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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탐구]
김종우 객원기자 / 서울동대문도장
해학海鶴 이기李沂가 살았던 당시의 국내외 정세는 안으로는 민씨閔氏의 족벌 정치族閥政治가 횡행하고 밖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해학은 한말 격동기의 한복판에서 근대 개혁 사상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항일 구국 운동을 펼친 위대한 선각자다.
그가 남긴 최대 업적은 9천 년 한민족의 역사⋅문화⋅철학을 정리하는 ‘대한의 역사 복원 사업’이다. 이것은 고성 이씨 가문에서 600년 동안 이어 온 역사 광복을 향한 대장정의 결정판이다. 해학은 자신이 감수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제자 계연수를 통해 출간토록 하였고, 《단학회檀學會》를 설립하여 환단桓檀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게 하였다.
대한의 9천 년 역사의 정통 맥과 국혼을 되살려 낸 해학은 진정 ‘국사학의 대부代父’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구국 운동에 헌신하다
출생과 성장
이기李沂는 1848년 전라도 만경(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증伯曾이며 호는 해학海鶴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살았던 기간, 나라는 국운이 쇠하여 안으로는 민란이 자주 일어나 붕괴의 조짐이 일었고 밖으로는 세계 열강들의 국권 침탈 야욕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휩싸인 시기였다.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과의 만남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 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대한제국의 토지 조사 사업에 참여
그는 1895년에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탁지부 대신 어윤중에게 토지 제도의 결함을 논하며 개혁할 점을 지적한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제출했다. 대한제국은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였다. 그는 1899년 양지아문의 양무위원量務委員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충청도 아산에서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을 주관하였다.
나인영(나철)⋅오기호 등과 함께 한 외교 활동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었다.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대한자강회 조직과 애국 계몽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 계몽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오적 암살 계획과 진도 유배
그는 1907년 2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서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상호 연락 미비와 계획 차질로 거사는 실패하였고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당시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에 귀양 갔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일부벽파론 주창
그는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 계몽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가 『호남학보』를 통해 발표한 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도끼 하나로 낡은 것을 깨부순다고 하는 제목처럼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는 낡은 유교 사상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단학회 창립과 순국
1909년 1월 15일 나인영을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단군檀君을 교조敎祖로 하는 《단군교》의 부활을 선포하였다. 해학 역시 그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건국 기원과 삼신설의 해석 차이로 해학은 제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3월에 《단학회》를 창립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본 이기는 구국의 일념으로 7월 13일 서울 어느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해학이 짊어진 필생의 사업
한민족의 9천 년 역사 복원
해학은 경세가⋅실학자⋅교육계몽가⋅개혁사상가⋅문장가⋅독립운동가 등으로 불리며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해학의 생애를 기술한 자료들을 보면 대개가 그가 행한 모든 구국 활동 끝머리,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최후의 의지처가 단군이었으며 그래서 역사에 천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해학이 1909년 1월 나철이 주도한 단군교의 중광에 참여한 일과 그해 3월에 《단학회》를 창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을 염두에 둔 기록이다. 반면 필자는 해학이 펼친 다양한 분야의 활동 이면에 그가 평생 시종일관하여 추구하고 지향한 주제는 역사 광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려 말 고성 이씨 7세손인 이존비李尊庇와 그의 손자 행촌杏村 이암李嵒에서 시작된 역사 광복 프로젝트는 고성 이씨 가문이 짊어진 영광된 사명이요 생사를 건 대장정이었다. 해학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에는 분명 역사 광복의 의지와 결의가 함축되어 전해졌을 것이다. 해학은 가문에 내려오는 ‘환단 시대의 역사서 복원’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온몸으로 현실 상황에 저항하고 부딪히며 시세를 살폈다. 나라가 망해 가는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그는 《단학회》를 설립하고 세상과 하직한다.
그의 사후 2년이 지난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가 발간된다. 이에 앞서 해학이 1897년에 제자 계연수를 만나 그를 지도하여 1898년에 이암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그리고 1899년에 이맥의 『태백일사太白逸史』 를 간행하였다.
『환단고기』는 삼성기전三聖紀全(상·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 4권을 합본한 것이다. 이 중 『단군세기』와 『태백일사』가 차지하는 분량이 전체의 80%에 해당한다.
역사 광복의 명문 거족 고성 이씨
#이존비의 역사의식과 자주독립 정신#이존비李尊庇(1233~1287: 고려 고종 20~충렬왕 13)는 고려 경효왕 때 사람이다. 고성 이씨 7세손으로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 사상에 대한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다. 고성 이씨가 고려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가 이존비 대에 이르러서이다. 여기 나오는 행촌 이암李嵒을 비롯 이맥李陌, 이기李沂, 이상룡李相龍, 이유립李裕岦 등이 다 이존비의 후손들이다.
이맥의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나오는 이존비에 관한 글을 보면 그의 역사의식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이존비는 일찍이 서연에서 자주自主와 부강富强의 정책을 논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환단桓檀⋅조선朝鮮⋅북부여北扶餘⋅고구려高句麗 이래로 모두 부강하고 자주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年號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사대事大의 주장이 국시國是로 정해져 있어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한 행촌 이암李嵒#이존비의 손자인 행촌 이암(1297~1364)은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암은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자리까지 오른 정치가요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식을 갖춘 대학자였다. 그의 글씨는 여말 선초의 국서체國書體가 될 정도로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런 그가 망해 가는 국운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동북아의 종주였던 옛 조선의 영화로운 역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저술한 역작이 바로 『단군세기』이다. 『단군세기』 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만고의 명문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원형 문화 신교 역사관의 정립자이다.
이전에 이암은 천보산 태소암에서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소전거사素佺居士로부터 고서古書를 전수받았다. 그때 세 사람은 국호만 살아 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반드시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이 ‘3인의 결의 사건’ 덕분에 한국사 회복의 길에 서광이 비치게 된 것이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에는 이암이 올렸다는 상소문이 전하는데 그의 조부 이존비가 갖고 있던 역사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중 행촌 이암이 일찍이 상소하여 권신 무리가 국호를 폐하고 행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천제자天帝子)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
#조선 세종의 스승 용헌공 이원#이원李原(1368~1429)은 세종대왕 시 좌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행촌 이암의 손자다. 용헌공容軒公 이원은 조부가 편찬한 『단군세기』를 세종에게 진상하였을 것이다. 『단군세기』를 읽은 세종대왕은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평양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여 제사하게 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 1425년 9월 25일). 또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자 하는 발상은 단군세기의 ‘가림토 문자’ 기록을 보고 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헌공 이원은 7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모두 한 분파를 이루었다.
#『태백일사』를 지은 일십당 이맥李陌(1455~1528)#이맥은 이원의 막내아들 지墀의 넷째 아들이다. 44세(1498년, 연산군 4년) 때 식년시 급제로 관직에 나간 이맥은 장녹수의 사치스러움을 탄핵하다가 충청도 괴산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 후 66세(1520)의 나이에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이 되어 지난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마음껏 접하게 되었다. 이맥은 그 금서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과 예전 귀양 시절에 정리해 둔 글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 『태백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이맥은 신교 문화의 헌장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정통한 역사학자임은 물론 한민족의 신교 삼신 문화와 역사관의 화신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맥이 저술한 태백일사가 이맥의 백부(둔재공) 집안의 후손인 해학의 집안에 비밀리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한편 단군세기는 이맥의 후손인 이사겸(28세손)의 아들 이형식(29세손)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계연수에게 전해졌다.
단학회의 창립과 활동
해학 이기와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은 15년 차의 나이를 떠나 생사를 함께한 구국 동지였다. 해학은 평소 나철과 심각하고도 광범위한 토론의 기회를 많이 가졌으나 결국에는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神市開天과 단군건원檀君建元등 핵심 문제에서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였다.
1909년 1월 15일 홍암 나철은 《단군교》를 세웠고, 해학 이기는 《대한자강회》의 계연수, 이연보(이유립의 부친 이관집), 김효운 등의 간곡한 건의에 의하여 1909년 3월 16일 《단학회檀學會》를 창립하였다. 5월 5일에는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고유제를 지냈다.
단학회의 3강령은 아래와 같다.
일, 제천보본祭天報本
삼신님께 제사하여 근본을 갚는다.
이, 경조흥방敬祖興邦
조상을 공경하여 나라를 일으킨다.
삼, 홍도익중弘道益衆
대도를 홍포하여 무리를 유익하게 한다.
두 단체의 차이점을 보면 《단학회》에서는 배달국의 커발한 환웅을 기점으로 하는 신시개천을, 《단군교》(후에 대종교로 이름을 바꿈)에서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하는 단군개천을 주장하였다. 즉 《단학회》에서는 환웅의 태백산 천강을 개천절로 삼은 것이다.
또한 삼신관에서 《단학회》에서는 삼신을 우주의 주재자 개념으로 삼신일체상제로 인식하였기에 환인천제는 환국의 시조, 환웅은 신시의 시조, 단군은 조선의 시조로 보았다. 반면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삼신일체상제로 보았다. 《단학회》의 건원이나 삼신관은 철저히 고성 이씨 집안에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태백일사』 내용을 따른 것이다.
《단학회》의 조직과 활동
1대 회장 해학 이기가 세상을 떠난 후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는 《단학회》의 2대 회장이 된다. 계연수는 1914년 3월 16일 대영절에 평안북도 천마산 성인당에 모여 삼신일체상제를 주벽으로 모시고 환국 시조 환인천제, 신시 시조 환웅천황, 조선 시조 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천제를 올리면서 《단학회》의 운영과 미래의 발전 방향을 토의하였으며 취지문을 지어 서명을 받았다.
1918년 7월에 석주 이상룡李相龍과 여천 홍범도洪範圖가 벽산 이덕수李德秀의 소개로 《단학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해 10월 개천절에는 회원이 5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해 겨울에 《단학회》를 요령성 관전현 홍석랍자로 옮겼는데 오동진 장군이 단학회관을 짓고 전토佃土를 사서 기증하였다고 하며 여기에서 운초 계연수가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열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역사 교육을 하게 된다.
1919년 3월 16일 운초는 〈단학회보〉 창간호를 간행(8회까지 간행)하였고, 회보 발행 비용은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이 보조했다고 한다.
1920년 8월 15일 운초가 일제 밀정 감영극에게 체포되어 시신이 토막 나서 압록강에 던져졌고 배달의숙과 초고草稿 10여 종, 장서 3천여 권이 모두 불탔다고 한다. 운초를 이어 석천 최시흥이 제3대 단학회장을 맡고, 4대 벽산 이덕수, 5대 이용담, 6대 이유립으로 계승이 되었다.
《단학회》에서는 3종5정三宗五正으로 받드는 분이 있다. 3종은 해학 이기 대종사, 석주 이상룡 대종사, 단재 신채호 대종사이고, 5정은 운초 계연수 대승정, 백암 홍범도, 송암 오동진, 석천 최시흥, 벽산 이덕수이다.
환단고기 간행
《단학회》의 독립운동은 항일 무장 투쟁과 역사 수호 활동이다. 2대 회장 계연수는 『환단고기』 발간과 더불어 서로군정서에서 공을 세웠다. 3대 최시흥 장군은 천마산대, 광복군총영 등에서 가장 치열한 게릴라 항쟁을 벌였고, 제천혈맹 및 조선인 십보장 선언을 하였다. 조선인 십보장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해서 자유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한 헌장이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서 2대 회장 계연수는 《단학회》의 창시자 해학 이기의 숙원이자 꿈인 『환단고기』를 1911년 발간하였다. 운초는 1898년 『단군세기』를 간행하고 1899년 『태백일사』를 간행한 것에 이어서 안함로의 『삼성기』, 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권을 묶어 생전 해학 이기의 감수를 거쳐 1911년 5월 5일 묘향산 단굴암에서 환단고기 서문을 쓰고, 단학회의 사상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홍범도, 오동진의 자금을 받아, 만주의 관전현 성안에서 드디어 『환단고기』 30권을 간행하였다.
이 『환단고기』 초간본을 전해 받은 6대 회장 이유립(1907~1986)은 《단단학회檀檀學會》라는 이름으로 역사 광복 운동을 벌이며 1979년 마침내 『환단고기』기를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단학회》의 오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환단고기』를 완역한 역주본이 약 100년 만인 2012년 6월 상생출판에서 발행되었다. 역주자는 (사)대한사랑 상임고문이자 증산도 최고 지도자인 안경전 종도사다. 그 후 대한사랑에서는 환단의 역사와 철학을 알리는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국내외에서 30여 회 이상 진행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20년 11월 15일 대한사랑 주최 세계개천문화대축제가 열렸다. 그다음 날인 11월 16일 유튜브 방송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KBS 스페셜 추척-환단고기 열풍》(KBS 1999.10.2 방송)을 유튜브에 올렸다. 지금 20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가 기록되고 있다. 이제 인류 원형 문화의 보고寶庫가 담긴 『환단고기』의 진가眞價가 전 세계에 드러나고 있는 때를 맞이한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기는 자신과 더불어 호남 삼재로 불리는 석정 이정직李定稷, 매천 황현黃玹 등과 교유하였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 등 호남 출신의 후배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양명학 강화학파의 거두 이건창李建昌과 김택영金澤榮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들과도 교유하였다. 어윤중魚允中이나 박영효朴泳孝와 같은 개화파 정객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890년에는 대구에서 천주교 프랑스 선교사 아실 폴 로베르 신부를 방문하여 교리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해학은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당대의 분야별 대가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행동하는 동력원으로 삼았다.
60여 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다간 해학 이기! 그러나 그의 삶은 600년을 이어 온 고성 이씨 가문의 ‘9천 년 한민족 역사 문화 복원’을 향한 강력한 의지가 집약⋅점철된 생애였다.
해학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는 이 시간, 세상이 어지럽기는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 철학 경전이요 문화 경전인 『환단고기』가 인류 보편 문화와 사상으로 자리 잡아 새로운 세상을 여는 나침반이자 지침서로 기능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지방자치단체나 문중에서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을 발굴해서 기리는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쉽게도 아직 해학 이기 선생을 기념하는 공식적인 모임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위대한 선각자 해학 이기 선생을 재조명하여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별로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자료>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양종현, 『백년의 여정』, 상생출판, 2009.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상생출판, 2020.
한영우 외,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일지사, 2002
대한사랑 계간지 3호, 2020.
커발한 잡지
< 인터넷 자료 >
고성이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http://www.yesjokbo.net/jokboroot/new_default.asp)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홈페이지(https://db.history.go.kr/) /한국독립운동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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