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를 읽는 일이 씁쓸하고 아릿했던 것은 끝난 사랑의 후일담에 따르게 마련인 씁쓸한 긴 여운 때문이고, 그것의 성분적 요소들이 지독한 결핍과 쓰라린 실패이기 때문이다.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라는 구절에서 ‘다시’라는 부사를 주목한다. ‘다시’는 그 어휘의 문법적 쓰임인 계기적 시간을 잇는 운동성보다는 그것의 소진에 따른 단절을 더 많이 지시한다. 시의 화자는 ‘다시’ 앞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다. ‘다시’는 계기적 시간으로 나아가려는 화자의 안쓰러운 몸짓을 가리키지만, 실천적 행동으로서의 그것을 견인하지는 못한다. 이 시에서 ‘다시’라는 부사는 존재의 이행과 변화라는 애초의 제 뜻을 감당하는 일은 버겁다. 하지만 ‘다시’는 제 뜻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그 의미화에 닿는다. ‘다시’는 존재의 이행보다는 앞의 연애가 끝나버렸다는 것, 그 연애는 회고라는 형식에서만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 뒤를 잇는 여러 시구는 다시 사랑할 여자의 조건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범박한 세속성과 청승스러움을 나타내는 이 조건들은 앞서 떠난 여자가 갖지 못한 것이리라. 만일 앞선 연애의 여자가 그 조건들을 충족시켰다면 그 연애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류근의 상상세계에서 여자는 사랑 앞에서 앞뒤를 재고 늘 멈칫거리거나 망설인다. 왜일까?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 앞에서 간절함으로 목을 매고 그래서 그 사랑은 뜨겁고 아프다. 여자는 그 사랑이 너무 아프다고, 아픈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떠난다. 그런 여자 앞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너무 아픈 사랑〉) 사랑은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지만, 사랑이 지속되려면 거꾸로 사랑 아닌 그 무엇의 떠받드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은 절대로 저 혼자서 그것을 지속시킬 동력을 만들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랑만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곧 끝나리라는 예고일 따름이다. 그래서 “슬퍼 말아요, 어차피 우리들의 연애는/ 불친절한 예언이었을 뿐이니까요.”(〈친절한 연애〉)라는 시구는 불친절한 예언이 곧 사랑의 실천적 양태임을 말한다. 사랑만으로 사랑을 살아내겠다는 연인들의 약속은 찬란한 순수성으로 반짝거리지만 그 뒤에 숨은 함의는 사랑을 끝내겠다는 불친절한 예언이다. 방금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은 한결같이 사랑은 시작과 함께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실체적 진실에 눈감는다.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라는 시구에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구가 아니라 이미 끝난 사랑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배어난다. 이 시구들은 메아리가 없는 혼잣말이다. 화답이 없는 독백은 ‘내’가 떠나간 사랑과 다시 올 사랑 사이에 혼자 있음의 증거다.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혹은 돌아오지 말아야지, 따위의 가정법은 역설적으로 아직 사랑이 회임되지 않았음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기대 가능성의 희박함을 드러낸다. 결국 ‘나’는 버림받고 홀로 남아 ‘독작(獨酌)’을 하며, 여기는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위독한 사랑의 찬가〉)이라는 타자의 구시렁거림을 자기 것으로 편취한다. 혼자 술 마시기는 사랑의 동시적 주체인 ‘나’의 일방적 소외에서 빚어진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가장 쉬운 자기 망각/위로의 한 방식이다.
끝난 사랑은 떠나고 혼자 남은 자에게 그리움과 상처를 내려놓는다. 왜일까? “당신의 처음인 냄새를 나는 늘 마지막으로 간직할 뿐이어서 처음과 마지막이 한 몸으로 비틀리는 자세의 닿을 수 없는 냄새를 영원히 당신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다녀간 그 숱한 것들 가운데 당신밖에 나를 이 끝까지 데려다 놓은 처음은 없다”(〈당신의 처음인 마지막 냄새의 자세〉)라는 모호한 구절은 그 상처의 원인이 잃어버린 처음[당신]은 언제나 영구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나’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처음인 냄새’에서 분리시켜 그것이 휘발되어버린, 즉 그것을 영원한 상실의 자리에 데려다놓는 존재다. 그런 맥락에서 당신은 ‘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나’에게서 사랑을 앗아가는 존재라는, 즉 사랑을 주었다가 사랑을 빼앗는 모순된 이중성의 행위자라는 함의를 갖는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 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독백〉)버리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에게 왔다가 지나간 사랑들은 사실은 진실로 ‘나’를 찾아왔던 사랑들이다. 다만 그 사랑들이 ‘나’에게서 사라져 없을 뿐이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 뒤에 그것에 소외된 취객이 하나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처는 나의 체질”(〈상처적 체질〉)이라고 중얼거리는 취객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실연자일 것임에 틀림없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를 붙잡아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 한 잔 더 마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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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1966~ )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 시를 쓰는 사람이다. 1992년에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 등단 절차를 마쳤으나 지면에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2010년에 꽁꽁 묶어두었던 시고(詩稿)들을 갈무리해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상처적 체질》이라는 첫 시집을 펴냈다. 나는 시인을 알지 못한다. 시집에 따르면 시인은 술꾼이다.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극지(極地)〉) “낮은 여름이고 밤부터 가을이었는데/여름부터 취해 있던 내가 가을 술집에 앉아/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인지”(〈낮은 여름이고 밤부터 가을〉),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머나먼 술집〉)와 같은 술꾼의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는 시구들을 보면 시인은 술꾼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무수한 일탈과 위반의 스펙들을 쌓아온 것 같다. 시집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술 마시는 곡절은 대개 ‘연애’와 상관이 있다. 그 흘러넘치는 술들 안팎으로 지독한 ‘연애’가 배치되어 있다. 그 ‘연애’의 진폭은 눈썹 한끝에 어린 꽃나무들을 데려다준 첫사랑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버림받아 너무 아픈 실연의 사랑까지 꽤 넓고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