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아닌 다니엘이 되기를
믿음이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이다. 당시 반석교회는 학생회가 막 부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친구들을 주축으로 찬양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녀석들은 드럼이며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믿음이가 교회로 왔다. 녀석은 피아노가 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실력도 제법이었다. 어쩌면 주님은 그렇게 예비하시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녀석들은 밴드활동을 열심히 했다. 학교 축제며 찬양대회에 출전하면서 실력도 제법이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녀석이 성탄절 전야제가 있던 날, 새벽송을 돌기 전 나를 찾아와 내일은 여자 친구와 재천으로 놀러 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보할 것이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나는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중요한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녀석은 성탄절 아침에 다른 날보다 일찍 왔다. 그리고 그날 예배 시간에 반주할 곡들을 미리 쳐보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실 녀석은 그렇게 다복한 가정에서 자라질 못했다. 지금 아버지도 새로운 분이다. 어머니는 믿음이 형제 학비며 뒤바리지를 위해 밭일을 다니셨다.
중 3이 되고 믿음이 꿈은 강원외고를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탄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다른 이들은 헛된 일이라고 했다. 녀석도 반신반의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찬양예배 시간마다 ‘할수 있다 하신 이는’을 찬양했다. 학생부 예배 시간에도 이 찬양을 불렀다. 오래된 찬양이지만 친구들도 좋아했고 녀석들도 언제고 이 찬양을 흥얼거리곤 했다.
이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어른들 8명 밖에 없던 교회가 30명이 예배 드리는 교회가 되었고
피아노와 신디 그리고 드럼이 합주를 하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협연을 하는 예배를 드리고 되었다.
그뿐 아니라 약 2,000만원 들여서 리모델링을 하면서 혼자 계신 권사님을 교회로 모셨고 교회 봉고차를 새로 구입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친구들은 정말로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이 찬양을 부르며 자신들 삶을 불태웠던 것이다.
평창에서 3명이 외고에 원서를 넣었다. 한명은 진부에서 또 한명은 평창읍에서 둘 다 나름 지역에서 굉장한 집안 자녀라고 했다. 거기에 비해서 믿음이는 내세울 것이 없는 친구였다. 그러나 외고 교복을 맞춘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가 외고 기숙사로 떠나던 날 믿음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이 아들이 솔로몬이 아니라 다니엘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 주님을 잘 섬기며 지혜 왕으로 칭송받던 솔로몬은 우상과 여인들에게 빠져서 그 인생 말로에는 주님을 배반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아니 마지막이 되어서도 자신에게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 비록 사자굴에 들어가도 말이다. 그래서 믿음이에게 솔로몬이 아닌 다니엘이 되어야 한다고 기도했던 것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녀석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반석교회를 떠나서 이곳 대화로 옮긴 뒤 분주하게 보내던 어느 날 믿음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고3이 된 믿음이가 연세대학교 의대에 수시원서를 접수했다는 것이다.
미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힘들고 방황하던 믿음이를 믿음의 길로 인도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으신다.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으로 김교신 선생님을 꼽았다. 실제로 김교신 선생님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면서 손기정 선수를 응원했으며 그에게 신앙과 민족의식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정도의 만남은 아니더라도 믿음이에게 우리가 좋은 영향을 주었다니 오히려 우리야 말로 정말 고마운 일이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또한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산다는 것! 그것보다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믿음이 또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존재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