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의 수난사 - 72년 고고춤 금지령
1972년 10월23일 전국적으로 전 유흥업소에서 고고음악 연주와 고고춤 추는 것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선정적 음악으로 퇴폐적 풍조를 조성케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이유였다. 불응하면 업주는 영업 정지를 당해야 했고 고고족들은 경범죄로 경찰서 신세를 져야 했다.
71학번으로 한창 나이트클럽에서 고고춤을 즐길 시기인데 날 벼락을 맞은 것이다. ‘고고 70’ 영화를 보면 그 당시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다.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도 경찰의 단속 대상이던 시절이었다. 고고춤 금지까지 그 당시 해외토픽 감이었다. 문화적으로 원래부터 그런 문화가 없는 회교국도 아니면서 특정 음악과 춤을 금지한 것은 특별한 일이긴 했다.
숨쉴 구멍은 있었다. 이태원 해밀튼 호텔 나이트 클럽 등은 관광나이트라 하여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곳이니 예외였다. 실제로 외국인들은 없었고 내국인들만 득실댔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니 12시 자정을 넘기면 새벽 4시까지는 꼬박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귀를 찢는 듯한 연주 소리에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과 담배 연기 자욱하고 술병이 나뒹굴었다. 온몸은 땀에 절어 옷은 후줄근해지고 한창 때라 그런지 수염도 하룻밤 새에 텁수룩하게 부쩍 자란 것 같았다. ‘싸움터에서 돌아온 부상병 같다’는 표현이 나올 만했다. 그런 몰골로 새벽에 뒷골목 해장국 집을 찾으니 해장국을 말아 파는 할머니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우리를 한심한 건달로 보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할 때였다. 5.16 군사 혁명 후 춤을 불법이라며 사회악으로 대대적으로 단속하여 재미를 본 때문인지 또다시 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사교춤은 이미 단속대상이었고 젊은이들의 춤까지 대상에 들어간 것이다.
고고춤은 그야말로 족보가 없는 막춤이다. 노래는 8비트의 고고 풍, 슬로 고고 풍이 있지만, 고고춤과는 다르다. 영화 ‘고고 70’에 보면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데블즈’가 중심이 된 나이트클럽에서 즉흥적으로 붙인 이름이란다. 고고춤은 광란의 춤이라 하여 그 당시 락엔롤 음악을 스피커가 울리도록 큰 볼륨으로 일렉기타로 쳐대면 그야말로 흥분되어 마구 몸을 흔들어대는 춤이다. 예쁘게 추는 춤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젊은 피와 그렇지 않아도 폭발할 것 같은 주체하지 못하는 젊음을 발산할 창구였던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퇴폐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통제를 받던 언론 기관들도 하나 같이 고고춤 문화를 나쁘게 보도했다.
1974년에 군에 입대하여 3년 복무를 마치고 나오니 고고춤의 인기도 시들했고 나이도 나이트클럽이나 드나들기에는 어딘지 늙은 감이 들었다. 그리고 78년 디스코가 들어오면서 디스코텍 문화로 바뀌었다.
문제는 춤이 또다시 ‘퇴폐풍조를 조성케 하는 반사회적 대상’으로 찍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춤의 역사는 지금도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도록 어두운 고난의 역사를 걸어 온 셈이다.
파트너와 맞춰 추려니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람들은 혼자서 형식에 구애 됨 없이 마구 흔들어 대는 막춤 시대가 그립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글;강신영