)라고 통역관의 말을 인용하여 오사카의 유명한 유녀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사카를 출발하기 전날인 9월 9일자 일기에는 「낭화여아곡」이라 이름 붙인 오언절구를 30수 모아놓고 있는데, 이것은 통역관에게 들은 유녀의 풍습을 토대로 하여 신유한 자신이 지은 것이다. 일본의 일반적인 생활 풍속을 묘사한 시는 정몽주 이래 통신사들의 기행록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신유한처럼 유녀의 습속을 소재로 한 악부시 형태의 아름다운 시를 남긴 사람은 없다.16) 이것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유녀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아무리 신유한이 일본의 유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해도, 이를 소재로 한 시를 짓는 일은 당시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낭화여아곡」의 서문에서 일본 유녀들의 풍습이 매우 추하여 입에 담을 것이 못된다고 한 다음 “공자가 나라를 위한 교화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정성(鄭聲)을 멀리하라’ 하셨으나, 시경(詩經)을 편찬할 때에는 정풍․위풍을 채택하여 후세의 경계로 삼았었다. 육조(六朝)․삼당(三唐)에도 운치 있는 시인과 낭군을 생각하는 여인들의 음란하거나 고운 시편들은 모두 상복(桑濮)의 소리였었다. 이것도 나쁜 것이 아니라 각기 시대의 교화를 증험할 만한 것일 뿐이다. 나는 비록 시사(詩詞)에 익숙하지 못하나 자못 통역의 말을 취하여 운(韻)을 붙여서, 왜인의 신악부(新樂府)로 만든 것이 무릇 30장이 되었다. 다른 날 돌아가 조정에 고하여, 풍요(風謠)를 채집하는 군자로 하여금 이것을 응징하게 하련다.”고 하여 공자가 시경을 편찬할 때 淫詩가 많은 鄭과 衛 두 나라의 노래를 채록한 사실을 예로 들어, 자기가 유녀를 소재로 한 시를 쓰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낭화여아곡」을 살펴보면서 유녀에 기울였던 신유한의 관심의 일단을 엿보기로 하자.
나를 사랑해 후기를 약속하면서, 憐儂約後期
나더러 정조를 지키라네. 敎儂作芳潔
주인집에선 금전을 벌라하니, 主家覓金錢
금전은 어디서 나올꼬. 金錢以何出
情人은 나를 사랑한다며 정절을 강요하는데 그렇게 되면 주인에게 세를 바칠 돈은 어디서 구하느냐고 하소연한다. 정조를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유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앞에서 통역관이 신유한에게 한 말을 그대로 한시로 옮겨놓은 듯 하다. 시 바로 밑에는 “기생은 모두 貴家에서 기르므로 날짜를 계산하여 돈을 내기 때문에 기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라는 주를 붙여, 매일 주인에게 세를 지불해야 하는 일본의 유곽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주인에게 바칠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정조를 지킬 수 없는 유녀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 바로 다음의 시이다.
고운 낭군 가는 것 원망스럽고, 姸郞去以怨
추한 낭군 오면 찡그려지네, 惡郞來故顰
나는 눈물이 두 가지, 儂有兩種淚
이 낭군 저 낭군에 늘 수건 적시네. 爲郞長濕巾
좋은 손님이 떠나면 그것이 싫어서 울고, 싫은 손님이 오면 거절할 수 없어서 울기 때문에 늘 눈물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고운 낭군과 추한 낭군을 선택할 수 없는 자기의 괴로운 처지를 ‘눈물이 두 가지’라고 표현한 곳에 묘미가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물론 유녀로, 유녀가 직접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낭화여아곡」에 실려있는 시가 모두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읽는 이에게 화자의 심정을 훨씬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유한이 이 시를 지은 것은 유녀의 안타까운 심정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가 시 바로 밑에 “기생은 미남 추남을 가리지 않고 돈만 보고 몸을 맡기는 것도 주인이 세금을 받기 때문이다.”라는 주를 붙인 것을 보면, 일본의 유녀가 돈만 밝히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신유한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생긴 원인까지도 전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낭군은 누에 올라 자려 하는데, 歡欲上樓眠
나는 목욕탕이 좋다 하네. 儂言浴室好
향탕에 나의 살결 씻고서, 蘭湯澡儂膚
웃음을 머금고 낭군과 포옹하네. 含笑交郞抱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혼욕의 풍습을 읊은 시인데, 이 풍습도 조선유학자의 눈을 놀라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이 시의 주에서 “이 나라 풍속은 반드시 목욕탕을 만들고 남녀가 함께 목욕한다”고 했는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윤리에 물들어 있던 그에게 혼욕은 매우 신기했을 것이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혼욕에 대해 “집집마다 반드시 목욕탕의 설비가 있는데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하며 대낮에 서로 정사(情事)를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17) 한다고 말했다. 집집마다 욕실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 청결함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단지 혼욕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혼욕의 풍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혼욕은 지금도 일본의 목욕문화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될 정도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소재인데, 하물며 조선의 유학자에게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낭군의 머리는 푸르기 수박 같고, 郞頭綠如瓜
나의 이빨은 희기가 박속 같네. 儂齒白如瓠
박이 나서 오이넝쿨 안으면, 瓠生抱瓜蔓
어디엔들 얽히지 아니하리. 何處不縈紆
일본식 상투(丁髷)를 하기 위해 이마 위의 머리를 깎으면 머리가 푸르스름하게 될 것이다. 그 푸르스름한 남자의 이마를 푸른 수박으로, 유녀인 나의 하얀 이를 박 속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박과 수박(오이) 넝쿨이 얽힌 것으로 남녀간의 성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푸른색과 흰색의 대비도 뛰어나지만, 박과 수박 넝쿨이 얽혀있는 것을 남녀간의 성행위로 비유한 것은 실로 뛰어나다.
그런데, 이 시에서 재미있는 것은 유녀의 특징으로 하얀 이가 거론된 것이다. 보통 하얀 이는 「瓠犀」라는 단어가 나타내고 있듯이 미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것이 이 시에서는 유녀를 의미하고 있다. 요컨대, 결혼한 일본여자가 이를 물들인다는 풍습을 모르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신유한도 이러한 걱정이 있었던지 “남자는 모두 머리를 깎았고 여자는 이에다 검은 칠을 하는데, 다만 기생의 이빨은 희다.”라는 주를 달고 있다.
그는 이를 물들이는 풍습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이를 물들이는 행위 그 자체도 그의 눈을 끌었겠지만, 이를 물들이는 것이 결혼의 표시라는 것도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머리 형태에 의해 결혼 여부를 나타내는 조선의 풍습에서 보면 그것은 정말 신기한 풍습이었을 것이다. 이를 물들이는 풍습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은 것도 그의 관심도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이를 물들이는 풍습에 관해 쓴 시를 하나 더 들어보자. 그는 쓰시마(對馬)에서 「賽神曲」을 10편 지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감은 색으로 새로 이를 물들이니, 玄華新染齒
사람 보면 부끄러워 말못하네. 見人羞不言
낭군의 왼팔 베고 누워, 獨枕郞左臂
연거푸 좌위문을 부르네. 連喚左衛門
이것은 신혼부부의 모습을 그린 시이지만, 여기에서도 이를 물들이는 풍습이 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이 시에도 역시 “왜녀가 시집가면 이에 검정 물을 들인다. 남자는 거개 좌위문이라 말한다. 이것은 새로 시집간 여자가 말한 것이다” 라는 주가 붙어있는데, 여자가 결혼하면 이를 물들인다고 하는 풍습을 알기 전에는 이 시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꽃비녀에 비단 실 신이요, 花釵繡絲履
옥같은 손가락에 은가락지 끼었네. 玉指約銀環
특별히 대마도 손님이, 偏是馬州客
나한테 생색을 낸 것이라네. 與儂作好顔
유녀들의 장신구를 소개한 시로서 이것들은 모두 조선에서 수입된 것이다. 당시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對馬島)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 손님이 생색을 낸 것이라고 한 것이다. 주에서는 “비녀․신․가락지 등은 모두 조선에서 나는 것이므로 대마도 사람들이 사다가 준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낭화여아곡」에는 이외에도 오사카의 유명한 유녀들에 대한 소개나 빗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 국제 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에 대한 이야기, 화대, 손님의 신분 등을 소재로 한 시들이 있다.
4. 남색을 소재로 한 시 - 「男娼詞」
「낭화여아곡」의 바로 뒤에는 「남창사」라 이름 붙인 칠언절구가 10수 실려있다. 일본인의 남색을 소재로 한 시인데, 아마도 이 풍습이 일본인의 성풍속 중에서 신유한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남색의 풍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것은 정욕(情慾)중에도 특이한 경지로서 정․위(鄭衛)의 세상에서도 듣지 못하던 것이니, 한(漢)나라 애제(哀帝)가 동현(董賢)에게 하던 짓을 역사에 나무란 것이 곧 이것이던가?”라고 하여 그 충격을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도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남색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궁중에 男妓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여왕이나 비빈들의 성적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남성인 왕이 남성의 육체미나 동성애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전자의 예로는 恭愍王대에 설치한 子弟衛가 있고, 후자에 해당하는 임금으로는 穆宗이나 宣宗, 毅宗 등이 있다. 의종은 배를 띄우고 소년들에게 뱃노래와 고기잡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즐겼다. 그렇지만 목종은 자태가 미려한 庾行簡에게 龍陽의 총애를 베풀어 閤門舍人을 시켰으며, 선종은 童男과 童女를 함께 어울려 노래부르고 춤을 추게 함으로써 서로의 아름다움을 비교하고 童男과 동성애를 즐겼다. 忠烈王은 여성에게 남자 옷을 입힌 男粧隊를 곁에 두고 즐겼으며, 禑王도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연약한 남성미를 감상하였다. 이처럼 고려말에 대상이 소년에서 남장 여자로 바뀐 것은 고려 중엽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유교적 윤리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18)
따라서 조선의 유학자인 신유한이 일본인의 남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그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에게 특별히 이 문제에 관해 질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신유한이 貴人들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한 호슈의 글에 나오는 “왼쪽에는 붉은 치마요, 오른쪽에는 어여쁜 총각이다”라는 문구를 가리키며 이것이 남창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호슈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신유한이 “귀국의 풍속이 괴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천하가 동일한 바이나 오히려 음(淫)하고 혹(惑)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어찌 양(陽)만 있고 음(陰)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이요?” 하자, 호슈가 웃으며 “학사(學士)는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19)
호슈는 당시 쓰시마의 서기로 대조선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3년이나 부산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조선통으로 조선 사절들도 인정하는 학자였다. 그런 그가 이런 대답을 했으니 신유한으로서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가 “우삼 동의 말하는 것도 오히려 그와 같으니, 그 나라 풍속의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20)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남창사」에 실려있는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남경의 그림비단 조선의 모시, 南京畵錦朝鮮苧
그림 박은 경대는 8촌이 넘네. 蒔薈粧奩八寸餘
청루에 가서 춘색을 취하지 않고, 不向靑樓貯春色
그대의 눈썹과 볼에 비추어 그대의 옷을 짓네. 照君眉頰製君裾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에서 남색이 성행한 것은 14세기 이후 절에서부터였지만 17세기에 들어와서는 미소년에게 정염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미소년을 와카슈라 부르고 그들과 정교를 맺는 일을 슈도(衆道), 혹은 냐쿠도(若道)라 불렀는데, 신유한에 의하면 곱게 화장을 한 다음 중국이나 조선에서 수입한 옷을 입고 부채를 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여자보다 배는 아름답다고 한다. 따라서 무사는 말할 것도 없고 승려나 서민까지도 경쟁적으로 그들을 편애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특히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남색을 애호했기 때문에 이 풍조는 더욱 확산되어 애인인 미소년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17세기 중반에 남색 알선 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다시 만연하게 되었다. 가부키의 와카슈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21) 그러니 유곽에 가서도 유녀를 부르지 않고 미소년을 찾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기생 집 봄빛이 도로 세월없으니, 娼臺春色亦無聊
보야향도 문득 쓸쓸해지네. 保野芳香便寂寥
천금으로 보검을 사서, 看取千金買寶劍
어여쁜 동자 허리에 채워주는 것을 보아라. 一歡將繫姣童腰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미소년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되자 당시 오사카 제일의 유녀라고 하는 보야향도 찾는 손님이 없다는 것이다. 3연과 4연은 신유한이 주에서 “대판에서 상상녀를 보야향이라 한다. 상상녀를 한 번 데리고 자는데는 천금을 주는데, 남창에게도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미소년에게도 최고급 유녀의 화대만큼이나 많은 돈을 쓴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22) 그는 또 「남창사」의 다른 시에서 유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미소년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누각 앞에 대롱대롱 누런 귤이 향기로운데/비단옷에 은동자 어느 고을 낭군인고?/채찍을 멈추더니 촌춘․촌운 물을 여가도 없이/웃으면서 예쁜 동자 가리키며 창자 끊어지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구슬 밭 비단 장막 유구 자리로, 珠簾繡帳琉球席
그대를 가장 좋은 집에 고이 간직하네. 珍重藏君最好家
허리에 찬 3자 칼로, 自擬腰間三尺水
미친 나비 봄꽃에 가까이 못하게 한다네. 不敎狂蝶傍春花
류큐(琉球)에서 만든 자리를 깔고 아름답게 꾸민 저택에 미소년을 들여앉혀 놓고 다른 사람이 유혹하지 못하게 허리에 칼을 차고 지킨다고 한다. 男女(여기서는 물론 男男이지만) 사이를 나비와 꽃에 비유하는 것은 기발할 것도 없는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허리에 칼을 차고 꽃을 지킨다는 부분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언제나 허리에 칼을 차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생각해낸 묘미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순히 문학적인 수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 상황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적으로 남색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미소년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그런 와중에 목숨을 잃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23) 신유한도 주에서 “왜인들은 자기들의 처에게는 질투하지 아니하면서도, 남창에게는 질투하여 사람을 죽이는 자까지 있다”고 했다.
「남창사」에는 이외에도 남창들이 애교부리는 모습이나 뱃놀이하는 모습 등을 그린 시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만 생략하기로 하자.
5. 맺는 말
이상에서 신유한이 일본인의 성풍속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살펴보았는데, 과연 유교적 윤리관으로 무장한 조선의 유학자답게 그는 일본인의 성풍속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낭화여아곡」의 서문에서 오사카의 화려함에 감탄한 다음 “그 풍요․습속에 이르러서는 추하여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간간이 관에 있는 통역의 말을 들어서 소위 청루 기생들의 외설한 모든 형상들을 알게 되매 심히 추하여 입에 담을 것이 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결혼에는 동성(同性)을 피하지 아니하여 사촌남매끼리 서로 결혼하며,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아서,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와 같다고도 했다.24)
이러한 비판에는 물론 문화적으로 일본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선진 문명국 지식인으로서의 우월감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소년을 시켜 조선사절에게 시를 받아오게 한다는 내용을 읊은 「남창사」의 “계림의 사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니/찬란한 의관이 신선과 같네/너에게 권하노니 그림 부채 뽑아서/자리 앞에 꿇어앉아 시를 지어달라 하라”와 같은 시에는 그러한 신유한의 우월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월감은 당연히 상대방의 문화를 열등하고 나쁜 것으로 간주하며 자기의 문화를 좋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즉 각 문화 사이에는 우열이 없고 서로 다른 점만이 존재한다는 문화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와 다른 異文化를 바라볼 때에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이문화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일본인의 성풍속을 세밀히 관찰하고 확인한 다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가 「낭화여아곡」의 서문에서 그 습속이 추하여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공자가 시경을 편찬할 때 정․위 두 나라의 노래를 채록한 일을 예로 들면서까지 유녀를 소재로 한 시를 지은 것이나, 신유한의 비난에 대한 호슈나 일본인 통역의 대답을 여행기에 그대로 기록한 것, 시 밑에 주를 달아 일본인의 풍속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 모두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신유한은 조선 문화를 기준으로 하여 일본 문화를 판단하면서도 자기의 견문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전달자 내지는 관찰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실정을 파악해서 보고해야 하는 임무도 띠고 있는25) 통신사들의 공통된 입장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유녀나 남색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신유한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 점이 바로 신유한의 뛰어난 점이며 해유록이 이문화 체험담으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注】
1) 加藤周一, 日本文學史序說下(加藤周一著作集5), 平凡社, 1982년, p.76
2) 志摩芳次郞의 江戶の遊里(大陸書房, 1976년, p.152)에 의하면 遊女란 공창에서 일하는 매춘부 를 가리키고 사창에서 일하는 매춘부는 賣女라 불렀다고 한다.
3) 이 여색과 남색을 다룬 에도시대 문헌에 관한 기술은 加藤周一의 앞의 책(pp.76-77)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4) 엄밀하게 말하면 이 중에서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은 여덟 번이다. 나머지 네 번은 임진난 포로들의 송환문제를 협의하거나 태평세월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들이다.
5) 물론 공창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사창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막부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 구하고 사창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공창제도가 폐지된 현재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렇지 만 신유한이 언급한 것이 공창인 오사카의 유곽이므로 여기서는 오사카의 유곽에 초점을 맞춰 이 야기를 전개하기로 한다.
6) 志摩芳次郞, 앞의 책, p.44, p.210
7) 志摩芳次郞, 위의 책, pp.213-214
8) 신유한, 海游錄, 해행총재Ⅱ,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6년, p.93
9) 志摩芳次郞, 앞의 책, p.215
10) 이경복의 고려시대 기녀연구(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6년, p.43)에서 재인용.
11) 이경복(위의 책, p.48)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유녀’란 말은 원래 고려시대에 친족간에 화간한 부녀자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기녀나 창기를 지칭할 때도 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규보같은 사람은 유녀와 기녀를 구분하여 유녀를 창기란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러한 구분이 그 후에도 그대 로 이어져 조선시대에는 유녀란 말이 창기, 즉 私妓를 일컫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 에서도 우리 나라의 경우를 설명할 때에는, 유녀란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12) 이경복, 위의 책, pp.42-43
13) 신유한, 앞의 책, p.93
14) 신유한, 위의 책, p.93
15) 신유한, 위의 책, pp.93-94
16) 이혜순, 조선 통신사의 문학,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년, p.204
17) 신유한, 앞의 책, p.92
18) 이경복, 앞의 책, pp.30-31
19) 신유한, 앞의 책, p.94
20) 신유한, 위의 책, p.94
21) 志摩芳次郞, 앞의 책, pp.42-44
22) 신유한이 주에서 “대판에서 상상녀를 보야향이라 한다.”고 했지만 주 15)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 듯이, 보야향은 최상급 유녀의 이름일 것이다. 18세기초 오사카 신마치 유녀의 화대는 志摩芳次郞 (앞의 책, p.215)에 의하면, 최상급 유녀인 太夫는 은 63匁이고 그 다음 급인 天神은 은 30匁, 그 리고 囲는 은 17匁이었다고 한다. 대략 은 60匁이 1兩이니까 63匁은 신유한의 표현대로 천금까지 는 안되지만, 상당한 거액이다.
23) 志摩芳次郞, 앞의 책, p.42
24) 신유한, 앞의 책, p.92
25)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정부는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경계하면서 사귄다’는 외교 방침을 정했 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안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절들의 임무에는 일본 이 다시 침략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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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旨】
本稿は朝鮮の儒學者である申維翰(1681~1752)の日本旅行記に現れた日本文化觀、なかんずく性文化觀について書いたものである。
彼は儒敎的倫理觀で武裝した朝鮮の儒學者らしく、日本の性風俗について辛辣な批判を浴びせている。しかし、また一方で旺盛な好奇心を持ってそれを觀察し、ありがままに傳えようと努力をもしている。彼が「浪華女兒曲」の序文で、その習俗が醜くて記錄に値するものがないといいながらも、孔子が詩經を編纂したとき、淫詩を採錄したことを例にあげるまでにして遊女を素材にした漢詩を作ったことや、彼の非難に對する雨森芳洲や日本人通事の答えをそのまま記錄したこと、詩に注をつけて日本人の風俗を理解しやすくしたことなどが、みんなそのためであったのだろう。
このように申維翰は朝鮮文化を基準にして日本文化を批判しながらも、自分の見聞をそのまま傳達しようとする傳達者乃至觀察者としての立場を取っている。勿論,これは日本の實情を把握して報告しなければならない任務をも帶びている通信使たちの共通の立場でもあろうが、少なくとも遊女や男色を詩の素材にした點では、申維翰のような人はいなかった。これが申維翰の優れた點であり、また彼の旅行記が異文化體驗談として高い評價を得ている理由の一つであろう。
☞ 출처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 http://kscrc.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